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현재(우일서당)
소재지 : 정읍시 북면 남산리 614 (이문마을)
시대 : 조선시대
교통 : 역, 터미널에서 북면행 시내버스로 20분, 승용차로 15분
옛부터 고부(古阜)의 인물을 배출한 우일서당(雨日書堂)이다. 그 창건년대(創建年代)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물들의 연대를 보아서 오래된 것으로 여긴다.
모현재의 유래는 남산동 백발회(南山洞 白髮會)에서 비롯된다. 일찍이 우계 이광(덕수인, 雨溪 李洸: 壬辰亂에 全羅觀察使 역임)이 고향에 돌아와 향노(鄕老)들[양졸당 김현룡(청도인, 정유재란시 의사활동), 전의 이씨 등]과 남산동 백발회를 만들어 향풍(鄕風)을 길렀으며 불우(不遇)한 충의지사(忠義志士)들이 은거 하며 자적(自適)한 곳이다.
뒤에 인조(仁祖)때 명신(名臣)이 택당 이식(澤堂 李植)이 종조(從祖)인 양계 이광의 백발회 유적(遺績)을 이어 백발계(白髮契)를 조직하고 향약(鄕約)을 실천했다.
세월이 지나 우일서당이 침체하여지자 우일동민(雨日洞民)들이 택당 이식 소은 신천익(素隱 愼天翼), 덕원 배명순(德源 裵命純), 청호 이안진(淸湖 李安眞)등 선현(先賢)들을 추모하여 동계전(洞契錢)으로 1811년(순조 11年 辛未 )에 지금의 건물을 세우고 모현재라 불렀다. 그리고 한말(韓末)에는 일제(日帝)의 침입(侵入)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보니 우국충정(憂國忠情)에 불타는 9인(人)의 선비들이 모여 구노회(九老會)라 했다.
모현재에서는 향풍(鄕風)을 기리는 뜻에서 매년(海年) 효자(孝子) 효부(孝婦)를 표창하고 있다.
모현재 뜰에는 다음과 같은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白髮會結賢遺墟碑 (崇禎紀元後四壬戌五月(哲宗 13年 1802))
九老會結義碑 (甲午年(高宗 31年 1894))
兩日慕縣齋儒契員紀事碑 (檀紀四二八三年 庚寅)
慕賢齋仰止會碑 (檀紀四三○一年 戊申(1968))
백발회 결현유허비각 [ 白髮會結賢遺墟碑 (崇禎紀元後四壬戌五月(哲宗 13年 1802))]
모현재의l 뜰에 비각이 있다
백발회 인물은 다음과 같다.
신운익(申雲翼:平山人 奉事) 장언룡(張彦龍:昌寧人 參奉) 이안직(李安直:德水人 吉州牧使) 김위남 (金緯南:扶寧人) 김진남(金震南:扶寧人, 參奉) 조극눌(趙克訥:金堤人 호:義庵 進士) 홍성미(洪成美:南陽人 主簿) 신천기(申天紀:平山人 主簿) 홍호연(洪浩然:南陽人 僉知中樞府使) 이안진(李安眞:德水人 호:淸湖 忠敬公) 조극심(趙克諶:金堤人, 溪軒處士) 김정구(金正龜:扶寧人) 김식(金鉽:淸道人) 이직(李樴:德水人 進士) 조극근(趙克謹:金堤人 大護軍) 유의남(柳義南:文化人 左承旨) 권색(權愬:安東人 忠義衛) 이식(李植:德水人 호:澤堂 文靖公) 김집(金鏶:淸道人) 장익(張翼:昌寧人 承義郞) 신천익(愼天翼:居昌人 副提學) 김응구(金應龜:扶寧人, 六隱監役) 김련(金鍊:淸道人) 조질(趙礩:金堤人 僉知 中樞府使) 이익황(李益煌: 德水人 參奉) 배명순(裵命純:星山人 贈兵曹判書) 김명구(金命龜:扶寧人) 홍의연(洪毅然:南陽人) 김성철(金成轍:淸道人) 김복룡(金伏龍:淸道人 武科) 신갑룡(申甲龍:平山人 武科) 이안분(李安分:德水人 僉知中樞府使) 이안경(李安耕:德水人 承旨) 이안빈(李安貧:德水人 營將) 신율(申嵂:平山人 寧國原從一等功臣) 이극(李極:德水人, 禿參) 신급(申岌:平山人, 振武一等功臣主簿) 이윤(李潤:全義人, 忠順衛) 신해익(愼海翊: 居昌人 호:湖山 禮曹佐郞) 신찬(申纘:平山人 호:野隱 康翎縣監) 이전수(李全秀:全義 호:時淸齋) 홍우적(洪禹績:南陽人) 홍우치(洪禹治:南陽人) 이다.
구로회결의비 [九老會結義碑 (甲午年(高宗 31年 1894))]
비는 모현재의 뜰에 있으며 구로회는 조선말엽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의 항일투쟁을 벌였던 아홉 인물로 왜정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구로회원은 다음과 같다.
이선우(李善宇:全州人 호:梧山) 이동섭(李東燮:鳳山人 호:星南)
김창식(金昌植:淸道人 호:春谷) 한예리(韓禮梨:淸州人 호:芝山)
임상규(林相圭:醴泉人 호:稼隱) 김호재(金浩載:義城人 호:醒溪)
김정식(金貞植:淸道人 호:星隱) 이기로(李騏魯:全義人 호:舟溪)
이택로(李宅魯:全義人 호:又靑)
이광(李洸)
본관 덕수(德水) 호 우계산인(雨溪散人) 충청남도 당진(唐津) 출생.1574년(宣祖 7) 문과(文科)에 급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강계부사(江界府使),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거처 1590년(宣祖 23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592년(宣祖 25) 4월 임진난(壬辰亂)에 도내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 선조왕(宣祖王)이 의주(義州)로 피란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고 돌아왔다. 이 해 5월 조정으로부터 다시 기병하라는 왕명이 있어 도내 의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6월 경기도 용인(龍仁) 싸움에서 패하고 벼슬에서 해직되고 벽동(碧童)으로 유배(1592년9월1일)되었다가 사면되어 외향(外鄕·외가(申氏)의 고향)인 고부 우일(雨日·지금 정읍시 북면 남산리;피내)로 내려왔다.1601년(宣祖 34) 동천(桐川) 기슭에 영파정(映波亭)을 세우고 인근의 선비들과 시문(詩文)으로 즐겼으니 이를 백발회(白髮會)라 하여 향풍을 길렀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1589년 2월(당시 45세)에는 군관으로 있었다.
전라순찰사 이광이 공을 불러 자기 부하로 삼았다(이광과 공은 인척 관계이다).
宣修 23卷, 22年(1589 己丑 / 명 만력(萬曆) 17年) 12月 1日(甲戌) 21번째기사
以李舜臣爲井邑縣監。 舜臣爲監司李洸軍官, 洸奇其才, 奏爲本道助防將。
柳成龍與舜臣隣居, 察其行檢, 待之以賓友, 由是知名。
登第十四年, 始除縣監, 治縣有聲績
조선왕조실록 선조(1589, 만력 17) 12월 1일(갑술)
“이순신(李舜臣)을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 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유성룡이 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과거에 오른 지 14년 만에 비로소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성적(聲績)이 있었다.”
양졸당(養拙堂) 김현룡(金見龍)
선생은 청도 김씨로 자는 문숙, 호는 양졸당이니 일재 이항(李恒)선생의 문인중 진사로 임진란과 정유재란시에 의사(義士)로 활동하였다. 효행이 깊어 선인의 뜻에 따라 선대의 묘를 서교(西郊)로부터 옮겨와 유학의 예로 모셨으며, 학업에 힘쓰고 직접 심은 소나무 7그루와 백 척 오동나무 1그루 밑 정륜(八松亭)에서 선비들과 향풍을 즐겼다. 당시 동문 수학한 매당 김점과 창의사 건재 김천일과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당세에 명망이 높아 숭유되었다. 문집이 전하여오다 후세에 화재로 소실되고 양졸당기 만이 남아 전해 온다. 후에 후손들이 우일악산(雨日樂山:현 정우면 우일리 성동마을)에 악산재를 짓고 영헌공(金之岱), 중추원부사(金時雨, 태인초대현감), 양졸당 선생을 제현하여 오고 있다.
고부군읍지 의사(義士)란에
“金見龍 號養拙堂一齋李恒之門人中進士孝行純至學力工深手植八松於溪上今稱八松亭一鄕慕仰其風”
이식(李植)
덕수이씨로 자는 여고, 호는 택당이니 1584년(선조 17) 고부군 우일면 남산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천자가 영매하여 4세에 능히 문자를 읽으니 신동이라 일컬었다.
1610년(光海 2年) 한해에 진사(進士)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617년(光海 9年)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으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왔다가 1623년(仁祖 1年)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고 대사간이 되어 실정을 논박하기도 했으며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세가 부득하여 강화문(講和文)의 기초를 의뢰해 오자 공은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층계에서 떨어져 고의로 어깨 상처를 내어 강화문의 기초를 회피했었다. 1642년(仁祖 20年) 청나라에서는 이식이 김상헌과 화의를 배척했다 하여 붙잡아 가기도 했었다. 벼슬이 대사헌, 형조, 이조에 이르렀을 때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세의 문장으로 손꼽혔다. 만년에 향리에 돌아가 종조인 우계 이광의 유적인 백발회(白髮會)를 이어받아 주자(朱子), 백록동(白鹿洞) 규약을 준수하면서 남전 여씨향약을 권장하여 향풍을 길렀으니 바로 지금의 모현재이다. 1647년(仁祖 25年) 졸하니 향년 64세였다. 후에 영의정에 증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