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천의 광이 유적들
1. 고덕천의 연혁 |
고덕천 상류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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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천(高德川)은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이성산(二聖山)을 분수령으로 광암동에서 발원하여
서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강동구의 상일동·하일동·고덕동을 거쳐 한강으로 합류하는 한강의 제1지류이다. 한강의 남쪽에서 서울시계에 포함되는
하천으로서는 제일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시 경계지점인 강동구 상일동 225번지에서부터 고덕동의 한강 합류지점까지의 유역면적은 18.82㎢,
유로연장은 7.63㎞, 평균 하폭 55m, 하상경사는 1/200∼1/600정도에 달하는 하천이다. 하천 유역의
지 | 질은 제4기 충적층, 홍적층 선캠브리아기의 경기편마암복합체에 속하는 운모편암과 고상편마암으로
현재 풍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하천에 의하여 운반·퇴적된 퇴적층이 발달하고 있다. 충적층은 한강과 합류지점에 분포하고 있으며, 홍적층은 고덕천
일대의 저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편마암류는 고덕동과 상일동의 야산 부근에 분포되어 있다. 고덕천의 지명 유래는 고려말에
이앙중(李養中)이라는 사람이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고 이곳에 와서 숨어 살면서 태조 이성계의 벼슬 제의도 거절하는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받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의 동명인 고덕동도 이러한 연유로 인해 지어진 이름이다. 고덕천은 ‘해천(蟹川)’ 또는
‘게내’·’게천’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옛날부터 이 물줄기가 맑고 깨끗하여 게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하여
이 하천의 안쪽에 있는 마을을 ‘게내안말’이라 부르는 자연부락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현재 이 하천을 경계로 하여 서쪽을 상일동, 동쪽을
하일동이라 부르고 있다. 이 지역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계속 광주에 소속되어 있다가 1963년 1월 1일부터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서울시에 편입될 당시 이 하천 주위에는 전형적인 농촌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와 같은 환경은 198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1982년부터 고덕지구 택지개발사업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발되어 많은 서울 시민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아파트단지가
집중적으로 들어서면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지하철이 명일동과 고덕동에까지 들어오면서 생활이 편리해졌고, 서울시 외곽지역으로서
공기가 맑아 시민들의 주거공간으로 인기있는 지역으로 급부상하였다. |
2. 유로환경의 변화 |
경기도 하남시와의 경계지점까지는 자연형 하천으로서 정비되지 않은 상태로
물이 흘러 내려오다
고덕천의 정비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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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경계지점에서부터는 전 구간이 축제식 인공하천으로 되어 있어 저수로를 콘크리트로
공사하여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하천의 양 옆은 콘크리트 호안 블록공사를 한 상태이며, 하일동의 농경지는 6m 간격의 보가
저수로 전면에 설치되어 있다. 보와 보 사이에는 약간의 자갈들이 있으며, 제방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자전거 도로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이
4∼5m 가량 있다. | 이 지역은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연형
하천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홍수시에 한강으로부터 물이 역류하여 고덕동 일대 농경지가 침수됨으로 인하여
하천정비에 착수하였다. 이후 1990년대 강동구 지역이 개발되면서 하천 서쪽에는 많은 아파트들이 집중적으로 건립되었고, 하천 동쪽에는 전답이
남아 있어 논농사와 밭농사가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천 수질은 하남시 상류의 물은 맑은 편이지만 하남시와 서울시의 경계지역에 쓰레기
수거장이 있고, 상일인터체인지 부근의 공장과 주택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로 인해 오염이 되고 있다. 여름철의 우기를 제외하고는 하천의 수량을 유지할
수 없어 건천화 되어 가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물고기가 살기도 힘든 하천으로 전락하였다. 하천 하류의 하일인터체인지 부근에는 도시철도공사
고덕차량기지사무소가 자리잡고 있고, 고덕천이 둘로 갈라지는 지점 동쪽에 빗물펌프장이 있다. 그리고 이 하천을 따라 동쪽으로는 판교~구리고속도로가
있어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울 이남으로 나가는 차량들이 많이 소통하고 있다. |
3. 문화유적과 시설물 |
이 물줄기의 하류에서 서쪽으로 올림픽대로를 따라 거슬러 가면 선사시대 우리의 선조가 생활했던 터전인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남아 있어 오늘날 서울시민들의 선사역사의 학습장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유적지 바로 옆 동쪽으로 조선시대의
구암서원(龜巖書院)과
옛 절터인 암사(巖寺)의 터가 남아 있으며,
바로 옆에 광주이씨의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의 신도비가 남아 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광주 이씨의 집성촌으로서 이 가문의 묘소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다.
또한 강동구에서 하남인터체인지로 가는 길목에 고덕천 못미쳐
길동 산 6번지 일대에는 길동자연생태공원이 자리잡고 있어 자연학습장으로서 시민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
1) 암사동 선사주거지 |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고덕천 물줄기 하류에서 서쪽으로 한강변을 따라
약간 내려가면 선사시대 주거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유적지는 사적 제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 즉
선사시대 가운데서도 신석기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주거지로서 서울에서 쉽게
암사동 선사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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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 볼 수 있는 장소이다. 1925년 서울에 대홍수가 일어나 많은 피해를 입었을 당시
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던 이곳 암사동도 수해를 입었는데 물이 빠져나간 뒤에
지표면에 유물이 노출되어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1967년
전국대학연합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굴이 이루어졌고,
1971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잠실주경기장을 중 |
심으로 치루어지면서 외국인에게 서울의 문화유적을 알리기 위한 계획에 따라 1984년부터
서울대학교 주관으로 재발굴 작업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선사유적공원을 조성하여 현재는 선사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주거형태를 복원하였고,
움집터를 축소하여 전시관을 마련하였다. 이에 서울시민들의 휴식처로서, 선사시대의 학습장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고 있다.
1999년부터는 선사시대의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새로운 전시관을 신축하였고, 종래에 세워져 있던 전시관도 새로 보수작업을 시행하여 유적지에
걸맞는 형태의 전시관으로 탈바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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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즐문토기
| 이 유적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도 많은 움집터와 다량의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움집은 대부분 모를 접은 네모난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한 변의 길이가 대체로 5∼6m
가량 되었다. 움집 가운데는 냇돌을 둥글게 돌려서 만든 화덕자리가 있었고, 움집의 네 모서리와 벽체를 따라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또한 움집
한쪽변에는 계단 모양의 출입시설이 있었고, 움집과 움집 사이에는 저장구덩이도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토기인 즐문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돌도끼와 그물추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채집된 숯 등을 시료로 하여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에 의하면 이 유적이
기원전 5천년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지는 서울시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학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유적지로서 서울시에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보존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
2) 암사지(巖寺址) |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암사선사 주거지 옆 강가 바위절산에 위치한 절 터이다. 백중사(伯仲寺)라고도 불려졌던 이 절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도읍을 세우고 번성하였던 시대에 세워진 절로 추정된다. 사찰은 소실되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는 없으나 1987년 4월 19일부터 5월 30일까지 동국대학교에서 발굴한 바에 따르면 신라말과 고려초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백제 때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사찰에 관하여
"백중사는 일명 암사(巖寺)이며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詩에 [절은 푸른 벼랑에 걸쳐 있으니 어느날인가 황금을 펴고 지었는가. 낙엽을 쓰는 사람은 없지만 빈 집에는 오는 손님이
있네. 산 형세는 물에 다다라 끊어졌고 물구비는 잔에 부딪혀 돌아 흐르네. 고승과 같이 말을 주고 받으니 마음은 스스로 티끌이
없어지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살펴 보면 조선시대에 이 절 부근이 매우 경치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던
곳이었고, 명찰로서 이름이 높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위축되고 성리학, 즉 유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작용하여 이 부근에
구암서원(龜岩書院)을 세움에 따라 절이 크게 위축되었다.
현재의 동 이름인 암사동의 유래가 이 절 이름과 관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
3) 구암서원(龜岩書院)터 |
이 서원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건립되어 광주인의 둔촌(遁村) 이집(李集)과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을 비롯하여
정성근(鄭誠謹), 정엽(鄭曄),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을 배향하였던 곳이다. 숙종 23년(1697)에 서원의 현판을 국왕이 직접 써서
내려 줌으로써 이른바 사액서원이 되어 학문의 장소로서 선비들이 모여 들었으나,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전국 650여개 서원이 47개로 줄어들면서
함께 철폐되었다. 지금은 그 터에 이집의 비석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어 이곳이 구암서원 옛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
4) 광주이씨-익평공 신도비(翼平公神道碑) |
고덕천 물줄기 하류의 서쪽에 작은 산봉우리인 응봉이 자리잡고 있고, 그 옆 암사수원지 부근에 익평공신도비가 남아
있다. 이 신도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구암서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신도비는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의 신도비이다. 이극배는 광주의
향리였던 이집(李集)의 증손으로 호는 오봉(午峯), 자(字)는 겸보(謙甫)이다. 세종 때 관직에 올라 수양대군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세조의
왕위등극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으며, 판서를 두루 거쳐 성종 24년(1493) 영의정에 올라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심지가
깊고 의지력이 강하여 고위 직분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만나지 않았으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신도비는 연산군
2년(1496)에 건립된 이래 오늘날까지 자리잡고 있어 갖은 풍화를 겪어 일부가 훼손되긴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비문 전체가 양호한
상태이다. |
5) 광주이씨 諱唐공의 손녀 사위인-
강릉인 유 창 신도비(劉 敞 神道碑) |
고덕천의 하남인터체인지 부근에 강릉유씨 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는 신도비가 있다.
이 신도비는 조선초기의 유명한
문신 옥천부원군(沃川府院君) 유창(劉敞 : 1352~1420)과 그의 자손들의 묘가 있는 묘역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조선후기 헌종
12년(1846)에 유창의 후손이 세운 것이며, 조선시대의 분묘제도와 석조미술을 대표할 만한 문관석(文官石) 2기, 묘갈(墓碣) 1기,
망주석(望柱石) 2기와 함께 서있다. 신도비의 높이는 2.4m이고, 폭은 52cm이다.
헌종 때 이조판서와 홍문관 제학을 지낸 이광정(李光正)이
문장을 짓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낸 이의익(李宜翼)이 썼다. 유창의 14대 자손인 유석(劉錫)이 진잠현감으로 있을 때 조상들의 문헌을
간추리고 모아서 이광정에게 부탁하여 비문을 작성하였다. 1995년 1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유창의 호는 선암(仙庵), 원래 이름 이외에 사람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겨 따로이 부르는 이름인 자(字)는 태화(太和)이며 어려서는
경(敬)이라 불렀다. 본관은 강릉이며 우의정으로 추증된 유천봉(劉天鳳)의 아들이다.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이 창건될 때
태조 이성계를 도와 추충협찬개국공신(推忠協贊開國功臣)이 되었으며 예문관 대제학·판한성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천성이 부드럽고 너그러웠으며
사람들은 당나라 위사덕(委師德)에 견주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죽은 자를 기려 붙혀주는 시호(諡號)는 문희(文僖)이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이다. 이러한 제도는 중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왕릉의 신도비로서는 태조의 건원릉신도비와 태종의
헌릉신도비 및 세종의 영릉신도비 등이 있다. 그리고 사대부(士大夫)는 나라에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의 묘 앞 20여
미터 되는 지점에 신도비를 세웠다. 대체적으로 정2품 이상의 고위관리를 지내고 뛰어난 업적과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신도비를 세워
주었다. 그런데 유창 신도비는 그가 살았던 조선초기 당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14대 후손에 의해 세워진 점에서 다른 일반 신도비와 약간
다르다. 또한 그 내용은 유창의 생애와 업적을 여러 문집에 기록된 것을 바탕으로 기술하였으며, 조선초기의 역사적 사실과 유창의 후손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신도비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강릉인 유창은 광이의 여서이다. |
6) 길동자연생태공원 |
이 공원은 서울시 강동구 길동 산 6번지 일대, 즉 천호대로를 따라 상일인터체인지로 가는 길에서 길동사거리를 지나
대흥사 옆 사거리에서 성산봉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계획에 따라 조성되어 서울시민과 학생들에게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자연생태계 학습장 및 체험공간을 제공하며, 생물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고 시민들에게 건강한 녹지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도시환경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전체 면적은 80,683㎡(24,487평)로 탐방객을 위한 안내소와 자연적인 개울·관찰을 위한
장소·저수지·조류관찰대·초가집·자연탐방로·야외관찰대·야외강의장 등 시설이 있고, 수목 64종 31,846주와 야생초화류 138종
188,357본이 자리잡고 있다. 1971년 도시계획시설이 결정된 이후 1997년 9월에 생태공원지구 실시계획 인가가 나서 1998년 12월
14일 생태공원이 준공되었다. 생태공원은 자연관찰 및 학습을 위하여 공원녹지를 생태적으로 복원·보전하며, 이용자들에게 식물·동물·곤충들이
자연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제공된 장소를 말한다. 생태원리적 측면에서 보면 생태계 질서에 의해 스스로 유지되며
건강한 야생경관을 도입하고 최소 에너지 투입에 의해 유지·관리가 가능하도록 조성된 공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태공원의 기능은 다양한 소생물권을
형성하고, 서식처를 보호하며, 자연관찰 활동공간을 제공함은 물론 정보제공 및 자연복원에 대한 연구와 전파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태공원은 도시의 팽창과 개발에 따른 환경문제의 대두, 물리적 인공환경에 대한 가치 구조 변화로 자연환경에 대한 선호도 증가와 욕구 충족,
경제적 측면에서 비용 절감 등의 이유로 공원의 새로운 유형인 생태공원이 대두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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