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 시큰둥한 토끼, 온몸을 배배 꼬는 복숭아, 단발머리 휘날리는 고양이, 토끼의 탈을 쓴 단무지, 몇 마디 말보다 마음을 잘 표현하는 이 아이들 덕분에 SNS 화면에 인간미가 흐른다. 이 아이들을 마음에서 키워 손끝으로 낳는, 캐릭터 디자이너 권순호씨를 만났다.
권순호(40) 작가의 작업실에는 커다란 창이 있다. 창문 너머로 논이 보이고 텐트와 야전침대, 캠핑용 의자 등 생활의 흔적이 마치 인테리어 소품인 양 가지런히 놓였다.
“재활용 처리하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에요. 쌓아놓으면 분리수거 대상이지만, 가지런히 늘어놓으니 제법 그럴듯한 소품처럼 보이죠?”
‘평범함’ 을 ‘다르게’ 만드는 것. 그만의 그림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내 이름은 권순호. 그림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사전적 설명을 덧붙이면 “창작력과 기획력을 발휘하여 온·오프라인에서 필요한 캐릭터를 개발 혹은 도안하는 사람” 인 캐릭터 디자이너다. 웹툰을 그렸고, 앨범(음반) 디자인, 게임 제작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아기공룡 둘리’ ‘헬로 키티’ 같은 것이 대표적인 캐릭터 디자인이다.
내가 만든 캐릭터는 팬층(?)이 다양하지만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는 카카오톡 속의 주인공들이다.
지금도 장난꾸러기 같아 보인다. 어릴 때 재미있는 놀이는 뭐였나?
공부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장난치고 낙서하고 만화 보며 놀던 보통 아이였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미술 시간도 좋지만, 만화 주인공의 얼굴을 바꾸거나 새로운 그림을 덧붙이기, 검열에 걸려 삭제된 그림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당연히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배워본 적은 없다. 내 그림의 자유로움이나 단순한 표현의 비결은 정형화된 그림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를 지나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배우가 아니라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멋져 보이고 일을 별로 안 하면서도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업 같았으니까. 연극영화과 낙방 뒤 아르바이트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극단에 들어갈까, 재수해서 대학에 가야 하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고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결국 그림이 남았다.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고 싶지는 않았나?
당시에는 웹 디자인이 유행이고 인기 직종이었지만, 나는 캐릭터 디자인에 관심이 가더라.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대학에서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이라는 본질이 중요하지, 어디서 배우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학도 가지않고 “그림 그려 먹고살겠다” 하니 아버지가 엄청 반대하셨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 남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콘텐츠 시장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통로와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고, 내 말에 책임지겠다는 결심과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설득했다. 다행히 부모님이 내 의지를 받아주셔서 감사하지만, 허락을 안 하셨더라도 그림을 그렸을 거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하는 성격이다.
비틀기, 비꼬기, 뒤집어 생각하기의 달인이다. 성격도 그런가?
하하하, 나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다. 다만 ‘꼭 그래야 해?’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그림과 글로 옮기는 것뿐이다. ‘난쟁이와 지내던 백설공주에게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라는 호기심으로 ‘난쟁이와 함께 살던 공주는 산적이 되어 숲에 들어온 왕자를 공격했대요’ 라는 얘기를 만들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라 부르던 동요 뒤에 ‘왕자와 결혼한 신데렐라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란 가사를 붙여보기도 하고, 고흐의 자화상에 귀를 그려 ‘happy new year’를 ‘happy new ear’로 바꾼다든지…. 상상은 한계가 없다. 작정하고 생각하기보다 뒹굴뒹굴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잡아낸다. 떠오른 생각이나 이미지는 반드시 그림으로 그려둔다.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상상의 폭도 저마다 다르지만, 순간의 느낌을 잡아놓지 않으면 상상으로 끝난다. 누가 먼저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특허나 제품 개발 같은 거다. ‘이거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다만 빠르게 움직여 시장을 선점하는 이가 주목을 받고 이익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 부지런해야 한다.
캐릭터의 표정 속에 사람의 다양한 심리가 표정에 그대로 녹아 있어 공감 100%다. 비결이 있나?
관찰이 기본이다. 일의 성격상 관찰력은 곧 정보다. 일상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과 사물, 언어를 유심히 보고 듣는다. 물론 내가 느끼는 감정과 표정까지. 거울 속의 내 표정도 캐릭터의 모델 중 하나다. 인터넷에서 기사나 SNS를 볼 때도 댓글의 댓글까지 꼼꼼히 읽는다. 그 내용에 사람의 심리와 감정이 녹아 있고, 그때 지을 표정이 담겨 있다. 낚시 용어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지점을 포인트라 하는데, 사람의 시선과 마음을 잡는 포인트를 남보다 잘 잡는 것 같다.
캐릭터 디자인도 세상의 흐름을 읽는 눈과 마케팅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한 번에 ‘빵’ 터지는 캐릭터는 없다. 모든 캐릭터는 자기만의 역사와 스토리가 있다. 한 캐릭터를 백 번, 천 번 그려가면서 캐릭터의 스토리를 만들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캐릭터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무지’는 토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무지다. 하얀 옷을 벗으면 부끄러워한다. 무지와 함께 있는 작은 초록 ‘공룡’ 콘은 무지의 애완동물처럼 보여도 사실 무지를 키운 보호자다.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모두 자식처럼 소중하지만, 아무래도 제일 먼저 만든 ‘시니컬 토끼’에 애정이 많다. 토끼는 순한 이미지지만 평범함 속에 특별한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 머리카락을 얹으니 ‘개성 있는 시니컬 토끼’로 변신했다.
캐릭터 디자이너 1세대다. 10년 넘게 작업해오면서 어려움이나 슬럼프는 없었나?
내가 만든 캐릭터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관심 받지 못한 것도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처 받으면 어찌 살겠나. 만들어가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니까 미련은 없다. 힘들면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여행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과 에너지를 얻으면 그 에너지가 그림으로 환원된다. 그 과정이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찌됐든 산티아고만 가자>라는 책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애써 만든 캐릭터가 저작권 문제로 내 손을 떠날 때도 조금 섭섭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데 무게를 둔다. 사람들은 금전적인 손해에 대한 얘기도 하지만, 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직업’에 무게를 두는 청소년이 많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학생들을 만나면 묻는다. “넌 뭘 좋아하니?” 요즘 아이들 참 똑똑한데,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는 친구는 별로 없다. 많은 사람이 부모가 모든 결정권을 갖는 것이 문제라고 하지만, 학생들이 ‘내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학생들이 자신의 선택을 부모에게 미루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며 관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삶에서 어슬렁거리지 않기’를, ‘내 인생을 타인의 뜻에 맡기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더라도 리스크(위험)는 늘 존재한다. 그 리스크를 즐기고 극복하는 과정이 삶을 탄력 있게 만든다고 믿는다.
캐릭터 디자이너의 미래는 어떤지?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일을 시작할 때는 누가 내 그림을 알아주기만 바랐다. 조금 알려졌을 때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 내가 받는 사랑은 처음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다. 하지만 미래가 항상 더 중요하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디자인의 필요성과 캐릭터의 중요성도 점점 강조되고 있다. 제품이나 기업 이미지, 서비스산업, 게임에 이르기까지 캐릭터 디자인의 영역도 넓어진다. 자기만의 색깔과 상상력에 부지런함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 작은 꿈은 나의 캐릭터로 해외시장에 도전하는 것. 그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늘 그랬듯 과정을 즐기며 작업하려 한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