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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39강
乃至三乘十二分敎는 皆是栻不淨故紙며
내지삼승십이분교 개시식불정고지
佛是幻化身이요 祖是老比丘니
불시환화신 조시노비구
儞還是娘生已否아 儞若求佛하면
이환시낭생이부 이약구불
卽被佛魔攝이요 儞若求祖하면
즉피불마섭 이약구조
卽被祖魔縛이니 儞若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
즉피조마박 이약유구개고 불여무사
“그대들은 의지하여 변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 삼승 십이분교마저도 모두가 똥을 닦아낸 휴지다. 부처란 허깨비로 나타난 몸이며, 조사란 늙은 비구인데 그대들이 어머니가 낳아 주신 진짜 몸이 있지 않는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군(魔群)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그대들이 만약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 아무런 일도 없느니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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乃至三乘十二分敎는 皆是栻不淨故紙며
내지삼승십이분교 개시식불정고지
삼승십이분교와 팔만대장경, 아! 우리의 세계적인 보물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삼보(三寶) 중에 하나 아닙니까? 삼승십이분교라는 것과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거야. “똥 닦는 휴지다” 이 말이야. 여기서 부정(不淨)이라는 말은 똥을 말하는 거야. 똥 닦는 휴지다. 고지(故紙)라는 말은 휴지라는 뜻입니다.
팔만대장경이 그대로 다 똥 닦는 휴지다. 이거야. 이거 놀라운 소리야. 이거!
그래서 이러한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이런 임제록을 함부로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듣는 대상들이 스님들만 두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구참 사람들만 두고 하는 소리도 아닌 그러한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임제스님께서는 누구에게든지 바로 그러한 허울을 벗겨주고, 가차 없이 허울을 난도질해서 벗겨주는, 그래서 “진정한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 “너 자신에 눈을 떠라.” “무위진인(無位眞人)에 눈을 떠라.” 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이기 때문에 이런 거침없는 표현을 합니다.
이런 표현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천하에 어떤 조사도 이런 표현을 한 사람이 없어요. 또 운문스님, 그 분의 말씀도 아주 무서운 말씀이 있는데 부처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처라고 하는데 너무 끄달려있고 거기에 빠져 있으니까 “부처에게만 빠져있었지 자기 부처는 정작 챙길 줄 모른다.” 이거지.
그래서 운문스님 같은 이들은 “ 부처님이 막 때어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부르짖었을 때, 그때 내가 왔더라면 일방에 타살해가지고 한방으로 쳐 죽여 천하를 평화롭게 했을 텐데...” 하는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무슨 살인강도라서 그런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너무 사람들이 빠져서 [진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깨우쳐주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때 아! 우리가 얼마나 경계, 부처라고 하는 경계에 빠져 있었는가? 정말 내 자신은 왜 생각하지 못했는가? 내 자신을 깨달을 줄 알아야 되는데 밖에 있는 부처! 거기에만 그냥 빠져 있으니까 그런 말 한마디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는 거죠. 여기의 이런 말도 무서운 말 아닙니까?
아, 삼승십이분교! 금이야 옥이야 하는 그런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똥 닦는 휴지라고 딱 이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알고 위해야 됩니다. 또 그렇게 알고 팔만대장경을 애지중지해야 되고 애지중지하면서도 이러한 도리를 또 알아야 됩니다. 이게 중도라! 그래서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거야. 임제스님께서 이런 말씀 하셨다고 덮어놓고 이거 뭐 똥 닦는 휴지라고 취급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또 그것을 금이야 옥이야 취급해서 푹 빠져서 헤어날 줄 몰라서도 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치우치면 안 되는 거라.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도라 구요.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 장경을 많이 가져갔어요. 그래가지고 해방이 되니까 그 사람들이 그냥 짐도 못 챙기고 도망을 갔어요. 사람들이 어느 집에 가니까 좋은 장경이 가득 쌓여 있는 거라. 보니까 이게 종이라. 이걸 어떻게 할까? 불을 지르는데도 보통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잘 타는 것도 아니고 책은... 그래서 그걸 전부 엿장수에게 무게 달아서 파는 거라.
그 엿장수에게서 고춧가루장수는 몇 권을 사가지고는 뜯어서 고춧가루 싸주는 종이로 쓰는 거야.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보고는 대장경, 그 보물 같은 대장경을 사 들이는 예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고춧가루를 담아주는 그런 종이인거야. 한편으로는 그런 종이지만 또 어떤 면으로는 아주 보물 같은 종이고. 그 양면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고 위해야 되고 또 부정할 때는 위할 줄 알면서 부정하고 그러면 치우치지 않고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하는 이런 의미죠.
佛是幻化身이요
불시환화신
부처라고 하는 것도, 뭐 부처라서 부처라고 하던지 아미타불이라 하던지 무슨 부처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환화신(幻化身)이라! 변화된 것. 환영(幻影)! 환상으로 변화된 몸이다. 이거야. 환화(幻化)! 환상으로 변화된 몸이다. 환상으로 태어나고 생겨난 몸이다.
제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죠. 홀로그램이라고! 제가 그걸 처음 봤을 때 너무 신기해가지고 ... 어떤 공간에서 사람이 막 활동하고 놀고 춤추고 하는 모습이 역력히 있는데 이렇게 만져보면 없어. 손에 안 잡혀. 그 카메라를 나한테다가 해놓으면 내가 앞에서 하는 동작이 또 있어. 그게 전부 환화야. 실재(實在)하지 않는데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祖是老比丘니
조시노비구
조사라고 하는 것이 뭐냐? 늙은 비구지 뭐 별거냐 이거지. “늙은 비구다.” 이것 참 기가 막힌 말이야. “조사라고 하는 것은 늙은 비구다.” 중이 되어가지고 나이 많으면 그게 조사지 뭐 더 이상 없어요. 더 이상 없다고... 지금 늙은 비구스님들 그대로 조사라! 그런 스님들이 다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불교가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외 무슨 보살이다, 부처다, 무슨 수다원, 사다함, 아라한,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묘각, 등각 전부 말(言)이야.
“그냥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하나 있을 뿐이지 그 외 아무것도 아니야! 전부 문자(文字)고 어떤 근기에 맞추느라고 가설해 놓은 어떤 방편설인거야. 전부 가설해 놓은 것입니다. 보리니 열반이니 해탈이니 이게 전부 가설(假說) 해 놓은 거라. “의변지경(依變之境)이다.” 하는 것입니다. “불시환화신(佛是幻化身이요 조시노비구(祖是老比丘)다.”
儞還是娘生已否아
이환시낭생이부
그대들은 또한, 이(儞), 어머니가 낳아준 사람이지 않느냐? 그대들은 또한 어머니가 나아준 사람 아니냐! 본래사람! 본래인(本來人)!무위진인(無位眞人)! 뭐 토를 붙이자면, 그대들은 진짜 무위진인, 보고 듣고 알고 느끼고 분별하는 이 무위진인(無位眞人)! 이게 본래 신(身)이다.
여기서는 어머니가 낳아준 몸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뜻으로 하는 말이고, 진짜 어머니가 낳아줬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본래 몸, 네가 가지고 있는 본래 몸이 있는데, 본래 너 자신이 있는데 무슨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그렇게 찾느냐 이것입니다.
본래신(本來身)이라고 하는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고 진정한 나! 참 나(我)인 것입니다.
儞若求佛하면卽被佛魔攝이요
이약구불 즉피불마섭
그대들이 부처를 구한다면 즉피불마섭(卽被佛魔攝), 부처라고 하는 마군이에 포섭되어 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한다면은 부처라고 하는 마군이에 포섭되고 만다.” 자기 자신은 놔두고 딴 데 가서 헤매니까. 진짜 살아있는 자기 부처는 놔두고 딴 데 가서 헤매니까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죠. 아! 임제스님께서는 참 어떤 상황이라도 냉철해요. 그 안목이... 결국은 자기 챙기는 일이지. “자기 챙기는 일” 이게 확 손에 딱 잡힐 때까지 의식적으로라도 챙기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라도! 그리고 가끔 가끔 크게 눈은 한번 씩 뜨는 거라. 이런 조사스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크게 한번씩 내 자신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혼자 몽롱하게 챙기고 있다가도 한번씩 내 자신에 대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아주 큰, 우뢰와 같은 사자후를 통해서 한번씩 눈을 확확 뜨는 것이죠. 그러면 어느 날 정말 자기 살림살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儞若求祖하면卽被祖魔縛이니
이약구조 즉피조마박
그대들이 만약에 조사를 구하면, 즉피조마박(卽被祖魔縛), 조사라고 하는 마군이에 속박됨을 입는다. “조사라고 하는 마군이에 속박되고 만다.” 부처를 구한다. 조사를 구한다. 라고 하는 것. 이 문제를 가지고도 담선법회에서도 또 이야기를 했더라구요.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 이 문제를 가지고 한참 떠드는 거라. 한참... “깨닫기를 구하는 마음” 이게 병 아니냐? 이거야.
물론 서장에서 대혜스님이 지적한 말입니다. 깨닫기를 구하는 그 마음이 대오선(待悟禪)! 대오(待悟)! 기다릴 대(待) 자예요. 이럴 때는.... “깨닫기를 기다리는 참선”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대오지심(待悟至心)” “대오선(待悟禪)” 이런 말을 쓰는데 그건 큰 병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걸 막 지적해서 “깨달으려고 참선하는 것 아니냐?” 물론 깨달으려고 참선을 하지.
“깨달으려고 하는 한 못 깨닫는다.” 깨달으려고 하는 한 못 깨닫는다. 그러더라 구요. 말로는 딱 맞지. 깨달으려고 참선하는 것은 출발은 틀림없이 그렇게 했어. 출발은 깨달으려고 참선을 했지만 화두를 드는 순간, “깨닫겠다.” “참선하겠다.” 뭐 예를 들어 “이 뭣꼬?” 라고 하는 순간부터 의심이 깊어지고 깊어질 때 거기에는 “깨닫는다.” “부처다.” “조사다.” “내가 참선을 한다.” 하는 이것마저도 뚝 끊어져 버리거든.
그것마저 뚝 끊어져버리는 것을 참선하는 사람들은 공부라고 하는데 말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은 “아, 당신들은 깨달으려고 화두 드는 것 아니냐?” “그럼, 그렇다.” 하니까 그러면 뭐냐? 대혜스님이 지적한 바는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병중에 가장 모진 병이다.” “제일 독한 병이다.” 라고 지적을 했는데 “당신들 전부 병신들 아니냐.” 그 병에 떨어져 있으니까. 그러니까 보통 수좌들은 대답을 못해요. 이것이 아닌 것 같은데...하면서도 이론이 정의가 안 되니까 대답을 못하는 거라.
그러니까 어떤 스님이 나와서 그러더라고 “당신이 한번 무(無)자 화두를 딱 들어봐라. 아니면 이 뭣꼬? 하는 화두를 들어봐라.
無!
했을 때 거기에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그걸 왜 한번도 경험해보지 아니하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래가지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그만 안 되는 거라. 그래도 “깨달으려고 하면 그건 병이다.”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동안 이건 병이다. 라고 주장을 해 쌌는 거라.
화두를 딱 들었을 때는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또 그걸 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지. 그걸 원력이라고 한참 해 쌌는데 그게 쉽게 해결이 안 되더라고... 요즈음 수능시험이 가까워졌잖아요. 며칠 안 남았지.... 범어사 도량의 염불소리를 이렇게 들어보면 수능시험이 가까워오면 볼륨이 자꾸 높아지는 거야. 100일 기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전혀 안 들리다가 차츰차츰 날짜가 50일, 60일 70일 넘어가면 볼륨이 자꾸 커지다가 요즈음은 도량을 완전히 뒤 흔들 듯이 볼륨이 커지거든. 그런 예들이 있습니다.
부전 스님이 한참 기도를 하는데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가만히 목탁소리를 낮추고 들어보니까 대학보살! 대학보살! 하더라는 거야. 얼마나 급하면 대학보살 하겠어요? 아이들 대학 보내려고 기도를 하지만 기도하는 동안에 대학 찾으면 이건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으려고 화두를 들지만 화두를 드는 동안에 깨달을 생각이 있으면 대혜스님께서 지적하신 “병중에 아주 모진 병이다.” 그러니까 화두를 들 때는 그게 없어야 됩니다.
기도를 할 때는 대학 아니라 우 대학도 없어야 된다고 그 생각이. 오직 기도일념이 되어 버려야지 거기에는 대학이니 뭐니 없어야 됩니다. 나중에는 “내가 뭐하고 있는고?” 이래야 된다고. “내가 뭐하고 있는고?” “우리 아들이 대학에 갔는가?” 이런 정도까지 들어가야 돼. 기도가 제대로 되려면...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들어가야 하는데 워낙 급해 놓으니까 그만 대학보살을 찾고... 그것은 대혜스님께서 지적한 그 병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 분별을 정확하게 해야 됩니다. 참선이 되었던지. 기도가 되었던지 결국은 하나니까. 도구가 달라서 그렇지. 일을 하는 것은 결국하나니까.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도 “부처를 구한다.” “조사를 구한다.” 는 것은 구한다는 마음이 있으면 그건 부처의 마군이라고 하는데 포섭되어버리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는 그 마음이 있는 한 조사의 마군이에 속박되고 만다. 깨닫기를 구한다고 하면 깨달음이라고 그 병에 그만 떨어지고 만다. 아이를 대학에 보낸다고 하는 그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그 마음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건 그 병에 떨어지고 만다. 기도를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 떨어져야 됩니다. 그 생각이... 여기도 마찬가지라. 또 다른 차원으로.
儞若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
이약유구개고 불여무사
“이약유구개고(儞若有求皆苦) 불여무사(不如無事)” 이것은 유명한 말입니다. 그대들이 만약 구함이 있으면 다 괴롭다. 불여부사(不如無事),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참 이건 아주 비수와 같은 말이죠. 비수와 같은 말... 구하는 것이 있으면 이건 공부고 임제록이고 무슨 견성성불이고 참선이고 다 팽개쳐버리고 이 말만 가지고 일상생활에 이끌어다 써도 다 적용이 됩니다. 이건 어디 적용 안 되는 데가 없어. “고통은 구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유구개고(有求皆苦)라. “구함이 있으면 다 괴로운 것이다.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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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 형상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有一般禿比丘하야 向學人道호대
유일반독비구 향학인도
佛是究竟이니 於三大阿僧祗劫에
불시구경 어삼대아승지겁
修行果滿하야 方始成道라하니
수행과만 방시성도
道流야 儞若道佛是究竟인댄
도류 이약도불시구경
緣什麽하야 八十年後에
연십마 팔십년후
向拘尸羅城雙林樹間하야 側臥而死去며
향구시라성쌍임수간 측와이사거
佛今何在오 明知 與我生死不別이니라
불금하재 명지 여아생사불별
“어떤 머리 깎은 비구가 있어서 학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부처님은 최고 궁극적인 경지인 삼대 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그 결과가 다 채워져서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최고 궁극적인 경지라 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80년 후에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가셨는가? 그리고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들의 생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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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이 없는 것이 참 형상이다” 진짜 형상은 형상이 없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有一般禿比丘하야 向學人道호대
유일반독비구 향학인도
어떤 머리 깎은 비구가 있어서 학인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을 향해서 말하되
佛是究竟이니 於三大阿僧祗劫에
불시구경 어삼대아승지겁
부처라고 하는 최고의 경지, 구경의 자리이니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祗劫)하면 어마어마한 세월인 것입니다. 삼대아승지겁이라고 하는 이 세월은 일 겁(一劫)만 하더라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월인데
修行果滿하야 方始成道라하니
수행과만 방시성도
수 억 만년, 수수 억만년이라고 하는 세월동안 수행을 해서 육바라밀을 그것도 골고루 닦아가지고 그 결과가 만족했을 때 방시성도(方始成道)라, 바야흐로 비로소 도를 이룬다. 교학에 상당히 이론 이론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근기들에 맞춰서 이야기를 해놨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달래야지 어떡해! 그런 것으로 달래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들어오게 해서는 더 큰 보물을 주는 것이지. 더 큰 보물을...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을 불난 집에서 꺼낼 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준다고 달래야지.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것. 좋은 것 준다고 하면 믿나? 이해도 안 가는 거야. 처음에는 자기들 마음에 딱 맞는 그런 좋은 장난감을 준다고 할 때 아이들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오면 그때는 좋은 것, 어마어마한 것. 평생 쓰고도 남을, 평생가지고 놀 그런 어마어마한 장난감을 주는 것이지요. 그게 부처님의 방편입니다.
임제록 같은 데서는 그런 방편이라고 하는 것이 싹 다 떨어져버린 그야말로 가지도 떨어지고 낙엽도 떨어져버린 나무 둥치만 딱 남아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임제록이라고 하는 것은 가지도 없어요.
잎은 말할 것도 없고, 잔가지 이런 것 싹 다 떨어져버리고 완전히 몸뚱이만 남아있는 그런 나무입니다. 그런 나무가 보기가 좋고 너무 빠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미도 없고, 경치도 없고 “본분 도리 그대로” 이니까. 그렇게 보통 머리 깎은 비구들이 생각하는데
道流야 儞若道佛是究竟인댄
도류 이약도불시구경
그대들이 만약 말하기를 “부처가 구경이다” “최고의 경지다” 그렇게 할진댄
緣什麽하야 八十年後에
연십마 팔십년후
무엇을 인연해서, 무엇 때문에, 80년 후에 어찌해서 연십마(緣什麽), 무엇 때문에 하는 그런 말이죠. 구어체가 되어서 그 당시 그냥 막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 쓰는 말이라야 법문하는 데는 설득력이 있고 박력이 있고 그렇거든요. 점잖은 문어체로 해놓으면 얼른 와 닿지 않으니까. 이런 소리를 막 쓰는 것입니다. 80년 후에
向拘尸羅城雙林樹間하야 側臥而死去며
향구시라성쌍임수간 측와이사거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간(間)에서 옆으로 누워가지고 죽었느냐 이겁니다. 부처가 최고라면 안 죽어야지. 부처가 구경이라면 그렇게 죽지 않아야 될 것이고 금강 불교신이 되어서 지금도 살아서 움직여야 될 것 아니냐? 구경이 아니다 이거지. 또 말하는 부처는 그런 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佛今何在오 明知 與我生死不別
불금하재 명지 여아생사불별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분명하게 우리가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명지(明知), “분명하게 알라.” 하는 경고하는 말입니다. 무엇이 나와 더불어 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냐. “여아생사불별(與我生死不別)” 내가 태어났듯이 자기도 그렇게 태어났고, 내가 아프듯이 자기도 그렇게 아팠고, 내가 죽듯이 자기도 그렇게 죽는다. 나와 더불어 생사가 다르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부처님의 좋은 점을 자꾸 부각시켜서 이야기를 하는데 불우하고 불행한 입장으로 보면 참으로 부처님께서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7일 만에 어머니를 잃어버렸고 남의 젖을 먹고 살았지요. 남의 젖이 오죽하겠어요? 또 무엇보다도 성도를 해서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릴 그 무렵에 가비라성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는 멸망해버렸습니다. 이웃나라에게 침범을 당해가지고 완전히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석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죠.
지금도 네팔에 가면 부처님의 후손인 석가족이 있습니다. 그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불상을 만들어서 팔아먹고 살아요. 그 인연이 묘(妙)하죠. 직업도 잘 안 바꾸고 불상 만들고, 부처님 탱화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네팔은 부처님 고향이잖아요. 사실은... 네팔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석가족이라고 해서 자기들 나름대로 긍지가 있죠. 아! 우리는 죽어도 우리 할아버지 그 덕에 산다는 것입니다. 불상 만드는 석가족이 많습니다. 그 당시, 살아생전에 자기나라도 없어져 버리고 친족들도 사정없이 몰살을 당합니다. 그러한 처참한 광경을 이야기 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랬을 때 부처님의 그 마음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경(經)도 있습니다. 유리왕이 석가족을 쳐들어갈 때, 부처님께서는 그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앙상한 마른나무 밑에 서 계셨죠. 바로 옆에는 아주 무성한 숲이 있었고. 유리왕이 지나가다가 그러한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는 그 당시 당대의 최고의 성자니까, 유리왕이 말에서 내려서 인사를 하고는
“부처님이시여! 어찌하여 저 숲 속의 그늘에서 쉬지 않고 여기 바싹 마른 나무 밑에서 이렇게 계십니까?” 하니까 “그대가 나의 나라를 쳐들어가는데 내 마음이 오죽하겠나?” “내 마음은 바싹 마른 이 나무와 같다.” 타들어가는 이 나무와 같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유리왕도 감동하여 철군을 합니다. 싹 해군(解軍)을 해버려요. 두 번째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또 부처님께서 그런 수법을 썼어요. 수법이라고 하기보다는 하여튼 그렇게 설득을 하려고 그랬어요.
침범하고 빼앗으려는 야욕을 좀 가라앉히려고 그렇게 했는데 두 번째도 역시 또 그렇게 설득을 시켰고, 세 번째는 이 사람의 욕심이 한참 동안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그런 약효가 오래가지 않았죠. 그 약효가 몇 달 동안은 있었지만 그 후 몇 달 있다가 또 쳐들어왔어요. 그때도 부처님이 부근에 있었지만 자리를 피해버렸어요. 부처님이 앞서처럼 그렇게 해도 들을 사람이 아니고 이미 지나가 버렸어. 그 약효는 다 없어져 버렸어요. 어차피 들을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첫댓글 _()()()_
감사 합니다._()()()_
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괴롭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一輪月님! 감사드립니다.._()()()_
“구함이 있으면 다 괴로운 것이다.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맙습니다._()()()_
내가 태어났듯이 자기도 그렇게 태어났고, 내가 아프듯이 자기도 그렇게 아팠고, 내가 죽듯이 자기도 그렇게 죽는다. 나와 더불어 생사가 다르지 아니하니라... 佛今何在오...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一輪月님! 감사드립니다... _()()()_
?若有求皆苦라 不如無事로다...一輪月님! 고맙습니다. _()()()_
有一般禿比丘 하야 向學人道호대 佛是究竟 이니於三大阿僧祗劫 에 修行果滿 하야 方始成道 라하니 해설 머리를 깍은 어떤 비구 들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 에게 부처는 궁극적 인 자리이니 삼대 아승지겁 동안 그,"과,"가다 채워 저야 바야흐로 도,"를 이룬다고 말해준다, 도류야 만약에 부처를 궁극인 자리라 한다면 어지하여 부처님 꼐서는 팔십년 후에 구시나가라 성 의사라 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 가셨으며 부처님이 지금은 어디에 게시는가 우리들의 생사와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한다,,,,일륜월님,,수고하셧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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