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소(Assos) : 지도 마르마라 해협 참고 앗소는 에게해 북부에 있는 작은 항구로서 그 경관이 뛰어나다. 마을언덕에는 그리스 시대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마을 중심에는 작은 호텔들과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의 요새가 매우 인상적이며 정상에 B.C. 530년경에 지어진 아데나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소아시아 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도리안 건축양식의 유적이다.
아이발륵(Ayvalik) 레스보스 섬 맞은편, 해안 만에 위치한 아이발륵은 올리브 무역의 중심지인 작고 수려한 도시이다. 고대에는 KIDONAI라 불리었으며 현재의 아이발륵은 16세기에 형성되었다. 1929년 로잔 협정의 결정에 따라 마게도니아, 크레타, 레스보스 섬에 살고있는 터키-그리스인 교환에 따라 정착하게 된 터키인들로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아이발륵은 수 마일의 해변, 수 많은 고급 호텔들과 식당들로 대규모의 휴양 도시이다. 이웃하고 있는 23개의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알리베이 섬은 페리나 보슬 쉽게 갈 수 있다. 악마의 사탄으로 불리는 언덕에는 주변의 섬들과 해안, 만들의 출중한 경관을 볼 수 있으며 남쪽에는 '살름삭르'라 불리는 길고 아름다운 해안선과 호텔들이 있다.
베르가마(Bergama), 페르가몬(Pergamon), 버가모 페르가몬(Pergamum 현지명 베르가마)은 이즈미르의 90 km 북쪽에 위치하여 있으며, 구불구발하게 경사진 언덕을 올라간 정상에 세워진 도시였다. 페르가몬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페르가몬이라는 이름이 전래된 유래는 트로이 전쟁 시기로 올라간다. 전설에 의하면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불타고 파괴된 후 트로이의 왕이었던 헥토르(Hector)의 미망인 안드로마크(Andromache)는 아카이아인 들에 의해 노예로 잡혀간 후 아킬레스의 아들 네프톨레무스와 결혼한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세 아이 중 하나가 페르가몬을 건설한 페르가무스(Pergamos)이다. 그 의미는 "높은 곳" 을 의미한다. BC 560년경 리디아, BC 360년경에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아오다가, BC 334년 알렉산더대왕 때에 이르러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그가 점령한 방대한 영토는 그의 충실한 4 장군에 의해 분할 되었다. 그 중에 리시마쿠스 장군의 통치 하에 들게 되었는데 페르가몬이 천연적인 요새임을 깨달은 그는 아크로폴리스의 꼭대기에 성을 쌓도록 했다. 리시마쿠스 장군은 이곳을 군사기지로 만든 후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사령관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를 이곳의 성주로 만든 후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물려 받은 9,000 탤런트의 금화를 필레타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러나 펠레타리우스는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와 내통하여 그가 리시마쿠스를 공격한다면 리시마쿠스가 자신에게 맡겼던 보물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제안을 받아드린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쿠스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해 졌고 기원전 281년 리시마쿠스는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보물을 받기 위해 찾아온 셀레우코스의 사신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 이 보물을 사용하여 페르가몬을 요새화하고 그는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페르가몬 왕국의 새장을 열었다. 성주 팔레타리우스는 페르가몬을 요새화하고 인근지역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 시키며 페르가몬 왕국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조카 유메네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유메네스는 공정하고 현실적인 왕이 였다. 그는 학문과 과학을 장려함으로써 그의 시대에 페르가몬은 그 분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앗탈로스 1세는 막강한 갈라티아 군대를 물리쳐 진정한 왕으로 추앙을 받았다. 유메네스 2세는 자신의 부친 밑에서 착실히 통치 수업을 받아 유능한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고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추구해 로마와의 관계를 계속 개선해 나갔다. 그의 통치기간은 페르가몬 왕국의 황금기였다. 역사가 파타아스나 철학자 메냔드로스 등이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그는 아크로폴리스를 각종 기념물 및 신전으로 치장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이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유메네스 2세의 뒤를 이은 왕은 앗탈로스 2세이다. 그는 유메네스가 원정을 나갈 때마다 정사를 돌보았으므로 정치적 경험이 풍부했다. 그는 정사뿐 아니라 군사 지식도 탁월해 모든 페르가몬 인들은 그를 초인간적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시기는 이미 강성해진 로마의 내정 간섭과 주변국가 왕의 이간질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앗탈로스 2세의 치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페소수 항구의 복구 작업이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오늘날의 안탈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의 조카 앗탈로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보다는 동. 식물학 등의 학문을 더 좋아했으며 정사를 그의 재상에게 맡기고 연구에 열중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방대한 국가를 로마제국에 헌납하므로서 페르가몬 왕국은 종식된다. 로마시대를 맞이한 페르가몬은 역시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잃지 않았다. 로마제국은 페르가몬을 아시아 지역의 수도로 삼았고, 트라얀 신전과 세라피스 신전등 큰 건물을 세웠다. 또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의료기관을 현대화 함으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 되게 하였다. 그 곳에서 일했던 유명한 갈렌 의사는 500여권이 넘는 의학 서적을 남겼다. 비잔틴 제국에 들어와서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 함으로서 페르가몬도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된다. 즉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 속에 소아시아 7대 교회중의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 페르가몬도 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3세기경 데시우스 황제는 3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게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비잔틴 말기에 이르러 차츰 지진으로 황폐하게 되고 게다가 7-8세기에는 아랍인들의 침략으로 쇠퇴하게 되어 조그마한 촌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페르가몬의 찬란한 유적들은 수 백년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땅속에 잠들고 있었다. 1878년 어느날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잇는 철도공사를 감독하던 독일의 토목기사 칼 휴만이 한 농부가 자신의 마차 뒤에 대리석에 부조 된 한 유물의 파편을 싣고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얻어 베르린의 고고학자에 보내어 고대 페르가몬의 유물임이 판명되면서부터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이 발굴된 유물들을 실어 나르자 주민들은 왜 쓸모없는 저런 돌들을 애써 가져 가려 할까 할 정도로 유적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페르가몬이 오늘날의 '베르가마'라는 이름으로 변경된 것은 터키민족의 정착 이후였다. 성서상에서는 버가모이며, 요한계시록 2: 12-17에 언급되어 있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 해발 약 300m 높이에 경사가 심한 산 꼭대기에 탑처럼 우뚝 솟아 있어서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필레타리우스 시대부터 지어진 성곽이 지진으로 무너진 채 남아 있다. 그리스 시대 이전에는 아크로폴리스 내에 있던 자체의 우물로 물이 해결되었으나 주민이 늘어나자 북쪽으로 44 km 떨어진 마드라(Madra) 산의 우물에서 이곳까지 물을 끌어드렸다. 이 수로에 사용된 수로관은 진흙으로 구워진 토관으로서 길이 50∼75 cm, 지름 16∼19 cm 의 토관 20만개가 사용 되었다고 하며 초당 45리터의 물을 쏟아 붓게 했다고 한다. 이 배수지에서 다시 이보다 작은 아연관을 통해 아크로폴리스의 각 지역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에 당시에 물을 끓어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수로의 일부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아테네신전, 트라야누스신전, 제우스신전, 도서관등이 있다.
성곽 성벽은 과거의 지진으로 일부 무너진 채로 남아있는데 잘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부분은 B.C 4세기부터의 것이고, 큰 부분은 유메네스 2세가 더 높이 쌓아 올린 것이다.
헤론 그리스 시대에는 그 시대의 뛰어난 영웅들이 죽은 후 마치 신들처럼 신격화되어 숭배되었다. 이들 영웅들을 숭배하고 제사 드리기 위해 지어진 헤론이라고 불렀다. 페르가몬의 헤론은 앗탈로스 1세와 유메네스 2세를 숭배하기 위하여 지은 것인데 현재는 그 일부 벽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시장 제우스 제단의 바로 남쪽 아래부분에 소위 아고라는 시장터가 L자형으로 위치해 있으며, 그 둘레는 도리아 및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테네 신전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도서관 아테나 신전의 북쪽면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세워진 이 도서관은 모두4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큰 방은 13m X 16m 크기를 갖고있다. 이방은 독서실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지금도 나무선반을 고정 시켜 놓았던 구멍이 이 벽에 남아있다. 고대에 지어진 다른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이중 벽으로 되어있어서 습기나 벌레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다. 이 방에는 약 20만 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도서관이었다. 이집트로부터 파피루스를 수입하여 썼는데, 유메네스 2세의 도서관에 대한 큰 관심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이집트가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했다. 그래서 페르가몬 사람들은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고안해 책을 만들었다. 영어의 "parchment(양피지)"라는 단어의 어원도 "pergamon" 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트라얀 신전 로마시대에 아시아의 각 도시는 황제의 신전을 건축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해서 이 특권을 따내기 위해 갖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페르가몬 주민들은 트라얀 황제의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산 밑의 평원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하얀 대리석으로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했다.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원형 극장 페르가몬은 여러 시대에 걸쳐 3개의 극장이 세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건축되고 로마시대에 개축된 이 극장은 아래에서 위 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다. 약 1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극장의 관중석은 3단으로 되어있고, 2번째 하단에는 황제의 자리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있다. 극장의 무대 앞에는 얄 250m 길이의 열주랑이 늘어서 있는데 이 주랑의 북쪽 끝에 디오이소스 신전이 보인다.
디오니소스 신전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제우스 제단 약 70 m × 77 m 크기의 연단 위에 세워져 있던 이 건물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제단은 페르가몬 왕국의 전성기였던 유메네스 2세 시대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곳의 유적은 독일로 옮겨져 동 베들린 박물관에 복원되어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빈 터만 남아있다. 말 발굽의 모양을 하고있는 이 제단은 가로 세로의 길이가 36.44m X 34.21m 로 되어 있고, 서쪽으로 향한 정면의 제단은 21개의 층으로 되어있다. 이 제단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제단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로서 그리스의 각종 신화의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세라피스 신전(Serapis) - 버가모교회 베르가마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신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 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아스클레피온(Asklepieon) 베르가마 시내 입구에 있는 아스클레피온은 자연요법과 정신요법이 주를 이루고 있는 종합병원으로, 세계 최초로 기원전 4세기경에 지어졌다고 하나,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의 시대의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 기관이었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었던 로마의 극장에서부터 이곳 까지 길이 800 m, 폭 18.14 m의 대로가 나 있으며, 길 양쪽으로 마치 가로수와 같이 15 m 높이의 석주가 세워져 있다. 1967년 발굴된 이 길의 아스클레피온쪽 400 m는 하드리안 황제 시기에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길로 장식 되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의료 기관인 현관 건물에 해당하는 프로필론이 나온다. 이 프로필론을 통해 아스클레피온 안으로 들어서면서 넓은 정원이 나온다. 정원 및 정원 주변에 여러가지 시설물 등이 세워졌다. 아스클레피온에 대한 전체적인 것은 다음의 지도를 참고 바란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몬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프로필론의 바로 북쪽에 지금도 벽면에 책 선반을 고정 시켜 놓았던 자국이 남아있다. 정원 북쪽 주랑은 최근 복원되어 잘 보존 되고있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있는 황제실 쪽의 약 10개의 기둥은 175년의 대 지진으로 붕괴 된 후 나중에 다시 세워졌다. 기둥의 서쪽 끝에는 연극과 음악회가 공연되었던 소극장이 있는데, 3,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화자들에게 삶의 욕구를 불어 넣어주는 연극이나 음악회 공연은 정신 요법을 이용한 당시의 좋은 치료법이기도 했다. 아스클레피온의 치료 방법은 자연요법과 정신요법이 주를 이루고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 치료법을 자세히 전하고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으로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우선 맨 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부터가 치료의 시작이다. 환자들은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생각에 젖게 되고, 일단 아스크레피온 안에 들어오면 하데스 신이 침범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이들이 수속을 마치고 제일 먼저 행하는 것은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서의 목욕이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는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이 외에도 진흙 목욕을 병행하기도 했다. 목욕이 끝나면 그들은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간다. 80m 길이의 지하 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오면서 작은 소리를 내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장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환자들이 도착하는 곳은 둥근 건축물로 되어있는 치료실이다. 이 치료실은 2층으로 되어 있었다. 환자들은 잠자기 전에 반드시 신에게 기도드릴 것을 의사로부터 권유를 받고, 잠이 깬 후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유도하여 해몽해 주기가지 한다. 치료실의 남쪽 문으로 난 테라스는 환자들의 일광욕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치료실의 바로 북쪽에는 이 아스클레피온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던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었다. 아스클레피온은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기관이었다.그 유명한 아리우스 아리스티데스도 이곳에서 약 13년간을 머물며 치료를 받았으며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티로스, 갈레누스와 같은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이지미르(Izmir)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터키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며 이스탄불에 이어 2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이즈미르는 에게해 연안의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하고있어서 터키의 모든 수출입 물자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며 산업과 경제의 도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국제아트 페스티발(6월7일)과 국제 이즈미르 페스티발(8월9일)개최 기간 중 이즈미르의 활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온화한 기후, 상쾌한 갯바람, 해안가의 야자수 산책로를 느낄 수 있다.
역사 고대의 이즈미르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바이라클러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전 3000년 경 전반에 이미 이 바이락클러 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고고학적 발굴은 증명하고 있다. 터키 중 서부 지역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던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은 밖으로부터 도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그리스를 ?i겨 난 후 이 도시를 점령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의 한 부족에서 또 한 부족으로 주인이 바뀐 사건은 기원전 800년경에 발생했으며, 바로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장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이즈미르에서 태어나 활약했다. 알랙산더는 피구스 산 기슭에 성벽을 쌓고 새 도시를 건설했다. 그 후 이즈미르는 페르가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로마제국의 아시아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즈미르는 비잔틴, 셀추크, 오스만 터키의 역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성하였다. 한 때 역사적 수난이나 자연적 재난도 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지 못했다. 비잔틴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 유적을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유적은 거의 사라지고 이슬람 유적들이 대신 자리를 잡게 되었다.
코낙 광장 옆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는 고대 아고라에 서 있던 포세이돈과 데미테르상 등 고대 최대의 소장품이 있음. 고고학 박물관과 근접한 곳에 있는 민족지학 박물관에는 베르가마와 괴르데스 카펫, 민족 의상과 낙타의 고삐 등 민족 공예 수집품. 아타튀르크 거리(Atatürk Caddesu)에 위치한 오래된 이즈미르 가옥은 아타튀르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 집의 주인이기도 했던 아타튀르크와 관련된 사진 전시. 코낙에 있는 미술관에는 터키가 나은 유명 화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줌브리예트에 있는 사립 셀축 아샤르 미술관에는 20세기 터키 미술의 골동품이 있다. 바이라클르 : 카디페칼레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대에 리시마쿠스가 세운 성과 성벽
카디페칼레 이즈미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피구스 산에 오늘날 카디페 칼레라 불리는 성이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 성벽 중 일부는 알렉산더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그 후 비잔틴, 오스만 터키 등이 보수 증축하여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시장터 성벽에서 북서쪽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소위 '나마즈가흐'라고 불리는 지역에 고대 로마의 시장터였던 아고라가 나온다.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이 아고라는 일부 재건 되었는데, 상점 앞에 늘어섰던 열주랑이 남아있다. 한편 시장터에는 대리석으로 된 3개의 신상, 즉 앉아있는 모습의 포세이돈 신, 서 있는 모습의 테메테르 여신과 아프테키스 신상이 있다. 이들 신상은 아마도 당시의 시장터 안에 있던 제단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큘트르 공원 1922년 이 도시는 그리스에 의해 불탔는데, 현재 큘투르 공원은 그 당시 불이 났던 한 부분에 세워졌다. 이 공원의 면적은 48헥트아르이며 매 해 이곳에서 무역 박람회가 열린다. 이 도시의 중심지로는 코낙 광장인데, 1901년에 세운 모리쉬 스타일의 아름다운 시계탑이 서 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는 조그많고 그림과도 같은 코낙 모스크가 1756년 이래로 서 있다. 광장의 북서쪽에는 공화국 광장이 있고 그 중심지에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공화국 광장으로부터 항구까지 수 많은 음식점과 가게 등을 낀 산책길이 있는데, 노천 카페에 앉아 있는 연인들로 이곳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해 준다. 이 연안 북쪽으로는 페리호를 타고 갈 수 있는 '카르시야'가 있다. 세인트 폴리카르프 교회 유적 : 이즈미르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 크즈라르아스 한 : 18세기 오스만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18세기의 건축 특징 사아트 쿠레시(시계탑) : 도시 중심인 코낙 광장에 있으며, 이즈미르의 상징 다리오 모레노거리 : 주요 산책로로서, 19세기의 엘리베이터인 아산쇠루가 있다. 케메랄트 하브라 거리 : 오래된 건물과 유대교회당 쥼브리예트 메이다느(Cumhuriyet Meydan?; 공화국 광장) : 아타튀르크 동상 히사르 모스크(Hisar Mosque) : 이즈미르 최대 최고의 모스크 사렙치오르 모스크(20세기)와 사드르반 모스크(17세기, 19세기에 복원), 케메랄트 모스크 : 지역 주변에 있음
예술, 문화, 쇼핑 케메랄트 마켓(Kemeralt? Market) : 매력적인 골동품, 최고급 물건 등, 다양한 액세서리, 양복, 이즈미르 명물인 말린 무화과와 포도 등. 근대적이고 고급스러운 가게 : 알산자크의 코르돈 프롬나드와 카르셔야카 거리, 줌후리예트 거리
이지미르 주변 발초바(Balçova) : 이즈미르 남서쪽으로 체쉬메(Çe?me)로 향하는 도로(D300)에 위치. 터키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갖춰진 온천 챠말트(Çamaltı) : 이지미르 서쪽으로 카르샤카(Karşiyaka)의 15 km 서쪽에 위치. 해안가의 바닷물이 들어오는 습지로 조류에게 있어 중요한 성역- 이즈미르 새의 천국으로 보호됨 케말파샤(Kemallpaşa), 카라벨(Karabel) 패스 :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아름다운 카라괼호 옆의 송림. 피크닉 최적지. 레스토랑과 수영장 있음. 케말파샤에 있는 카라벨 패스(이즈미르에서 20km) 바위에는 히타이트인에 새겨놓은 조각. 벨카베에서 이즈미르만를 전망하고, 터키 커피를 마심. 벨카베 독립하여 독자적 사회를 형성한 일곱교회 : 요하네의 묵시록에 기록됨. 이즈미르(스미르나; Izmir Smyrna), 에페스(에페소스; Efes, Ephesus), 에스키 히사르(라오디케아; Eskihisar, Laodicea),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 Ala?ehir, Philadelphia), 사르트(살디스; Sart, Sardis), 아크히사르(티야디라; Akhisar, Thyatira), 베르가마(페르가몬; Bergama, Pergamum)에는 일부, 혹은 모든 교회를 1일 내지 4일간 순회하는 투어 있다. 체쉬메(Çeşme) 반도 : 이즈미르의 서쪽에서 에게해의 파도를 막아주는 곳. 체슈메는 분수라는 의미로 18세기 부터 19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많은 샘물이 발견된 것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 자연이 손상되지 않은채 보존된 모래 사장과 수영. 관광객을 위한 숙박 시설과 레스토랑, 그리고 스포츠 시설과 오락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음. 여름이 되면 매년 국제 가요 콘테스트가 개최됨. 주 1회 체슈메와 베니스항을 잇는 페리가 운행되고 있음. 우르자의 볼거리는 하얀 모래사장과 알튼유누스 마리나와 바캉스 종합 센터. 우르자 해변은 수상 스포츠 특히 윈드 서핑과 요트에 최적. 우르자 주변에는 수 많은 온천이 있으며, 쉬프네 해변의 온천이 유명. 파샤 리마누에는 쾌적한 시설을 갖춘 캠프장이 있음. 우르자 해변에서는 매년 7월에 형형색색의 요트가 모여 국제 챠카베이 옵티미스트 요트대회가 개최 됨. 에리티라이시울두르 : 체쉬메에서 북으로 20 km에 위치. 조용한 해변도시. 달리안 : 활기 있는 마리나부두에서 맛있는 생선 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 치프트릭에는 다양하고 많은 숙박시설 도시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향하면 바로 길다란 모래사장(플란타 플라쥬)이 있음. 남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캠프장이 있고, 캠프장 옆에는 이 지역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알튼쿰 팔라쥬(황금 해변) 알라챠트(Alaçaı) : 우르자처럼 해안에서 내륙부로 들어간 남쪽에 위치. 언덕에는 풍차가 점재 카라부룬 반도 : 해안선을 따라 차로 달리면 바루크오바와 모르도안(Mordo?an) 이라 불리우는 조용한 해변과 정취 있는 어촌을 지나게 됨. 카라부른 : 아늑하게 지낼 수 있는 호텔과 티 가든, 레스토랑이 즐비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꼬불꼬불 구부러진 길은 아흐메트 베일리에서 남쪽으로 팜작 해변까지 계속 이어져 있음.
에게해 내륙부 에게해에서 내륙쪽으로 들어가면 초기 문명을 지탱해 온 비옥한 토양이 펼쳐짐, 온천 휴양지 마니사(Manisa) : 대표적인 섹축호와 오스만 제국의 건축물 보존. 포도 수확이 시작되는 8월에는 매년 수확제 개최 시필다 국립공원(Sipil Dağı Nat. Park) : 도시 남쪽에 있으며, 유명한 눈물 흘리는 이오페의 동상이 있음. 괴르데스 : 북쪽에 위치하며 양탄자 생산지 보즈산 : 사르데스 남쪽에 있으며, 하이킹과 등산. 우샤크(Uşak) : 이즈미르에서 E96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225 km에 위치. 양탄자 산지의 중심지, 카프탄즈 하우스 박물관과 아타튀르크의 집을 사용한 아타튀르크 민족 박물관 아푠(Afyon) : 우샤크에서 100 km 동쪽으로서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당당한 모습의 요새가 한적하게 아푠시를 내려다 봄. 아푠에서 남쪽으로 100 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디나르(Dinar)시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아츠크 하바(Aç?k Hava) 박물관(야외 박물관)이 있음. 큐타햐(Kütahya) : Afyon에서 D650으로 88 km 북쪽에 위치. 터키에서도 유수의 오랜 역사를 갖인 도시. 차브다르 히사르(아에자니; Aezanai) : 큐타햐 남동쪽에 위치하며, 극장과 스타디움, 제우스 신전이 남아 있는 로마의 도시. 무라트산 : 쾌적한 풍경 속에 캠프장과 온천이 있고, 둠루프나르 근처에는 바쉬코무탄 국립공원과 독립전쟁의 기념비가 있다.
지도 : Sekcuk, Ephesus, Kusadasi, Aydin, Prene, Miletus, Assessos, Bodrum, Kos Island, Datca Datca
셀축에서 에페스까지는 약 30분거리로 마을 버스가 자주 운행한다. 단, 쉬린제에서 셀축으로 오는 버스는 저녁 8시가 마지막이니 주의해야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이나 성요한 교회를 가기 위해선 택시나 마차를 타거나 걷는다. 그러나 여름에 햇볕아래서 4 km를 걷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마차 보통 5명이 타면 2,000원정도로 흥정을 할 수 있다. 고대도시 에페스(에베소)는 너무도 유명하다. 지중해를 돌아다니던 배들이 이곳에 도착해 짐을 부렸던, 또 짐을 싣고, 로마로, 알렉산드리아로, 안타키아(안디옥)로 떠났던 소아시아의 수도 에페스는 항구였으나, 지금은 바다가 수 km가 물러나 있는 내륙도시로 변해버렸다. 에페스는 전설까지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소아시아(소아시아 7대 교회 참고)의 수도였으며, 터키 땅에 있는 2개의 세계 칠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였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이고, 또한 기독교의 성지로 사도 바울이 오랜동안 머물렀고, 사도 요한이 숨을 거뒀고, 성모마리아가 살았다고 하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이기도 한 에페스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잘 보존된 에페스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멘데레스강의 덕분이다. 멘데레스강이 부지런히 흙을 날러서 항구의 바닥을 메웠고, 덕분에 항구는 낮아진 수심 때문에 배가 들어올 수 없었고, 항구의 기능을 잃은 에페스는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게되었다. 사람들이 떠난 에페스는 오랜 세월동안의 퇴적작용에 그 모습을 감추어졌고, 이제야 세상 사람들에게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룹으로 여행을 한다면 산 위쪽의 누가의 무덤이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탐색을 시작하고, 배낭여행을 한다면 부득이 아랫쪽 입구에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윗쪽 입구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에 띄이는 건축물중의 하나가 바로 오데온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형극장으로 착각하는 오데온은 다름아닌 실내극장이다. 오데온의 규모만 보아도 당시 에페스의 규모가 짐작이 될 것이다. 온통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도로를 따라서 윗쪽부터 순서대로 옛 에페스의 시청건물, 도미티안 황제의 신전, 헤라클라스의 문, 공중목욕탕, 트라이안 황제의 님파니움(분수, 샘터), 화장실, 유곽, 에페스의 빌라를 지나면 정말 아름다운 건물에 도착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도서관 건물이다. 당시 세계에서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 다음으로 컸다는 세계 3번째의 도서관이었다. 한국에는 기독교 성지순례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소개하는 곳이다. 그러나 사고 바울이 이곳에 왔을 때는 이 건물이 없었고, 사도 바울이 죽고 몇십년 후에 지어진 셀수스 도서관으로 알려졌으므로 두란노 서원 같지는 않다. 대리석 도로를 따라서 길을 계속가면 터키에서 가장 큰 반원형 극장에 도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이탈리아의 폼페이를 방문한 사람은 에페스를 폼페이와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 데, 에페스는 폼페이보다도 무려 10 배 이상은 크다. 당시 인구를 두고 말하는 것인데 에페스의 인구는 25만이 넘었다고 한다. 에페스를 둘러보는 데는 빠른 걸음으로 아무런 관심없는 사람이 둘러보아도 한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되신다면 오후에 쉬린제 마을에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류 문화유산 중 가장 화려한 도시" Ephesus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사료는 기원전 13세기경 Hittite(힛타이트, 성경에 햇족)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이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Lydia)왕국의 크로수스(Croesus)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에 처음으로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Delos)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Pergamum)에서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트스 황제)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스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은 그의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시 이곳을 방문하여 선교를 벌이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스에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하여 에페소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페르가몬, 이즈미르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당했으나, 황제 도미티안이 피살 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비진틴 제국시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 들어와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으로 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잦은 지진과 이 지역을 흐르는 멘델레스강의 범람으로 지각 변동에 의해 오늘날 바다는 이곳에서 5 km 떨어진 쿠샤다스 지역까지 밀려나가 오늘날은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동부 체육관 초기 그리스 시대의 체육관이며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기관인 합숙 훈련원이다.
에페소(Ephesus)
매표소 입구를 들어서면 아래 사진과 같이 큰 도로가 나온다. 아래의 요약지도에서 Basilica가 있고, 도로 남측에 시장터(Agora)와 이시스 신전, 그 아래에 도미티안 신전(Domitian Temple) 등이 있고, 도로 북측에 오데온 극장(Odeon)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것이 셀수수 도서관(Celsus Library)이며, 이의 북측에 대극장이 있고, 극장 못미쳐 서쪽으로 항구 도로(Habour Street)가 항구와 연결되었었다.
에페소는 생각보다 넓으므로 위의 요약 지도를 참고로 관광하면 이해에 훨씬 도움을 줄 것이다.(사진을 클릭하여 확대하여 볼 것)
바리우스 목욕탕(Varium Baths) 발굴된 비문에 의하면 이 목욕탕은 플라비우스와 그의 아내가 비용을 부담해 지은 것이라 하는데 다른 목욕탕과 마찬가지로 냉탕, 온탕, 열탕 및 풀장과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다.
아고라(Agora) 시장터 아고라는 시장을 뜻한다. 대극장으로 가는 대리석 도로의 서쪽에 위치한 아고라(Lower Agora)는 네로 황제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아직도 발굴중이다. 이곳에서 3개의 문이 있다. 오데온 극장 건너편에 있는 아고라(Upper Agora)는 사방이 가로 세로 110 m로서 기원전 3세기 경에 설치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두 줄의 화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서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그 때 당시의 모든 여성들은 이곳에 꼭 한번 오고자 했다고 한다. 다른 시장터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시장의 한 가운데에 신전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처음에는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Isis Temple)이 있다. 로마시대에 아고라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사람들은 밭에서 입는 옷을 입고 아고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아고라는 기둥과 둥근 지붕형 구조로 만들어진 대단히 인상적인 곳이다.
세라피스(Serapis)신전 시장터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전은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신전으로 2세기에 로마의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에페스가 항구도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밀접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데온(Odeion) 소극장 오데온(Odeion)은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극장과 같은 형태로 소극장이라고 도한다. 에베소의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하며 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베소인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들은 대원형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콘서트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400명을 수용하였다.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 전용이었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 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 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때 세워진 시청 건물인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에는 영원히 꺼지면 안되는 성화가 타고 있었으며, 이 불은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잘 관리가 되었다.
프리타니움(Prytaneium, Council) 로마제국시대에 에페스는 "자유도시(Civitas libera)" 였다. 즉 도시의 행정과 관련된 모든 공직은 명예직이었다. 따라서 도시의 중요한 축제나 행사에 드는 경비나 공공 건물의 건축 및 보수에 소요되는 경비는 시민들이 스스로 담당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이것을 기리기 위한 희사자들의 동상과 비문이 시장터나 주요 도로변에 세워진 것이다. 도시에서 종교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는 프리탄(Prytan) 직위였다. 프리탄의 주요 임무는 프리타니움에 위치해 있던 도시의 성화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프리탄들의 또 하나 중요한 임무는 도시 내에 있는 성소를 감독하는 일이며 일상의 제물로 쓰이는 동물을 공급하는 것인데, 이 경비도 프리탄 스스로 부담했다. 이 지역은 시정과 종교를 통치하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헤라클레스(Heracles) 문 헤라클레스 게이트는 대리석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물을 따서 지었다. 쿠레테스(크레테스) 도로가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 문은 2층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쿠레테스 도로(Curetes Street)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테스는 반산반인의 인물이였으나 나중에 에페소스에서 크레테스 하면 아프테미스 신전의 업무에 종사하는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 승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의 양편은 기둥으로 이어진 화랑이 있었고 이 회랑 뒤로는 가게 및 개인 주택들이 있었다. 또한 기둥 앞에는 에페소스의 유공자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동상의 받침대 중 어떤 것은 동상의 인물을 설명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기도 한데, 그들 중 하나가 유명한 물리학자 알렉산드로스다.
쿠레테스(Curetes) 그리스 신화에 원래 구레테스는 반신반인의 인물이었다. 레토(Leto)가 제우스의 아이를 잉태하여 쌍둥이로 아폴로(Apollo)와 아르테미스(Artemis)를 낳을 때, 레토를 시샘하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구레테스들은 그들의 무기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레토가 해산할 때 지르는 소리가 안 들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에페스에서 구레테스하면 아르테미스 신전의 업무에 종사하는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승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의 양편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이 있고, 이 회랑 뒤로 가게 및 개인 주택들이 있었다. 이 기둥중의 하나가 유명한 물리학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도미티안 신전(Domitian Temple)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페스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파트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요한은 그가 암살 당한 후 요한은 에페소로 돌아 올수 있었다. 이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굴된 도미티안 황제의 조각상이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에페스가 Neokoros 얻을 수 있었던 시대 1. Domitian 황제(81-96), 2. Hadrian 황제(128), 3. Elagabalus 황제(218-222), 4. Valerian 황제(251-260)
트라이안 우물(Trajan Fountain) 쿠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 목욕탕 3층으로 되어있는 이 건물은 에페소스에서 큰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1세기에 지어져 4세기 말까지 계속 수리되면서 변형되어온 이 건물은 400년에 이 목욕탕의 수리를 담당한 기독교인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이 목욕을 즐겼으며, 목욕탕은 로마제국 시대에 있어서는 문화생활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크레테스 도로를 보면 옛날 그때 당시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폴로 우물(Pollio Fountain)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이 우물은 기원전 80년에 지어진 것이다. 우물에는 호머의 잘품 오딧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주제로 한 조상들이 조각되어있다. 현재 이것은 에페소스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팔각정 에페소스에서는 신전에 돈을 희사한 사람이나 공공 건물의 유지를 위해 돈을 희사한 사람, 각종 대회 경비를 희사한 사람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동상을 주요 도로변이나 시장터 등지에 건축했다. 또한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비문으로 새겨 바로 이 팔각정에 보관하기도 했다.
하드리안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랑을 갖춘 주택가 하드리안 신전 맞은편 불불산 기슭의 중사면에는 에페소스의 귀족들이 살았던 주택가가 있다. 이 주택들의 대부분은 가운데 화랑으로 둘러 쌓인 정원이 있고 그 둘레에 180X180의 크기의 모양으로 바이 지어져 있다. 주택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있고 벽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재 쿠레토스 도로에 2채만이 복원되어 공개되고 있는데 이는 상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공중 화장실 하드리안 신전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공중화장실은 구멍을 낸 대리석 판으로 50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사용하던 개방적인 화장실이다. 화장실의 바닥은 모자이크가 깔려있고, 스콜라티스티카 목욕탕으로부터 나온 물이 씻어 내려가게 위생적으로 고안되어 있다. 좌석 정면에 있는 수로는 깨끗한 물이 흘러 용변을 본 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아마도 용변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셀수스(Celsus)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서(사진 참고),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항구도로(Harbour Street), 아카디안 도로(Arcadian Street) 과거에 항구로 가기 위한 거리로서 항구 거리(아르카디안, Arcadian)라고 하며, Arcadian 황제(395~408 A.D.)가 개축한 것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아크카디안 이라고도 부른다. 도로의 폭은 21 m, 길이는 530 m이다. 중앙부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었으며, 폭은 11 m 이며, 양쪽에 높이 5 m의 기둥들이 서 있다. 이들은 야간 조명을 위하여 양초 같은 것으로 거리를 조명했다고 한다. 양쪽 인도길에는 모자이크로 되어 있었고 도로 주위에는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로는 항구까지 바로 연결이 되어 있어 가장 화려하고 활발한 곳이다. 이 도로는 바다 쪽에서 오는 통로가 되어 에페소스를 방문하는 황제, 총독 및 각종 고위 귀족들은 제일 먼저 환영식을 이 도로상에서 받았다. 북쪽 방향에 대 원형극장이 있고, 여기서 부터 대리석 도로가 시작된다.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잇는 이 도로는 크고 고른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대리석 도로라 불리 운다. 네로 황제 시대에 2m 높이 둑을 쌓아 회랑을 만들었다. 원래 이 회랑의 벽에 이용되었던 돌에는 철이나 아연으로 된 쇠를 박아 연결시켰는데 비잔틴 제국시대에 에베소가 경제적으로 허약해 졌을 때 이 쇠를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 파인 구멍이 흉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그 유명한 창녀촌 광고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리석 도로(Marble Road)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잇는 이 도로는 크고 고른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대리석 도로라 불리 운다. 네로 황제 시대에 2m 높이 둑을 쌓아 회랑을 만들었다. 원래 이 회랑의 벽에 이용되던 벽돌은 철이나 아연으로 된 꺽쇠를 박아 연결시켰는데 비잔틴 제국시대에 에페스가 경제적으로 허약해 졌을 때 이 꺽쇠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두 제거되어 지금도 그 파인 구멍이 흉하게 남아있다.
창녀촌(Brothel)
대리석 도로에 유곽으로 가는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사진과 같이 한 여인의 얼굴 모습과 왼발이 그려져 있는데, 이 발바닥 보다 작은 사람은 출입금지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리고 하트 모양의 그림과 아코로디아(나를 따라오세요)라는 문자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구멍(돈을 가져오세요)을 뚫어 놓았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창녀 촌을 광고하는 모습이다. 다수의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있는 이곳은 정원을 둘러싸고 그룹 지어져 있다. 그 당시 모든 방은 벽감 위에 놓여진 촛불로 불을 밝혔으며 이 건물의 바닥에는 4계절을 알리는 모자이크 등 많은 모자이크들이 남아있다.
대극장(Theatre)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사진 참고). 따라서 로마-그리스 타입으로 무척 아름다운 극장의 표본이 되겠다. 고대 극장이 모두 그러하듯이 3부분으로 되어있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4개의 기념상 아르카디우스 도로의 중간 부분에는 보다 높은 4개의 열주랑이 있었는데 그 열주랑 위에는 4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동상이 서 있었다. 지금은 단지 주랑 만을 볼 수 있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 패키지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볼 수 없는 곳이다. 1929년 셀추크 도시의 중심부에 설립되어졌으며, 1964년과 1976년에 확장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어, 에페소스의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로마인들의 집, 폴리오, 트라얀의 우물, 악세사리, 무덤 속의 유물, 세라믹, 유리, 키벨레의 부조, 석비 등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의 것들이다. 아르테미스 관은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하다.이 곳에는 2개의 아르테미스 상이 양 옆으로 서 있는데 프리티네이온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중 큰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을 복제한 조상으로서 머리에는 세 줄의 폴로를 싣고있다. 검투사 경기를 소개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데 무척 재미있다. 점심시간에는 휴관이므로 그 때를 피하길 바란다.
숙소 식사 에페스에는 팬션, 호텔이 많은 데 버스로 에페스에 도착한 사람들을 호객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깨끗하고, 친절한, 아주 한국사람들에게 우호적인 팬션은 박물관의 뒤쪽에 있다. 호주에서온 마크가 운영하는 아웃백, 바름과 호메로스 등을 추천할만 하다. 그들에게 부탁하면 각종 서비스를 거의 원가나 무료로 해줄 것이다. 아침 식사도 아주 좋다. 커미션을 받는 사람들의 잔재주에 많은 피해를 보기는 하지만 나름데로 질로 승부하는 프로 근성이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 카라한 펜션은 한국인의 새로운 집결지로 떠오르고 있다. 닉네임이 일자눈썹 알리인 집주인 아들이 보통 오토가르에 마중 나온다. 집주인들이 모두 친절하고, 방도 깨끗하다. 부엌도 쓸 수 있더. 그리고 모든 차이는 서비스로 제공되며, 더블룸은 1인당 7,000원. 점심식사 장소는 터키말로 예디 우유얀라르(일곱명의 잠자는 사람들 무덤)의 바로 앞에 있는 괴즈레메 식당이 있다. 터키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이곳은 외국인 보다는 터키인들이 더 붐빈다. 아웃백의 주인 마크가 하는 말인즉 "터키 사람이 많이 가는 곳이 정말 좋은 곳이야". 교즈레메는 한국의 빈대떡과 같은 음식인데, 안에 치즈, 갈은 쇠고기, 꿀등을 넣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역시 천막아래의 바닥에 앉아서 먹는 옜날 터키풍의 분위기도 좋다. 셀축의 멜틈 팬션 : 깨끗하고 친절하다.. 에페스까지 무료 차량 대절. 6달러에 아침 포함. 드림 팰리스(?). 오토가르 근처에 있는 팬션 가지 말 것. 에페스까지 차량 대절 없고, 아침 식사도 불포함.
사도 요한 교회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 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죽 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세례소 등이 있다.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사원이 있다. 이사베이 회교 사원은 1375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회교 건물이다. 본래는 두 개의 첨탑이 있었는데 17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에베소 교회, 일곱교회 중의 하나(현재 Selcuk)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A.D. 37년~42년)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데 사도 요한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왔다고 한다. 마리아를 모신 사도 요한은 얼마동안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다가 에베소로 오게되어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에베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인 교회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의 활동 중심지였다. 즉, 이 도시는 밧모 섬으로부터 오는 편지(소식)의 도착지이면서 동시에 일곱 개의 교회를 차례로 연결하는 도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신에 그리스도인들은 꾸준히 신앙을 지켜 가긴 했으나(계 2:2-3) 사랑은 점차 식어가고 있었기에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부터 책망을 받았다(계 2:4). 또 그는 니골라당과 타협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과실을 먹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시는데(계 2:7), 이 말씀은 에베소 도시의 아테미의 신성한 대추야자 나무를 배경으로 생명나무의 형사이 대조를 이루게 한다. 요한계시록에 첫사랑을 잃은 교회로 묘사되고 있는 에베소 교회는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라는 주님의 책망과 권고를 듣게 된다.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7대 교회를 볼 때 1세기 말엽 소아시아 지역에는 어느 정도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진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복음전파는 사도바울과 같은 복음전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3차에 걸친 복음전도여행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했으며 특별히 이곳 에베소 지역에서 3차 여행 때 2년 이상 머물기도 하였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쟁쟁한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관계된 교회이다. 사도요한, 사도바울,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등등 특별히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 에베소에 와서 살았다. 에베소는 알렉산더 대왕이 B.C 334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방문하였고, 알렉산더 대왕 사후 리시마쿠스 장군에 의해 에베소의 번영이 이루어졌다. 에베소 원형극장, 체육관, 각종 경기장도 이때에 건립된 것이다. 교회사적으로는 A.D 431년에 에베소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마리아의 신학적인 위치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방의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기독교의 많은 전승을 간직한 에베소에게 주님께서 하셔던 말씀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첫사랑을 회복할 것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에베소서 : 대략 A.D 62경 사도 바울이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때에 에베소 교회에 써 보낸 편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영광스런 성도의 지위와 성도의 올바른 생활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행전 19:1-2] "아볼로가 고리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를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도다."
누가의 무덤 : 의사이며 동시에 역사가이며 복음전도자였던 누가의 유해는 요한이 에베소에 있을 때 에베소에 모셔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로 이장되었고 후에 머리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에 보내져 은쟁반 안에 보관되었고 몸은 파도바(pado·a) 시에 있는 성 기우시타나(Giustina)교회에 보관중이다. 에베소에 있는 누가의 무덤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무덤 입구에 황소그림이 있다. 에스겔 1장과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비유중 황소를 누가복음에 적용하여 황소 복음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본래 처음부터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신전으로 사용하던 곳을 기독교 국가가 된 이 후에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한 것 같다. 에베소 후문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곳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말기를... 이곳은 터키 성지 보존회가 관리하고 있으며, 한글로 된 안내 표지도 볼 수가 있다.
셀축 성 사도요한의 교회 북쪽으로 언덕 위에 높이 솟아있는 이 성은 원래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후에 터키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해 요새화 하였다.
이사베이(Isa bey)모스크 사도요한 교회의 서쪽 끝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사베이 모스크는 1375년 셀축 투르크의 술탄인 이사베이에 의해 세워졌다. 많은 부분이 지진으로 손상되었지만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잠자는 일곱 사람의 동굴 기독교 박해시대에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신전에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황제의 신에게 경배하도록 강요 당하였다. 이를 거절한다면 이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AD 250년경 데시우스(Decius) 황제시대에 7명의 젊은 기독교 신자가 이러한 박해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 이들은 어느날 동굴에서 잠에 빠져 한동안 자다 일어나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시내에 나갔다가 자신들이 하루 밤이 아닌 200년간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기독교가 공인이 되어 로마제국 어디든지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을 때였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당시 각 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부활의 증거로 받아 들였다. 그 일곱 사람은 나중에 죽은 후 화려한 장례식과 함께 이 동굴에 다시 묻혔다.
아르테미스 신전(Artemis Temple) -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 에페소 박물관에서 2∼300 m의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단 한 개의 기둥만이 남아있다(사진 참고). 세계 7대 불가사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경이적인 건축물에 붙여 놓은 이름으로서 사람에 따라서 유적이 달라지기도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이집트 기자의 파라미드,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로도스의 크로이소스 대거상,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와 터키에 2개 있는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능묘이다. 이 것 외에도 8대 불가사의로 꼽는 터키 중부의 넴릇산에 있는 유적과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꼽기도 한다. 따라서 에베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아르테미스는 이집트에서는 이시스(Isis), 인도에서는 이스(Isi), 바벨론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 히타이트인들은 시벨레(Cybele), 그리스에서는 레아(Rhea), 로마에서는 다이아나(Diana), 중국에서는 대모신이라고 불려졌다. 크로수스 왕이 지역에 신전을 세우기 전에는 키벨레 신전이 있었다. 키벨레 신전은 전통적인 소아시아 반도의 풍요의 여신으로 아르테미스와 같은 성격의 신이였다. 기원전 498년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이오니아 연행 중 아테네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334년 알렉산더의 명령으로 오늘날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그 이전의 키벨레 신전을 사라졌지만 키벨레의 정신은 남아 키벨레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 관습이나 성격은 아르테미스에게 물려졌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Artemis-성서의 아데미)신은 원래 달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다이아나(Diana)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지중해 도시국가에서는 아르테미스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 되었다. 이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어떤 신전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 다산, 다복의 신인 아르테미스 여신은 소아시아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천하가 섬기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기를 잘 낳게 해주고 축복을 준다는 이 여신을 사랑했다. 여신의 머리에는 성벽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도시민의 신이요, 보호자란 뜻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계 최초의 대리석 건물로서 신전이 세원진 자리는 본래 에베소에 처음 정착했던 아마존족이 참나무 밑에서 제전을 행하던 곳이었다. 그곳은 늪지대였기 때문에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기반이 튼튼해야 했다. 신전은 높이 15 m, 길이 105 m, 넓이 55 ㎡에 석주(이오니아식)가 127 개가 사용되었고, 127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처마도리(Architraves) 하나의 무게만도 24톤의 무게가 나가는데, 그 당시의 장비를 감안해 볼 때 어떻게 그러한 무게의 대리석을 기둥높이(17.65m)까지 들어 올린 것이다. 이것을 건축하는 데 무려 2백년이나 걸렸다. 이 신전에 악명이라도 좋으니 자기의 이름이 역사상에 남아 있기를 열망한 한 남자가 불을 질렷다. 알렉산더가 태어났던 B.C 356년 5월 21일이었다. 이 화재로 무너져 내린 신전의 보수를 위해 알렉산더는 아름다운 아르테미스 신전에 자기의 이름을 기록해줄 것을 조건으로 건설비용을 조달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요구 조건은 에베소인들에 의해 정중히 거절당했다. 그러나 에베소 시민들이 가진 것만으로 신전을 보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지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사람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품고 있던 이미지 즉, 대모신이며 성모로 항상 순결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내걸었다. "여신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만약 여신이 이 신전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여신의 위대한 힘으로 신전 내의 모든 것을 지켜줄 것이다. 귀중품이나 금, 은, 금전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원한다면 신전에다 맡겨도 좋다. 믿음을 기뻐한 여신은 매년 감사의 뜻으로 무엇인가 상을 내릴 것이다." 이 포고문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부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귀중품들을 가져다가 신전에 맡겼다. 이것을 계기로 아르테미스 신전에서부터 은행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7차례나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나, 마지막으로 AD 125년 코트족(Goths)에 의해 파괴, 약탈된 후로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고 채석장으로 변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토사로 완전히 덮여 자취를 감추었지만 1874년 영국인에 의해 발굴되어, 지진으로 파괴되고, 게다가 그곳에 있던 석주들은 여러 지역으로 이동되었는데 그 중에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사원 건설에도 이곳의 기둥을 가져다 사용됐다고 하며, 현재는 133개의 돌기둥(직경 1.85 m, 높이 18.6 m) 중에서 사진과 같이 하나의 기둥만이 남아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2.5배 면적이 높았다고 하지만 복원도를 보지 않고는 불가사의 건축물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복원된 모형도는 이들을 해체하여 옮겨간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아르테미스 신전의 한쪽 구석에는 붉은 벽돌의 조그만 바잔틴 교회가 남아 있으며, 아르테미스 신전 위쪽 언덕에 사도요한 기념교회가 보인다. 아르테미스 신전 위쪽 언덕 꼭대기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다. 그 밖에도 리디아 시대의 무덤, 청동의 집, 원형 극장,유대인 회당 등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 (Artemis, 영:Diana)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이자 숲의 여신, 사냥의 여신, 처녀성의 여신이다. 제우스신과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로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여동생이다. 로마신화에서는 아르테미스를 디아나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다이아나라고 한다. 고대도시 에베소(에페수스)의 수호신이었던 아르테미스는 에베소 유적지 중 당시의 시청에 해당하는 프리타니온(당시 지방자치행정을 관장하던 건물로서 에베소의 행정고문들이 그들의 모임을 갖고, 공식적인 방문자를 맞이하던 곳)에서 그 동상이 발견되어 현재는 에베소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A.D. 1-2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실물의 높이는 약 2.92 m이고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져있다. 아르테미스의 동상은 3층의 사원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마치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머리 뒷부분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달과 별의 여신으로 바벨론과 팔레스타인의 아스타르테(Astrarte)를 상징한다. 이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바벨론의 여신과 같다는 것을 의미했다. 목에는 도토리와 원추형의 모티브를 가진 목걸이가 걸려있고, 팔에는 사자들이 부조로 되어 있다. 이 여신의 가슴에 있는 4열의 둥그런 것은 처음에는 젖가슴, 계란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소의 고환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것은 아르테미 신전에 바쳐진 황소의 고환을 묘사한 것인데, 고환은 "씨앗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 이다. 이 신상의 치마부분에는 두 다리가 모아진 형태로 앞면에는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맨 밑에서부터 소, 사자, 사슴, 그리핀(그리스 신화 ; 몸통은 사자이고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인 괴물), 페가수스(그리스신화 ;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을 때, 메두사의 피가 대지에 스며드니 거기에서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가 나왔다고 함)등이 새겨져 있고, 치마의 옆에는 도시의 상징인 벌과 스핑크스(그리스신화; 여자의 머리 가슴, 새의 날개, 사자의 몸통을 가진 괴물)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아르테미스가 동물의 보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쉬린제(Sirince) , 시린제 : 전통마을 셀축에서 동쪽으로 9 km 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19세기의 오스만 전통 마을이 바로 쉬린제이다. 셀죽에서 돌무쉬로 15분 정도 소요되며, 저녁 7시까지 돌무쉬(마을버스)가 다닌다. 옛날 우리나라 처럼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서, 좁은 길에 대부분 적색 지붕의 2층 집들 이다. 시린제는 그리스 사람들이 살때는 크르큰제(40 가구가 살던곳)에서, 그리스와 인구교환 후에 그리스에 살던 터키사람들이 와서 정착하며 살면서 터키 정부의 지원이 없자 스스로를 자조하는 말로 치르킨제(추한 곳)로 부르다가 지금은 시린제(아름다운 곳)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조그만 시장이 있으며, 서쪽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다. 시린제는 집집마다 직접 담근 질 좋은 와인로 유명하다. 마을 전체가 와인 생산지이다. 이곳에서의 와인은 1병에 2∼3$정도 밖에 안하며,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딸기와인, 체리와인, 오렌지와인, 애플와인 등등 없는게 없다. 종류별로 시음도 해볼 수 있다. 와인을 맛보고 싶은 시린제 사람들과 여행자들을 위해 셀축에서 9 km 떨어진 곳에 와인 하우스가 마련되어 있다. 시린제가 한 눈에 보이는 아르테미스 샤랍에비의 잘 꾸며진 정원에 앉아서 그리스 풍의 백년은 족히 넘을 시골집들을 바라보며 갖는 여유로운 시간은 포도주 맛만큼이나 달콤하다. 가을에는 이곳 주위에서 나오는 귤, 오렌지, 복숭아를 직접 과수원에서 살 수 있다.
숙소 : 즐비하게 늘어선 주거 중에는 숙박이 가능하도록 내부를 고쳐 펜션으로 운영하고 있다. 숙박요금은 5∼7$ 이다.
쿠샤다스(Kuşadası) 터키어로 쿠샤다스란 '새들의 섬'이란 뜻으로 터키 최대의 휴양 도시답게 수많은 호텔, 방갈로, 펜션 등을 갖춘 휴양 객들의 천국이다. 조그마한 에게 연안의 만에 건설된 도시로서 황금 빛의 해변을 끼고 있다. 이 곳의 항구는 다양한 유람선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이들 유람 단체는 가능한한 주변의 에페소스(Ephesus, Efes), 밀레투스(Miletus), 디딤(Didim), 프리에네(Prene) 등의 관광 제안을 받는다. 여름에는 많은 관광객들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여전히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이곳에서 성지 순례객들이 자주 방문하는 파트모스(밧모)섬에 갈 수 가있다. 전세선만이 파트모스섬을 운해한다. 배로 5시간 거리이다. 또 가까운 그리스 섬인 사모스(Samos)섬에 매일 배가 운행한다. 쿠샤다스에서 볼만한 곳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데, 항구에서 가까운, 터키에서는 비둘기 섬이라 부르는 곳의 경치가 아주 좋다. 이곳에서 해지는 노을 보는 것은 너무도 로맨틱하다. 태양이 바다위로 지지않고 육지 위로 지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성의 입장료는 없다. 또 볼만한 곳은 케르반 사라이(대상 숙소)이다. 옛날 실크로드의 종착역이기도 했던 쿠샤다스의 잘지어진 대상 숙소는 들어서자 마자 하늘로 뻗은 야자수가 눈에 띈다. 야자수 밑에서 터키 홍차를 한잔 하는 것도 옛날 대상들의 수고를 느끼게 할만하다. 튼튼하게 지어진 대상 숙소는 지금은 호텔로도 쓰이고 가끔씩 전통 무용 공연을 하기도 한다.
성모마리아의 집(House of Virgin Mary) 에페소스로부터 8 km 떨어진 420 m 높이의 불불산에 위치하고있다. 불불(Bulbul) 산 쪽의 산길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서 5 km의 산 꼭대기에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보낸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사진 참고). 성모 마리아의 집은 전혀 볼 것이 없지만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성지로서 로마 교황청의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계신 곳이다. 에페스 뒤쪽의 산으로 한참을 올라가야하는 데,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며, 걸어가려면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죽기 전 (요한복음 19장 26-27절)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그 후 431년 에페스에서 열렸던 종교회의의 의사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예수가 죽은 후 4∼6년(AD 37∼48) 뒤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스로 와서 코레우스산(Coresus산 ;현 불불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냈다고 하는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Catherine Emmerich 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1878년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성모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891년 융이라는 신부의 인솔아래 에페스 남쪽의 산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오늘날의 성모마리아의 집이 밝혀졌는데, 발견 당시의 집터의 모양은 책에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더욱이 이 수녀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어 그 계시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크게 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했으며, 1967년 교황 바울로 6세 및 1979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도 이곳을 방문했다.
발굴 당시 이 건물은 오직 집터와 일부 벽만 남아있었다. 그 위에 현재의 모습의 건물을 복원시킨 것인데 붉은 선이 그어져있다. 본당의 바닥에는 회색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난로가 놓여져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석탄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본 결과 성모 마리아 당대인 1세기의 것이었다고 한다. 집 아래쪽에는 샘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순례 객들은 성수로 자기 고장의 교회나 성당으로 가져가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지 순례객들은 조그만 물병을 준비해 성수를 담아오는 것도 잊지말자. 성모 마리아의 집에 들어서면 한국말 안내판이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다른나라 안내판에 비해서 조금 낡았다.
성모마리아의 교회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숙소 식사 : 시내 중심에는 17세기부터 있는 "오쿠즈 메흐?X장군"이라 불리는 대상의 숙소가 있다. 오늘날에는 옛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안락한 숙소들이 있다. 또한 새들의 섬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작은 성이 있다.
이오니아 문명 : 이오니아의 도시는 모두 12개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것은 밀레투스, 미우스, 프리에네, 사모스, 에페수스, 콜로폰, 레베두스, 테오스, 에리트라에, 키오스, 클라조메나에와 포카에아이다.
프리엔, 프리에네(Priene) 쿠샤다스에서 13 km 정도가면 쇽케(Söke)이며, 이곳의 남서쪽으로 고대도시였던 프리에네가 있다. 프리에네의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기둥은 멀리서도 잘 보인다. 프리에네에 갈려면 약간의 등산을 해야한다. 이 도시는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 Codurs의 손자가 이끄는 모험가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 땅에 왔을 때 주민들은 그들의 새로운 도시를 미케일(Mycale) 산 근처에 건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항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 도시에 건설되었던 아테네여신을 위한 신전의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제의하자 에페스인들과 달리 이들은 그의 호의를 받아 들였다.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의 자비심을 찬양하는 비문을 만들었는데 이 비문은 현재 대영 박물관 고고학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페르가모(현지명은 베르가마)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에페스나 다른 인근의 도시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므로 헬레니즘시대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오니아의 항구도시로서 B.C 4세기에 밀레도의 Hippodmos에 의해 도입된 장기판식의 도시계획으로 유명하다. 비잔틴 시대부터 중요성을 잃었고 오스만제국 시대에 와서는 거의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중요한 유적은 모두 독일로 반출 되었다. 이곳의 원형 극장의 수용인원은 약 5,000명 정도가 되는 데 그것으로 미루어봐서 밀레투스보다는 큰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오니아 동맹의 리더중의 하나였다. 아테네 신전의 기둥은 지금도 건재하게 남아있었다. 프리에네에서 남쪽으로 넓은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데 그 평원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생각을 해보니 자연의 위력을 새삼 실감나게 했다. 예전에는 밀레투스와 프리에네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배였을 것이다. 육로로는 바파호수의 끝가지 돌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프리에네의 뒤쪽은 깍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 데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잠시 신전의 기둥옆에서서 평원을 내려다 보며 휴식을 가졌다. 아직은 한국사람이 많이 찾지않는 디디마, 밀레투스, 프리에네였지만 서양사람들은 꾸준히 방문하는 곳이다.
바파 호수 바파호수는 옛날에는 바다 였으나 지금은 호수로 변해있다. 달 빛이 부서지는 호수는 매우 아름답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호수로 옛날 헤라클레이아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 각종 새들의 낙원인 이 바파호수는 새들뿐만이 아니라 물고기도 아주 많다. 특히 뱀장어가 많이 잡히는 데 그 요리가 일품이다. 여기를 방문한다면 뱀장어요리를 맛보기를 바란다. 바파호수 바로 옆의 식당에서 차한잔을 하며 호수의 섬들을 보는 것도 좋다. 숙소 : 호텔 클럽 나투라 올리바로서 바파호수 바로 옆에 자리잡아 바파호수와 한데 어울려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방갈로 형태의 호텔이다. 넓은 공간에 비탈길로 놓인 산책로와 숙소, 그리고 호수가 바로 옆에 자리잡은 레스토랑은 파도소리와 어울린다.
헤라클레이아 바파호수의 뒤쪽의 헤라클레이아는 인근의 밀레투스나 프리에네랑 다르게 아나톨리아의 원주민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간선도로에서 꺽어져 10km를 가면 헤라클레이아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헤라클레이아로 가는 길의 경치는 기가 막혔다. 산이 온통 기암절벽으로 덮혔있었다. 잘 찍지 못하지만 사진기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바파호수를 옆의 시골마을에 도착해서 원형극장의 노란 표시판을 따라가서 헤라클레이아의 유적지를 돌아본다. 이 주변을 돌아보는 데 5일이 걸릴다고 한다. 헤라클레이아에서는 반드시 배를 한편 타고 유적지를 둘러보아야한다.
밀렛(Milet), 밀레투스(Miletus) 프리에네의 남쪽으로 16 km 거리에 밀레투스(Miletus)가 있다. 쇼케에서 남쪽으로 약 30 km 지점에 있는 서쪽 갈림길로 7 km 가면 디딤(Didim)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20km를 가면 밀렛 이다. 이 고대 도시는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한 도시이다. 크레타 섬에서 추방된 아폴로 신의 아들인 밀레투스(Milletus)에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과거에 밀렛은 에페스와 마찬가지로 항구도시였으나 멘데레스강의 활동에 의해 흘러들어온 흙이 바다를 메꾸어서 지금은 내륙지방이 되어버렸다. 밀렛은 아주 이른 시기(기원전 1600년경)부터 크레타인과 카리아인들이 정착해 크레타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 후 기원전 1200년경 밀렛은 이오니아인들의 세력권 내에 들게 되었는데, 천혜의 항구에 위치한 관계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그 세력을 흑해 연안까지 뻗쳤다 한다. 이 도시의 전성기는 유명한 군주 트리사불레스(Thrasybules)의 통치 시기인 기원전 약 7세기 경으로 많은 철학자 및 역사학자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활약했다. 그리스철학, 천문학, 지질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탈레스(Thales)도 이 도시에서 태어나 활약했는 데, 그는 BC 585년 5월 28일의 일식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며, 만유의 근원이 물이며 불변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여 그의 학문과 사상은 오늘날의 핵기술을 낳게했다. 한편 만유의 근원이 공기라고 주장하여 탈레스의 학설과 쌍벽을 이루게 했던 아낙시메게스(Anaximenes)나 유명한 철학자 아낙시멘데르(Anaximender), 그리고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헥카테우스(Hecataeus), 또한 위대한 기하학자 이시도루스(Isidorus-콘스탄티노풀의 성소피아 건축자)도 이 도시의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세기의 매춘부 아스파시아(Aspasia)도 이 지역에서 출생해 나중에 아테네의 정치가 페라클레스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BC 546년에 페르시아의 속주가 되었는데, 이 도시를 몰락하게 한 사건은 BC 494년에 발생했다. 즉 밀렛이 주동이 되어 에페스, 서머나 등 인근의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함으로서 밀레도는 거의 파괴되고, 주민들이 대량 학살 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후 히포다무스에 의해 재건되는 데,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을 본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도시의 몰락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였다. 즉 멘데레스 강의 퇴적 작용에 의해 밀렛은 오늘날 내륙 깊숙이 자리잡게 되어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기능도 잃어 쇠퇴하게 된 것이다.
성서 속의 밀렛 밀렛 사도행전 20장 17절-38절까지, 디모데 후서 4장 20절에 언급되었다. 즉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에베소에 들리지 않고 밀렛에 잠시 들려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의 장로들을 오게 한다. 이 밀렛에서의 이별 장면은 상당히 감동적이다. 사도 바울이 그들과 함께 기도를 마친 후 작별을 고하려하자 모두들 바울의 목을 안고 울었다. 다시는 바울을 볼 수 없으리라는 슬픈 생각에 그를 배 타는데까지 울면서 전송하는 장면은 쉽게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유적으로는 반원형극장, 비잔틴성, 사자의만, 델피니움, 북부시장, 체육관, 화우스티나 목욕탕, 일리야스 베이 모스크 등이 있다. 밀레투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원형 극장일 것이다. 당시 15,00명을 수용했던 극장은 지금도 보존이 잘되있는 편이다.
디딤(Didim), 디디마, 미딤 셀축에서 D525번 도로를 남쪽으로 약 60 km 내려가서 서쪽으로 7 km 가면 디딤이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에서 정착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이 디딤의 아폴로신전이나 지성소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통치하고 왕래했지만 디딤이란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어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디딤은 이 자체가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고 밀레도의 영토에 속했으며 성직자들과 신전을 지키고 관리하는 종들이 살았던 곳 이었다. 디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8세기 말이었다. B.C 494년에 이오니아가 Lade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게 패했을 때 디딤의 아폴로신상은 끌려갔고 신전의 재물도 약탈당했다. 그 때 아폴로신전의 성직자들은 비겁하여 재산을 지키려 하지않고 정복자에게 아무 저항없이 모든 걸 바치고 난 후 밀레도인들의 분노를 살 것을 두려워하여 페르시아군에게 사정하여 자기들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페르시아왕은 그들을 데려가 살게 했는데 약 1세기 반 후에 페르시아군을 무찌르고 진군한 알렉산더 대왕이 밀레도인들로부터 성직자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대노하여 그들이 살았던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으며 아폴로신상을 디딤으로 복원시켰다. 페르시아인들은 아폴로신전을 파괴한 후 약 150년간 방치하였다가 알렉산더대왕이 이오니아에 도착했을 때 디딤에 새로운 신전을 짓도록 명령하여, 그후 약 500년동안 건축이 계속되었으나 결국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건축이 중단되고, 신전의 중요성은 퇴색되어 갔으며,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A.D 380년) 왕은 신전에 대한 참배를 일체 금했다. 1,500년대의 지진에 의해 파괴된 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신전의 모습이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모두 기둥이 105개가 있었던 웅장한 신전이었다. 신전을 돌아보면서 그 규모에 다시한번 놀랐다. 곳곳에 지붕에 조각되어있던 메두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둥중에 몇몇은 다른것과 다르게 톱니바퀴가 아니라 평범한 둥근 기둥이었는데 그것이 세계최초의 노동자들의 태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아폴로신전 밖에 유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약 4Km 떨어진 알튼 쿰(Altin Kum; 황금의 모래)이라는 훌륭한 해수욕장이 있다.
보드룸(Bodrum) 셀축에서 남쪽으로 오면 밀라스(Milas) 읍과 만나고,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56 km 정도가면 보드룸이다. 보드룸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마소루스의 무덤 마소로움(마우솔레움)이 있는 곳"으로, 고대 명은 할리카나수스(Halicarnassus)이다. 보드룸은 BC 1000년경에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진 고대도시 이다. 보드룸은 반도로서, 보드룸의 주변에는 많은 휴양도시가 있다(참고1, 참고2, 참고3). 유명한 곳 중의 하나가 버로 얄르카박이다. 그외에도 괼쿄이, 카드칼레시, 규뮤슈륙, 투르구트 레이스는 보드룸보다도 더 좋으면 좋았지 뒤떨어지지는 않는 아름다운 곳이다. 보드룸반도 전체가 휴양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도시는 Aor주 연방의 일부였으며 B.C 7∼6세기는 리디아(Lydia)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B.C 546년 리디아왕 크로수스가 페르시아에 패함으로 밀라스로부터 통제 받는 페르시아의 도시가 되었다. 페르시아가 리디아왕국을 점령하고 그리스의 도시들을 정복한 후에 BC 480년에 이 도시는 페르시아의 이름으로 카리아(Carian Dynasty)왕조의 여왕 아르테미시아(Artemisia)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여왕은 페르시아와 그리스간의 전쟁시에 페르시아 편에 섰고, 살라미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Xerxes BC 519-465)로 부터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카리아 왕조의 가장 강력한 권위를 세운 왕은 마우솔로스(Mausolus)였다. 그는 헬레니즘 문명을 받아드려 도시를 가꾸는데 신경을 썼다. 5.5 km에 달하는 정교한 방어 성벽을 만들고, 프로코네시아 지방의 대리석으로 성벽을 감쌌다. 그리고 그는 살아 생전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만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러자 왕위 계승자인 그의 부인인 아르테미시아 여왕의 동생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완성하여 당대에 기술로는 만들기 어려운 아름다운 무덤으로서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마소로움(마우솔레움)을 건설했다. 이 여왕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남편이 죽자 그의 뼛가루를 포도주에 섞어 죽을 때까지 매일 마셨다. 이 할리카나수스의 마우솔레움 영묘의 사자상 하나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에페스의 아르테미스신전과 함께 터키땅에 자리잡은 옛날 세계의 최고 건축물중의 하나인 마소로움은 얼마나 웅장했던지 아직도 마소루스의 무덤을 뜻하는 마소로움은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 영묘라는 단어를 등장시키게 했다. 길이 38미터 폭 32미터 높이 45미터의 이 웅장한 건축물은 지금은 단지 그 기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게 폐허만이 남은 이유중의 하나는 지진에 의한 파괴도 있겠지만 로도스섬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제국의 공격을 대비해 성을 보강할 때 이 마소로움의 돌을 사용한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조각상도 영국에서 가져가면서 지금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마소로움의 복원도를 보면서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주는 아쉬움을 여기서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B.C 4세기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고, 3세기에는 프토레마우스와 셀레우쿠스가 지배했다. 80년 길리기아, 베레스 지방의 로마 총독에 의해 약탈되었다. 이때 도시의 예술품들이 파괴되었고, 과거의 영화는 다시 오지 않게 되었다. 1523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슐레이마니에 대왕에게 완전히 정복되어 이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몰타(Molta)로 철수하였다. 할리카르나소스의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대 역사학자 헤르도투스(Herdotus BC 484-420) 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서사시적 투쟁의 연대기를 서술함이다. 또한 BC 8세기경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로마의 신화적인 탄생으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성베드로 성당 A.D 15세기, 한 때는 섬이었던 반도 부분에 세워진 이 성은 설계와 건물 부조물들을 지진으로 무너진 마우솔레움에서 가져다 썼다. 최초의 발굴은 1,415∼1,500년경 독일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성곽은 터키, 프랑스 공동 작업하였다. 이곳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바다 속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하는 흥미진진한 해양 박물관이 있다. 보드룸 항구에는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이곳에서 에게해를 항해하는 크쿠즈에 참가해도 좋은 여행이 될것이고, 시간 여유가 있으면 가까운 그리스섬인 코스섬을 갔다 오는 것도 괜찮다. 스킨 스쿠버를 가르쳐주는 클럽도 있다. 시즌 중의 시장은 외국관광객으로 항상붐빈다. 보드룸의 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많은 락카페와 디스코(디스코텍)와 주점은 밤에 빼놓을 수 없는 보드룸의 상징이 되었다. 보드룸은 연말이나 터키의 명절때에는 터키의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장소로 빼놓을 없는 곳이다. 그만큼 외국관광객 뿐만이 아니라 터키 관광객도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드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할리카르나소스의 발륵츠이다. 이 뜻은 할리카르나소스의 어부라는 뜻인데 보드룸의 한복판에서, 또 보드룸성의 입구에서 동상이 서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굴까하고 의심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이후로 보드룸은 아주 작은 어촌을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오스만제국 사람이었던 할리카르나소스의 어부에 의해 전 터키에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명문가문에 태어난 사람인데 자기 부인과 정을 통한 아버지를 살해한 죄목으로 이곳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 문학 활동을 벌였다. 뛰어난 문학가인 그는 보드룸에 살면서 그가 쓴 글은 보드룸을 전 터키인에게 가장 사람받는 곳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 생각하지마요. 당신이 이곳에 왔던 것처럼 당신도 이곳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온갖 추억을 보드룸에 두고 떠나게 될것입니다."
보드룸 성 보드룸에서 어디에서건 한 눈에 보이는 보드름 성은 성요한 기사단이 15세기에 세운 성으로 성 베드로(세인트 피터스)성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수중박물관이라고 불리우는 데, 그 이유는 인근의 수중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몇안되는 수중박물관이라는 자랑을 들었지만 내게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보다는 터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유럽식의 성이라는 것이 더 흥미를 잃으켰다. 이 성을 자주 방문했지만, 이 곳에 올때마다 느끼는 것은 중세의 기사들의 향취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곳을 지키는 기사들의 국적에따라 이름 붙여진 프랑스, 영국, 불란서, 이탈리아 등의 성채는 그 견고함 못지 않게 오스만제국에 맞서 오랜 세월동안 이길수 없는 싸움을 벌여왔던 로도스 기사단의 절망감이 느껴왔다. 그들은 언제 몰려올지 모른 오스만 제국의 대군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정작 이곳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가장 훌륭한 왕중에 하나인 카누니 술탄 슐레이만의 공격에 의해 로도스섬이 함락당하고,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를 떠나 말타로 본거지를 옮길때 이 곳의 성 베드로 성도 오스만 제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성 베드로성은 그냥 유적지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말고 바다가 잘 보이는 탁 틔인 곳에 앉아서 아무런 생각없이 오가는 배들을 내려다보는 여유를 가져보길 권한다.
보드룸의 원형극장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수용인원은 약 13,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원형극장은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과 에페스의 극장이 주는 감동과는 비교할 수없을 만큼 보존상태도 안좋고, 아니 너무 복원냄새가 난다.
숙소 : 최고 비싼 호텔중에 하나인 안틱 티야트로는 하루밤 숙박요금으로 더블이 150불이다. 저녁식사도 포함되어있지 않다. 할리카르나소스(보드룸의 옛이름)의 원형극장 앞에 있는 호텔은 아주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녁에 보드룸성을 내려다보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지배인은 코소보인인 마사르 베이(존칭어)였는데, 8개국어를 구사하는 마음씨좋고 인자하다.
마르마리스, 말마리스(Marmaris) 밀라스에서 D330 도로로 동쪽으로 38 km 가면 D550 도로와 만나며, 이곳에서 28 km 가면 무을라(Mu?la)이고, 29 km를 남쪽으로 가면, 남서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27 km 가면 마르마리스 이다. 마르마리스는 고대 '피스코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경치와 해변으로 유럽인들에게 잘 알려진 휴양도시이다. 여름에는 거리는 인파로 덮일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최근에는 관광용 요트 항구로서 유명해지고 있는 도시다. 역사를 보면 마르마리스는 BC 4세기 후반 로디안(Rhodian..현재 그리스영인 로도스의 사람들)이 통치했던 곳이다. AD 1522년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마니에 대왕이 이스탄불에서 40,000명의 해군과 20,000명의 지원군을 700척의 함대에 실어 보내고 자신도 140,000명의 육군을 마르마리스까지 이끌고 가서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펴서 도시를 점령하였다. 훗날 넬슨(Nelson) 제독의 함대가 잠시 피난하여 머물렀을 때처럼 대 병력을 수용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중세의 성과 성벽 안에 있는 수 백년 된 전통 가옥들은 볼만하다. 또한 도시 센터에서 2Km 떨어진 아사르테페의 유적지와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은 확실히 볼만하다. 항구 쪽에는 오스만 제국 당시의 성곽이 있으나, 불행히도 많은 고층 건물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마르마르스는 보드룸과 쌍벽을 이루는 터키 서부지역의 휴양도시로서, 로도스섬(Rodos Adası)으로 가는 배가 매일 출발한다. 마르마리스에서 D500 도로의 서쪽으로 75 km 가면 조용한 휴양도시인 닷차(다트차; Datça)가 나온다. 닷차에서 더 동쪽으로 가면 고대도시 크니도스(Knıdos)까지는 28 km정도의 거리다.
로도스 섬(Rodos Adası) '에게 해의 장미' '행복의 섬' 등의 별칭이 붙어 있는 로도스 섬은 로데카네소스 제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뿐만 아니라 피레우스에서 키프러스나 중 근동으로 가는 배가 반드시 기항하는 항로의 요충이기도 하다. B.C 12C에 도리스인들이 이 섬에 린도스, 카미로스, 이알리소스 등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BC 1C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에는 베네치아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그리스에 병합이 된 것은 1948년의 일이다. 로도스 시는 꽤 넓은 두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시가지는 현대적인 호텔과 디스코데크가 즐비하고, 구 시가지는 성벽에 둘러 싸여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루즈나 요트를 위한 자그마한 항구로 신시가지에 면해 있는 만드라키항(Mandraki) 과 대형관광선이나 페리를 위한 큰 항구 Commercial Harbour 가 구시가에 면해 있다.
소크라테스 거리(Socratous) 와 술레이만 회교사원 (Suleiman's Mosque) 항구에 면해 잇는 통행문 가운데 유난히 큰 곳이 "바다의 문"(Pili Ag. Ekaterinis) 이다. 일명 로도스의 쇼핑거리이다. 토산품점, 직물 전문점, 모피나 귀금속점들이 길 양편에 빽빽이 자리잡고 있다. 윈도우 쇼핑을 하면서 천천히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갑자기 눈을 막아서는 번쩍번쩍 하는 양파 모양의 회교사원을 보게 된다. 이것이 1522년에 세워진 술레이만 회교사원이다. 로도스기사단(성요한 기사단)은 그 직전에 터키군에 패하여 말타섬으로 탈출했다.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바다의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로도스시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1440∼1489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당시는 병원이었다. 성요한 기사단은 원래 의료계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그 이념도 병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는데 있었다. 조각으로는 로도스의 아프로디테(미의여신)상이 유명하다.
기사단의 궁전(Palace of the Grand Masters) 기사의 거리를 끝까지 가면 오른쪽에 궁전이 보인다. 유럽의 왕족이나 제후들의 화려한 궁전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실용적이고 일종의 성채와 같이 튼튼해 보이는 모습이다. 몇차례의 지진이나 전쟁으로 손상을 입었는데, 제1차대전 후 로도스 섬을 지배했던 이탈리아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역대 성 요하네 기사단장들이 살던 곳으로 궁전이라기보다 요세 같은 느낌이 드는 이 궁전은 방이 158개로 한때 감옥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를 위해 수복된 것으로, 무솔리니가 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내부는 이탈리아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각국으로부터 기증받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알리소스 : 고대 3대 도시의 하나로 지금은 아테네와 제우스신의 신전터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부근의 집 가운데 민박이 많다.
나비의 계곡 : 이알리소스에서 14km 쯤 더 가면 Petaloudes 에 "나비의 계곡"이라는 계곡이 있다. 이 일대는 때가 되면 사방 1km 정도의 계곡이 온통 춤추는 색색의 나비들로 뒤덮인다.
카미로스유적 : 로도스 시에서 34km 쯤 서해안을 따라 간 곳. 고대 3대 도시 중의 하나이다.
린도스(Lindos) 고대도시 가운데 지금까지 그 자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은 린도스 뿐이다. 로도스시에서 동해안을 따라 약 55km에 위치해 있다. 관광버스나 정기버스가 자주 다니고 있다. 이곳은 마을 전체가 정부로부터 고고학 유적지로 지정되어 차의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마을 꼭대기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왼쪽에는 하얀 모래사장의 해안이 보이고, 오른쪽 위의 아크로폴리스까지는 꼬불꼬불한 길을 돌계단을 밟아 얼마쯤 올라 가야한다. 이길에는 산토리니에서와 같이 한번쯤 나귀를 타보는 것도 괜찮다. 아테네-피레우스에서 직접 가는 배가 있으며, 터키의 마르마리스로 들어 올수 있다.
크니도스(Knıdos) 크니도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직후 펠레폰네수스에서 온 도리스 사람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반도의 험한 지형 때문에 통신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크니도스는 해안선을 따라 영토를 넓혀갔다. BC6세기 중엽에는 이 도시가 시실니(Sicily) 북쪽 해안과 라파리(Lipari) 섬에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와 무역업의 성공으로 부를 축적하여 그리스 델피에 있는 크니도스 보고에 많은 재물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546년 페르시아가 에게해 연안의 도시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해 들어오자 크니도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토를 섬으로 만들고자 영토 중에 가장 좁은 지역을 택해 깊은 터널을 파므로서 본토와 자기들의 땅을 분리시키려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이 역사에 참여한 시민들 중 많은 사람이 날으는 돌조각에 의해 얼굴과 눈 부상을 많이 당했다. 이 불길한 징조에 절망한 크니도스인들은 델피로 가서 지성소의 충고를 듣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신의 대답은 "제우스 신이 크니도스의 땅을 섬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벌써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하면서 그들의 땅을 포기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충고를 받아 드리기로 하고 그들의 도시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BC4세기 말경 크니도스는 유명한 의학학교가 생겨 명의들을 많이 배출했고, 유명한 철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수학자인 유독소스(Eudoxus)가 이 지방 출신으로 별과 흑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법칙을 세운바 있다. BC 279년에는 크니도스의 Sostratus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유명한 파로스(Pharos) 등대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웠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올리브 산지이며, 식초는 최고의 품질이었고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포도주였다. 이 포도주는 피를 맑게 해주고 위나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며 아무리 과음하더라도 숙취에 걸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BC 2세기에 이르러 크니도스가 로도스의 통치 하에 있을 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도시가 노출되어 있는 관계로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AD 7세기 이 후로 시작된 아랍족의 침략에 견디다 못해 주민들은 이 지역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카우노스(Kaunos, Caunos) 무으라(Mu?la)에서 남쪽으로 약 54 km 거리인 쿄이제이즈(Köyce?iz) 마을(북쪽에서 올때는 Dögüsbelen에서 남동쪽 도로으로 조금 가다가 지선으로 간다)에서 갈 수 있다. 쿄이제이즈의 좁은 호수를 따라 보트로 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카이누스 도자기 조각들이 BC 9세기 이전에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도시가 그리스 문명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으나 그리스인들이 거주했다는 증거는 전혀없고 또한 그리스인들도 아니었다. 역사학자 헤로도트스는 카우누스인들은 소아시아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전설에 의하면 카우노스는 밀레투스의 아들이며 아폴로신의 손자로서 그의 쌍둥이 여동생 Byblis가 공격해 오므로 카리아로 도주하였다. BC 4세기에 한 항해 일지에 의하면 카우노스는 카리안족들이 세운 것이라 되어있다. 이 Caunus는 여자에 대해 죄를 지었고 이 무법천지의 욕망을 다스릴 수 없어 스스로 떠나게 되며, 불행한 로맨스를 묘사하는데 종종 사용되었던 "카우누스인의 사랑(A Caunian Love)" 이다. 유적으로는 석관무덤, 아크로폴리스, 극장 등이 남아있다.
달리안(Dalyan) 카우노스 바로 서쪽이지만 도로로 연결되지 않아 아크차카바크(Akçakkavak)에서 남서쪽으로 약 4 km 가면된다. 달리안(Dalyan)은 "Fish Traps"이란 뜻이며 지중해의 거북이들이 알을 낳는 장소로서 세계의 자연 보호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유명한 곳이다. 터키 정부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달리안강의 하류에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아름다운 백사장의 이스투스 해수욕장은은 오염되지않은 청정구역이다. 바닷거북이 5월과 9월 사이에 알을 낳고, 본능적으로 빛을 찾아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바다 거북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는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산란기에는 밤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그 이유는 빛을 찾아서 바다로 들어가는 바닷거북이 불빛을 보고 혼동을 일으켜 바다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안강은 아주 많은 갈대 숲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수로가 아주 고불고불 나 있어서 카누를 타고 여행할 경우에는 길을 잃기 쉽고, 강이 아주 좁다. 배를 타는 곳에서 건너편 절벽쪽으로 바위를 파서 만든 묘지가 보인다. 전통적인 리키아식의 묘지이다. 달리안과 카우노스 유적지를 배를 타고 연결하여 여행하는 것이 좋다.
카슈에서 페티예는 4∼5시간 소요되며, 하나의 커다란 요새같은 만 주변에 세워진 유명한 도시이다. 1957년 이 도시는 지진에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휴양지로서 잘 만들어져 주위의 섬을 포함한 주변을 배를 타고 돌아보는 방법이 가장 좋다. 마치 바닷물 색갈이 터키석 같은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웰유 데니즈는 해변 뒷편으로 숲이 우거진 산 기슭에 자리잡고 만의 입구가 좁아 하나의 호수처럼 보이는 곳이다. 고대도시 텔레수스(Telmessus)가 현대의 페티예를 말한다(사진). 탈레수스의 표기에 다블 에스(ss)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 이전의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텔레수스인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알렉산더를 대신하여 통치권을 받았던 크레타인 네아쿠스는 텔레수스를 점령하기 위하여 술책을 썼는데 텔레수스 주민들에게 자기들이 포로로 잡은 여자 가수들과 소년들을 시에 남겨놓고 가도 좋으냐고 물었고 주민들은 의심 없이 응낙하였다. 소년들의 퉁소 가방 안에 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그들의 척후병인 소년들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그 후 시간이 흐른 후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가 되었다. AD 451년 칼케톤 종교회의에 텔레수스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페티예에서 파묵칼레까지 가격은 만원정도, 카밀 코치라는 버스회사에서 표를 구입한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서비스도 좋다. 페티예 거쳐서 오타쟈 걸쳐서 뮬하 걸쳐서 데니즐리로 가면, 약 6시간에서 7시간 걸린다.
욜루데니즈(Ölüdeniz)) 페티예에서 돌무쉬를 갈아타고 30분정도 가면 욜루데니즈 이다. 욜루데니즈를 찾는 사람이 많으므로 버스도 자주 있다. 욜류데니즈는 파도, 밀물, 썰물이 없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물이 깨끗해 수영을 하다보면 물고기도 보인다. 욜루데니즈 가기 전에 식당과 쇼핑센터가 밀집된 거리가 있다. 욜루데니즈에서 이곳까지 돌무쉬 타고 와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할 수 있다. 다만 여기는 유럽인들의 휴양지라 물가가 다소 비싸다. 욜루데니즈 해변에 들어갈때 입장료 있으며, 학생은 750원이다. 비치에서 파라솔이랑(2000원) 의자(1개당 2000원) 빌리는데도 돈내야 한다.
<숙소> 욜루데니즈의 투어리스트 인포에서 추천해준 Grand Taner 호텔은 수영장 딸린 호텔중에서 가격이 가장 저렴한 곳이다. 더블룸 1인당 15000원으로 에어컨, 욕실 등 시설이 좋다. 수영장 옆에는 미니 바가 있고, 포켓볼도 맘대로 칠수 있다. 해변에서 가까운 편이다.
테르메수스(Telmessos) 테르메수스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나 리시아인이 아니고, 피시디아(성서상의 비시디아)로부터 왔다. 피시디아는 팜필리아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였다. BC 8세기 이전 건국 초부터 테르메수스인들은 호전적이었고 공격적이었으며, 그들의 이웃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한 때는 리시아 연맹의 30개 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용감했었다. 평지에 있는 도시들과 떨어져있고, 황량하고 비옥하지 못한 땅에 위치한 테메르수스는 올리브가 유일한 농작물이었다. 그들이 전략적인 요충에 위치한 관계로 해안과 내륙지방의 무역을 간섭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지역을 통과하는 여행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들였다. 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무서운 군대에도 겁을 내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도 그 방어가 튼튼한 것을 보고 정복의 꿈을 버리고 지나친 두 개의 도시중 하나이다. 테르메수스는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곳으로 산의 거의 정상부분까지 차가 올라갈 수있다. 원형극장, 오데온(실내극장), 시스턴(물저장고), 아고라가 있으며, 높은 곳에 건축된 원형극장은 웅장하며, 무대 쪽은 절벽이다. 테르모수스는 기중기 같은 장비를 가지고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발굴작업이 이루지고 있지 않다고 하며, 험난한 곳에 있기 때문에 잘 보존 되어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파묵칼레(Pamukkale),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성서지명 - 히에라폴리스(골로새서) 관련성경 - 골4:13 이스탄불 오토가르에서 인근 데니즐리까지 버스로 13 시간 소요되며, 20달러 내외이다. 이즈미르에서 데니즐리까지는 남동쪽으로 약 238 km 거리이다.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까지는 20 여 km로서 마을버스로 45분 정도 소요된다. 페티예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에 있는 파묵칼레까지의 거리는 약 666 km이다. 라오디게아로부터 약 9 km 정도 떨어져 있고 해발 약 750 m 높이의 리쿠스계곡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파묵칼레 자체만 2∼3시간이면 돌아볼수 있으나, 히에라폴리서 전체를 보려면 하루 이상을 잡아야 할 것이다(아래의 지도 참고)
파묵칼레 지도(지도를 클릭하여 크게 볼 것) 파묵칼레에 가면 지면이 완전히 눈으로 덮인 듯한 언덕 하나가 나타나는데, 사실 이것은 눈이 덮인 것이 아니라 온천수에 의해 이루어진 자연의 대 작품이다. 이곳이 바로 터키인들이 목화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의 '파묵칼레'라고 이름 붙인 고대의 '히에라폴리스(성스런 도시; 聖市)'이다. 터키어로 '파묵(pamuk)'은 '솜(목화(木花)을 뜻하고, '칼레(kale)'는 '성(城)'을 뜻한다. 산화칼슘이 주성분인 온천수가 언덕 꼭대기에서 솟아나서 1만 4천년간 걸쳐 산봉우리부터 흘러내리며, 비탈을 온통 순백의 바위로 뒤덮게 했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욕조를 만들고, 계단식 자연 수영장을 만들었는데, 이 모양이 솜을 쌓아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터키의 절경 중 하나이다(여행 참고). 또 한쪽의 산자락에서는 유황온천이 흘러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온천수의 깊이는 무릎 이하의 높이여서 수영을 할 수는 없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서 얼마 안가면 전체가 새하얀 곳에 둘러싸여 있는 파묵칼레가 나온다. 이 온천수가 만들어 계속 만들어 놓은 테라스는 파손되기 쉬우므로 신발을 벗고 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한 손에 신발을 들고 가야 한다. 물은 ?泰嗤? 석회석이 쌓여 미끄러우므로 조심해야 하며, 가끔 자갈이 밟히면 발바닥이 아프기도 한다. 현재는 과도한 개발로 인해 온천수가 줄어들어 무미건조한 하얀 석회붕만이 자리하고 있고 있는 곳도 많다. 과거에는 수영도 하였다고 하지만, 걷거나 흘러가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쉬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대시대로부터 온천물은 류머티스, 심장병,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위 어느 곳에서나 실제의 목화밭을 볼 수 있듯이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모직산업에 종사하였고 섬유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는데, 현재 많은 주민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 민박, 레스토랑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석회붕 위쪽으로는 로마 시대의 야외 원형 극장을 비롯하여 교회, 공중 목욕탕, 신전등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이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바로 이 하얀 목화성 언덕위에 건설된 도시인 것이다.
기원전 500년 경에 활약한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포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대는 서방 원정시 이 히에라폴리스 언덕 밑의 리쿠스 골짜기를 통과해서 사르디스, 에페소스 등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침략했다고 한다. 히에라폴리스라는 이름의 도시를 최초로 건설한 왕은 기원전 180년쯤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로서 페르가몬의 창건자 텔레포스(Telephos)의 아내 히에라(Hiera)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를 히에라폴리스라고 명명했으며, 聖市(성시)라는 의미이다. 히에라폴리스는 바로 이웃의 고대도시 라오디케아와 경쟁관계를 유지하며 급진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기원전 133년에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제국에 자진 헌납함으로써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후 티베리아 황제 시대인 AD 17년에 지진에 의해 대파되었으나 복구되어 2∼3세기경 최 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된 이 도시는 수많은 각종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어서 "신전의 전시관"이라 불릴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이 도시의 전성기는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폴리스는 기독교의 대 교구가 설치되어 기독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히에라폴리스의 주산업은 카페트 및 직조를 주로 하는 양모산업과 꽃을 기르는 원예사업이 중심이었고 특히 석공예가 상당히 활발해서 섬세한 돌 조각이 여기저기 눈에 띄이고 있다. 인근 지역에는 대리석 산지가 있어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의 얼룩 달룩한 대리석 기둥은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다. 초대 7대 교회의 하나가 인근 라오디케아에 세워졌다. 더욱이 예수의 12제 자중 한 사람이었던 사도 빌립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사도 빌립이 전교하던 장소에 순교 기념관이 있다. 6세기부터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하자 11세기까지 이 도시의 주민들은 지금의 데니즐리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하였으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셀주크(셀축)와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그 찬연했던 과거의 영광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잦은 지진, 전쟁 타 지역으로의 이주를 통하여 역사의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는 망각되고, 유명한 온천수가 뛰어난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는 하얀 목화성,즉 파묵칼레로만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곳은 1887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시작된 이래, 아직도 발굴 연구 작업중에 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동서남북으로 비교적 정확한 사각형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파피아스' 와 골로새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에바브라'가 복음 전파에 힘썼다. 요즘 이 지역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많이 홰손이 되어 통제를 하고 있으며, 여행객들을 위하여 시간을 정해 온천물을 흘러 보내고 있으므로, 신발을 벗고 미지근한 온천물에 발목을 적시며 걸어 다닐 수 가 있다.
파묵칼레에서는 백색의 칼슘으로 이루어진 석회 언덕의 물을 걷다가 오기 쉬운데, 주위에 수많은 호텔들이 있어 겨울에도 노천탕을 즐길 수 있으며, 히에라폴리스 언덕 위쪽에 빌립 사도의 순교 기념 교회, 원형극장, 박물관, 소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 등 여러 볼 곳이 많다. 또한 이 도시의 북쪽 끝에 히에라폴리스에서 7 km 거리에 초대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있었던 라오디게아가 있다.
박물관(Museum)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하며,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8시 30분에서 정오, 오후 1시 30분에서 5시까지 개관한다. 로마 시대의 조각 작품 등을 전시했다.
원형극장(The Theatre) 이 도시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보존상태가 좋은 원형극장이 으뜸으로 꼽힌다. 2세기 하드리안(Hadrian) 황제 때에 지은 원형극장은 3세기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시대에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관중석은 2층으로 되어 있고 1층에는 20줄, 2층에는 25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한 약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극장이다. 무대는 각종 신화의 내용을 한 부조나 여러가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무대 아랫단의 아폴로 신화를 주제로 한 부조는 인근 히에라폴리스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시 북쪽 끝에는 거대한 묘지군(墓地群)인 네크로폴리스가 자리 잡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줄잡아 수천개는 됨직하다. 소아시아 반도에서 가장 큰 묘역이라 한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석관형, 가옥형, 봉분형 등 무덤의 다양한 양식과 크기이다.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에 따라 그 규모와 장식이 다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여러 시대가 중첩되면서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조화로움인지도 모른다.
사도 빌립 순교 추모관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팔각형의 건물이 나오는데 이 건물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건물이다. 기독교의 역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하나인 사도 빌립은 말년에 히에라폴리스에 와서 전도를 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5세기경 그 무덤 위에 사도 빌립을 추모하기 위한 건물이 세워졌다. 직경 20m의 중앙 홀은 사도 빌립의 추모행사가 개최 된 곳이고 그 둘레에 팔각형 모양에 따라 8개의 기도실이 있다. 주변의 부속 건물은 교육관 혹은 손님 접대용 방이나 창고로 사용했다.
아폴로 신전(Apollon Temple) 고대 히에라폴리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은 Apollo신에 대한 숭배였다.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곳은 A.D.3세기경에 건축되어졌으며, 신전의 몇몇 기념물들은 헬레니즘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25 m 규모의 이 건물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악마의 굴, 플루토니움(Plutonium) 아폴로 신전의 남쪽 바로 곁에 위치한 한 사람이 겨우들어갈 정도의 지하동굴로서, 지옥의 신 Pluton이 이 동굴을 통해 독가스를 뿜어 냈다고 하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지하의 영계(靈界)인‘하데스’ 로 통하는 입구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래서 입구에 하계의 신인 플루토를 위한 신전을 짓기도 했다. 이 동굴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면 주위 2,000㎡에 달하는 지역에 독가스가 짙은 안개 형태로 번져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를 죽였다고 한다. 현지인들이‘진 델리이(악마의 굴)’로 부르는 굴은 유독가스가 품어져나와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자들이 독가스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위해 아폴로 신전의 사제들이 키우던 새나 다른 동물들을 돈을 주고사서 시험해 보는 통에 신전은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사제들은 이 독가스 동굴을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아폴로 신전의 제사장만이 가능하고, 지옥의 신 Pluton과도 만날 수 있다고 소문을 낸 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와 지옥의 신 Pluton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고, 예언을 요구할 때, 제사장이 동굴로 들어가 Pluton을 만나고 온 뒤, 그 답변을 들려주고 많은 대가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눈, 코, 입을 모두 막고, 오랫동안 숨을 쉬지않는 연습을 통해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우상숭배로 간주되어 동굴은 막혀진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노천 목욕탕(Pamukkale Thermal)
이곳 주위에 수많은 호텔들이 있는데 겨울에도 노천탕을 즐길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박물관 북쪽편에 위치한 노천 목욕탕(정식명칭 Pamukkale Motel)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하며, 서서히 수영하면서 즐길 수 있는 노천 목욕탕이다. 이 노천 목욕탕에는 파손된 고대의 대리석 기둥들이 잠겨져 있다(여행참고).
분수대 2세기경에 지어진 분수대로 앞에 큰 연못이 있다. 정면은 많은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정면의 한 가운데 움푹 파인 벽면에는 연못으로 물을 흘러보내는 큰 파이프 구멍이 있다. 이 분수대는 바로 이웃하고 있는 아폴로 신전의 부속 건물이다.
고대도시의 폐허지 1 km의 긴 도로 주변에 있는 폐허된 건물들은 로마와 비쟌틴 제국의 중요한 공공건물이었다. 그곳에 이는 3개의 문은 히에라폴리 시민들이 건축하여 도미티아누스에게 헌납한 것으로 "도미티아누스의 문(Arch of Domitian)"이라고 부른다.
로마의 목욕탕(Baths) 온천 지대의 특성을 가장 잘 이용한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로마 목욕탕으로 개선문 밖 북쪽에 3세기경에 지어졌다. 이것은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로 개조되어 사도 바울에게 바쳐졌다. 열탕, 온탕, 냉탕, 탈의실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로마식 목욕탕으로 운동을 위한 부속건물과 황제가 연회를 개최하던 대형 홀이 아직도 남아 풍요로왔던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 홀은 지금은 히에라폴리스의 모든 유물을 한 자리에 모은 현장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 온천수는 밖으로 흘러 파묵칼레의 기묘한 옥외 석회암 온천장을 형성했다. 섭씨 35도 정도의 온천수는 특히 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있다. 얼굴이 못생긴 처녀가 공주가 된다는 등, 여러 종류의 토착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피부가 거칠고,무한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젊은 여성들의 필수적인 순례지가 되었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처녀들이 자신을 정화하고 새로운 남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파묵 칼레의 온천수에 몸믈 담구는 현대적 풍속도를 연출하고 있다.
로마의 개선문(Byzantine Gate) 개선문은 3개의 통로와 2개의 둥근 탑으로 되어 있으며 그 곳에 새겨진 문자로 도미티안 황제에게 바쳐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의 아시아 총독이었던 유리우스 프론티누스에 의해 지어져기 때문에 "프론티노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200여개 석관이 있는 공동묘지(Necropolis, Cemetery) 공동묘지는 성문 밖 북쪽 문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수 천 개의 무덤은 소아시아 반도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세가지 형태의 묘가 있는데 석관의 형태는 평민들의 묘이며, 그러나 석돌집안에 선반을 만들고 그 선반위에 시신을 안치한 후 문을 닫는 묘는 대부분 부자들 묘이다. 돔 형태의 묘는 계단을 내려가면 그 안에 방이 있는데 이런 묘는 영웅들의 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소 리조트 시설이 과다할 정도로 밀집되었으며, 주말에는 예약없이 숙박 불가능하다. Polat Thermal Hotel(+90-258-271-41-10, 팩스 258-271-4092) 등. 파묵칼레 흰 절벽 위쪽에 매우 호사스러운 노천온천이 있다. Öztürk pansiyon : 나무가 많고 깨끗하며 수영장이 있다.
앗소(Assos) : 지도 마르마라 해협 참고 앗소는 에게해 북부에 있는 작은 항구로서 그 경관이 뛰어나다. 마을언덕에는 그리스 시대 유적들이 산재해 있고 마을 중심에는 작은 호텔들과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의 요새가 매우 인상적이며 정상에 B.C. 530년경에 지어진 아데나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소아시아 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도리안 건축양식의 유적이다.
아이발륵(Ayvalik) 레스보스 섬 맞은편, 해안 만에 위치한 아이발륵은 올리브 무역의 중심지인 작고 수려한 도시이다. 고대에는 KIDONAI라 불리었으며 현재의 아이발륵은 16세기에 형성되었다. 1929년 로잔 협정의 결정에 따라 마게도니아, 크레타, 레스보스 섬에 살고있는 터키-그리스인 교환에 따라 정착하게 된 터키인들로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아이발륵은 수 마일의 해변, 수 많은 고급 호텔들과 식당들로 대규모의 휴양 도시이다. 이웃하고 있는 23개의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알리베이 섬은 페리나 보슬 쉽게 갈 수 있다. 악마의 사탄으로 불리는 언덕에는 주변의 섬들과 해안, 만들의 출중한 경관을 볼 수 있으며 남쪽에는 '살름삭르'라 불리는 길고 아름다운 해안선과 호텔들이 있다.
베르가마(Bergama), 페르가몬(Pergamon), 버가모 페르가몬(Pergamum 현지명 베르가마)은 이즈미르의 90 km 북쪽에 위치하여 있으며, 구불구발하게 경사진 언덕을 올라간 정상에 세워진 도시였다. 페르가몬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페르가몬이라는 이름이 전래된 유래는 트로이 전쟁 시기로 올라간다. 전설에 의하면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불타고 파괴된 후 트로이의 왕이었던 헥토르(Hector)의 미망인 안드로마크(Andromache)는 아카이아인 들에 의해 노예로 잡혀간 후 아킬레스의 아들 네프톨레무스와 결혼한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세 아이 중 하나가 페르가몬을 건설한 페르가무스(Pergamos)이다. 그 의미는 "높은 곳" 을 의미한다. BC 560년경 리디아, BC 360년경에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아오다가, BC 334년 알렉산더대왕 때에 이르러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그가 점령한 방대한 영토는 그의 충실한 4 장군에 의해 분할 되었다. 그 중에 리시마쿠스 장군의 통치 하에 들게 되었는데 페르가몬이 천연적인 요새임을 깨달은 그는 아크로폴리스의 꼭대기에 성을 쌓도록 했다. 리시마쿠스 장군은 이곳을 군사기지로 만든 후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사령관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를 이곳의 성주로 만든 후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물려 받은 9,000 탤런트의 금화를 필레타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러나 펠레타리우스는 시리아의 왕 셀레우코스와 내통하여 그가 리시마쿠스를 공격한다면 리시마쿠스가 자신에게 맡겼던 보물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제안을 받아드린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쿠스 사이에 전쟁은 불가피해 졌고 기원전 281년 리시마쿠스는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보물을 받기 위해 찾아온 셀레우코스의 사신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 이 보물을 사용하여 페르가몬을 요새화하고 그는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며 페르가몬 왕국의 새장을 열었다. 성주 팔레타리우스는 페르가몬을 요새화하고 인근지역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 시키며 페르가몬 왕국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조카 유메네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유메네스는 공정하고 현실적인 왕이 였다. 그는 학문과 과학을 장려함으로써 그의 시대에 페르가몬은 그 분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앗탈로스 1세는 막강한 갈라티아 군대를 물리쳐 진정한 왕으로 추앙을 받았다. 유메네스 2세는 자신의 부친 밑에서 착실히 통치 수업을 받아 유능한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고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추구해 로마와의 관계를 계속 개선해 나갔다. 그의 통치기간은 페르가몬 왕국의 황금기였다. 역사가 파타아스나 철학자 메냔드로스 등이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그는 아크로폴리스를 각종 기념물 및 신전으로 치장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이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유메네스 2세의 뒤를 이은 왕은 앗탈로스 2세이다. 그는 유메네스가 원정을 나갈 때마다 정사를 돌보았으므로 정치적 경험이 풍부했다. 그는 정사뿐 아니라 군사 지식도 탁월해 모든 페르가몬 인들은 그를 초인간적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시기는 이미 강성해진 로마의 내정 간섭과 주변국가 왕의 이간질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앗탈로스 2세의 치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페소수 항구의 복구 작업이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오늘날의 안탈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의 조카 앗탈로스 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보다는 동. 식물학 등의 학문을 더 좋아했으며 정사를 그의 재상에게 맡기고 연구에 열중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방대한 국가를 로마제국에 헌납하므로서 페르가몬 왕국은 종식된다. 로마시대를 맞이한 페르가몬은 역시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잃지 않았다. 로마제국은 페르가몬을 아시아 지역의 수도로 삼았고, 트라얀 신전과 세라피스 신전등 큰 건물을 세웠다. 또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의료기관을 현대화 함으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이 되게 하였다. 그 곳에서 일했던 유명한 갈렌 의사는 500여권이 넘는 의학 서적을 남겼다. 비잔틴 제국에 들어와서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 함으로서 페르가몬도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된다. 즉 사도 요한의 요한계시록 속에 소아시아 7대 교회중의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 페르가몬도 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3세기경 데시우스 황제는 3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게 하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비잔틴 말기에 이르러 차츰 지진으로 황폐하게 되고 게다가 7-8세기에는 아랍인들의 침략으로 쇠퇴하게 되어 조그마한 촌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페르가몬의 찬란한 유적들은 수 백년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땅속에 잠들고 있었다. 1878년 어느날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잇는 철도공사를 감독하던 독일의 토목기사 칼 휴만이 한 농부가 자신의 마차 뒤에 대리석에 부조 된 한 유물의 파편을 싣고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을 얻어 베르린의 고고학자에 보내어 고대 페르가몬의 유물임이 판명되면서부터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이 발굴된 유물들을 실어 나르자 주민들은 왜 쓸모없는 저런 돌들을 애써 가져 가려 할까 할 정도로 유적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페르가몬이 오늘날의 '베르가마'라는 이름으로 변경된 것은 터키민족의 정착 이후였다. 성서상에서는 버가모이며, 요한계시록 2: 12-17에 언급되어 있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 해발 약 300m 높이에 경사가 심한 산 꼭대기에 탑처럼 우뚝 솟아 있어서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필레타리우스 시대부터 지어진 성곽이 지진으로 무너진 채 남아 있다. 그리스 시대 이전에는 아크로폴리스 내에 있던 자체의 우물로 물이 해결되었으나 주민이 늘어나자 북쪽으로 44 km 떨어진 마드라(Madra) 산의 우물에서 이곳까지 물을 끌어드렸다. 이 수로에 사용된 수로관은 진흙으로 구워진 토관으로서 길이 50∼75 cm, 지름 16∼19 cm 의 토관 20만개가 사용 되었다고 하며 초당 45리터의 물을 쏟아 붓게 했다고 한다. 이 배수지에서 다시 이보다 작은 아연관을 통해 아크로폴리스의 각 지역에 공급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에 당시에 물을 끓어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수로의 일부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아테네신전, 트라야누스신전, 제우스신전, 도서관등이 있다.
성곽 성벽은 과거의 지진으로 일부 무너진 채로 남아있는데 잘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부분은 B.C 4세기부터의 것이고, 큰 부분은 유메네스 2세가 더 높이 쌓아 올린 것이다.
헤론 그리스 시대에는 그 시대의 뛰어난 영웅들이 죽은 후 마치 신들처럼 신격화되어 숭배되었다. 이들 영웅들을 숭배하고 제사 드리기 위해 지어진 헤론이라고 불렀다. 페르가몬의 헤론은 앗탈로스 1세와 유메네스 2세를 숭배하기 위하여 지은 것인데 현재는 그 일부 벽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시장 제우스 제단의 바로 남쪽 아래부분에 소위 아고라는 시장터가 L자형으로 위치해 있으며, 그 둘레는 도리아 및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테네 신전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도서관 아테나 신전의 북쪽면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유메네스 2세에 의해 세워진 이 도서관은 모두4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큰 방은 13m X 16m 크기를 갖고있다. 이방은 독서실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지금도 나무선반을 고정 시켜 놓았던 구멍이 이 벽에 남아있다. 고대에 지어진 다른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이중 벽으로 되어있어서 습기나 벌레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다. 이 방에는 약 20만 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도서관이었다. 이집트로부터 파피루스를 수입하여 썼는데, 유메네스 2세의 도서관에 대한 큰 관심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이집트가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했다. 그래서 페르가몬 사람들은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고안해 책을 만들었다. 영어의 "parchment(양피지)"라는 단어의 어원도 "pergamon" 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트라얀 신전 로마시대에 아시아의 각 도시는 황제의 신전을 건축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해서 이 특권을 따내기 위해 갖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페르가몬 주민들은 트라얀 황제의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전망이 좋고, 산 밑의 평원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하얀 대리석으로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했다.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원형 극장 페르가몬은 여러 시대에 걸쳐 3개의 극장이 세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크로폴리스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건축되고 로마시대에 개축된 이 극장은 아래에서 위 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다. 약 1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극장의 관중석은 3단으로 되어있고, 2번째 하단에는 황제의 자리가 대리석으로 치장되어있다. 극장의 무대 앞에는 얄 250m 길이의 열주랑이 늘어서 있는데 이 주랑의 북쪽 끝에 디오이소스 신전이 보인다.
디오니소스 신전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제우스 제단 약 70 m × 77 m 크기의 연단 위에 세워져 있던 이 건물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유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제단은 페르가몬 왕국의 전성기였던 유메네스 2세 시대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곳의 유적은 독일로 옮겨져 동 베들린 박물관에 복원되어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빈 터만 남아있다. 말 발굽의 모양을 하고있는 이 제단은 가로 세로의 길이가 36.44m X 34.21m 로 되어 있고, 서쪽으로 향한 정면의 제단은 21개의 층으로 되어있다. 이 제단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제단의 벽면을 장식한 부조로서 그리스의 각종 신화의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세라피스 신전(Serapis) - 버가모교회 베르가마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신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 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아스클레피온(Asklepieon) 베르가마 시내 입구에 있는 아스클레피온은 자연요법과 정신요법이 주를 이루고 있는 종합병원으로, 세계 최초로 기원전 4세기경에 지어졌다고 하나,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의 시대의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 기관이었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었던 로마의 극장에서부터 이곳 까지 길이 800 m, 폭 18.14 m의 대로가 나 있으며, 길 양쪽으로 마치 가로수와 같이 15 m 높이의 석주가 세워져 있다. 1967년 발굴된 이 길의 아스클레피온쪽 400 m는 하드리안 황제 시기에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길로 장식 되었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의료 기관인 현관 건물에 해당하는 프로필론이 나온다. 이 프로필론을 통해 아스클레피온 안으로 들어서면서 넓은 정원이 나온다. 정원 및 정원 주변에 여러가지 시설물 등이 세워졌다. 아스클레피온에 대한 전체적인 것은 다음의 지도를 참고 바란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몬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프로필론의 바로 북쪽에 지금도 벽면에 책 선반을 고정 시켜 놓았던 자국이 남아있다. 정원 북쪽 주랑은 최근 복원되어 잘 보존 되고있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있는 황제실 쪽의 약 10개의 기둥은 175년의 대 지진으로 붕괴 된 후 나중에 다시 세워졌다. 기둥의 서쪽 끝에는 연극과 음악회가 공연되었던 소극장이 있는데, 3,5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화자들에게 삶의 욕구를 불어 넣어주는 연극이나 음악회 공연은 정신 요법을 이용한 당시의 좋은 치료법이기도 했다. 아스클레피온의 치료 방법은 자연요법과 정신요법이 주를 이루고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 치료법을 자세히 전하고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으로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우선 맨 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부터가 치료의 시작이다. 환자들은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 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생각에 젖게 되고, 일단 아스크레피온 안에 들어오면 하데스 신이 침범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이들이 수속을 마치고 제일 먼저 행하는 것은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서의 목욕이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는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이 외에도 진흙 목욕을 병행하기도 했다. 목욕이 끝나면 그들은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간다. 80m 길이의 지하 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오면서 작은 소리를 내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장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환자들이 도착하는 곳은 둥근 건축물로 되어있는 치료실이다. 이 치료실은 2층으로 되어 있었다. 환자들은 잠자기 전에 반드시 신에게 기도드릴 것을 의사로부터 권유를 받고, 잠이 깬 후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유도하여 해몽해 주기가지 한다. 치료실의 남쪽 문으로 난 테라스는 환자들의 일광욕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치료실의 바로 북쪽에는 이 아스클레피온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던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었다. 아스클레피온은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기관이었다.그 유명한 아리우스 아리스티데스도 이곳에서 약 13년간을 머물며 치료를 받았으며 로마의 황제들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티로스, 갈레누스와 같은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이지미르(Izmir)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터키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며 이스탄불에 이어 2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이즈미르는 에게해 연안의 천혜의 요충지에 위치하고있어서 터키의 모든 수출입 물자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며 산업과 경제의 도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국제아트 페스티발(6월7일)과 국제 이즈미르 페스티발(8월9일)개최 기간 중 이즈미르의 활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온화한 기후, 상쾌한 갯바람, 해안가의 야자수 산책로를 느낄 수 있다.
역사 고대의 이즈미르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바이라클러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전 3000년 경 전반에 이미 이 바이락클러 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고고학적 발굴은 증명하고 있다. 터키 중 서부 지역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던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은 밖으로부터 도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그리스를 ?i겨 난 후 이 도시를 점령 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의 한 부족에서 또 한 부족으로 주인이 바뀐 사건은 기원전 800년경에 발생했으며, 바로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장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이즈미르에서 태어나 활약했다. 알랙산더는 피구스 산 기슭에 성벽을 쌓고 새 도시를 건설했다. 그 후 이즈미르는 페르가몬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로마제국의 아시아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즈미르는 비잔틴, 셀추크, 오스만 터키의 역사적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계속 번성하였다. 한 때 역사적 수난이나 자연적 재난도 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지 못했다. 비잔틴은 도시 곳곳에 기독교 유적을 남겨 놓았으나 아랍 및 터키인들의 침략으로 유적은 거의 사라지고 이슬람 유적들이 대신 자리를 잡게 되었다.
코낙 광장 옆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는 고대 아고라에 서 있던 포세이돈과 데미테르상 등 고대 최대의 소장품이 있음. 고고학 박물관과 근접한 곳에 있는 민족지학 박물관에는 베르가마와 괴르데스 카펫, 민족 의상과 낙타의 고삐 등 민족 공예 수집품. 아타튀르크 거리(Atatürk Caddesu)에 위치한 오래된 이즈미르 가옥은 아타튀르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 집의 주인이기도 했던 아타튀르크와 관련된 사진 전시. 코낙에 있는 미술관에는 터키가 나은 유명 화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줌브리예트에 있는 사립 셀축 아샤르 미술관에는 20세기 터키 미술의 골동품이 있다. 바이라클르 : 카디페칼레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대에 리시마쿠스가 세운 성과 성벽
카디페칼레 이즈미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피구스 산에 오늘날 카디페 칼레라 불리는 성이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 성벽 중 일부는 알렉산더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그 후 비잔틴, 오스만 터키 등이 보수 증축하여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시장터 성벽에서 북서쪽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소위 '나마즈가흐'라고 불리는 지역에 고대 로마의 시장터였던 아고라가 나온다.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이 아고라는 일부 재건 되었는데, 상점 앞에 늘어섰던 열주랑이 남아있다. 한편 시장터에는 대리석으로 된 3개의 신상, 즉 앉아있는 모습의 포세이돈 신, 서 있는 모습의 테메테르 여신과 아프테키스 신상이 있다. 이들 신상은 아마도 당시의 시장터 안에 있던 제단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큘트르 공원 1922년 이 도시는 그리스에 의해 불탔는데, 현재 큘투르 공원은 그 당시 불이 났던 한 부분에 세워졌다. 이 공원의 면적은 48헥트아르이며 매 해 이곳에서 무역 박람회가 열린다. 이 도시의 중심지로는 코낙 광장인데, 1901년에 세운 모리쉬 스타일의 아름다운 시계탑이 서 있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에는 조그많고 그림과도 같은 코낙 모스크가 1756년 이래로 서 있다. 광장의 북서쪽에는 공화국 광장이 있고 그 중심지에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공화국 광장으로부터 항구까지 수 많은 음식점과 가게 등을 낀 산책길이 있는데, 노천 카페에 앉아 있는 연인들로 이곳의 매력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해 준다. 이 연안 북쪽으로는 페리호를 타고 갈 수 있는 '카르시야'가 있다. 세인트 폴리카르프 교회 유적 : 이즈미르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교회 크즈라르아스 한 : 18세기 오스만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18세기의 건축 특징 사아트 쿠레시(시계탑) : 도시 중심인 코낙 광장에 있으며, 이즈미르의 상징 다리오 모레노거리 : 주요 산책로로서, 19세기의 엘리베이터인 아산쇠루가 있다. 케메랄트 하브라 거리 : 오래된 건물과 유대교회당 쥼브리예트 메이다느(Cumhuriyet Meydan?; 공화국 광장) : 아타튀르크 동상 히사르 모스크(Hisar Mosque) : 이즈미르 최대 최고의 모스크 사렙치오르 모스크(20세기)와 사드르반 모스크(17세기, 19세기에 복원), 케메랄트 모스크 : 지역 주변에 있음
예술, 문화, 쇼핑 케메랄트 마켓(Kemeralt? Market) : 매력적인 골동품, 최고급 물건 등, 다양한 액세서리, 양복, 이즈미르 명물인 말린 무화과와 포도 등. 근대적이고 고급스러운 가게 : 알산자크의 코르돈 프롬나드와 카르셔야카 거리, 줌후리예트 거리
이지미르 주변 발초바(Balçova) : 이즈미르 남서쪽으로 체쉬메(Çe?me)로 향하는 도로(D300)에 위치. 터키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갖춰진 온천 챠말트(Çamaltı) : 이지미르 서쪽으로 카르샤카(Karşiyaka)의 15 km 서쪽에 위치. 해안가의 바닷물이 들어오는 습지로 조류에게 있어 중요한 성역- 이즈미르 새의 천국으로 보호됨 케말파샤(Kemallpaşa), 카라벨(Karabel) 패스 : 이즈미르에서 동쪽으로 아름다운 카라괼호 옆의 송림. 피크닉 최적지. 레스토랑과 수영장 있음. 케말파샤에 있는 카라벨 패스(이즈미르에서 20km) 바위에는 히타이트인에 새겨놓은 조각. 벨카베에서 이즈미르만를 전망하고, 터키 커피를 마심. 벨카베 독립하여 독자적 사회를 형성한 일곱교회 : 요하네의 묵시록에 기록됨. 이즈미르(스미르나; Izmir Smyrna), 에페스(에페소스; Efes, Ephesus), 에스키 히사르(라오디케아; Eskihisar, Laodicea),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 Ala?ehir, Philadelphia), 사르트(살디스; Sart, Sardis), 아크히사르(티야디라; Akhisar, Thyatira), 베르가마(페르가몬; Bergama, Pergamum)에는 일부, 혹은 모든 교회를 1일 내지 4일간 순회하는 투어 있다. 체쉬메(Çeşme) 반도 : 이즈미르의 서쪽에서 에게해의 파도를 막아주는 곳. 체슈메는 분수라는 의미로 18세기 부터 19세기에 걸쳐 이 지역에서 많은 샘물이 발견된 것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 자연이 손상되지 않은채 보존된 모래 사장과 수영. 관광객을 위한 숙박 시설과 레스토랑, 그리고 스포츠 시설과 오락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음. 여름이 되면 매년 국제 가요 콘테스트가 개최됨. 주 1회 체슈메와 베니스항을 잇는 페리가 운행되고 있음. 우르자의 볼거리는 하얀 모래사장과 알튼유누스 마리나와 바캉스 종합 센터. 우르자 해변은 수상 스포츠 특히 윈드 서핑과 요트에 최적. 우르자 주변에는 수 많은 온천이 있으며, 쉬프네 해변의 온천이 유명. 파샤 리마누에는 쾌적한 시설을 갖춘 캠프장이 있음. 우르자 해변에서는 매년 7월에 형형색색의 요트가 모여 국제 챠카베이 옵티미스트 요트대회가 개최 됨. 에리티라이시울두르 : 체쉬메에서 북으로 20 km에 위치. 조용한 해변도시. 달리안 : 활기 있는 마리나부두에서 맛있는 생선 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 치프트릭에는 다양하고 많은 숙박시설 도시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향하면 바로 길다란 모래사장(플란타 플라쥬)이 있음. 남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캠프장이 있고, 캠프장 옆에는 이 지역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알튼쿰 팔라쥬(황금 해변) 알라챠트(Alaçaı) : 우르자처럼 해안에서 내륙부로 들어간 남쪽에 위치. 언덕에는 풍차가 점재 카라부룬 반도 : 해안선을 따라 차로 달리면 바루크오바와 모르도안(Mordo?an) 이라 불리우는 조용한 해변과 정취 있는 어촌을 지나게 됨. 카라부른 : 아늑하게 지낼 수 있는 호텔과 티 가든, 레스토랑이 즐비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꼬불꼬불 구부러진 길은 아흐메트 베일리에서 남쪽으로 팜작 해변까지 계속 이어져 있음.
에게해 내륙부 에게해에서 내륙쪽으로 들어가면 초기 문명을 지탱해 온 비옥한 토양이 펼쳐짐, 온천 휴양지 마니사(Manisa) : 대표적인 섹축호와 오스만 제국의 건축물 보존. 포도 수확이 시작되는 8월에는 매년 수확제 개최 시필다 국립공원(Sipil Dağı Nat. Park) : 도시 남쪽에 있으며, 유명한 눈물 흘리는 이오페의 동상이 있음. 괴르데스 : 북쪽에 위치하며 양탄자 생산지 보즈산 : 사르데스 남쪽에 있으며, 하이킹과 등산. 우샤크(Uşak) : 이즈미르에서 E96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225 km에 위치. 양탄자 산지의 중심지, 카프탄즈 하우스 박물관과 아타튀르크의 집을 사용한 아타튀르크 민족 박물관 아푠(Afyon) : 우샤크에서 100 km 동쪽으로서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당당한 모습의 요새가 한적하게 아푠시를 내려다 봄. 아푠에서 남쪽으로 100 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디나르(Dinar)시에서 북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아츠크 하바(Aç?k Hava) 박물관(야외 박물관)이 있음. 큐타햐(Kütahya) : Afyon에서 D650으로 88 km 북쪽에 위치. 터키에서도 유수의 오랜 역사를 갖인 도시. 차브다르 히사르(아에자니; Aezanai) : 큐타햐 남동쪽에 위치하며, 극장과 스타디움, 제우스 신전이 남아 있는 로마의 도시. 무라트산 : 쾌적한 풍경 속에 캠프장과 온천이 있고, 둠루프나르 근처에는 바쉬코무탄 국립공원과 독립전쟁의 기념비가 있다.
지도 : Sekcuk, Ephesus, Kusadasi, Aydin, Prene, Miletus, Assessos, Bodrum, Kos Island, Datca Datca
셀축에서 에페스까지는 약 30분거리로 마을 버스가 자주 운행한다. 단, 쉬린제에서 셀축으로 오는 버스는 저녁 8시가 마지막이니 주의해야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이나 성요한 교회를 가기 위해선 택시나 마차를 타거나 걷는다. 그러나 여름에 햇볕아래서 4 km를 걷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마차 보통 5명이 타면 2,000원정도로 흥정을 할 수 있다. 고대도시 에페스(에베소)는 너무도 유명하다. 지중해를 돌아다니던 배들이 이곳에 도착해 짐을 부렸던, 또 짐을 싣고, 로마로, 알렉산드리아로, 안타키아(안디옥)로 떠났던 소아시아의 수도 에페스는 항구였으나, 지금은 바다가 수 km가 물러나 있는 내륙도시로 변해버렸다. 에페스는 전설까지 포함하여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소아시아(소아시아 7대 교회 참고)의 수도였으며, 터키 땅에 있는 2개의 세계 칠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였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이고, 또한 기독교의 성지로 사도 바울이 오랜동안 머물렀고, 사도 요한이 숨을 거뒀고, 성모마리아가 살았다고 하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이기도 한 에페스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잘 보존된 에페스를 볼 수 있게 된 것은 멘데레스강의 덕분이다. 멘데레스강이 부지런히 흙을 날러서 항구의 바닥을 메웠고, 덕분에 항구는 낮아진 수심 때문에 배가 들어올 수 없었고, 항구의 기능을 잃은 에페스는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게되었다. 사람들이 떠난 에페스는 오랜 세월동안의 퇴적작용에 그 모습을 감추어졌고, 이제야 세상 사람들에게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룹으로 여행을 한다면 산 위쪽의 누가의 무덤이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탐색을 시작하고, 배낭여행을 한다면 부득이 아랫쪽 입구에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윗쪽 입구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에 띄이는 건축물중의 하나가 바로 오데온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형극장으로 착각하는 오데온은 다름아닌 실내극장이다. 오데온의 규모만 보아도 당시 에페스의 규모가 짐작이 될 것이다. 온통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도로를 따라서 윗쪽부터 순서대로 옛 에페스의 시청건물, 도미티안 황제의 신전, 헤라클라스의 문, 공중목욕탕, 트라이안 황제의 님파니움(분수, 샘터), 화장실, 유곽, 에페스의 빌라를 지나면 정말 아름다운 건물에 도착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도서관 건물이다. 당시 세계에서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 다음으로 컸다는 세계 3번째의 도서관이었다. 한국에는 기독교 성지순례에서 두란노 서원으로 소개하는 곳이다. 그러나 사고 바울이 이곳에 왔을 때는 이 건물이 없었고, 사도 바울이 죽고 몇십년 후에 지어진 셀수스 도서관으로 알려졌으므로 두란노 서원 같지는 않다. 대리석 도로를 따라서 길을 계속가면 터키에서 가장 큰 반원형 극장에 도착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이탈리아의 폼페이를 방문한 사람은 에페스를 폼페이와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 데, 에페스는 폼페이보다도 무려 10 배 이상은 크다. 당시 인구를 두고 말하는 것인데 에페스의 인구는 25만이 넘었다고 한다. 에페스를 둘러보는 데는 빠른 걸음으로 아무런 관심없는 사람이 둘러보아도 한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되신다면 오후에 쉬린제 마을에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류 문화유산 중 가장 화려한 도시" Ephesus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사료는 기원전 13세기경 Hittite(힛타이트, 성경에 햇족) 비문에서 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이다. 그러나 역사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리디아(Lydia)왕국의 크로수스(Croesus)왕이 이 도시를 기원전 560년에 처음으로 침략하면서이다. 그 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의 각축장으로 변해 때로는 파괴되고, 때로는 융성하면서 영고성쇠를 거듭했다. 즉,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유명한 델로스(Delos)동맹이나, 그리이스의 도시국가와 페르시아 간의 펠레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도 이 시기에 에페스가 위치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의 에페스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평온을 되찾고 융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그의 장군 중에 한 사람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이곳을 지배하면서 피온산 기슭에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바로 이 시대 때부터의 유적이다. 그 후 로마가 지배하면서 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Pergamum)에서 에페스로 옮기고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 나갔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트스 황제)와 대치하던 중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기원 후 1세기에 에페스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은 그의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시 이곳을 방문하여 선교를 벌이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스에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 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하여 에페소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페르가몬, 이즈미르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당했으나, 황제 도미티안이 피살 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비진틴 제국시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 들어와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으로 떨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잦은 지진과 이 지역을 흐르는 멘델레스강의 범람으로 지각 변동에 의해 오늘날 바다는 이곳에서 5 km 떨어진 쿠샤다스 지역까지 밀려나가 오늘날은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동부 체육관 초기 그리스 시대의 체육관이며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기관인 합숙 훈련원이다.
에페소(Ephesus)
매표소 입구를 들어서면 아래 사진과 같이 큰 도로가 나온다. 아래의 요약지도에서 Basilica가 있고, 도로 남측에 시장터(Agora)와 이시스 신전, 그 아래에 도미티안 신전(Domitian Temple) 등이 있고, 도로 북측에 오데온 극장(Odeon)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것이 셀수수 도서관(Celsus Library)이며, 이의 북측에 대극장이 있고, 극장 못미쳐 서쪽으로 항구 도로(Habour Street)가 항구와 연결되었었다.
에페소는 생각보다 넓으므로 위의 요약 지도를 참고로 관광하면 이해에 훨씬 도움을 줄 것이다.(사진을 클릭하여 확대하여 볼 것)
바리우스 목욕탕(Varium Baths) 발굴된 비문에 의하면 이 목욕탕은 플라비우스와 그의 아내가 비용을 부담해 지은 것이라 하는데 다른 목욕탕과 마찬가지로 냉탕, 온탕, 열탕 및 풀장과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다.
아고라(Agora) 시장터 아고라는 시장을 뜻한다. 대극장으로 가는 대리석 도로의 서쪽에 위치한 아고라(Lower Agora)는 네로 황제 시대에 건축된 것으로 아직도 발굴중이다. 이곳에서 3개의 문이 있다. 오데온 극장 건너편에 있는 아고라(Upper Agora)는 사방이 가로 세로 110 m로서 기원전 3세기 경에 설치된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아고라는 두 줄의 화랑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뒤에 상점들이 줄서 있어서 청동, 구리제품, 등잔을 비롯한 많은 도자기 제품, 포도주, 꿀, 고기, 비단, 보석 등이 거래되었다. 그 때 당시의 모든 여성들은 이곳에 꼭 한번 오고자 했다고 한다. 다른 시장터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시장의 한 가운데에 신전이 위치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처음에는 이집트의 이시스 신전(Isis Temple)이 있다. 로마시대에 아고라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사람들은 밭에서 입는 옷을 입고 아고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아고라의 기념문은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아고라는 기둥과 둥근 지붕형 구조로 만들어진 대단히 인상적인 곳이다.
세라피스(Serapis)신전 시장터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신전은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를 숭배하던 신전으로 2세기에 로마의 안토니우스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에페스가 항구도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밀접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데온(Odeion) 소극장 오데온(Odeion)은 2세기에 세워진 음악당으로 극장과 같은 형태로 소극장이라고 도한다. 에베소의 정치 조직은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Boule)라고 불리는 원로원(상원에 해당하며 300명으로 구성)으로 바로 이 소극장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Demos) 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모든 에베소인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들은 대원형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 소극장은 콘서트 등 문화적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는데 총 1,400명을 수용하였다. 가장 낮은 부분인 오케스트라의 중앙에 빗물을 받는 홈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지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 전용이었다. 맨 꼭대기의 대리석 좌석은 현재 없어졌지만, 아래 쪽의 좌석들은 잘 보존되어 있다. 계단 옆 부분에 새겨진 그리핀(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의 발 모양은 오데온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오데온 옆에는 기원전 3세기 아우구스투스 통치때 세워진 시청 건물인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신성한 지역에는 영원히 꺼지면 안되는 성화가 타고 있었으며, 이 불은 크레테스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에 의해 꺼지지 않게 잘 관리가 되었다.
프리타니움(Prytaneium, Council) 로마제국시대에 에페스는 "자유도시(Civitas libera)" 였다. 즉 도시의 행정과 관련된 모든 공직은 명예직이었다. 따라서 도시의 중요한 축제나 행사에 드는 경비나 공공 건물의 건축 및 보수에 소요되는 경비는 시민들이 스스로 담당했다. 그들은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고, 이것을 기리기 위한 희사자들의 동상과 비문이 시장터나 주요 도로변에 세워진 것이다. 도시에서 종교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는 프리탄(Prytan) 직위였다. 프리탄의 주요 임무는 프리타니움에 위치해 있던 도시의 성화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었다. 프리탄들의 또 하나 중요한 임무는 도시 내에 있는 성소를 감독하는 일이며 일상의 제물로 쓰이는 동물을 공급하는 것인데, 이 경비도 프리탄 스스로 부담했다. 이 지역은 시정과 종교를 통치하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헤라클레스(Heracles) 문 헤라클레스 게이트는 대리석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물을 따서 지었다. 쿠레테스(크레테스) 도로가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이 기념 문은 2층의 구조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있는 두개의 기둥에는 Nemea,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Heracles의 모습이 부조 되어 있어서 이 문을 헤라클레스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네미아 골짜기에 사는 사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이 사자를 죽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12가지 어려운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이 문은 귀족과 평민의 경계선이 되었다.
쿠레테스 도로(Curetes Street)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테스는 반산반인의 인물이였으나 나중에 에페소스에서 크레테스 하면 아프테미스 신전의 업무에 종사하는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 승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의 양편은 기둥으로 이어진 화랑이 있었고 이 회랑 뒤로는 가게 및 개인 주택들이 있었다. 또한 기둥 앞에는 에페소스의 유공자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동상의 받침대 중 어떤 것은 동상의 인물을 설명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기도 한데, 그들 중 하나가 유명한 물리학자 알렉산드로스다.
쿠레테스(Curetes) 그리스 신화에 원래 구레테스는 반신반인의 인물이었다. 레토(Leto)가 제우스의 아이를 잉태하여 쌍둥이로 아폴로(Apollo)와 아르테미스(Artemis)를 낳을 때, 레토를 시샘하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구레테스들은 그들의 무기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어 레토가 해산할 때 지르는 소리가 안 들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에페스에서 구레테스하면 아르테미스 신전의 업무에 종사하는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승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의 양편에는 기둥으로 이어진 회랑이 있고, 이 회랑 뒤로 가게 및 개인 주택들이 있었다. 이 기둥중의 하나가 유명한 물리학자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비문이 새겨져 있다.
도미티안 신전(Domitian Temple)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페스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파트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요한은 그가 암살 당한 후 요한은 에페소로 돌아 올수 있었다. 이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굴된 도미티안 황제의 조각상이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에페스가 Neokoros 얻을 수 있었던 시대 1. Domitian 황제(81-96), 2. Hadrian 황제(128), 3. Elagabalus 황제(218-222), 4. Valerian 황제(251-260)
트라이안 우물(Trajan Fountain) 쿠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 목욕탕 3층으로 되어있는 이 건물은 에페소스에서 큰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1세기에 지어져 4세기 말까지 계속 수리되면서 변형되어온 이 건물은 400년에 이 목욕탕의 수리를 담당한 기독교인 스콜라티스티카(Skolatistika)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이 목욕을 즐겼으며, 목욕탕은 로마제국 시대에 있어서는 문화생활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크레테스 도로를 보면 옛날 그때 당시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폴로 우물(Pollio Fountain)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이 우물은 기원전 80년에 지어진 것이다. 우물에는 호머의 잘품 오딧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주제로 한 조상들이 조각되어있다. 현재 이것은 에페소스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팔각정 에페소스에서는 신전에 돈을 희사한 사람이나 공공 건물의 유지를 위해 돈을 희사한 사람, 각종 대회 경비를 희사한 사람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동상을 주요 도로변이나 시장터 등지에 건축했다. 또한 이들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비문으로 새겨 바로 이 팔각정에 보관하기도 했다.
하드리안 신전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랑을 갖춘 주택가 하드리안 신전 맞은편 불불산 기슭의 중사면에는 에페소스의 귀족들이 살았던 주택가가 있다. 이 주택들의 대부분은 가운데 화랑으로 둘러 쌓인 정원이 있고 그 둘레에 180X180의 크기의 모양으로 바이 지어져 있다. 주택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어있고 벽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재 쿠레토스 도로에 2채만이 복원되어 공개되고 있는데 이는 상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공중 화장실 하드리안 신전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공중화장실은 구멍을 낸 대리석 판으로 50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사용하던 개방적인 화장실이다. 화장실의 바닥은 모자이크가 깔려있고, 스콜라티스티카 목욕탕으로부터 나온 물이 씻어 내려가게 위생적으로 고안되어 있다. 좌석 정면에 있는 수로는 깨끗한 물이 흘러 용변을 본 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아마도 용변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셀수스(Celsus) 도서관 셀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서(사진 참고),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 아시아주의 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게 되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해 이 도서관을 건축하여 125년에 완성하였다. 도서관의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는데 지혜, 행운, 지식 그리고 선행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4명의 여성들의 석상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에 소장되어 있던 수 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호하게 했다. 그러나 262년 코트족 침략 때 모두 소실되었다.
항구도로(Harbour Street), 아카디안 도로(Arcadian Street) 과거에 항구로 가기 위한 거리로서 항구 거리(아르카디안, Arcadian)라고 하며, Arcadian 황제(395~408 A.D.)가 개축한 것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아크카디안 이라고도 부른다. 도로의 폭은 21 m, 길이는 530 m이다. 중앙부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었으며, 폭은 11 m 이며, 양쪽에 높이 5 m의 기둥들이 서 있다. 이들은 야간 조명을 위하여 양초 같은 것으로 거리를 조명했다고 한다. 양쪽 인도길에는 모자이크로 되어 있었고 도로 주위에는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로는 항구까지 바로 연결이 되어 있어 가장 화려하고 활발한 곳이다. 이 도로는 바다 쪽에서 오는 통로가 되어 에페소스를 방문하는 황제, 총독 및 각종 고위 귀족들은 제일 먼저 환영식을 이 도로상에서 받았다. 북쪽 방향에 대 원형극장이 있고, 여기서 부터 대리석 도로가 시작된다.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잇는 이 도로는 크고 고른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대리석 도로라 불리 운다. 네로 황제 시대에 2m 높이 둑을 쌓아 회랑을 만들었다. 원래 이 회랑의 벽에 이용되었던 돌에는 철이나 아연으로 된 쇠를 박아 연결시켰는데 비잔틴 제국시대에 에베소가 경제적으로 허약해 졌을 때 이 쇠를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 파인 구멍이 흉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그 유명한 창녀촌 광고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리석 도로(Marble Road) 대극장과 셀수스 도서관을 잇는 이 도로는 크고 고른 대리석이 깔려 있어서 대리석 도로라 불리 운다. 네로 황제 시대에 2m 높이 둑을 쌓아 회랑을 만들었다. 원래 이 회랑의 벽에 이용되던 벽돌은 철이나 아연으로 된 꺽쇠를 박아 연결시켰는데 비잔틴 제국시대에 에페스가 경제적으로 허약해 졌을 때 이 꺽쇠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모두 제거되어 지금도 그 파인 구멍이 흉하게 남아있다.
창녀촌(Brothel)
대리석 도로에 유곽으로 가는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사진과 같이 한 여인의 얼굴 모습과 왼발이 그려져 있는데, 이 발바닥 보다 작은 사람은 출입금지를 나타냈다고 한다. 그리고 하트 모양의 그림과 아코로디아(나를 따라오세요)라는 문자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구멍(돈을 가져오세요)을 뚫어 놓았다.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 창녀 촌을 광고하는 모습이다. 다수의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있는 이곳은 정원을 둘러싸고 그룹 지어져 있다. 그 당시 모든 방은 벽감 위에 놓여진 촛불로 불을 밝혔으며 이 건물의 바닥에는 4계절을 알리는 모자이크 등 많은 모자이크들이 남아있다.
대극장(Theatre)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사진 참고). 따라서 로마-그리스 타입으로 무척 아름다운 극장의 표본이 되겠다. 고대 극장이 모두 그러하듯이 3부분으로 되어있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4개의 기념상 아르카디우스 도로의 중간 부분에는 보다 높은 4개의 열주랑이 있었는데 그 열주랑 위에는 4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동상이 서 있었다. 지금은 단지 주랑 만을 볼 수 있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 패키지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볼 수 없는 곳이다. 1929년 셀추크 도시의 중심부에 설립되어졌으며, 1964년과 1976년에 확장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어, 에페소스의 역사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로마인들의 집, 폴리오, 트라얀의 우물, 악세사리, 무덤 속의 유물, 세라믹, 유리, 키벨레의 부조, 석비 등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의 것들이다. 아르테미스 관은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하다.이 곳에는 2개의 아르테미스 상이 양 옆으로 서 있는데 프리티네이온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중 큰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것을 복제한 조상으로서 머리에는 세 줄의 폴로를 싣고있다. 검투사 경기를 소개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데 무척 재미있다. 점심시간에는 휴관이므로 그 때를 피하길 바란다.
숙소 식사 에페스에는 팬션, 호텔이 많은 데 버스로 에페스에 도착한 사람들을 호객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깨끗하고, 친절한, 아주 한국사람들에게 우호적인 팬션은 박물관의 뒤쪽에 있다. 호주에서온 마크가 운영하는 아웃백, 바름과 호메로스 등을 추천할만 하다. 그들에게 부탁하면 각종 서비스를 거의 원가나 무료로 해줄 것이다. 아침 식사도 아주 좋다. 커미션을 받는 사람들의 잔재주에 많은 피해를 보기는 하지만 나름데로 질로 승부하는 프로 근성이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 카라한 펜션은 한국인의 새로운 집결지로 떠오르고 있다. 닉네임이 일자눈썹 알리인 집주인 아들이 보통 오토가르에 마중 나온다. 집주인들이 모두 친절하고, 방도 깨끗하다. 부엌도 쓸 수 있더. 그리고 모든 차이는 서비스로 제공되며, 더블룸은 1인당 7,000원. 점심식사 장소는 터키말로 예디 우유얀라르(일곱명의 잠자는 사람들 무덤)의 바로 앞에 있는 괴즈레메 식당이 있다. 터키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이곳은 외국인 보다는 터키인들이 더 붐빈다. 아웃백의 주인 마크가 하는 말인즉 "터키 사람이 많이 가는 곳이 정말 좋은 곳이야". 교즈레메는 한국의 빈대떡과 같은 음식인데, 안에 치즈, 갈은 쇠고기, 꿀등을 넣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역시 천막아래의 바닥에 앉아서 먹는 옜날 터키풍의 분위기도 좋다. 셀축의 멜틈 팬션 : 깨끗하고 친절하다.. 에페스까지 무료 차량 대절. 6달러에 아침 포함. 드림 팰리스(?). 오토가르 근처에 있는 팬션 가지 말 것. 에페스까지 차량 대절 없고, 아침 식사도 불포함.
사도 요한 교회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 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죽 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세례소 등이 있다.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사원이 있다. 이사베이 회교 사원은 1375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회교 건물이다. 본래는 두 개의 첨탑이 있었는데 17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에베소 교회, 일곱교회 중의 하나(현재 Selcuk) 역사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A.D. 37년~42년)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는데 사도 요한은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왔다고 한다. 마리아를 모신 사도 요한은 얼마동안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다가 에베소로 오게되어 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내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에베소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인 교회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요한의 활동 중심지였다. 즉, 이 도시는 밧모 섬으로부터 오는 편지(소식)의 도착지이면서 동시에 일곱 개의 교회를 차례로 연결하는 도로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신에 그리스도인들은 꾸준히 신앙을 지켜 가긴 했으나(계 2:2-3) 사랑은 점차 식어가고 있었기에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부터 책망을 받았다(계 2:4). 또 그는 니골라당과 타협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과실을 먹게 하겠노라고 약속하시는데(계 2:7), 이 말씀은 에베소 도시의 아테미의 신성한 대추야자 나무를 배경으로 생명나무의 형사이 대조를 이루게 한다. 요한계시록에 첫사랑을 잃은 교회로 묘사되고 있는 에베소 교회는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라는 주님의 책망과 권고를 듣게 된다.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7대 교회를 볼 때 1세기 말엽 소아시아 지역에는 어느 정도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진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복음전파는 사도바울과 같은 복음전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3차에 걸친 복음전도여행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했으며 특별히 이곳 에베소 지역에서 3차 여행 때 2년 이상 머물기도 하였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쟁쟁한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관계된 교회이다. 사도요한, 사도바울,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등등 특별히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 에베소에 와서 살았다. 에베소는 알렉산더 대왕이 B.C 334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방문하였고, 알렉산더 대왕 사후 리시마쿠스 장군에 의해 에베소의 번영이 이루어졌다. 에베소 원형극장, 체육관, 각종 경기장도 이때에 건립된 것이다. 교회사적으로는 A.D 431년에 에베소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마리아의 신학적인 위치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방의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기독교의 많은 전승을 간직한 에베소에게 주님께서 하셔던 말씀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첫사랑을 회복할 것을 말씀하시는 듯하다.
에베소서 : 대략 A.D 62경 사도 바울이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때에 에베소 교회에 써 보낸 편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영광스런 성도의 지위와 성도의 올바른 생활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행전 19:1-2] "아볼로가 고리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를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도다."
누가의 무덤 : 의사이며 동시에 역사가이며 복음전도자였던 누가의 유해는 요한이 에베소에 있을 때 에베소에 모셔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로 이장되었고 후에 머리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에 보내져 은쟁반 안에 보관되었고 몸은 파도바(pado·a) 시에 있는 성 기우시타나(Giustina)교회에 보관중이다. 에베소에 있는 누가의 무덤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무덤 입구에 황소그림이 있다. 에스겔 1장과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비유중 황소를 누가복음에 적용하여 황소 복음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본래 처음부터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신전으로 사용하던 곳을 기독교 국가가 된 이 후에 누가의 무덤으로 사용한 것 같다. 에베소 후문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곳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말기를... 이곳은 터키 성지 보존회가 관리하고 있으며, 한글로 된 안내 표지도 볼 수가 있다.
셀축 성 사도요한의 교회 북쪽으로 언덕 위에 높이 솟아있는 이 성은 원래 비잔틴 시대에 지어졌으나 후에 터키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해 요새화 하였다.
이사베이(Isa bey)모스크 사도요한 교회의 서쪽 끝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사베이 모스크는 1375년 셀축 투르크의 술탄인 이사베이에 의해 세워졌다. 많은 부분이 지진으로 손상되었지만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잠자는 일곱 사람의 동굴 기독교 박해시대에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신전에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황제의 신에게 경배하도록 강요 당하였다. 이를 거절한다면 이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AD 250년경 데시우스(Decius) 황제시대에 7명의 젊은 기독교 신자가 이러한 박해를 피해 이 동굴로 피신했다. 이들은 어느날 동굴에서 잠에 빠져 한동안 자다 일어나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시내에 나갔다가 자신들이 하루 밤이 아닌 200년간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이미 기독교가 공인이 되어 로마제국 어디든지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을 때였다.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이 사건을 전해 듣고, 당시 각 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부활의 증거로 받아 들였다. 그 일곱 사람은 나중에 죽은 후 화려한 장례식과 함께 이 동굴에 다시 묻혔다.
아르테미스 신전(Artemis Temple) -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 에페소 박물관에서 2∼300 m의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단 한 개의 기둥만이 남아있다(사진 참고). 세계 7대 불가사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경이적인 건축물에 붙여 놓은 이름으로서 사람에 따라서 유적이 달라지기도 한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이집트 기자의 파라미드,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의 공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로도스의 크로이소스 대거상,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와 터키에 2개 있는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능묘이다. 이 것 외에도 8대 불가사의로 꼽는 터키 중부의 넴릇산에 있는 유적과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꼽기도 한다. 따라서 에베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아르테미스는 이집트에서는 이시스(Isis), 인도에서는 이스(Isi), 바벨론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 히타이트인들은 시벨레(Cybele), 그리스에서는 레아(Rhea), 로마에서는 다이아나(Diana), 중국에서는 대모신이라고 불려졌다. 크로수스 왕이 지역에 신전을 세우기 전에는 키벨레 신전이 있었다. 키벨레 신전은 전통적인 소아시아 반도의 풍요의 여신으로 아르테미스와 같은 성격의 신이였다. 기원전 498년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이오니아 연행 중 아테네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334년 알렉산더의 명령으로 오늘날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그 이전의 키벨레 신전을 사라졌지만 키벨레의 정신은 남아 키벨레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 관습이나 성격은 아르테미스에게 물려졌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Artemis-성서의 아데미)신은 원래 달의 여신으로 로마 신화의 다이아나(Diana)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지중해 도시국가에서는 아르테미스가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 되었다. 이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어떤 신전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 다산, 다복의 신인 아르테미스 여신은 소아시아에서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천하가 섬기는 여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기를 잘 낳게 해주고 축복을 준다는 이 여신을 사랑했다. 여신의 머리에는 성벽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도시민의 신이요, 보호자란 뜻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계 최초의 대리석 건물로서 신전이 세원진 자리는 본래 에베소에 처음 정착했던 아마존족이 참나무 밑에서 제전을 행하던 곳이었다. 그곳은 늪지대였기 때문에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기반이 튼튼해야 했다. 신전은 높이 15 m, 길이 105 m, 넓이 55 ㎡에 석주(이오니아식)가 127 개가 사용되었고, 127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처마도리(Architraves) 하나의 무게만도 24톤의 무게가 나가는데, 그 당시의 장비를 감안해 볼 때 어떻게 그러한 무게의 대리석을 기둥높이(17.65m)까지 들어 올린 것이다. 이것을 건축하는 데 무려 2백년이나 걸렸다. 이 신전에 악명이라도 좋으니 자기의 이름이 역사상에 남아 있기를 열망한 한 남자가 불을 질렷다. 알렉산더가 태어났던 B.C 356년 5월 21일이었다. 이 화재로 무너져 내린 신전의 보수를 위해 알렉산더는 아름다운 아르테미스 신전에 자기의 이름을 기록해줄 것을 조건으로 건설비용을 조달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요구 조건은 에베소인들에 의해 정중히 거절당했다. 그러나 에베소 시민들이 가진 것만으로 신전을 보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지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사람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품고 있던 이미지 즉, 대모신이며 성모로 항상 순결하다는 것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내걸었다. "여신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만약 여신이 이 신전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여신의 위대한 힘으로 신전 내의 모든 것을 지켜줄 것이다. 귀중품이나 금, 은, 금전 등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원한다면 신전에다 맡겨도 좋다. 믿음을 기뻐한 여신은 매년 감사의 뜻으로 무엇인가 상을 내릴 것이다." 이 포고문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부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귀중품들을 가져다가 신전에 맡겼다. 이것을 계기로 아르테미스 신전에서부터 은행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7차례나 파괴되고 재건되었으나, 마지막으로 AD 125년 코트족(Goths)에 의해 파괴, 약탈된 후로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고 채석장으로 변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토사로 완전히 덮여 자취를 감추었지만 1874년 영국인에 의해 발굴되어, 지진으로 파괴되고, 게다가 그곳에 있던 석주들은 여러 지역으로 이동되었는데 그 중에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 사원 건설에도 이곳의 기둥을 가져다 사용됐다고 하며, 현재는 133개의 돌기둥(직경 1.85 m, 높이 18.6 m) 중에서 사진과 같이 하나의 기둥만이 남아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2.5배 면적이 높았다고 하지만 복원도를 보지 않고는 불가사의 건축물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복원된 모형도는 이들을 해체하여 옮겨간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 아르테미스 신전의 한쪽 구석에는 붉은 벽돌의 조그만 바잔틴 교회가 남아 있으며, 아르테미스 신전 위쪽 언덕에 사도요한 기념교회가 보인다. 아르테미스 신전 위쪽 언덕 꼭대기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다. 그 밖에도 리디아 시대의 무덤, 청동의 집, 원형 극장,유대인 회당 등이 있다.
아르테미스 여신 (Artemis, 영:Diana)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이자 숲의 여신, 사냥의 여신, 처녀성의 여신이다. 제우스신과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로서 태양의 신 아폴론의 여동생이다. 로마신화에서는 아르테미스를 디아나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다이아나라고 한다. 고대도시 에베소(에페수스)의 수호신이었던 아르테미스는 에베소 유적지 중 당시의 시청에 해당하는 프리타니온(당시 지방자치행정을 관장하던 건물로서 에베소의 행정고문들이 그들의 모임을 갖고, 공식적인 방문자를 맞이하던 곳)에서 그 동상이 발견되어 현재는 에베소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A.D. 1-2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실물의 높이는 약 2.92 m이고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져있다. 아르테미스의 동상은 3층의 사원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마치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머리 뒷부분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다. 달과 별의 여신으로 바벨론과 팔레스타인의 아스타르테(Astrarte)를 상징한다. 이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바벨론의 여신과 같다는 것을 의미했다. 목에는 도토리와 원추형의 모티브를 가진 목걸이가 걸려있고, 팔에는 사자들이 부조로 되어 있다. 이 여신의 가슴에 있는 4열의 둥그런 것은 처음에는 젖가슴, 계란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소의 고환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것은 아르테미 신전에 바쳐진 황소의 고환을 묘사한 것인데, 고환은 "씨앗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 이다. 이 신상의 치마부분에는 두 다리가 모아진 형태로 앞면에는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맨 밑에서부터 소, 사자, 사슴, 그리핀(그리스 신화 ; 몸통은 사자이고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인 괴물), 페가수스(그리스신화 ;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을 때, 메두사의 피가 대지에 스며드니 거기에서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가 나왔다고 함)등이 새겨져 있고, 치마의 옆에는 도시의 상징인 벌과 스핑크스(그리스신화; 여자의 머리 가슴, 새의 날개, 사자의 몸통을 가진 괴물)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아르테미스가 동물의 보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쉬린제(Sirince) , 시린제 : 전통마을 셀축에서 동쪽으로 9 km 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19세기의 오스만 전통 마을이 바로 쉬린제이다. 셀죽에서 돌무쉬로 15분 정도 소요되며, 저녁 7시까지 돌무쉬(마을버스)가 다닌다. 옛날 우리나라 처럼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서, 좁은 길에 대부분 적색 지붕의 2층 집들 이다. 시린제는 그리스 사람들이 살때는 크르큰제(40 가구가 살던곳)에서, 그리스와 인구교환 후에 그리스에 살던 터키사람들이 와서 정착하며 살면서 터키 정부의 지원이 없자 스스로를 자조하는 말로 치르킨제(추한 곳)로 부르다가 지금은 시린제(아름다운 곳)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조그만 시장이 있으며, 서쪽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다. 시린제는 집집마다 직접 담근 질 좋은 와인로 유명하다. 마을 전체가 와인 생산지이다. 이곳에서의 와인은 1병에 2∼3$정도 밖에 안하며,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딸기와인, 체리와인, 오렌지와인, 애플와인 등등 없는게 없다. 종류별로 시음도 해볼 수 있다. 와인을 맛보고 싶은 시린제 사람들과 여행자들을 위해 셀축에서 9 km 떨어진 곳에 와인 하우스가 마련되어 있다. 시린제가 한 눈에 보이는 아르테미스 샤랍에비의 잘 꾸며진 정원에 앉아서 그리스 풍의 백년은 족히 넘을 시골집들을 바라보며 갖는 여유로운 시간은 포도주 맛만큼이나 달콤하다. 가을에는 이곳 주위에서 나오는 귤, 오렌지, 복숭아를 직접 과수원에서 살 수 있다.
숙소 : 즐비하게 늘어선 주거 중에는 숙박이 가능하도록 내부를 고쳐 펜션으로 운영하고 있다. 숙박요금은 5∼7$ 이다.
쿠샤다스(Kuşadası) 터키어로 쿠샤다스란 '새들의 섬'이란 뜻으로 터키 최대의 휴양 도시답게 수많은 호텔, 방갈로, 펜션 등을 갖춘 휴양 객들의 천국이다. 조그마한 에게 연안의 만에 건설된 도시로서 황금 빛의 해변을 끼고 있다. 이 곳의 항구는 다양한 유람선의 방문을 받게 되는데, 이들 유람 단체는 가능한한 주변의 에페소스(Ephesus, Efes), 밀레투스(Miletus), 디딤(Didim), 프리에네(Prene) 등의 관광 제안을 받는다. 여름에는 많은 관광객들의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여전히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이곳에서 성지 순례객들이 자주 방문하는 파트모스(밧모)섬에 갈 수 가있다. 전세선만이 파트모스섬을 운해한다. 배로 5시간 거리이다. 또 가까운 그리스 섬인 사모스(Samos)섬에 매일 배가 운행한다. 쿠샤다스에서 볼만한 곳은 그렇게 많지는 않은 데, 항구에서 가까운, 터키에서는 비둘기 섬이라 부르는 곳의 경치가 아주 좋다. 이곳에서 해지는 노을 보는 것은 너무도 로맨틱하다. 태양이 바다위로 지지않고 육지 위로 지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성의 입장료는 없다. 또 볼만한 곳은 케르반 사라이(대상 숙소)이다. 옛날 실크로드의 종착역이기도 했던 쿠샤다스의 잘지어진 대상 숙소는 들어서자 마자 하늘로 뻗은 야자수가 눈에 띈다. 야자수 밑에서 터키 홍차를 한잔 하는 것도 옛날 대상들의 수고를 느끼게 할만하다. 튼튼하게 지어진 대상 숙소는 지금은 호텔로도 쓰이고 가끔씩 전통 무용 공연을 하기도 한다.
성모마리아의 집(House of Virgin Mary) 에페소스로부터 8 km 떨어진 420 m 높이의 불불산에 위치하고있다. 불불(Bulbul) 산 쪽의 산길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서 5 km의 산 꼭대기에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보낸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사진 참고). 성모 마리아의 집은 전혀 볼 것이 없지만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성지로서 로마 교황청의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계신 곳이다. 에페스 뒤쪽의 산으로 한참을 올라가야하는 데,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며, 걸어가려면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죽기 전 (요한복음 19장 26-27절)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그 후 431년 에페스에서 열렸던 종교회의의 의사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예수가 죽은 후 4∼6년(AD 37∼48) 뒤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에페스로 와서 코레우스산(Coresus산 ;현 불불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모 마리아가 말년을 보냈다고 하는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Catherine Emmerich 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1878년 "성모마리아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성모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891년 융이라는 신부의 인솔아래 에페스 남쪽의 산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 오늘날의 성모마리아의 집이 밝혀졌는데, 발견 당시의 집터의 모양은 책에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더욱이 이 수녀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어 그 계시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크게 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했으며, 1967년 교황 바울로 6세 및 1979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도 이곳을 방문했다.
발굴 당시 이 건물은 오직 집터와 일부 벽만 남아있었다. 그 위에 현재의 모습의 건물을 복원시킨 것인데 붉은 선이 그어져있다. 본당의 바닥에는 회색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난로가 놓여져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발굴된 석탄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본 결과 성모 마리아 당대인 1세기의 것이었다고 한다. 집 아래쪽에는 샘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순례 객들은 성수로 자기 고장의 교회나 성당으로 가져가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지 순례객들은 조그만 물병을 준비해 성수를 담아오는 것도 잊지말자. 성모 마리아의 집에 들어서면 한국말 안내판이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다른나라 안내판에 비해서 조금 낡았다.
성모마리아의 교회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숙소 식사 : 시내 중심에는 17세기부터 있는 "오쿠즈 메흐?X장군"이라 불리는 대상의 숙소가 있다. 오늘날에는 옛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안락한 숙소들이 있다. 또한 새들의 섬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작은 성이 있다.
이오니아 문명 : 이오니아의 도시는 모두 12개로 구성되어있는데, 그것은 밀레투스, 미우스, 프리에네, 사모스, 에페수스, 콜로폰, 레베두스, 테오스, 에리트라에, 키오스, 클라조메나에와 포카에아이다.
프리엔, 프리에네(Priene) 쿠샤다스에서 13 km 정도가면 쇽케(Söke)이며, 이곳의 남서쪽으로 고대도시였던 프리에네가 있다. 프리에네의 아크로폴리스의 신전 기둥은 멀리서도 잘 보인다. 프리에네에 갈려면 약간의 등산을 해야한다. 이 도시는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 Codurs의 손자가 이끄는 모험가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 땅에 왔을 때 주민들은 그들의 새로운 도시를 미케일(Mycale) 산 근처에 건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항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 도시에 건설되었던 아테네여신을 위한 신전의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제의하자 에페스인들과 달리 이들은 그의 호의를 받아 들였다. 이 때 알렉산더 대왕의 자비심을 찬양하는 비문을 만들었는데 이 비문은 현재 대영 박물관 고고학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페르가모(현지명은 베르가마)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에페스나 다른 인근의 도시들과는 달리 로마제국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므로 헬레니즘시대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오니아의 항구도시로서 B.C 4세기에 밀레도의 Hippodmos에 의해 도입된 장기판식의 도시계획으로 유명하다. 비잔틴 시대부터 중요성을 잃었고 오스만제국 시대에 와서는 거의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중요한 유적은 모두 독일로 반출 되었다. 이곳의 원형 극장의 수용인원은 약 5,000명 정도가 되는 데 그것으로 미루어봐서 밀레투스보다는 큰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오니아 동맹의 리더중의 하나였다. 아테네 신전의 기둥은 지금도 건재하게 남아있었다. 프리에네에서 남쪽으로 넓은 평원이 내려다 보이는 데 그 평원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생각을 해보니 자연의 위력을 새삼 실감나게 했다. 예전에는 밀레투스와 프리에네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배였을 것이다. 육로로는 바파호수의 끝가지 돌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프리에네의 뒤쪽은 깍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 데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잠시 신전의 기둥옆에서서 평원을 내려다 보며 휴식을 가졌다. 아직은 한국사람이 많이 찾지않는 디디마, 밀레투스, 프리에네였지만 서양사람들은 꾸준히 방문하는 곳이다.
바파 호수 바파호수는 옛날에는 바다 였으나 지금은 호수로 변해있다. 달 빛이 부서지는 호수는 매우 아름답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호수로 옛날 헤라클레이아라는 고대 도시가 있었다. 각종 새들의 낙원인 이 바파호수는 새들뿐만이 아니라 물고기도 아주 많다. 특히 뱀장어가 많이 잡히는 데 그 요리가 일품이다. 여기를 방문한다면 뱀장어요리를 맛보기를 바란다. 바파호수 바로 옆의 식당에서 차한잔을 하며 호수의 섬들을 보는 것도 좋다. 숙소 : 호텔 클럽 나투라 올리바로서 바파호수 바로 옆에 자리잡아 바파호수와 한데 어울려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일종의 방갈로 형태의 호텔이다. 넓은 공간에 비탈길로 놓인 산책로와 숙소, 그리고 호수가 바로 옆에 자리잡은 레스토랑은 파도소리와 어울린다.
헤라클레이아 바파호수의 뒤쪽의 헤라클레이아는 인근의 밀레투스나 프리에네랑 다르게 아나톨리아의 원주민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간선도로에서 꺽어져 10km를 가면 헤라클레이아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헤라클레이아로 가는 길의 경치는 기가 막혔다. 산이 온통 기암절벽으로 덮혔있었다. 잘 찍지 못하지만 사진기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바파호수를 옆의 시골마을에 도착해서 원형극장의 노란 표시판을 따라가서 헤라클레이아의 유적지를 돌아본다. 이 주변을 돌아보는 데 5일이 걸릴다고 한다. 헤라클레이아에서는 반드시 배를 한편 타고 유적지를 둘러보아야한다.
밀렛(Milet), 밀레투스(Miletus) 프리에네의 남쪽으로 16 km 거리에 밀레투스(Miletus)가 있다. 쇼케에서 남쪽으로 약 30 km 지점에 있는 서쪽 갈림길로 7 km 가면 디딤(Didim)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20km를 가면 밀렛 이다. 이 고대 도시는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한 도시이다. 크레타 섬에서 추방된 아폴로 신의 아들인 밀레투스(Milletus)에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과거에 밀렛은 에페스와 마찬가지로 항구도시였으나 멘데레스강의 활동에 의해 흘러들어온 흙이 바다를 메꾸어서 지금은 내륙지방이 되어버렸다. 밀렛은 아주 이른 시기(기원전 1600년경)부터 크레타인과 카리아인들이 정착해 크레타 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 후 기원전 1200년경 밀렛은 이오니아인들의 세력권 내에 들게 되었는데, 천혜의 항구에 위치한 관계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그 세력을 흑해 연안까지 뻗쳤다 한다. 이 도시의 전성기는 유명한 군주 트리사불레스(Thrasybules)의 통치 시기인 기원전 약 7세기 경으로 많은 철학자 및 역사학자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활약했다. 그리스철학, 천문학, 지질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탈레스(Thales)도 이 도시에서 태어나 활약했는 데, 그는 BC 585년 5월 28일의 일식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며, 만유의 근원이 물이며 불변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여 그의 학문과 사상은 오늘날의 핵기술을 낳게했다. 한편 만유의 근원이 공기라고 주장하여 탈레스의 학설과 쌍벽을 이루게 했던 아낙시메게스(Anaximenes)나 유명한 철학자 아낙시멘데르(Anaximender), 그리고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헥카테우스(Hecataeus), 또한 위대한 기하학자 이시도루스(Isidorus-콘스탄티노풀의 성소피아 건축자)도 이 도시의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세기의 매춘부 아스파시아(Aspasia)도 이 지역에서 출생해 나중에 아테네의 정치가 페라클레스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BC 546년에 페르시아의 속주가 되었는데, 이 도시를 몰락하게 한 사건은 BC 494년에 발생했다. 즉 밀렛이 주동이 되어 에페스, 서머나 등 인근의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함으로서 밀레도는 거의 파괴되고, 주민들이 대량 학살 당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후 히포다무스에 의해 재건되는 데,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을 본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도시의 몰락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였다. 즉 멘데레스 강의 퇴적 작용에 의해 밀렛은 오늘날 내륙 깊숙이 자리잡게 되어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기능도 잃어 쇠퇴하게 된 것이다.
성서 속의 밀렛 밀렛 사도행전 20장 17절-38절까지, 디모데 후서 4장 20절에 언급되었다. 즉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에베소에 들리지 않고 밀렛에 잠시 들려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의 장로들을 오게 한다. 이 밀렛에서의 이별 장면은 상당히 감동적이다. 사도 바울이 그들과 함께 기도를 마친 후 작별을 고하려하자 모두들 바울의 목을 안고 울었다. 다시는 바울을 볼 수 없으리라는 슬픈 생각에 그를 배 타는데까지 울면서 전송하는 장면은 쉽게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유적으로는 반원형극장, 비잔틴성, 사자의만, 델피니움, 북부시장, 체육관, 화우스티나 목욕탕, 일리야스 베이 모스크 등이 있다. 밀레투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원형 극장일 것이다. 당시 15,00명을 수용했던 극장은 지금도 보존이 잘되있는 편이다.
디딤(Didim), 디디마, 미딤 셀축에서 D525번 도로를 남쪽으로 약 60 km 내려가서 서쪽으로 7 km 가면 디딤이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에서 정착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이 디딤의 아폴로신전이나 지성소에 의해서 증명된다.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통치하고 왕래했지만 디딤이란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어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디딤은 이 자체가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고 밀레도의 영토에 속했으며 성직자들과 신전을 지키고 관리하는 종들이 살았던 곳 이었다. 디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8세기 말이었다. B.C 494년에 이오니아가 Lade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게 패했을 때 디딤의 아폴로신상은 끌려갔고 신전의 재물도 약탈당했다. 그 때 아폴로신전의 성직자들은 비겁하여 재산을 지키려 하지않고 정복자에게 아무 저항없이 모든 걸 바치고 난 후 밀레도인들의 분노를 살 것을 두려워하여 페르시아군에게 사정하여 자기들을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페르시아왕은 그들을 데려가 살게 했는데 약 1세기 반 후에 페르시아군을 무찌르고 진군한 알렉산더 대왕이 밀레도인들로부터 성직자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대노하여 그들이 살았던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으며 아폴로신상을 디딤으로 복원시켰다. 페르시아인들은 아폴로신전을 파괴한 후 약 150년간 방치하였다가 알렉산더대왕이 이오니아에 도착했을 때 디딤에 새로운 신전을 짓도록 명령하여, 그후 약 500년동안 건축이 계속되었으나 결국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건축이 중단되고, 신전의 중요성은 퇴색되어 갔으며,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A.D 380년) 왕은 신전에 대한 참배를 일체 금했다. 1,500년대의 지진에 의해 파괴된 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신전의 모습이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모두 기둥이 105개가 있었던 웅장한 신전이었다. 신전을 돌아보면서 그 규모에 다시한번 놀랐다. 곳곳에 지붕에 조각되어있던 메두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둥중에 몇몇은 다른것과 다르게 톱니바퀴가 아니라 평범한 둥근 기둥이었는데 그것이 세계최초의 노동자들의 태업의 결과라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아폴로신전 밖에 유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약 4Km 떨어진 알튼 쿰(Altin Kum; 황금의 모래)이라는 훌륭한 해수욕장이 있다.
보드룸(Bodrum) 셀축에서 남쪽으로 오면 밀라스(Milas) 읍과 만나고,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56 km 정도가면 보드룸이다. 보드룸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마소루스의 무덤 마소로움(마우솔레움)이 있는 곳"으로, 고대 명은 할리카나수스(Halicarnassus)이다. 보드룸은 BC 1000년경에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진 고대도시 이다. 보드룸은 반도로서, 보드룸의 주변에는 많은 휴양도시가 있다(참고1, 참고2, 참고3). 유명한 곳 중의 하나가 버로 얄르카박이다. 그외에도 괼쿄이, 카드칼레시, 규뮤슈륙, 투르구트 레이스는 보드룸보다도 더 좋으면 좋았지 뒤떨어지지는 않는 아름다운 곳이다. 보드룸반도 전체가 휴양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도시는 Aor주 연방의 일부였으며 B.C 7∼6세기는 리디아(Lydia)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B.C 546년 리디아왕 크로수스가 페르시아에 패함으로 밀라스로부터 통제 받는 페르시아의 도시가 되었다. 페르시아가 리디아왕국을 점령하고 그리스의 도시들을 정복한 후에 BC 480년에 이 도시는 페르시아의 이름으로 카리아(Carian Dynasty)왕조의 여왕 아르테미시아(Artemisia)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여왕은 페르시아와 그리스간의 전쟁시에 페르시아 편에 섰고, 살라미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Xerxes BC 519-465)로 부터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카리아 왕조의 가장 강력한 권위를 세운 왕은 마우솔로스(Mausolus)였다. 그는 헬레니즘 문명을 받아드려 도시를 가꾸는데 신경을 썼다. 5.5 km에 달하는 정교한 방어 성벽을 만들고, 프로코네시아 지방의 대리석으로 성벽을 감쌌다. 그리고 그는 살아 생전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하여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만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러자 왕위 계승자인 그의 부인인 아르테미시아 여왕의 동생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완성하여 당대에 기술로는 만들기 어려운 아름다운 무덤으로서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마소로움(마우솔레움)을 건설했다. 이 여왕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남편이 죽자 그의 뼛가루를 포도주에 섞어 죽을 때까지 매일 마셨다. 이 할리카나수스의 마우솔레움 영묘의 사자상 하나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에페스의 아르테미스신전과 함께 터키땅에 자리잡은 옛날 세계의 최고 건축물중의 하나인 마소로움은 얼마나 웅장했던지 아직도 마소루스의 무덤을 뜻하는 마소로움은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 영묘라는 단어를 등장시키게 했다. 길이 38미터 폭 32미터 높이 45미터의 이 웅장한 건축물은 지금은 단지 그 기초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게 폐허만이 남은 이유중의 하나는 지진에 의한 파괴도 있겠지만 로도스섬의 성 요한 기사단이 오스만제국의 공격을 대비해 성을 보강할 때 이 마소로움의 돌을 사용한 것이다. 그나마 남아있던 조각상도 영국에서 가져가면서 지금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마소로움의 복원도를 보면서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주는 아쉬움을 여기서도 느낄 수밖에 없었다. B.C 4세기 알렉산더에게 정복되었고, 3세기에는 프토레마우스와 셀레우쿠스가 지배했다. 80년 길리기아, 베레스 지방의 로마 총독에 의해 약탈되었다. 이때 도시의 예술품들이 파괴되었고, 과거의 영화는 다시 오지 않게 되었다. 1523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슐레이마니에 대왕에게 완전히 정복되어 이 지방의 기독교인들은 몰타(Molta)로 철수하였다. 할리카르나소스의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대 역사학자 헤르도투스(Herdotus BC 484-420) 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서사시적 투쟁의 연대기를 서술함이다. 또한 BC 8세기경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로마의 신화적인 탄생으로부터 3세기 중엽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성베드로 성당 A.D 15세기, 한 때는 섬이었던 반도 부분에 세워진 이 성은 설계와 건물 부조물들을 지진으로 무너진 마우솔레움에서 가져다 썼다. 최초의 발굴은 1,415∼1,500년경 독일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성곽은 터키, 프랑스 공동 작업하였다. 이곳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바다 속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시하는 흥미진진한 해양 박물관이 있다. 보드룸 항구에는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이곳에서 에게해를 항해하는 크쿠즈에 참가해도 좋은 여행이 될것이고, 시간 여유가 있으면 가까운 그리스섬인 코스섬을 갔다 오는 것도 괜찮다. 스킨 스쿠버를 가르쳐주는 클럽도 있다. 시즌 중의 시장은 외국관광객으로 항상붐빈다. 보드룸의 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많은 락카페와 디스코(디스코텍)와 주점은 밤에 빼놓을 수 없는 보드룸의 상징이 되었다. 보드룸은 연말이나 터키의 명절때에는 터키의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장소로 빼놓을 없는 곳이다. 그만큼 외국관광객 뿐만이 아니라 터키 관광객도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드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할리카르나소스의 발륵츠이다. 이 뜻은 할리카르나소스의 어부라는 뜻인데 보드룸의 한복판에서, 또 보드룸성의 입구에서 동상이 서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굴까하고 의심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이후로 보드룸은 아주 작은 어촌을 벗어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오스만제국 사람이었던 할리카르나소스의 어부에 의해 전 터키에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명문가문에 태어난 사람인데 자기 부인과 정을 통한 아버지를 살해한 죄목으로 이곳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 문학 활동을 벌였다. 뛰어난 문학가인 그는 보드룸에 살면서 그가 쓴 글은 보드룸을 전 터키인에게 가장 사람받는 곳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 생각하지마요. 당신이 이곳에 왔던 것처럼 당신도 이곳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보다 먼저 왔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온갖 추억을 보드룸에 두고 떠나게 될것입니다."
보드룸 성 보드룸에서 어디에서건 한 눈에 보이는 보드름 성은 성요한 기사단이 15세기에 세운 성으로 성 베드로(세인트 피터스)성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수중박물관이라고 불리우는 데, 그 이유는 인근의 수중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몇안되는 수중박물관이라는 자랑을 들었지만 내게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보다는 터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유럽식의 성이라는 것이 더 흥미를 잃으켰다. 이 성을 자주 방문했지만, 이 곳에 올때마다 느끼는 것은 중세의 기사들의 향취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곳을 지키는 기사들의 국적에따라 이름 붙여진 프랑스, 영국, 불란서, 이탈리아 등의 성채는 그 견고함 못지 않게 오스만제국에 맞서 오랜 세월동안 이길수 없는 싸움을 벌여왔던 로도스 기사단의 절망감이 느껴왔다. 그들은 언제 몰려올지 모른 오스만 제국의 대군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정작 이곳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가장 훌륭한 왕중에 하나인 카누니 술탄 슐레이만의 공격에 의해 로도스섬이 함락당하고,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를 떠나 말타로 본거지를 옮길때 이 곳의 성 베드로 성도 오스만 제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성 베드로성은 그냥 유적지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말고 바다가 잘 보이는 탁 틔인 곳에 앉아서 아무런 생각없이 오가는 배들을 내려다보는 여유를 가져보길 권한다.
보드룸의 원형극장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 수용인원은 약 13,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원형극장은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과 에페스의 극장이 주는 감동과는 비교할 수없을 만큼 보존상태도 안좋고, 아니 너무 복원냄새가 난다.
숙소 : 최고 비싼 호텔중에 하나인 안틱 티야트로는 하루밤 숙박요금으로 더블이 150불이다. 저녁식사도 포함되어있지 않다. 할리카르나소스(보드룸의 옛이름)의 원형극장 앞에 있는 호텔은 아주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녁에 보드룸성을 내려다보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지배인은 코소보인인 마사르 베이(존칭어)였는데, 8개국어를 구사하는 마음씨좋고 인자하다.
마르마리스, 말마리스(Marmaris) 밀라스에서 D330 도로로 동쪽으로 38 km 가면 D550 도로와 만나며, 이곳에서 28 km 가면 무을라(Mu?la)이고, 29 km를 남쪽으로 가면, 남서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27 km 가면 마르마리스 이다. 마르마리스는 고대 '피스코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경치와 해변으로 유럽인들에게 잘 알려진 휴양도시이다. 여름에는 거리는 인파로 덮일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최근에는 관광용 요트 항구로서 유명해지고 있는 도시다. 역사를 보면 마르마리스는 BC 4세기 후반 로디안(Rhodian..현재 그리스영인 로도스의 사람들)이 통치했던 곳이다. AD 1522년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마니에 대왕이 이스탄불에서 40,000명의 해군과 20,000명의 지원군을 700척의 함대에 실어 보내고 자신도 140,000명의 육군을 마르마리스까지 이끌고 가서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펴서 도시를 점령하였다. 훗날 넬슨(Nelson) 제독의 함대가 잠시 피난하여 머물렀을 때처럼 대 병력을 수용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중세의 성과 성벽 안에 있는 수 백년 된 전통 가옥들은 볼만하다. 또한 도시 센터에서 2Km 떨어진 아사르테페의 유적지와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은 확실히 볼만하다. 항구 쪽에는 오스만 제국 당시의 성곽이 있으나, 불행히도 많은 고층 건물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마르마르스는 보드룸과 쌍벽을 이루는 터키 서부지역의 휴양도시로서, 로도스섬(Rodos Adası)으로 가는 배가 매일 출발한다. 마르마리스에서 D500 도로의 서쪽으로 75 km 가면 조용한 휴양도시인 닷차(다트차; Datça)가 나온다. 닷차에서 더 동쪽으로 가면 고대도시 크니도스(Knıdos)까지는 28 km정도의 거리다.
로도스 섬(Rodos Adası) '에게 해의 장미' '행복의 섬' 등의 별칭이 붙어 있는 로도스 섬은 로데카네소스 제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뿐만 아니라 피레우스에서 키프러스나 중 근동으로 가는 배가 반드시 기항하는 항로의 요충이기도 하다. B.C 12C에 도리스인들이 이 섬에 린도스, 카미로스, 이알리소스 등 도시를 건설하였으나, BC 1C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에는 베네치아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그리스에 병합이 된 것은 1948년의 일이다. 로도스 시는 꽤 넓은 두개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시가지는 현대적인 호텔과 디스코데크가 즐비하고, 구 시가지는 성벽에 둘러 싸여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루즈나 요트를 위한 자그마한 항구로 신시가지에 면해 있는 만드라키항(Mandraki) 과 대형관광선이나 페리를 위한 큰 항구 Commercial Harbour 가 구시가에 면해 있다.
소크라테스 거리(Socratous) 와 술레이만 회교사원 (Suleiman's Mosque) 항구에 면해 잇는 통행문 가운데 유난히 큰 곳이 "바다의 문"(Pili Ag. Ekaterinis) 이다. 일명 로도스의 쇼핑거리이다. 토산품점, 직물 전문점, 모피나 귀금속점들이 길 양편에 빽빽이 자리잡고 있다. 윈도우 쇼핑을 하면서 천천히 길을 따라 가다 보면 갑자기 눈을 막아서는 번쩍번쩍 하는 양파 모양의 회교사원을 보게 된다. 이것이 1522년에 세워진 술레이만 회교사원이다. 로도스기사단(성요한 기사단)은 그 직전에 터키군에 패하여 말타섬으로 탈출했다.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바다의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로도스시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1440∼1489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당시는 병원이었다. 성요한 기사단은 원래 의료계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그 이념도 병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는데 있었다. 조각으로는 로도스의 아프로디테(미의여신)상이 유명하다.
기사단의 궁전(Palace of the Grand Masters) 기사의 거리를 끝까지 가면 오른쪽에 궁전이 보인다. 유럽의 왕족이나 제후들의 화려한 궁전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실용적이고 일종의 성채와 같이 튼튼해 보이는 모습이다. 몇차례의 지진이나 전쟁으로 손상을 입었는데, 제1차대전 후 로도스 섬을 지배했던 이탈리아인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역대 성 요하네 기사단장들이 살던 곳으로 궁전이라기보다 요세 같은 느낌이 드는 이 궁전은 방이 158개로 한때 감옥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를 위해 수복된 것으로, 무솔리니가 별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내부는 이탈리아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각국으로부터 기증받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알리소스 : 고대 3대 도시의 하나로 지금은 아테네와 제우스신의 신전터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부근의 집 가운데 민박이 많다.
나비의 계곡 : 이알리소스에서 14km 쯤 더 가면 Petaloudes 에 "나비의 계곡"이라는 계곡이 있다. 이 일대는 때가 되면 사방 1km 정도의 계곡이 온통 춤추는 색색의 나비들로 뒤덮인다.
카미로스유적 : 로도스 시에서 34km 쯤 서해안을 따라 간 곳. 고대 3대 도시 중의 하나이다.
린도스(Lindos) 고대도시 가운데 지금까지 그 자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은 린도스 뿐이다. 로도스시에서 동해안을 따라 약 55km에 위치해 있다. 관광버스나 정기버스가 자주 다니고 있다. 이곳은 마을 전체가 정부로부터 고고학 유적지로 지정되어 차의 출입이 금지 되어 있다. 마을 꼭대기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있고 왼쪽에는 하얀 모래사장의 해안이 보이고, 오른쪽 위의 아크로폴리스까지는 꼬불꼬불한 길을 돌계단을 밟아 얼마쯤 올라 가야한다. 이길에는 산토리니에서와 같이 한번쯤 나귀를 타보는 것도 괜찮다. 아테네-피레우스에서 직접 가는 배가 있으며, 터키의 마르마리스로 들어 올수 있다.
크니도스(Knıdos) 크니도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직후 펠레폰네수스에서 온 도리스 사람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반도의 험한 지형 때문에 통신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크니도스는 해안선을 따라 영토를 넓혀갔다. BC6세기 중엽에는 이 도시가 시실니(Sicily) 북쪽 해안과 라파리(Lipari) 섬에 식민지를 가지게 되었다. 식민지 통치와 무역업의 성공으로 부를 축적하여 그리스 델피에 있는 크니도스 보고에 많은 재물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546년 페르시아가 에게해 연안의 도시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해 들어오자 크니도스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토를 섬으로 만들고자 영토 중에 가장 좁은 지역을 택해 깊은 터널을 파므로서 본토와 자기들의 땅을 분리시키려는 대역사를 시작했다. 이 역사에 참여한 시민들 중 많은 사람이 날으는 돌조각에 의해 얼굴과 눈 부상을 많이 당했다. 이 불길한 징조에 절망한 크니도스인들은 델피로 가서 지성소의 충고를 듣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신의 대답은 "제우스 신이 크니도스의 땅을 섬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벌써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하면서 그들의 땅을 포기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충고를 받아 드리기로 하고 그들의 도시를 페르시아에게 넘겨주었다. BC4세기 말경 크니도스는 유명한 의학학교가 생겨 명의들을 많이 배출했고, 유명한 철학자이며 천문학자이고 수학자인 유독소스(Eudoxus)가 이 지방 출신으로 별과 흑성들의 움직임에 대한 법칙을 세운바 있다. BC 279년에는 크니도스의 Sostratus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유명한 파로스(Pharos) 등대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세웠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올리브 산지이며, 식초는 최고의 품질이었고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포도주였다. 이 포도주는 피를 맑게 해주고 위나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며 아무리 과음하더라도 숙취에 걸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BC 2세기에 이르러 크니도스가 로도스의 통치 하에 있을 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도시가 노출되어 있는 관계로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AD 7세기 이 후로 시작된 아랍족의 침략에 견디다 못해 주민들은 이 지역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카우노스(Kaunos, Caunos) 무으라(Mu?la)에서 남쪽으로 약 54 km 거리인 쿄이제이즈(Köyce?iz) 마을(북쪽에서 올때는 Dögüsbelen에서 남동쪽 도로으로 조금 가다가 지선으로 간다)에서 갈 수 있다. 쿄이제이즈의 좁은 호수를 따라 보트로 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카이누스 도자기 조각들이 BC 9세기 이전에 인간의 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도시가 그리스 문명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으나 그리스인들이 거주했다는 증거는 전혀없고 또한 그리스인들도 아니었다. 역사학자 헤로도트스는 카우누스인들은 소아시아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전설에 의하면 카우노스는 밀레투스의 아들이며 아폴로신의 손자로서 그의 쌍둥이 여동생 Byblis가 공격해 오므로 카리아로 도주하였다. BC 4세기에 한 항해 일지에 의하면 카우노스는 카리안족들이 세운 것이라 되어있다. 이 Caunus는 여자에 대해 죄를 지었고 이 무법천지의 욕망을 다스릴 수 없어 스스로 떠나게 되며, 불행한 로맨스를 묘사하는데 종종 사용되었던 "카우누스인의 사랑(A Caunian Love)" 이다. 유적으로는 석관무덤, 아크로폴리스, 극장 등이 남아있다.
달리안(Dalyan) 카우노스 바로 서쪽이지만 도로로 연결되지 않아 아크차카바크(Akçakkavak)에서 남서쪽으로 약 4 km 가면된다. 달리안(Dalyan)은 "Fish Traps"이란 뜻이며 지중해의 거북이들이 알을 낳는 장소로서 세계의 자연 보호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유명한 곳이다. 터키 정부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달리안강의 하류에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아름다운 백사장의 이스투스 해수욕장은은 오염되지않은 청정구역이다. 바닷거북이 5월과 9월 사이에 알을 낳고, 본능적으로 빛을 찾아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바다 거북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는 건축허가가 나오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산란기에는 밤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그 이유는 빛을 찾아서 바다로 들어가는 바닷거북이 불빛을 보고 혼동을 일으켜 바다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안강은 아주 많은 갈대 숲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수로가 아주 고불고불 나 있어서 카누를 타고 여행할 경우에는 길을 잃기 쉽고, 강이 아주 좁다. 배를 타는 곳에서 건너편 절벽쪽으로 바위를 파서 만든 묘지가 보인다. 전통적인 리키아식의 묘지이다. 달리안과 카우노스 유적지를 배를 타고 연결하여 여행하는 것이 좋다.
카슈에서 페티예는 4∼5시간 소요되며, 하나의 커다란 요새같은 만 주변에 세워진 유명한 도시이다. 1957년 이 도시는 지진에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휴양지로서 잘 만들어져 주위의 섬을 포함한 주변을 배를 타고 돌아보는 방법이 가장 좋다. 마치 바닷물 색갈이 터키석 같은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웰유 데니즈는 해변 뒷편으로 숲이 우거진 산 기슭에 자리잡고 만의 입구가 좁아 하나의 호수처럼 보이는 곳이다. 고대도시 텔레수스(Telmessus)가 현대의 페티예를 말한다(사진). 탈레수스의 표기에 다블 에스(ss)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 이전의 도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텔레수스인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알렉산더를 대신하여 통치권을 받았던 크레타인 네아쿠스는 텔레수스를 점령하기 위하여 술책을 썼는데 텔레수스 주민들에게 자기들이 포로로 잡은 여자 가수들과 소년들을 시에 남겨놓고 가도 좋으냐고 물었고 주민들은 의심 없이 응낙하였다. 소년들의 퉁소 가방 안에 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그들의 척후병인 소년들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그 후 시간이 흐른 후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가 되었다. AD 451년 칼케톤 종교회의에 텔레수스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페티예에서 파묵칼레까지 가격은 만원정도, 카밀 코치라는 버스회사에서 표를 구입한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서비스도 좋다. 페티예 거쳐서 오타쟈 걸쳐서 뮬하 걸쳐서 데니즐리로 가면, 약 6시간에서 7시간 걸린다.
욜루데니즈(Ölüdeniz)) 페티예에서 돌무쉬를 갈아타고 30분정도 가면 욜루데니즈 이다. 욜루데니즈를 찾는 사람이 많으므로 버스도 자주 있다. 욜류데니즈는 파도, 밀물, 썰물이 없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물이 깨끗해 수영을 하다보면 물고기도 보인다. 욜루데니즈 가기 전에 식당과 쇼핑센터가 밀집된 거리가 있다. 욜루데니즈에서 이곳까지 돌무쉬 타고 와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할 수 있다. 다만 여기는 유럽인들의 휴양지라 물가가 다소 비싸다. 욜루데니즈 해변에 들어갈때 입장료 있으며, 학생은 750원이다. 비치에서 파라솔이랑(2000원) 의자(1개당 2000원) 빌리는데도 돈내야 한다.
<숙소> 욜루데니즈의 투어리스트 인포에서 추천해준 Grand Taner 호텔은 수영장 딸린 호텔중에서 가격이 가장 저렴한 곳이다. 더블룸 1인당 15000원으로 에어컨, 욕실 등 시설이 좋다. 수영장 옆에는 미니 바가 있고, 포켓볼도 맘대로 칠수 있다. 해변에서 가까운 편이다.
테르메수스(Telmessos) 테르메수스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나 리시아인이 아니고, 피시디아(성서상의 비시디아)로부터 왔다. 피시디아는 팜필리아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였다. BC 8세기 이전 건국 초부터 테르메수스인들은 호전적이었고 공격적이었으며, 그들의 이웃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한 때는 리시아 연맹의 30개 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용감했었다. 평지에 있는 도시들과 떨어져있고, 황량하고 비옥하지 못한 땅에 위치한 테메르수스는 올리브가 유일한 농작물이었다. 그들이 전략적인 요충에 위치한 관계로 해안과 내륙지방의 무역을 간섭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지역을 통과하는 여행자들로부터 세금을 걷어 들였다. 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무서운 군대에도 겁을 내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도 그 방어가 튼튼한 것을 보고 정복의 꿈을 버리고 지나친 두 개의 도시중 하나이다. 테르메수스는 차가 없으면 가기 힘든 곳으로 산의 거의 정상부분까지 차가 올라갈 수있다. 원형극장, 오데온(실내극장), 시스턴(물저장고), 아고라가 있으며, 높은 곳에 건축된 원형극장은 웅장하며, 무대 쪽은 절벽이다. 테르모수스는 기중기 같은 장비를 가지고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발굴작업이 이루지고 있지 않다고 하며, 험난한 곳에 있기 때문에 잘 보존 되어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파묵칼레(Pamukkale),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성서지명 - 히에라폴리스(골로새서) 관련성경 - 골4:13 이스탄불 오토가르에서 인근 데니즐리까지 버스로 13 시간 소요되며, 20달러 내외이다. 이즈미르에서 데니즐리까지는 남동쪽으로 약 238 km 거리이다. 데니즐리에서 파묵칼레까지는 20 여 km로서 마을버스로 45분 정도 소요된다. 페티예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이스탄불에서 데니즐리에 있는 파묵칼레까지의 거리는 약 666 km이다. 라오디게아로부터 약 9 km 정도 떨어져 있고 해발 약 750 m 높이의 리쿠스계곡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파묵칼레 자체만 2∼3시간이면 돌아볼수 있으나, 히에라폴리서 전체를 보려면 하루 이상을 잡아야 할 것이다(아래의 지도 참고)
파묵칼레 지도(지도를 클릭하여 크게 볼 것) 파묵칼레에 가면 지면이 완전히 눈으로 덮인 듯한 언덕 하나가 나타나는데, 사실 이것은 눈이 덮인 것이 아니라 온천수에 의해 이루어진 자연의 대 작품이다. 이곳이 바로 터키인들이 목화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의 '파묵칼레'라고 이름 붙인 고대의 '히에라폴리스(성스런 도시; 聖市)'이다. 터키어로 '파묵(pamuk)'은 '솜(목화(木花)을 뜻하고, '칼레(kale)'는 '성(城)'을 뜻한다. 산화칼슘이 주성분인 온천수가 언덕 꼭대기에서 솟아나서 1만 4천년간 걸쳐 산봉우리부터 흘러내리며, 비탈을 온통 순백의 바위로 뒤덮게 했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욕조를 만들고, 계단식 자연 수영장을 만들었는데, 이 모양이 솜을 쌓아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터키의 절경 중 하나이다(여행 참고). 또 한쪽의 산자락에서는 유황온천이 흘러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온천수의 깊이는 무릎 이하의 높이여서 수영을 할 수는 없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서 얼마 안가면 전체가 새하얀 곳에 둘러싸여 있는 파묵칼레가 나온다. 이 온천수가 만들어 계속 만들어 놓은 테라스는 파손되기 쉬우므로 신발을 벗고 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한 손에 신발을 들고 가야 한다. 물은 ?泰嗤? 석회석이 쌓여 미끄러우므로 조심해야 하며, 가끔 자갈이 밟히면 발바닥이 아프기도 한다. 현재는 과도한 개발로 인해 온천수가 줄어들어 무미건조한 하얀 석회붕만이 자리하고 있고 있는 곳도 많다. 과거에는 수영도 하였다고 하지만, 걷거나 흘러가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쉬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대시대로부터 온천물은 류머티스, 심장병,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위 어느 곳에서나 실제의 목화밭을 볼 수 있듯이 이곳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모직산업에 종사하였고 섬유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는데, 현재 많은 주민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 민박, 레스토랑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 석회붕 위쪽으로는 로마 시대의 야외 원형 극장을 비롯하여 교회, 공중 목욕탕, 신전등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이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바로 이 하얀 목화성 언덕위에 건설된 도시인 것이다.
기원전 500년 경에 활약한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포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대는 서방 원정시 이 히에라폴리스 언덕 밑의 리쿠스 골짜기를 통과해서 사르디스, 에페소스 등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을 침략했다고 한다. 히에라폴리스라는 이름의 도시를 최초로 건설한 왕은 기원전 180년쯤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로서 페르가몬의 창건자 텔레포스(Telephos)의 아내 히에라(Hiera)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를 히에라폴리스라고 명명했으며, 聖市(성시)라는 의미이다. 히에라폴리스는 바로 이웃의 고대도시 라오디케아와 경쟁관계를 유지하며 급진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기원전 133년에 페르가몬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제국에 자진 헌납함으로써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후 티베리아 황제 시대인 AD 17년에 지진에 의해 대파되었으나 복구되어 2∼3세기경 최 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된 이 도시는 수많은 각종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어서 "신전의 전시관"이라 불릴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이 도시의 전성기는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폴리스는 기독교의 대 교구가 설치되어 기독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히에라폴리스의 주산업은 카페트 및 직조를 주로 하는 양모산업과 꽃을 기르는 원예사업이 중심이었고 특히 석공예가 상당히 활발해서 섬세한 돌 조각이 여기저기 눈에 띄이고 있다. 인근 지역에는 대리석 산지가 있어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의 얼룩 달룩한 대리석 기둥은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다. 초대 7대 교회의 하나가 인근 라오디케아에 세워졌다. 더욱이 예수의 12제 자중 한 사람이었던 사도 빌립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사도 빌립이 전교하던 장소에 순교 기념관이 있다. 6세기부터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하자 11세기까지 이 도시의 주민들은 지금의 데니즐리로 이주해 와서 살기 시작하였으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셀주크(셀축)와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그 찬연했던 과거의 영광도 함께 묻히고 말았다. 잦은 지진, 전쟁 타 지역으로의 이주를 통하여 역사의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는 망각되고, 유명한 온천수가 뛰어난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는 하얀 목화성,즉 파묵칼레로만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곳은 1887년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시작된 이래, 아직도 발굴 연구 작업중에 있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동서남북으로 비교적 정확한 사각형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파피아스' 와 골로새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에바브라'가 복음 전파에 힘썼다. 요즘 이 지역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많이 홰손이 되어 통제를 하고 있으며, 여행객들을 위하여 시간을 정해 온천물을 흘러 보내고 있으므로, 신발을 벗고 미지근한 온천물에 발목을 적시며 걸어 다닐 수 가 있다.
파묵칼레에서는 백색의 칼슘으로 이루어진 석회 언덕의 물을 걷다가 오기 쉬운데, 주위에 수많은 호텔들이 있어 겨울에도 노천탕을 즐길 수 있으며, 히에라폴리스 언덕 위쪽에 빌립 사도의 순교 기념 교회, 원형극장, 박물관, 소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 등 여러 볼 곳이 많다. 또한 이 도시의 북쪽 끝에 히에라폴리스에서 7 km 거리에 초대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있었던 라오디게아가 있다.
박물관(Museum)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하며,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8시 30분에서 정오, 오후 1시 30분에서 5시까지 개관한다. 로마 시대의 조각 작품 등을 전시했다.
원형극장(The Theatre) 이 도시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보존상태가 좋은 원형극장이 으뜸으로 꼽힌다. 2세기 하드리안(Hadrian) 황제 때에 지은 원형극장은 3세기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시대에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관중석은 2층으로 되어 있고 1층에는 20줄, 2층에는 25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한 약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극장이다. 무대는 각종 신화의 내용을 한 부조나 여러가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무대 아랫단의 아폴로 신화를 주제로 한 부조는 인근 히에라폴리스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시 북쪽 끝에는 거대한 묘지군(墓地群)인 네크로폴리스가 자리 잡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 줄잡아 수천개는 됨직하다. 소아시아 반도에서 가장 큰 묘역이라 한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석관형, 가옥형, 봉분형 등 무덤의 다양한 양식과 크기이다.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에 따라 그 규모와 장식이 다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여러 시대가 중첩되면서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조화로움인지도 모른다.
사도 빌립 순교 추모관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팔각형의 건물이 나오는데 이 건물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건물이다. 기독교의 역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하나인 사도 빌립은 말년에 히에라폴리스에 와서 전도를 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5세기경 그 무덤 위에 사도 빌립을 추모하기 위한 건물이 세워졌다. 직경 20m의 중앙 홀은 사도 빌립의 추모행사가 개최 된 곳이고 그 둘레에 팔각형 모양에 따라 8개의 기도실이 있다. 주변의 부속 건물은 교육관 혹은 손님 접대용 방이나 창고로 사용했다.
아폴로 신전(Apollon Temple) 고대 히에라폴리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은 Apollo신에 대한 숭배였다.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곳은 A.D.3세기경에 건축되어졌으며, 신전의 몇몇 기념물들은 헬레니즘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25 m 규모의 이 건물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악마의 굴, 플루토니움(Plutonium) 아폴로 신전의 남쪽 바로 곁에 위치한 한 사람이 겨우들어갈 정도의 지하동굴로서, 지옥의 신 Pluton이 이 동굴을 통해 독가스를 뿜어 냈다고 하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지하의 영계(靈界)인‘하데스’ 로 통하는 입구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래서 입구에 하계의 신인 플루토를 위한 신전을 짓기도 했다. 이 동굴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면 주위 2,000㎡에 달하는 지역에 독가스가 짙은 안개 형태로 번져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를 죽였다고 한다. 현지인들이‘진 델리이(악마의 굴)’로 부르는 굴은 유독가스가 품어져나와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자들이 독가스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위해 아폴로 신전의 사제들이 키우던 새나 다른 동물들을 돈을 주고사서 시험해 보는 통에 신전은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사제들은 이 독가스 동굴을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오직 아폴로 신전의 제사장만이 가능하고, 지옥의 신 Pluton과도 만날 수 있다고 소문을 낸 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와 지옥의 신 Pluton에게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고, 예언을 요구할 때, 제사장이 동굴로 들어가 Pluton을 만나고 온 뒤, 그 답변을 들려주고 많은 대가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눈, 코, 입을 모두 막고, 오랫동안 숨을 쉬지않는 연습을 통해 동굴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우상숭배로 간주되어 동굴은 막혀진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노천 목욕탕(Pamukkale Thermal)
이곳 주위에 수많은 호텔들이 있는데 겨울에도 노천탕을 즐길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박물관 북쪽편에 위치한 노천 목욕탕(정식명칭 Pamukkale Motel)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하며, 서서히 수영하면서 즐길 수 있는 노천 목욕탕이다. 이 노천 목욕탕에는 파손된 고대의 대리석 기둥들이 잠겨져 있다(여행참고).
분수대 2세기경에 지어진 분수대로 앞에 큰 연못이 있다. 정면은 많은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정면의 한 가운데 움푹 파인 벽면에는 연못으로 물을 흘러보내는 큰 파이프 구멍이 있다. 이 분수대는 바로 이웃하고 있는 아폴로 신전의 부속 건물이다.
고대도시의 폐허지 1 km의 긴 도로 주변에 있는 폐허된 건물들은 로마와 비쟌틴 제국의 중요한 공공건물이었다. 그곳에 이는 3개의 문은 히에라폴리 시민들이 건축하여 도미티아누스에게 헌납한 것으로 "도미티아누스의 문(Arch of Domitian)"이라고 부른다.
로마의 목욕탕(Baths) 온천 지대의 특성을 가장 잘 이용한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로마 목욕탕으로 개선문 밖 북쪽에 3세기경에 지어졌다. 이것은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로 개조되어 사도 바울에게 바쳐졌다. 열탕, 온탕, 냉탕, 탈의실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로마식 목욕탕으로 운동을 위한 부속건물과 황제가 연회를 개최하던 대형 홀이 아직도 남아 풍요로왔던 당시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 홀은 지금은 히에라폴리스의 모든 유물을 한 자리에 모은 현장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 온천수는 밖으로 흘러 파묵칼레의 기묘한 옥외 석회암 온천장을 형성했다. 섭씨 35도 정도의 온천수는 특히 피부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있다. 얼굴이 못생긴 처녀가 공주가 된다는 등, 여러 종류의 토착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피부가 거칠고,무한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젊은 여성들의 필수적인 순례지가 되었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처녀들이 자신을 정화하고 새로운 남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파묵 칼레의 온천수에 몸믈 담구는 현대적 풍속도를 연출하고 있다.
로마의 개선문(Byzantine Gate) 개선문은 3개의 통로와 2개의 둥근 탑으로 되어 있으며 그 곳에 새겨진 문자로 도미티안 황제에게 바쳐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의 아시아 총독이었던 유리우스 프론티누스에 의해 지어져기 때문에 "프론티노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200여개 석관이 있는 공동묘지(Necropolis, Cemetery) 공동묘지는 성문 밖 북쪽 문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수 천 개의 무덤은 소아시아 반도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세가지 형태의 묘가 있는데 석관의 형태는 평민들의 묘이며, 그러나 석돌집안에 선반을 만들고 그 선반위에 시신을 안치한 후 문을 닫는 묘는 대부분 부자들 묘이다. 돔 형태의 묘는 계단을 내려가면 그 안에 방이 있는데 이런 묘는 영웅들의 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소 리조트 시설이 과다할 정도로 밀집되었으며, 주말에는 예약없이 숙박 불가능하다. Polat Thermal Hotel(+90-258-271-41-10, 팩스 258-271-4092) 등. 파묵칼레 흰 절벽 위쪽에 매우 호사스러운 노천온천이 있다. Öztürk pansiyon : 나무가 많고 깨끗하며 수영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