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병철·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물고기만이 아니라 그물까지 줄 때 사회복지 효과가 배가될 것이며,
돈의 속박에서 벗어나 돈의 주인이 되는 삶을 기대할 수있을 것이다.
여윳돈을 맡기는 사람에겐 돈을 불려주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겐 빌려주는 돈 심부름을 하는 금융인 생활을 40년 넘게 하다 보니 돈에 얽힌 삶의 이면을 들여다볼 때가 많다.197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됐을 때의 일이다. 과수원을 하던 아주머니가 토지를 수용당해 그 보상금을 예금하러 왔다. "큰돈을 손에 쥐게 돼서 좋겠다"고 했더니 한마디로 "돈이 원수"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편은 할 일이 없어졌으니 날마다 술타령이고 아이들은 돈 걱정 안 해도 되니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것이다. 갑작스레 생긴 큰돈이 단란했던 가정의 일상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돈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지난 2000년 한국FP협회를 설립해 CFP(국제공인 재무설계사)를 양성하고 재무설계(financial planning)를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CFP인증자가 만나는 고객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놀라운 일이 많다. 사립대학에 근무하는 K교수는 아버지가 진 빚을 갚느라 대출을 받았고, 대출이자를 갚기 위해 카드 대출로 돌려막느라 빚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K씨가 빚도 상속된다는 사실을 알고 상속을 포기했더라면 아버지가 진 빚을 대신 갚지 않아도 됐을 것이며, 카드론보다 이자가 훨씬 싼 교원공제 대출제도를 알았더라면 이자 부담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나눔의 돈 심부름을 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사는 이웃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급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감당할 만한 자산이 없어 빚을 지게 되고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다. 쓰고 남은 돈을 모으는 것이 저축이 아니라 저축할 돈부터 떼어 놓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올바른 저축 방법이란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더라면 돈이 주는 고통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돈에 얽힌 이 같은 사연들을 접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돈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돈에 대해 올바로 알고 제대로 관리하며 각종 금융제도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은 꼭 필요하다. 그런데 가정이든 학교든 사회든 어디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돈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은 주먹구구식이고, 돈이 부추기는 탐욕에 짓눌려 돈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불행도 안겨주는 '위험 물질'인 돈에 관한 한 무면허 운전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돈의 노예가 아닌, 돈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출발은 교육이다. 미국에선 1960년대 후반 재무설계 제도를 창안하여 한 개인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관리하는 일을 CFP 같은 재무설계 전문가들이 도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에 대한 재무설계 교육에도 열심이다. 1984년 민간을 중심으로 시작된 청소년 재무설계 교육에 이제는 정부까지 뛰어들었다. 미국 재무부는 2001년 재무설계 교육국을 설립했고, 백악관은 지난해 대통령 자문위원회까지 만들었으며, 일부 주정부에선 재무설계를 고등학교의 정식 교과과정으로 편입했다.
교육 내용도 한 개인의 바람직한 경제적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재무설계 교육에 대한 표준적 지침인 점프 스타트(Jump $tart)는 재무적 의사결정과 책임, 소득과 직업, 재무계획 수립과 소득관리, 신용과 부채, 위험관리와 보험, 저축과 투자 등 6개로 구분하여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재무적 참살이를 준비하게 하는 일종의 면허 교육인 셈이다.
미국에선 재무설계 교육 이외에 경제·경영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최근 들어선 재무설계 교육이 대세를 이루는 분위기다. 그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렸던 앨런 그린스펀도 "어릴 때부터 먹는 음식과 운동에 신경을 쓰면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젊은이들이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고 재무목표를 세워 돈을 저축해나간다면 돈과 관련된 고통을 피할 수 있으며, 화폐의 시간 가치 때문에 일찍 시작할수록 적은 돈으로 큰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에도 재무설계 제도가 도입된 지 어언 10년이 다 됐다. CFP 자격자들이 은행의 PB센터, 보험 및 증권사의 FP센터 등에서 고객들에게 재무설계 서비스를 해주고, 무료 강연회와 서민에 대한 봉사활동을 통해 재무설계에 대한 인식을 높여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아직 제한적이다.
때마침 정부부처와 경제단체 등이 주축이 돼 지난해 한국경제교육협회를 설립해 청소년 경제교육이란 깃발을 내걸었고, 올해 5월엔 경제교육지원법까지 만들어 체계적인 뒷받침에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교육비 축소 및 시험부담 논쟁에 휘말려 교과목 반영이 주춤거리고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영세민과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돈은 정부 예산과 민간단체의 성금을 합쳐 해마다 수십조원에 이른다. 그럴 때마다 염려되는 것은 과연 물고기만 줘서 자립을 유도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재무설계 교육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에 해당한다. 물고기만이 아니라 그물까지 줄 때 사회복지 효과가 배가될 것이며, 돈의 속박에서 벗어나 돈의 주인이 되는 삶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재무설계 교육은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