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에 지인과 대화 중에 "함께 맞는 비'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신문 기사를 보던 중에 우연히 노회찬 전 의원 사무실에 걸려 있는
신영복 선생의 "함께 맞는 비" 휘호가 눈에 들어왔네요.
신영복 선생은 노회찬씨를 비롯한 많은 진보적 지식인이 정신적인 스승으로 모시는 분입니다.
선생은 육사 교수로 재직 중 (조작된)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수십년의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중에 나눈 서간(엽서)을 모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나왔지요.
저는 지금도 이 책의 몇 구절을 가끔 떠올리면서 제 삶을, 생활을 반성하고는 한답니다.
스물여덟에 감옥에 들어가 마흔여덟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신영복 선생은
이후 여러 저작(책, 휘호, 그림)과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계십니다.
이 분 글이 참 좋습니다.
다음은 출소 이후에 신영복 선생이 직접 "함께 맞는 비"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이 글은 옥중에서 겪은 매우 침통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일 새벽 출소를 앞둔 재소자가 내게 출소 후의 취직을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나의 대학동창 친구에게 메모를 적어달라고 하는 조심스러운 부탁이었습니다. 교도소 생활도 매우 성실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출소자의 취직을 부탁할 만한 동창생이나 친구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국가보안법으로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어떤 형태로든 연락을 취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찾아갈 사람을 소개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매우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성실하고 양심적인 출소자 한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매우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고 동창생들과 같은 지위에 있었더라면 비록 그런 능력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능력은 있되 만남이 없는 경우'와 '만남은 있되 능력이 없는 경우'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은지에 대해 한동안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1년여 동안 그와 함께 수형생활 속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결코 부질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에게 작은 우산 하나도 들어주지 못했지만 그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던 수형생활이 그에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돕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다음은 출소 이전에 쓰여진 글입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에서 -
형수님께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에 받은 약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고, 도리어 그 아프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기가 엇갈려 일어난 실패의 사소한 예에 불과하지만, 남을 돕고 도움을 받는 일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큰 것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함께 징역을 살아가는 사람 중에는 접견도, 서신도, 영치금도 없이 받은 징역을 춥게 살면서도 비누 한 장, 칫솔 한 개라도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고집 센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남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좁은 속을 핀잔하기도 하고, 가난이 만들어 놓은 비뚤어진 심사를 불쌍하게 여기기도 하고, 단 한 개의 창문도 열지 않는 어두운 마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남의 호의를 거부하는 고집이 과연 좁고 비뚤고 어두운 마음의 소치인가. 우리는 공정한 논의를 위하여 카메라를 반대편, 즉 베푸는 자의 얼굴에도 초점을 맞추어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칫솔 한 개를 베푸는 마음도 그 내심을 들추어보면 실상 여러 가지의 동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겪어서 압니다. 이를테면 그 대가를 다른 것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한 상략적(商略的)인 동기가 있는가 하면, 비록 물질적인 형태의 보상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으나 수혜자 측의 호의나 협조를 얻거나, 그의 비판이나 저항을 둔화시키거나, 극단적인 경우 그의 추종이나 굴종을 확보함으로써 자기의 신장(伸張)을 도모하는 정략적(政略的)인 동기도 잇으며, 또 시혜자라는 정신적 우월감을 즐기는 향략적(享樂的)인 동기도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기에서 나오는 도움은 자선이라는 극히 선량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조금도 선량한 것이 못됩니다. 도움을 받는 쪽이 감수해야 하는 주체성의 침해와 정신적 저상(沮喪)이 그를 얼마나 병들게 하는가에 대하여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서둘러 자기의 볼일만 챙겨가는 처사는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인간적 주체로 보지 않고 자기의 환경이나 방편으로 삼는 비정한 위선입니다.
이러한 것에 비하여 매우 순수한 것으로 알려진 '동정'이라는 동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측은지심(側隱之心)의 발로로서 고래(古來)의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정이란 것은 객관적으로는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인정주의의 한계를 가지며 주관적으로는 상대방의 문제해결보다는 자기의 양심의 가책을 위무(慰撫)하려는 도피주의의 한계를 갖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정은 동정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하는 자의 시점에서 자신을 조감케 함으로써 탈기(脫氣)와 위축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이 점에서 동정은, 공감의 제일보라는 강변(强辯)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공감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값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 가지를 부단히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징역 속에서, 제게도 저의 호의가 거부당한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비좁은 마음을 탓하기도 하였지만, 순수하지 못했던 나 자신의 저의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남의 호의를 거부하는 고집에는 자기를 지키려는 주체성의 단단한 심지가 박혀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간의 물질적 수혜에 비하여 자신의 처지를 개척해나가는 데 대개의 경우 훨씬 더 큰 힘이 되어줍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치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첫댓글 공감합니다.누구나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분이며,돕는다는것,진정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는것뿐 그래서 누구에게도 바라지도 기대지도 의지하지도 않아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것을 공감하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