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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선교네트워크 원문보기 글쓴이: 양무리
일본인의 기원 - 2 (일본인의 기원)
B. 일본인의 기원 일본인의 기원에 대하여는 기원(紀元) 전후까지 채집 경제의 단계에 있던 토착의 조몬시대인[繩文時代人:조몬시대는 일본 선사시대의 시대 구분으로 수천년 전에서 기원 전후까지에 이르는 시대]이 그 후 한반도(韓半島)로부터 도래(渡來)하여 농경문화를 보급시킨 야요이시대인[彌生時代人:야요이시대는 일본 선사시대에서 대략 BC 300~AD 300에 이르는 시대]과 혼혈하여 형질적인 변화를 이루면서 현재의 일본인의 원형을 형성하였다는 설과, 조몬시대인이 그 이후에 도래한 사람들로부터 문화적 자극을 받아서 그들 스스로가 야요이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설이 양립되어 있었습니다.
* 목차 1. 일본인 혈통 80% 한반도 등서 유래 2.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 3. 일본 야마이국의 첫왕 히미코는 가야 공주 4. 알타이諸語를 기준으로한 韓 日 양국어의 비교
1. 일본인 혈통 80% 한반도 등서 유래 日문부성 ‘유전자 프로젝트’ 책임 오모토 교수 인터뷰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아키히도 일왕이 고대 천황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혀 '한일 간 핏줄 커넥션'이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인류유전학 권위자가 현대 일본인의 형성에 한반도 이주민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신동호 기자 dongho@donga.com 2002년 2월 4일 과학동아
※ 제 생각에는 일본의 원주민은 2만년 전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이 건군된 B.C. 2000년 경에 이주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2. 일본인은 한국인의 후예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과학전문지「디스커버」지 1998년 6월호에서「일본인의 뿌리」라는 논문을 통해, "현재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일본인의 기원을 한국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건국의 뿌리는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일본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던 '야요이(彌生)문화'가 있다.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 말기에 한민족이 동(東)으로 대이동을 하여 일본에까지 가서 정착하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부합되는 것이다.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문화는 특히 한반도 남부 지방 사람들이 일본 규슈(九州)지방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것이다. 이들 청동기는 일본열도에 이주한 한민족이 만든 것이 분명함은 한국과 일본열도 두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극명하게 그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 일본 북규슈(北九州) 사가(佐賀)현에는 단군조선 말기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시대 유구지가 있다. 일본은 1994년 야요이시대 유구지를 컴퓨터로 당시의 모습을 추리, 완벽하게 복원해 놓고 있다고 한다. 야요이문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서북규슈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말기에는 훗카이도 일부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지역에 확산되었다. 야요이문화의 연대는 그 발상지인 규슈지방의 경우 서기전 3세기(지금부터 2300여년 전)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1987년 발행된 도쿄대 인류학 잡지의 영문판《고대일본 이주자 수 추정》이란 하나하라(埴原和郎) 인류학자의 주장을 보면,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한국개척자들)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지방은 도래인들이 거의 전부다.", "따라서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다"라는 '추정통계 보고서'를 발표하여 대량집단이 이주한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라시대는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문화 말기(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 즉 '한ㆍ일 관계사'에서 그 기원은 일찍이 '단군조선' 말기의 민족의 대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군조선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본열도는 대부분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이룩되어 왔는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단군조선인들을 비롯 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계라는 것은 이미 밝혀져 왔고, 또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와 삼한 등에 이어, 가야인들은 고구려ㆍ백제ㆍ신라보다 앞서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대거 이주, 선주(先住)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 전역을 장악, 고대 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이 그들의 일왕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분들을 비롯 당시 지배자들의 묘제는 3∼4세기에 걸쳐 성행했던 '가야고분'의 형태이며 5세기 중엽부터는 백제 전기의 석실분이 나타난다. 일본 일왕 즉위식에서 전달되는 일왕가의 삼종신기(三種神器)라는 이른바 동경(銅鏡), 동검(銅劍), 곡옥(曲玉) 역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에 의심을 하는 한ㆍ일학자는 없다. 이 세가지는 가야의 고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대마도와 북규슈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오키노시마(沖ノ島)'는 고대유물의 정창원(正倉院)으로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가야계'가 틀림없으나 일본 사학자들이나 궁내청(宮內廳)은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며 무더기로 출토된 국보급 유물들에 대해 일본 궁내청은 오키노시마에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이 오키노시마는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이처럼 일본은 고대 유적지 발굴 특히 일왕가와 연관된 유적조사는 금기로 하고 있다. 출토물들이 1만여점이 넘는데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있다.
그러나 가야(伽倻)는 그간 한국사에서 가야사가 많이 누락된 채 엮어져 왔다. 최근 김해지방 고분에서 가야 유물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 공백이 급속히 메워져 가고는 있지만 옛 문헌으로는 단지 ≪삼국사기≫에 그 일부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짤막한 내용만이 소개되어 있다. 가야는 서기 42년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의해 건국되어 520년간 존속하다가 서기 562년 신라에 병합되기 전 까지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국시대를 이루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철기문화를 꽃피우며 김해만을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일본에 진출해 일본왕실의 기원이 되는 등 동북아 문화의 젖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가 가야사를 포함하여 사국사기가 되어야 함에도 가야를 병합한 신라가 의도적으로 가야사를 누락시켜 버렸고, 그 후 ≪삼국사기≫ 등을 편찬하였던 고려마저도 가야사를 외면한 채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 위주로 역사를 엮어왔고, 특히 일제강점기 때 '가야사'는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왜곡ㆍ말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일본 일왕가의 본관 감추기, 즉 일본의 기원인 단군조선을 비롯 "가야세력과 백제 망명정권이 일본 일왕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고문서를 불태우는 등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ㆍ말살하였다. 일제는 1915년 6월 29일 치안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독부 극비지령인 경무령을 발동하여 가야 김수로왕을 시조(始祖)로 하는 김해김씨족보 발행을 금지했고, '가야사'를 보존한 김해김씨문중을 약탈했다. 가야인들이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을 두고 일본 규슈지방으로 집단이주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야지방과 일본열도, 특히 규슈와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일본열도는 인구가 적은 미개척지였기 때문에 개척의욕이 강한 가야인들로서는 개척의 대상이 되었고, 문물이 발달한 가야인들은 성품이 온화하여 투쟁을 싫어해 좌ㆍ우에서 백제와 신라의 크고 작은 협공을 수없이 받게되자 항쟁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천지 개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93년 4월에 고려대 교우회관과 인천(경기은행 본점 대강당)에서《역사적 뿌리 탐구의 여정》의 저자인 일본인 사학자 다카모도 마사도시(高本政俊; 1928∼)가 초청돼「일본 속의 가야문화 ─ 일본 사람에게서 한ㆍ일 고대사를 듣는다」라는 강연회가 개최된 적이 있다. 다카모도 씨의 '고본(高本)'이란 성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서의 고(高)자와 일본에 건너온 것을 의미하는 본(本)자를 따서 만든 성씨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일본 각처의 지명, 신사와 절의 이름, 인명 등을 열거하면서 많은 한국인이 수차례 걸쳐 집단으로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민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의 고대 왕조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고 밝혔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일본으로 진출할 때의 경로는 어떻게 될까? 고구려는 서해를 거쳐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와 도쿄인근의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현(埼玉縣)과 도쿄를 개척하였고, 백제는 남해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긴키(近畿)평야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로 상륙하여 죽내가도(竹內街道, 다케노우치가이도)를 따라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고, 신라는 동해를 거쳐 니가타(新潟)의 사도(佐渡)섬을 거쳐 일본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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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 야마이국의 첫왕 히미코는 가야 공주 전 후 일본열도는 고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패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그후에는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규슈 지역의 발굴로 신화로만 알려졌던 것이 역사로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역사를 몇백년 앞당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흥분의 도가니에서 고대사의 진실을 밝히는 빛이 비쳐졌다. 그것도 한 줄기가 아닌 세줄기의 빛이었다. 그 빛을 받아 모든 일본인이 진실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인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첫번째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 등이 일본인의 기원으로 밝힌 기마민족설이다. 규슈 지역과 긴키 지역에서는 말재갈, 말에게 씌운 갑옷 등 무덤의 주인공이 기마민족임을 나타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와 문헌연구를 종합하여 에가미 교수는 1958년에 『일본민족의 기원』, 1967년에 『기마민족국가』라는 저서를 통해 일본의 고대국가를 세운 이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마민족임을 밝혀 일본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우리로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본으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다수 일본 학자들은 일본문화의 기원이 남방에 있다고 보았고, 이는 한국도 동일하다고 보았다. 북방에서부터 문화가 전래되었다고 한다면 한반도를 뛰어넘어 일본이 문화를 전수받을 수 없으므로 자연히 한국의 선진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남방의 해양에서 문화를 받았고 이를 다시 한반도에 전수하였다는 전제 아래, 이를 입증할 만한 것들을 내놓았고 이것이 부족하다 생각하면 날조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에가미 교수의 발표는 분명 충격이었다. 두번째 충격은 우리나라 가야 지역의 발굴이었다. 특히 대성동 고분에서는 파형동기와 갑옷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마지막 충격은 『춤추는 신녀』의 저자인 이종기씨(95년 작고)가 일본어로 쓴 『卑彌呼 渡來の謎』라는 책이었다. 그것은 앞선 두 가지 빛보다도 훨씬 강도가 컸다. 이씨는 이 책을 통하여 일본인들이 개국 시조라고 믿는 야마이국 히미코(비미호) 여왕조차 한국인이며 그것도 가야국 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1976년 일본의 이견서방(二見書房)에서 이 책을 출간하자 당시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서문을 통하여 『야마이국 문제에 한국인 연구자가 정면 으로 파고든 예는 없다. 더군다나 저자는 그 근원을 고대 인도에서 찾았고 남한에서 본 모습을 보고서는 다시 규슈의 시라누이 해안에 도달한다. 이후 그는 작고하기 직전까지 현장탐험을 계속해 새로운 자료를 보충해놓았는데, 그것이 유고작 『춤추는 신녀』를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아동문학가이기도 한 이종기씨는 식민사관학자들이 왜곡한 역사의 물줄기를 되돌려놓으려는 일념으로 돈도 명예도 없이 길고도 먼 탐사의 길을 걸었다. 민족문화의 보고인 『삼국유사』와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등을 안내자로 삼아 빌려 탄 자전거로 일본 규슈의 들판과 산속을 헤맸고, 이역만리 중국의 절 마당과 인도의 뒷골목까지 뒤졌다.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로왕릉을 상징하는 쌍어문(雙魚紋)이 일본 규슈의 신사에도, 중국 복주의 절에도, 저 멀리 인도 북동부 아요디아의 사원에도 있다는 것을 밝혀냈던 것.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수로왕비 허왕후가 실재하였음을, 그녀가 타고온 꽃가마 뱃길 또한 아시아 사람들이 서로의 지혜를 배우고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정기적으로 오고 가던 무역로이자 문화교류로였음을, 그리고 수로왕과 허왕후의 딸 비미호가 규슈로 건너가 국가를 세우고 여왕이 돼 통치하였음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는 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기록에 불신감을 보이던 우리나라 일부 사학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21세기 세계의 중심축을 꿈꾸는 동북아의 젊은이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희망과 용기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4. 알타이諸語를 기준으로한 韓 日 양국어의 비교 알타이어족은 한국어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어의 계통에 대한 연구가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되어 왔으나 쉽게 밝혀내지 못하고 몇 가지 계통설이 제기되었다. 알타이 어족과 동계라는 주장(북방계설), 드라비다어와 동계라는 주장(남방계설), 일본어와 동계라는 주장(한 일어 동계설), 인도 유럽어와 동계어란 주장(인도 유럽어동계설)등이다. 이 중에 알타이제어와 동계라는 계통설이 일반적으로 강하다. 국어를 알타이어족에 포함시킨 학자는 핀란드의 람스테트이다. 람스테트는 알타이조어의 근거지는 흥안산맥 근처라고 추정하고, 일부가 흥안산맥 동쪽으로 이동한 후 갈라져서 북쪽에는 퉁구스족, 남쪽에는 한족이 자리잡았고, 흥안산맥 서쪽으로 이동한 일부는 다시 갈라져서 북쪽에는 몽고족, 남쪽에는 터키족이 자리잡았다고 보았다. * 알타이제어들의 공동특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모음조화현상이 있다. 어두와 어말의 자음에 제약이 있다. (어두에 유음r이나 자음군이 오지 않으며, 어말 에도 자음군의 제약이 있다.) 교착성이 뚜렷한 첨가어이다. 모음교체 및 자음교체가 없다.(첨가어이므로 접미사(어미나 토)에 위하여 단어가 파 생되거나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고, 인구어처럼 모음이나 자음의 교체가 문법적 기능 을 가지지 않는다.) 관계대명사 및 접속사가 없다.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가 다양하다.(특히, 부사형어미의 사용으로 접속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 유럽어에서 두 용언은 접속사로 연결되지만 국어와 알타이어에서는 선행용언의 어간에 부사형어미를 첨가시켜 연결한다.) 주어가 서술어 앞에 오고, 수식어가 피수식어 앞에 오고, 목적어나 보어가 서술어 앞에 온다.
명사에 性, 數표지가 없고, 동사에도 性, 數가 나타나지 않는다. 성, 수는 접사나 단어의 첨가로 나타낸다. 위에서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와의 공통점은 대부분 일본어의 경우에도 적용이 된다. 다만 모음조화에 관한 것이 확실치 않다. 고대 일본어에 모음연결에 관한 제약규칙이 있었음이 드러나 있으나 이것이 알타이제어나 한국어에서 볼 수 있는 모음조화연상의 잔영인지는 결정하지 어렵다. 또 한가지 차이점은 일본어의 음절이 開音節으로서 모두 모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알타이제어 및 한국어에서는 자음으로 끝날 수 있다.
알타이제어에서는 형용사가 명사의 일종으로 명사와 같은 曲用을 하는데 비해 한국 어와 일본어는 동사의 일종으로 명사에 접합하는 부속인칭어미나 반조어미가 없다. 술어에 접미하는 인칭어미가 없다. こ そ あ ど 지시어체계가 近 中 遠의 3계열. 용언의 활용체계의 내부에 경의적인 형태소가 들어감. [r], [l]의 음운적 구별이 없다.
15 6세기 한국어 자료에는 악센트표기가 있는 것이 있는데 현재 일부 방언에 高低악 센트가 행해지고 있다.
알타이제어와 한국어 및 일본어의 비교방법은 각 어군의 고대자료가 많지 않으며, 많은 언어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소멸하여 연구 방법을 적용하기에 많은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李基文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어와 일본어의 사이에는 소멸된 '잃어버린 고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