|
균분상속 조선시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딸이 아들과 똑같은 상속분을 받게 된 것이 불과 30년도 안 된 것을 보면, 조상들이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재산상속에서 외손, 친손의 구분도 없고, 적서의 차별은 있을지언정 아들 딸의 차이도 없었던 것이 조선의 실제 풍경이였다. 딸은 혼수를 해서 내보내고, 아들은 데리고 살거나 집을 장만해주는 지금과 달리 '남귀여가혼'이라 하여 혼인할 때 처가에 들어가서 살거나, 처가 근처에서 사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여겼던 풍습도 그 한 가지다.
아들 딸의 구분 없이 재산을 상속하는 '남녀평등분재'의 문화는 고려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에 보면 나익희가 어머니로부터 누이들보다 특별히 더 받은 40구의 노비를 사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나누어줄 때에 나익희에게 따로 노비 40구(口)를 남겨 주었는데 나익희는 "내가 여섯 남매 가운데 외아들이 되었다 하여 어찌 소사한 것을 더 차지함으로써 여러 자녀를 골고루 화목하게 살도록 하는 거룩한 어머니의 뜻을 더럽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는 의리에 맞는 말이라 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고려사』권104, 열전 제17 나유
이렇듯 당시에는 남녀평등분재가 매우 당연했고, 또 무엇보다 형제간의 화목을 위한 전제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놀랍기만 한 이러한 전통의 풍경은 일종의 재산상속문서인 '분재기'의 두루마리 속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 '분재기'에는 혼인한 딸에게도 장자와 똑같이, 어미 잃은 외손에게도 장손과 똑같이 재산을 나눠주던 옛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의 균분상속은 나라에서도 법제나 정책을 통해서도 적극 보호되었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상속 규정을 보면 매우 상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남녀차별 없는 자녀균분제를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이 된 기본 법전이다. 조선 건국 전후부터 성종 15년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간의 왕명, 교지, 조례 중 영구히 준수할 것을 모아 엮은 법전이다.
『경국대전』에는 적처의 소생일 경우 장자, 차자, 딸의 성별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자식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준다고 되어 있다. 또한 부부가 각자가 따로 노비를 소유하여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자녀가 없는 경우는 부부가 함께 그 자식에게 사간의 상속을 인정하지만 사후에는 각기 본족에 환치한다고 되어 있다. 게다가 부인이 자녀가 없이 죽었을 때는, 그의 남긴 재산 상속에는 처갓집 사람들도 가담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듯 재산 상속에서 적자, 서자의 신분 차별은 있었지만, 장자, 차자, 남녀의 차별이 없이 균분함을 법으로 정해두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조선 건국 때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자녀균분상속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예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철저한 균분상속을 지키기 위해 해석을 엄밀히 하느라 육조의 판서들이 모두 모여 논쟁한 기록까지 있을 정도다. 이숙번의 처와 그 사위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의 기록을 보면 직책이 드러난 사람만 해도 모두 34명이나 된다.
또한 분재기에 보면 각 재산이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쪽에서 왔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남편과 아내가 재산을 별도로 관리하고 소유하였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때문에 죽은 마누라의 재산도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고, 죽은 딸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처가와 못 주겠다고 버티는 사위와의 재산상속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보물을 나누는 분재기, 보물보다 더 귀한 분재기
그렇다면 '분재기'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가계, 재산, 제사상속 등을 포괄하는 상속제도는 그 시대의 사회구조와 사회변동을 규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를 연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사료로는 실록이나 문집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자료는 바로 분재기(分財記)로, 현존하는 분재기는 모두 550여 편에 이른다.
분재기는 말 그대로 '재산을 나눈 기록'이다. 고문서의 일종으로 고려시대부터 작성되어, 조선시대에는 양반부터 노비까지 모두 재산을 분배할 때 이 '분재기'를 남겼다. 분재기는 분재방식과 분재종류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이렇게 종류가 많은 것은 그만큼 옛 선조들이 재산을 분배할 때 엄격했기 때문이다.
분재기는 당대에도 재산 소유권의 증빙자료로서 법률적 효력을 가진 매우 중요한 기록이었다. 조선 전기 『경국대전』 체제가 완성되면서 재산권 행사를 비롯한 법률적 행위에는 반드시 일정한 양식의 공(公), 사문서(私文書)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분재기가 바로 이 공문서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다. 분재기는 개인의 소유권 증빙자료로서도 공신력을 가졌다. 재산권과 관련된 법적 분쟁에서는 무엇보다도 분재기가 1차 증거자료로 채택되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집문서나 땅문서의 역할을 분재기가 일정부분 담당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재산분배를 둘러싼 분쟁은 심각하여 조선시대에는 유산의 법정상속 비율을 정하고 문서양식을 통일했으며, 분재기도 가족 간에 의논하여 나눈 문서 이외에는 모두 관의 공증을 받게 했고, 문서에는 증인의 서명을 갖추게 했다. 그 꼼꼼함과 엄격함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분재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애정부터 조상에 대한 효의 개념까지, 그리고 지극한 자식 사랑 혹은 원수 같은 부부싸움 이야기도 담겨 있다. 현재 여러 가문의 분재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그 중요도로 인해 보물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이렇듯 분재기는 보물을 나누는 증명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보물이 되었다.
분재기를 만드는 데는 상하구분이 없다! 양반부터 노비까지
재산상속의 기록을 남기는 분재기의 작성은, 양반 가문이나 거대 대부호의 집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양인과 노비의 집안에서도 이루어졌다. 노비의 신분으로 두 딸에게 재산을 남긴 노비 복만의 분재기를 보면, 노비라 하더라도 개인 소유의 재산이 있었고, 증인까지 앞세워 자기의 재산을 상속하는 문서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주목할 점은 균분상속의 철저함이다. 현대 사회에도 재산 때문에 수없이 많은 법정 다툼이 일어나지만, 옛 조상님들은 형제간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애초에 분재기를 작성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다 감안하여 합의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도망노비와 노비의 득후소생에 대한 분재이다. 많은 가문에서 분재기를 작성할 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생긴 도망가고 없는 노비의 수까지 계산하여, 후에 도망노비를 찾게 되면 누구누구에게 준다는 것까지 미리 명시해두었다.
17세기까지 유지된 철저한 남녀평균분재의 사례는 무엇보다 득후소생(得後所生)의 분재에서 잘 드러난다. 득후소생이란 분재된 노비들이 이후에 낳은 자식들을 말하는 것이다. 보통 혼인할 때 본가나 친가로부터 1차 재산을 분재받았는데, 이때 혼인 시 받은 노비(신노비)가 후에 자식을 낳게 되면 상속받은 노비의 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평성이 어긋나게 될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경국대전』에서는 득후소생에 대해서는 분재를 받은 당사자가 소유하도록 명시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의견은 다시 전체를 통계하여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균분을 원칙으로 했으니, 재산의 분배에서 노비의 수적 균분에 그치지 않고 늙고 병들고 젊고 어린 차이를 고려했다는 점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역사 속 남녀평등상속의 풍경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처가나 외가를 친가와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오히려 더 극진하게 섬기기도 했다. 잘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 가문의 제사를 지냈다. 이런 문화는 평등한 재산상속 관행 덕에 가능했다.
두 번의 장가로 부자가 된 퇴계 이황, 대유학자의 유유자적한 생활 뒤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물려받은 든든한 재산이 있었다. 퇴계의 가문을 살펴보면, 퇴계의 외가와 전처, 후처의 처가 및 자부(子婦) 쪽의 가문들은 모두 조선시대 안동권을 대표했던 명문사족이었다. 퇴계의 어머니, 아내, 며느리는 혼인할 때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평등하게 재산을 분배 받았고, 이 재산이 퇴계 학문을 닦는 데 경제적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듯, 일부 대유학자들의 유유자적한 생활 뒤에는 그들과 관계된 여성들이 받은 평등한 재산권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김종직의 경우도 외가의 세거지인 밀양에서 성장하였으며, 창녕 조씨와 혼인한 이후에는 처가의 세거지인 금산 근처에서 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종직의 처와 아들의 묘가 있는 위치에서도 확인되는데, 김종직은 밀양에 묻혀 있지만, 그 처와 아들의 묘는 금산에 있다.
이러니 조선 전기의 사대부인 김감, 봉원효, 손순효와 같은 이들이 아들과 사위, 친손과 외손을 동일시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사위는 아들과 거의 동일한 존재였다. 혼인을 해 처가에 들어가 처부모와 동거한 그날부터 남자는 장인과 장모는 물론 처가의 삼촌, 사촌에 이르는 가족들과 한 가족이 되어 기쁨과 슬픔, 고통까지도 함께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 형태는 분가를 한 뒤에도 계속됐다.
장인은 장성한 아이를 데리고 분가를 하는 딸과 사위를 위해 자신의 집 근처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생활을 위한 노비와 토지를 따로 마련해주었다. 대체로 17세기 이전 사대부들의 낙향이나 타읍 이주에 반드시 처가 또는 외가를 택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였다. 풍습이 이러했으니 장인, 장모의 입장에서 볼 때 아들의 자녀인 친손자, 친손녀와 딸의 자녀인 외손자와 외손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남녀균등상속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재산권에 대한 평등이 이 정도로 보장된 나라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우선 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에서도 이런 예는 없었거니와 서방과 동방의 역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베트남에서 조선시대와 같은 균분상속제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17세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이 독보적인 남녀균분상속제는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남녀균분상속제도를 균열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그리고 병자호란을 거치며 성리학적 예제를 뿌리내리려 노력한 조선의 집권 사대부들에 의해 이러한 여성들의 평등권은 박탈당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출가한 여성에게 재산을 균분상속하지 않았고, 출가외인의 개념이 강화되어 여성들은 더 이상 친정 조상의 제사를 윤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장자 중심의 가치관이 강화되면서 결국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때부터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까지 1,500여 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진, 남녀균분상속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평등한 삶은 성리학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이 건국된 지 300여 년이 넘어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자리 잡은 남녀 차별의 관행은 현대 사회 곳곳에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전통의 위력이다. 그러나 그 전통이라는 것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완결되어 대대로 전수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속제도의 역사를 살펴본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의미도 있다. 전통이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그 유연성을 발휘할 때만 오늘날 우리 삶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