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시아 예수의 길 (마가복음 8:22-38)
8장 22절부터 마가복음의 제 2막이 시작되는데, 제 2막의 끝은 10:52이다. 11장부터 끝(16장)까지는 제 3막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3막으로 되어 있으며, 1막은 갈릴리와 그 주변, 2막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
3막은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다.
제 2막은 처음과 끝이 유사한 수미쌍관(inclusio)의 구조로 되어 있다.
마가복음의 제 2막은 맹인 치유로 시작하고 맹인 치유로 끝난다. 그리하여 2막이 맹인 됨과 관계된 내용임이 암시된다.
2막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2막에서는 “길에서”(evn th/| o`dw/|)라는 표현이 계속 등장한다(8:27; 9:33-34; 10:17, 32, 52).
그리하여 2막은 예수의 길과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중심 주제임이 드러난다.
맹인을 치유하심 (8:22-26)
예수께서 벳새다 지역에서 맹인을 치유하신다. 맹인 치유는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여 희미하게 보게 되는 단계와
눈에 다시 안수하여 밝히 보는 단계로 진행된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 눈을 뜨게 되는 것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자들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지만, 아직 군사적 메시아로 여기는 중간 단계를 거친 후에,
고난 받아 죽고 부활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밝히 파악하게 됨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가는 이러한 유사성을 염두에 두고 맹인 치유가 두 단계로 전개됨을 묘사한 듯하다.
이사야 35:5은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라고 한다.
여기서 ‘그 때’란 문맥상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이다(이사야 35:4).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신다면 메시아를 통하여 오실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메시아 표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표적을 숨기고자 하신다. 눈을 뜬 사람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명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 표적을 보고 예수의 정체를 군사적 메시아로 오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벳새다에는 아마도 유대인들이 섞여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사야 35:5을 통하여 이 표적의 메시아적 의미를 파악하고,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에 따라 예수를 군사적 메시아로 여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치유된 사람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제자들의 예수 이해 (8:27-30)
예수께서 빌립의 가이사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는 엘리야라는 견해는 종말에 엘리야가 등장하리라는 말라기 4:5의 예언과 관련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라기 4:5).
“선지자들 중에 하나”라는 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종말에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에스드라후서(4 Ezra) 2:18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종말에 등장하는 선지자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제 종말이 왔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메시아가 등장했다고 여기진 않았다.
아마도 군사적 표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질문한다.
“당신은 메시아이십니다.” 제자들은 군사적 표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베푸신 여러 표적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다. 이것이 제자들이 무리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께서 군사적 표적을 앞으로 언젠가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군사적 승리를 가져오지 않는 메시아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당연히 군사적 메시아로서 기대되었다.
그러한 기대는 솔로몬의 시편 17:23-30에 잘 나타난다.
예수 이전에는 ‘여호와의 종’이나 ‘인자’가 메시아와 연결되지는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
제자들 역시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처럼 군사적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은 예수를 군사적 메시아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시편 2:7-9 말씀처럼 군사적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메시아가 아니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고난 받는 종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명령받은 메시아였다(마가 1:11 주해 참조).
아마도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꾸짖으셨을 것이다(30절, 헬라어 본문에는 ‘경고하다’가 아니라 ‘꾸짖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용된다).
제자들은 예수를 군사적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에, 그들의 믿음을 전파하면 진리가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군사적 메시아로 오해되는 것을 예수께서 원하지 않으셨기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전하는 것을 금하셨을 것이다.
예수를 전파하면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바르게 전하지 않으면 침묵하는 것보다 못하다.
메시아 예수의 길 (8:31-33)
제자들의 잘못된 지식을 교정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알려주신다.
예수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는 메시아이시다(31절).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꾸짖는다(32절, 헬라어 본문은 ‘항변하다’가 아니라 ‘꾸짖다’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꾸짖음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 의사를 담고 있다.
베드로의 반대는 예수께서 메시아이므로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것은 당시의 군사적 메시아 사상에 토대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보다 당시의 메시아 사상을 더 신뢰하고 있다.
당시 메시아 사상에 따르면 메시아는 군사적으로 승리한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할 수 없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기에는 예수께서는 메시아이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결코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이러한 논리 전개에 입각해서 예수께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가르침에 반대한 것이다.
베드로의 생각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에 근거해 있고, 그러한 메시아 사상은 구약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베드로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예수를 꾸짖은 데에는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토대한다(마가 1:11).
이것은 구약 성경의 계시보다 더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명확하게 드러난 더욱 최종적인 계시이다.
이러한 새 계시는 시편 2편에 나오는 메시아의 길과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길을 하나로 묶는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 인자’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의 정체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임을 암시한다.
다니엘 7:13에서 언급되는 ‘인자 같은 이’는 메시아처럼 권세를 받지만(다니엘 7:13-14),
여호와의 종처럼 고난도 당한다(다니엘 7:21, 25).
예수께서는 구약 성경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의 새 계시에 일치하는 고난 받는 메시아의 길을 가신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길을 반대하는 베드로를 꾸짖는다.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며,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고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
사탄이 예수를 유혹한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후에 광야에 나가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셨다(마가 1:13).
사탄은 아마도 군사적 메시아의 길을 택하라고 유혹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주장을 듣고 ‘사탄’이라고 부르험받으셨다(마가베드로는 지금 사탄이 서는 일을 하고 있다.)
베드로의 의도는 예수를 보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탄이 서는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사탄이 서는 일은 “인간의 일”과 일치한다. 베드로는 “인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탄의 일과 일치하고 있다.
‘인간의 일’이란 당시의 사탄이 생각하는 메시아 사상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처럼 사탄은 대다수 사탄이 빠진 시대정신 속에서 작용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따르는 길은 사탄의 길일 수 있다.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에 토대하여 기대한 승리하는 군사적 메시아 사상을 따르며
예수의 주장에 반대하다가 ‘사탄’이라고 불리고 “인간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중을 들은 베드로는 매우 억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에 반대하기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계실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동시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에 토대하여 섣불리 메시아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고려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더 심오한 계시를 주셨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예수께 깨우쳐 달라고 질문했어야 했다.
베드로의 행동은 인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길 대신에 인간의 길을 택한다. 성경 대신 자신의 판단을 택하며 사람들의 합의를 따른다.
그런데, 인본주의가 늘 이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신본주의의 탈을 쓴 교묘한 인본주의도 있다.
성경에 토대하고 성경을 믿는 많은 사람들의 합의에 토대하지만 하나님의 일에 위배될 수 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부정한다면 아무리 성경에 토대하는 주장이라 해도 그것은 인본주의이다.
예수 제자의 길 (8:34-38)
메시아 예수의 길이 어떠한 길인지 밝혀졌기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도 어떠해야 하는 지 분명해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 8:34).
고난 받는 메시아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은 고난 받는 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므로 제자들이 예수를 계속 따라가면 십자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힐 죄수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란 자기가 못 박혀 처형당할 십자가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자도를 제시함에 있어서 아무런 타협을 하시지 않는다.
아무리 예수를 따르는 시늉을 해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구하고자 한다면 목숨은 구하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된다(35절).
즉 구원을 얻지 못한다(영생은 구원을 뜻한다. 마가 10:17, 25-26 참조).
그러나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5절).
물론 목숨을 포기하였으나 잃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경우는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절대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과 반드시 구원을 얻는 사람을 대조하신다.
복음을 포기하고 목숨을 택한 자는 영생을 잃는다. 그러나 목숨을 포기하고 복음을 택한 자는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중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주신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는가?”
이처럼 짧은 인생 동안 잠시 붙은 목숨도 소중하다면 영원한 생명은 더욱 소중하다.
그러므로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영생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
목숨을 구하려다 영생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 비유는 목숨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
목숨이 천하보다 중요하다면 영생은 더더구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목숨은 천하보다 귀하다(36-37절).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포기한 사람은 천하를 포기할 수 있다.
따라서 재물이나 명예를 포기할 수 있다.
목숨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참된 제자는 재물이나 명예를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
재물이나 명예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더구나 목숨은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다. 재물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일들을 추구하고 있으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다.
그들은 베드로처럼 고난 받으러 가는 예수를 붙잡고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십자가를 향하여 가실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 뿐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는 제자의 길이 예수 믿는 길이다.
이렇게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르게 믿는 길은 없다.
제자도의 핵심은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예수와 복음을 택하는 것이다.
재물도 명예도 목숨도 모두 상대화하는 것이다. 온 천하도 상대화하고 온 천하보다 귀한 목숨도 상대화하고
예수와 복음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예수와 복음을 선택한 자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을 위해 순간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이 빠진 제자도는 거짓 제자도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지 않는 제자 훈련은 거짓 제자 훈련이다.
제자 훈련은 예수와 복음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훈련이어야 한다.
예수보다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루어지는 훈련이어야 한다.
제자 훈련은 평신도를 깨워 교회에서 목회자처럼 사역하게 하는 만인제사장직 프로그램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한 제자 훈련은 세상에서 예수처럼 고난 받으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와 복음을 따르는 훈련이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시는 예수, 어쩌면 아무 힘이 없이 보이는 예수를 부끄러워하고
승리하는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아를 추구한다면, 예수께서도 그런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38절).
죄 많은 세상에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시는 예수의 모습은 초라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부끄러워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올 때’는 다니엘 7:13(‘구름을 타고 와서’)을 암시하며 따라서 인자가 그 왕권을 받을 때를 가리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부끄럽게 여길 사람들은 예수를 자랑하지 못하고 부끄러워 한 사람들이다(38절).
38절에서 어떤 사본들(P45vid W k sa)에는 ‘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뚜스 에무스 로구스’ 대신 ‘뚜스 에무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뚜스 에무스’는 남성형이므로 “나의 사람들”(즉 나의 제자들)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비록 외증은 약하지만 문체와 문맥 등을 고려할 때, ‘뚜스 에무스’(나의 제자들)가 원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와 예수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는 제자들을 부끄러워하고,
세상에서 영광과 승리를 추구하는 자들을 예수께서는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을 예수께서 부끄러워하심을 암시한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자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제력과 권력과 학력 등을 자랑하려는 자들을 예수께서는 부끄러워하신다.
그들은 예수보다 경제력, 권력, 학력을 더 귀하게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실 때에 그들이 과연 경제력, 권력, 학력 등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38절에서 ‘인자’로 지시된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지시한다.
“그[인자]의 아버지의 영광”은 인자를 하나님의 아들과 일치시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인자”(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다니엘 7:13에 나오는 신적인 존재인 “인자 같은 이”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즉, 메시아)이시다.
그 인자는 다니엘 7:21, 25이 암시하듯이 고난당할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고난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받으신 분의 고난이다.
따라서 이 고난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할 것이다.
신현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
첫댓글 각 주 처리된 것은 제외하고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