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의 《예언자》[8]-1
아이들에 대하여 (1)
칼릴 지브란에 대한 명상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의 질문은 모두 여자가 한 것이다. 남자들 역시 질문을 하지만, 그 질문은 언제나 추상적이다. 그들은
'신神'에 대하여 묻는다. 도대체 이 '신神' 이라는 친구는 누구인가? 남자들의 마음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神,천국天國과 지옥地獄등등의 수천 가지 질문들은 솔직한 질문이 아니다. 모두 추상적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삶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신神이 없이도 그대는 아주 잘 살 수 있다. 사실 그대는 잘 살아가고 있다. 신神이 존재하든 안하든 그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들을 만났다.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의견이 정반대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보면 똑같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 그들이 겪는 문제는 다 똑같다. 사랑에 대한 문제, 결혼에 대한 문제, 아이들에 대한 문제....... 그러나 책속에서는, 철학
속에서는 그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차이를 느낀 적이 있는가? 여자는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세속적이다.
여자는 땅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공허한 말장난이나 수수께끼가 아니다.
심지어 수세기 동안 여자들에게는 그러한
것을 질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온통 쓰레기로 가득 차 있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매순간 부딪쳐야만 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라나데 Ranade 박사라고 하는 현대 인도의 최고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가장 존경받고 가장 학식있는 학자요, 이론가였다. 그는 인도 최고의 철학과인 알라하바드 대학의 철학과 교수였다. 그는
늙고 정년퇴직을 했는데도 인도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질문하기 위해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찾아가 마주 앉았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떤 질문인가?"
내가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찾아왔는가?"
"그냥
당신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당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는 여섯시간이 넘도록
그를 지켜보았는데,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이 추상적인 질문만을 던지고 있었다.
"신은 존재합니까? 영혼은 실체입니까? 사후 死後에도
삶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가 그것들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이었다. 여섯 시간 가량 지난 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이가 많고 나는 젊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는 다시 못 만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평생을 시간 낭비만 했습니다. 이 여섯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이 어떤 식으로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멀리서 왔고, 또 당신은 인생을 많이 살았지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제가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말아 주십시오. 당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제 비록 당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앞으로는 그것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으니, 뭔가 진실된 것을 탐구하십시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늙었고 그대는
젊지만, 그대의 말이 옳다."
사후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 죽은 다음에도 그대가 살아있을 것인지 아닌지, 진정한 의문은 그런 게 아니다.
진정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가?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가?
자비가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은 이
귀한 존재의 보물들을 맛본 적이 있는가?
영혼이 존재하는지 않은지, 이것은 진정한 의문이 아니다. 진정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 그곳에 내면의 실체가 있는지, 아니면 당신이 단지 알맹이 없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지 탐구해 본적이
있는가?
칼릴 지브란은 추성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추상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삶의 진정한 문제들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겁쟁이들이지 철학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겁쟁이들이 세계의 사상思想을 주름잡고 있으니......
이 질문들 모두가
여자에게서 나왔다. 거기 겁쟁이들도 있었다. 배운 사람들, 성직자들, 철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물었을 때, 알무스타파는 그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자가 바보 천치라면 그 어리석은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트라가 성전에서 나와 질문을
던지자, 알무스타파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나 장 폴 사르트르,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철학자들이지 유치원 선생이 아니다. 우리는
하찮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이라구? 그것이 철학적인 질문인가? 결혼? 이것이 철학적인 질문인가? 세상의 위대한 철학 논문이라고 하는
것들을 보라. 거기에는 사랑이나 결혼이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 모든 훌륭한 논문들은 삶의
현실로 부터의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신의 존재에만 관심이 있었지,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못하였다. 그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었다.
이것들은 하찮은 문제이고, 그들은 위대한 철학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건대, 그들은 겁쟁이들이다.
한 여성이 칸트에게
물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렇다고 대답만 해주신다면 저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결혼에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온갖 종류, 온갖 나라의 책들을 뒤지는 데에 3년이 걸렸다. 그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반대하는 의견과 찬성하는 의견들이 거의 비중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인이 한명 있었다. 평생동안 같이 한 이 하인이 3년 동안 내내
그를 지켜본 뒤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대학에 강의하러 나가시면, 나는 당신이 모아 놓은 결혼 찬성과 반대의 메모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모두 그럴싸해서 당신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이론들은 아무런
힘이 없으며, 당신에게 어떤 체험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만약 양쪽의 비중이 똑같아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긍정'쪽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직접 체험을 해볼 수 있으니까요. '부정'쪽은 체험할 기회를 닫아 버립니다."
칸트는 왜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후회하며 당장에 달려가 여자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 노인이 나왔다. 칸트가 말했다.
"나는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당신은
그 여자의 부친되시는군요.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러 왔습니다." 노인은 말했다.
"너무 늦었네. 그애는 벌써 결혼을 해서 애가 둘일세. 딴
데 가서 알아보게."
그의 위대한 철학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다. 다른 위대한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왜 그들은 터무니없고 무의미한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며, 삶의 진정한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가? 진정한 문제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철학자가 된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여자가 어떻게 위대한 철학자가 되겠는가? 여자는 "우리에게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결혼과 사랑에 대하여 알고 싶어한다. 여자는 보다 솔직하다. 그래서 언제나 삶의 작은 문제들, 인생에 더
밀접한 문제들, 매 순간 부딪쳐야 하는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
정말 큰 손실이다. 세상은 겁과 두려움에 바탕을 둔 어리석은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여자의 말에 귀기울였다면, 여자의 질문이 인정되고 그래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면 인류는 훨씬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남자의 질문에는 가슴이 필요 없다. 어떻게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 그대의 가슴과 연결되겠는가? 사후의 삶은?
이것들은 모두 머리 속의 생각일 뿐이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철학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주며, 인생의 작은 문제들을 존중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삶이란 작은 문제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을 풀지 못한다면 큰 문제들은 잊어 버려라. 어떻게 큰 문제를
풀겠는가? 그대는 삶의 실제적이고 진정한 문제들에 눈뜨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큰 질문들을 묻는 것이다. 아주 주의해서 들으라. 세상의 어떤
문학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한 아름다움과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는 물건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를 소유할 수 없다. 생명은 결코 누구에게 소유당할 수 없다. 생명을 그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는 있으나, 주먹을 쥐는 순간 생명은 빠져나간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아이들을 파괴해 왔다.
아이를 소유할 수 있는가? 그대는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가? 생명은 어디까지나 풍요로운 존재의
선물이다. 그대가 그 생명이 탄생하는 도구로 선택된 것에 감사하라. 아이는 그대를 통해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대에게 소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통로였을 뿐이다. 만일 부모들이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아이들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산과 숲과 들판을 통하여 흐르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대를 통하여 세상에 나온 아이는 그대 이전에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에 왔었다. 아이의 과거와 미래에는 영원이 놓여 있다. 아이는
여러 집, 여러 도시, 여러 낯선 장소에서 살았었다. 그 수백만의 통로들 중에서 그대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아이를 존경하라.
지금까지 세상의 어떤 사회도 아이들을 존경하지 않았다. 나이 먹고, 늙고, 거의 죽은 사람들만을 존경해 왔다. 모두가 무덤에만 존경을 표시하지,
요람에는 존경을 보내지 않는다. 아이는 가장 순수한, 전혀 물들지 않은 생명이다.
「저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그들은 태초로부터 나왔다. 아이는 노인보다 생명의 근원에
더 가깝다. 노인은 죽음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음은 존경하고 숭배하면서도 생명은 온갖 방법으로 억압하고 파괴한다. 아이들이 자기를
통하여 세상에 나오지만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어떤 부모도 자신의 종교와 정치 이념과 생각을 순진 무구한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백지 상태로 세상에 나오는데, 부모들이 서둘러서 저들을 기독교인으로, 이슬람인으로, 불교신자로 만들어 버린다.
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우리 부모는 당연히 자신들이 믿는 절이나 종교집회에 갈 때면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나는 부모에게 말했다.
"그것은 부모님의 종교이고, 부모님의 절입니다. 저에 대해서는 좀더 인내를 가지시고,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저 자신의 종교와 저
자신의 절을 찾겠습니다."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아이들은 모두 자신이 태어난 가문의 종교를
믿어야 한다."
내가 말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세상의 종교를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시고, 제가 혼자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저를 불구자로 만들지 마세요.
저를 파괴하지 마십시오. 진리가 있다면 제가 그것을 찾겠습니다. 남에게 진리를 빌려 오지는 않겠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저에게 진리를 줄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이를 두고 우리는 모태신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떻게 종교를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의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대 역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가 되려면 충분한 교육과 실습을 거쳐야 한다. 그때만이 의사가 될 수 있다.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대는 아이가 의사나 교수로
태어나는 게 아님을 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신비가로 태어날 수 있는가?
나는 종교성宗教性은 발견했지만, 어떤 종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도 나에게 자신들의 사상, 자신들의 신, 자신들의 존재관을 강요하지 않은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모든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부모들에게 억압당하고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어떤 부모든지 아이를 강제하고 조건지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찾고, 탐구하고,
추구할 근본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
「또 저들이 너희와 함께 있기는 하나 너희의 소유는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세상에선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그대의 부모를 기억하는가? 그들은 그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사랑을 이용하여 그대에게 자신들의 종교, 자신들의 정치이념, 자신들의 국적과 사상을 강요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왜 분열되었는가? 누가 죄인인가? 왜 이토록 많은 국가가 생겨났는가? 왜 이토록 많은 종교가 난립하는가?
인류는
하나다. 진리도 하나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본래 얼굴을 찾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가면이 씌워지고, 사람들은 이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인 것으로 착각한 채 평생을 산다.
그대는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적이 없다.
그리스도, 고타마 붓다, 마하비라, 노자, 짜라투스트라, 이들 중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지 선택할 기회도, 선택권도 그대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대의 종교는 그대를 묶는 밧줄이다. 그대의 감옥이다. 그대의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그것들은 육신이 아니라 그대의 영혼을 묶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을 팔아 버린
사람이다.
모든 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이 이제는 노예제도가 없어졌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도 그대는 노예이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 노예제도는 형태를 달리했을 뿐이다. 더 위험해졌다. 그대가 나에게 수갑을 채운다 해도 내 정신은 자유롭다. 내 발에 사슬을 채워도 내
영혼은 자유롭다.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그대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그대의 정신을 묶는 것이다. 이것이 더 큰
죄다. 지금까지의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사랑은 줄 수 있어도,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저들은 저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저들의 생각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아직은 씨앗의 형태이다. 저들은 아직 가능성의
상태이다. 하지만 저들에게 자유와 사랑을 주면 저들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실체화된다. 그대 자신의 생각이 실체화되었을때 그대의 존재는 너무나 큰
기쁨과 충족감과 축복을 느낀다. 그대는 꿈 속에서도 그러한 것을 체험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그대의 사고
능력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그대의 가슴에서 자라고, 그대의 가슴에서 꽃피어나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좋은 의도 아래에서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죽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영혼을 죽여 버렸다.
「저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다.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는 과거에 속해 있고, 그대의 시대는 끝났다.
부모들은 미래를 느낄 수 없다. 아이들은 과거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대의 죽은 경전들을 아이들에게 짐 지우지 말라.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가질 것이고, 저들 자신의 성자聖者들을 가질 것이다. 저들 자신의 부처, 저들 자신의 그리스도를 가질 것이다. 왜 저들이
과거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가? 그들의 미래는 활짝 열려 있다.
그대 만일 그대의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대의 손길을 거두라. 저들이
강해지도록 사상을 주입시키지 말라. 그대의 사상은 저들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대의 사상때문에 저들은 자신의 길을 잃을 것이다. 그대는
저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분명한 통찰력과 눈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대의 눈에는 먼지가 낀다. 그리고 모두가
그대에게 충고를 한다. 충고란 세상에서 누구나 주면서 아무도 받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에게 의존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알무스타파가 옳다. 그대는 어제에 살고 저들은 내일에 산다. 그대가 줄 수 있는 한 많은 사랑을 주어라. 현재는 만남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별의 장소이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현재에서 그대들은 해어지기 시작한다. 나날이 그대와 그대의 아이들의 간격은 더욱더
커진다.
글쓴이 NYT대표 이청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