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메콩넷"(www.mekong.net)의 운영자인 미국 언론인 브루스 샤프(Bruce Sharp)가 저술한 것으로,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사망한 사람들의 수에 관해 연구한 이전의 주요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내용이다. 이 논문은 최초 "메콩넷"에 게시된 후 2008년 6월 10일자로 다시 최종 업데이트된 것이다. (☞ 원문보기)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지옥의 계산
크메르루즈가 죽인 캄보디아 사람의 규모 (상)
Counting Hell
저자: 브루스 샤프(Bruce Sharp)
인도에는 한 무리의 시각장애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그들은 코끼리를 만났다. 첫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몸통을 만진 후 벽이 있다고 말했다. 두번째 사람은 코를 만진 후 뱀이라고 소리쳤다. 세번째 사람은 다리를 만진 후 나무라고 주장했다. 네번째 사람은 꼬리를 만진 후 밧줄이라고 주장했다.(주1)
우리는 사물을 기술함에 있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때때로 불완전할 때가 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붙잡으면, 크기와 모양을 통해 이해하려 하지만 그 본성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바로 이것이 폴 포트(Pol Pot) 시대의 캄보디아를 묘사할 때 발생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기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그 개괄적인 내용은 알고 있다. 한 난민(Narath Tan)의 증언에 따르자면, 그것은 "지상의 지옥"(Hell on the Earth)이었다.(주2)
이러한 표현은 캄보디아의 1970년대 전체를 개괄적으로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캄보디아의 이 시기는 전쟁, 학살, 기아 등 현대의 역사에서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종종 혼동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모순되기조차 하다. 도대체 벽인가? 뱀인가? 아니면 밧줄인가?
우리가 당시의 캄보디아를 어떻게 혁명기였다고 일반화시켜 정의할 수 있겠는가? 1970년대에 캄보디아 국민들이 받은 고통을 계량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지옥을 측량할 수 있는가? 하지만 모든 혁명들에 공통적인 요소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망자 수(death toll)이다.
정의 및 가정
본고의 목적을 위해 사망자 수에 관한 논의는 사망률을 과도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즉 크메르루즈 시대의 사망자 수는 그 정권의 정책적 결과에 따른 것으로 합리적으로 이해할만한 선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크메르루즈가 정권 획득을 위해 싸웠던 캄보디아 내전 기간의 사망자 수는 이 정권의 사망자 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특히 전쟁 중 사망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그 시작점은 분명하게 1975년 4월 17일부터가 된다.
하지만 그 종결점을 고정시키기는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크메르루즈가 1979년 1월에 "공식적으로"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상당히 의미있는 규모의 인구를 그 관할권으로 계속해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979년 후반에는 기근이 겹쳤다. 이 기근은 대부분 크메르루즈의 정책적 결과로 초래된 것으로, 이로 인한 사망자수 역시 크메르루즈 정권의 사망자수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데이타 자체가 부정확하고, 그 종료점을 몇달 정도씩 차이를 두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본고는 편의상 1979년 초에 끝이 난 것이라 보기로 한다.
사망자 수 논의에 있어서, 이러한 숫자들이 여전히 단지 추정치일 뿐이란 점을 알아두는 일도 중요하다. 이러한 추정치들은 매우 폭넓게 추정한 것으로, 추정된 수가 모두 동일한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이용가능한 증거들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기존의 여러 추정치들이 제시한 숫자들이 매우 심도있게 재검토되야 함이 드러난다.
추정치의 범위
본고가 작성되고 있는 현재(2005년 4월),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사망자수 추정치들은 150~170만명 사이의 범위에 있다. 물론 자주 인용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추정치가 보다 정확하다는 법은 없다. 이러한 추정치들은 때때로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과정을 통해 그 신뢰도가 올라가기도 한다. 즉 한 저자가 논문에서 사용한 추정치를 또다른 저자가 인용표시 없이 반복하고, 그후 또다른 사람이 2편의 논문에서 공통된 수치를 보고나서, 상호간 정합성이 있다고 생각해 신뢰할만한 수치라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와 관련된 의심스런 통계들은 종종 매우 주의깊게 연구된 저술이나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것으로는 캐롤 푸찌(Carol Pucci)가 <시애틀 타임스>(Seattle Times)에 기고한 다음과 같은 글이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베트남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은 붕괴했지만, 캄보디아는 1993년 유엔이 후원하는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고립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때 3,000만명이던 인구는 지금은 단지 1,300만명이 되었고, 5인 가족 평균 연소득이 375달러에 지나지 않는다.(주3) |
캄보디아의 비극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1,700만명이나 희생됐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통계치란 때때로 눈덩어리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즉 임의적으로 도입된 수치가 광범위하게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이후 관습적 지식(conventional wisdom)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되는 경우이다. 조엘 베스트(Joel Best)는 자신의 저서 <저주받은 거짓말과 통계>(Damned Lies and Statistics)에서, "통계상의 숫자는 스스로의 생명을 갖고... 반복을 통해 직설적 사실로 여겨지게 된다. 즉 정확하고 권위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주4)
아마도 사만타 파워(Samantha Power)의 책 <지옥에서 온 문제들>(A Problem from Hell)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워의 책은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저술이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설명하는 장에서, 그녀는 "캄보디아 내전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막대하다. 약 100만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살해됐다"고 적었다.(주5) 그녀는 엘리자벳 벡커(Elizabeth Becker)의 저서 <전쟁이 끝난 후>(the War was Over)를 그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벡커는 자신의 책에서 "내전 기간 동안 론 놀(Lon Nol) 측에서 공식적으로 50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며, 크메르루즈 장악 지역에서도 60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고 적었다.(주6) 하지만 벡커 역시 이 통계치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으며, 실제 이 수치는 잘못된 통계이기도 하다.
사실 파워, 벡커, 푸찌의 저술들은 통계치 자체에 논점을 맞춘 글들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 다소 불공정한 일이 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의 사례가 좋은 표본으로서 한번 숙고해보고 확인해볼만 한 사례일 수 있기 때문에 다루어본 것이다. 숫자는 용서가 없다. 작은 실수도 매우 큰 실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통계치라 할지라도 그 숫자들이 사용된 문헌적 근거 덕분에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잘못된 통계치로부터 좋은 통계치를 분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첫번째 방법은 모든 통계치들에 대해 약간의 회의적 관점에서 접근해보는 일이다. 즉 모든 수치들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수치는 다른 증거 하에서도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본 논문은 캄보디아에서의 사망자수에 관해 널리 통용되는 일부 추정치들을 검토해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이 추정치들에 적용된 통계도출 방법론과 가정들이 건전한 방식으로 구성된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 결론이 참다웁게 그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가? 행여 이러한 추정치들에 "단 하나의 실수"라도 있다면, 그러한 과정이 최종적인 출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사항들이다.
(주3) Pucci, Carol: "Touching the soul of Cambodia," Seattle Times, 2005-2-22. http://seattletimes.nwsource. com/html/traveloutdoors/2002182157_cambodia20.html.
(주4) Best, Joel: Damned Lies and Statistic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p. 35.
(주5) Power, Samantha: A Problem from Hell, p. 100.
(주6) Becker, Elizabeth: When the War Was Over, Simon and Schuster, 1986, p.170. |
추정치들
내전 승리 직후의 크메르루즈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인권적 대참사에 대한 우려를 자아냈다. 특히 무자비하게 이뤄진 프놈펜 주민 강제소개 사건이 난민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은 캄보디아가 유혈의 고통에 신음할 수 있다는 데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프랑소와 뽕쇼(Francois Ponchaud)는 사망자 수가 100만명을 넘을 수 있다고 제안했던 최초의 인물 중 한사람이다. 그는 최악의 학살이 발생하기도 전인 1977년 중반에, "신뢰할만한 통계치는 아무도 제안할 수 없지만, 그래도 분명히 100만명은 초과할 것"이라 저술했다.(주7) 이것은 추정치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직관적 추측보다 다소 나은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이 결국은 합리적으로 참된 상상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크메르루즈 정권이 몰락한 후, 학자들은 그 손실을 추산해야 할 엄정한 임무를 시작했다. 이 재앙적 사태를 평가하려는 최초의 노력은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담당했다. CIA는 <캄푸치아: 인구학적 대참사>(Kampuchea: A Demographic Catastrophe)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1975년부터 1979년 1월 사이의 사망에 관해 다양한 그룹과 수많은 원인들을 파악한 후 그 추정치를 제시했다. 그 결론은 순-인구손실(net population loss)이 약 140만명이란 것이었다. CIA는 출산율 2.7%에 인구 1,000명당 18명의 사망율로 상정하고, 정상적인 조건하에서라면 50만명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초과사망자 수(excess mortality)는 이를 제외한 90만명으로 추산했다.(주8)
이 보고서가 채택한 방법은 상당히 직선전인 것이다. 먼저 1975년 인구수를 추정하고, 이후 이 기간 중의 여러 단계마다 다양한 사회적 계층들에 대한 출생율과 사망율을 추정했다. 또한 처형당한 사람들의 수와 이민으로 인한 인구손실도 추정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 중 어떤 것도 확실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처형당한 사람들의 숫자의 경우, 처형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계층(군인, 지식인 등등)의 인구수를 추정해 계산했음이 명백하다. 즉 아마도 이들 중 일부가 단속을 피해 달아났다는 전제하에, 처형된 사람들의 비율을 추정한 것이다. 하지만 캄보디아 상황이 느리게 안정되면서 대참사가 부인할 수 없게 되자, 많은 언론인, 학자, 이전 정권 부역자들이 생존자 대열에 대거 합류했다.
각종 연구들의 대체적인 합의점은 사망자수를 100만~200만명 사이에서 제시했다.(주9)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추정치들이 현실성이 있는 것인지 검증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론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이러한 추정치들을 상세히 검토하는 일부터 필요하다.
본 논문은 주로 4인의 연구자들이 제시한 추정치들에 그 초점을 맞췄다. 이들 분석가들은 마이클 빅케리(Michael Vickery), 벤 키어난(Ben Kiernan),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 그리고 패트릭 휴블린(Patrick Heuveline)으로, 이들은 각기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사례마다 "핵심 가정"(core assumption)이라 부를만한 요소들을 갖고 있다. 이것은 증거의 중심적인 한 부분으로서, 출발점 역할을 하는 동시에 다른 자료들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7) Ponchaud, Francois: Cambodia Year Zero, Holt, Rinehart and Winston, 1978, p.71.
(주8) Central Intelligence Agency (National Foreign Assessment Center): "Kampuchea: A Demographic Catastrophe," 1980. 이 보고서는 "http://www.mekong.net/cambodia/demcat.htm"에서 열람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분명히 해 둘 점들이 있다. 첫째 이 보고서는 대(High), 중(Medium), 소(Low)의 3가지 규모의 추정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인용하는 것은 이 중 중간규모 추정치이다. 둘째는 이 보고서에 나타난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 사이의 인구손실 통계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태국으로 피난을 떠난 난민들로 인한 손실을 포함한 것인지 아닌지가 확인이 안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보고서가 난민수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 기간 중에 단지 55,000명의 난민수만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의 여파는 결과에 매우 강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주9) 예를 들어 Elizabeth Becker의 경우, "많을 경우 200만명에 달하는" 수치를 인용했다. (When the War was Over, p.1) 반면 David Chandler는 "100만명 이상"(The Tragedy of Cambodian History, p.236)이라 말했다. |
1. 마이클 빅케리 Michael Vickery
마이클 빅케리는 1984년 그의 저서 <캄보디아 1975-1982>(Cambodia 1975-1982)에서 사망자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사망자수가 여러 연구자들이 제시한 것만큼 많지 않을 수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1975년 4월의 인구를 단순히 수용할 수는 없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당시 인구와 인구통계학적으로 수용되는 출생율을 적용한 자료들은 사망자 규모를 100만~200만명 사이로 검토한 수치들로 제시하고 있다.(주10) |
빅케리의 분석은 통계자료들로부터 재구성한 것이다. 총 사망자수는 정권 시작기의 인구와 정권 말기의 인구 차를 계산해 추정하는 것이다. 총 사망자수에서 정상조건의 사망자수를 제외한 숫자가 초과 사망자수가 된다. 그리하여 먼저 1975년의 인구규모를 추정했다.
캄보디아의 전국적인 인구센서스 통계는 1962년의 경우가 유일하다. 이 통계는 총인구를 574만명으로 보고 있다. 이어지는 해들의 공식 통계들은 1962년 통계에서 매년 인구증가율을 2.2%로 잡아서 계산했고, 1970년도 인구를 680만명으로 보았고, 1971년도 인구는 690만명으로 보았다.
보다 섬세하게 생각한다면 1970년 인구는 699만 3,000명 혹은 714만 3,000명이고, 가장 세밀하게 생각할 경우의 7가지 가능한 수치들을 고려하면, 1970년도 인구는 702만9,000명 혹은 752만 4,000명이 된다. 이 수치를 외삽법으로 보정하고자 하는 저자는 아마도 736만 3,000명이란 수치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주11) |
계속해서 빅케리는 CIA의 <캄푸치아: 인구학적 대참사> 보고서를 인용한다.
CIA는 캄보디아 인구통계에 관한 보고서에서, 1970년도의 인구를 겨우 700만명이 넘는 것만으로 설정했다. 이는 우리의 목적에 비춰 기껏해야 추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1975년 4월 17일 인구를 730만명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인구성장율과 50만명으로 본 인구손실 모두를 낮춰잡은 것이다. 또한 730만명 안에는 크메르루즈 집권 직후 베트남으로 귀국한 베트남계 주민들 20만명도 포함되어 있어, 결국 [화교와 짬족을 포함하여] 크메르루즈의 "민주 캄푸치아"인구를 710만명으로 잡은 셈이다.(주12) |
빅케리는 또한 새로운 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1981년 중반의 캄보디아 인구로 680만명을 추산했던 점을 지적했다. PRK의 통계치는 6,353,690명의 사람들을 시골에 사는 "끄롬 사마끼"(krom samakki: 고립집단)로 등록했다.
큰 도시들(프놈펜 및 밧덤벙)에는 미등록 고립집단이 30~40만명이 됐고 시골지역에서도 등록이 안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었으므로, 총인구가 680만명뿐이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또한 1979년부터 시골로 도망친 사람들을 포함하여 710만명 정도가 상정되어야 한다 1970년대 초의 연간 인구증가율 2.2%를 가정한다면, "민주 캄푸치아"(DK) 정권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수는 670만 이상이 되어야 하고, 1979년도의 증가율이 낮아졌더라도 그보다 인구는 많아야 하는 것이다.(주13) |
빅케리는 출산율이 저하됐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크메르루즈 정권이 약 74만 8,000명의 초과 사망자수를 배출했다고 결론내렸다.(주14)
하지만 빅케리의 분석은 너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즉 센서스 데이타에만 의존할 경우, 어떠한 통계치를 적용해도 추정치에는 상응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타 분석자들 중에, 특히 벤 키어난의 연구는 이같은 반대에 부딪혔다. 키어난은 자신의 추정치와 빅케리의 추정치 사이에 발생한 불일치가, 주로 1975년 인구에 대한 추정을 달리하고 있어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어넌은 자신의 저술에서 말하기를, 빅케리가 "미국 CIA가 제시한 3가지 추정치 중 캄보디아 관련 주요 인구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가장 인구가 적은 것으로 "상정한" 통계치를 무시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지속되기 어렵다"고 했다.(주15)
빅케리는 CIA가 제시한 복수의 추정치들 중 어찌하여 그 추정치를 선택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CIA의 추정치를 "본 연구의 목적을 위해 아주 좋은 추정치"라고 적었지만, 그 부분의 근거를 보강하기 위한 각주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CIA의 1975년 인구수 추정치들 중 특히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구가 많도록 된 데이타를 선택한 것은, 빅케리 스스로 CIA 보고서가 크메루즈의 범죄를 최소화시키려 했음을 인정한 셈이다.(주16) 만일 빅케리가 자신의 독자적인 논증을 신뢰했다면, 어찌하여 1975년 인구에 대해 CIA의 추정치에 의존해야만 했던 것일까? 빅케리 자신이 표현한 바대로, 만일 CIA가 "폴 포트 파의 가장 최악의 범죄를 지원했던 것"(주17)이라면, 정권 초기의 인구수를 오히려 작게 잡는 단순한 방식을 사용하여야 하고, 이후 사망한 사람들의 수도 작게 잡으면 되는 것이다. 또한 1975년 인구의 추정치에는 내전기간 중 발생한 약 50만명에 달하는 초과사망자 수 역시 고려돼야 했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역시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한편 빅케리가 추정했던 1979년도 인구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문제점이 발견된다. 이 추정치는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수를 많게 추산하려 했던 행정당국자들이 취합한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그 수치가 실제보다 과도하게 잡혔을 것으로 믿고 있다.(주18) 빅케리의 추정치는 그 외에도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즉 그가 이민이나 난민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빅케리는 또한 1979년 출생자들의 경우만 제외하고, 1981년 인구 모두를 크메르루즈 정권기로부터 생존한 사람들로 잡고 있다. 게다가 그는 20만명의 베트남계 주민들이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자마자 베트남으로 피난한 것으로 상정했다.(주19) 하지만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된 후에 그 20만명 중에 얼마만한 사람들이 다시귀국했단 말인가? 빅케리는 그들의 귀국에 대해서는 추정치에 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다 귀국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적어도 상당수는 귀국했을 것이다. 게다가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하면서 그 이전에는 캄보디아에 살지 않았던 새로운 베트남계 주민들도 이주해 들어왔음은 틀림없다. 1979년 이래로 PRK 정권에 반대하는 정파들은 캄보디아에 베트남계 인구가 너무 많아졌다고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한 바 있다. 물론 그러한 비판들이 과장됐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베트남계 주민들이 어느 정도는 유입됐다는 사실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끝으로, 과도한 사망율이 발생한 사건이 끝나면 출생율 역시 종종 정상비율을 넘어서서 증가하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점도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크메르루즈 정권 붕괴 후의 인구 추정치에 평화시의 출생율만 고려해서 생존자 수를 추정하면, 생존자 수 역시 과도하게 산정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주20) 따라서 빅케리가 1980-1981년 사이의 출생율을 2.2%로 잡은 것은 그가 1970년 인구 추정치에 반영했던 2.7%의 인구증가율과 비교할 때 너무도 낮은 것이다.
센서스 통계치들을 비교하여 사망율을 추정하는 일도 사망자수를 과소평가하게 되는 원인이되기도 한다. 인구학자들은 거의 모든 센서스 통계자료가 실제보다는 적은 수를 기록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만일 각각의 센서스 자료들 역시 과소평가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우리가 추정하는 사망자수 역시 과소평가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센서스 당시 발생한 오차 범위에서 수치를 상향조정해야만 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러한 방식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최초 재앙의 발생 시작부터 인구수를 과소평가했다면, 우리가 생존자수 역시 차감 계산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망자 중 일부가 고려되지 않았다면, 생존자 중 일부도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가장 잘 이해가 될 것이다. 먼저 시작점(1975)의 인구를 대략 790만명이라고 가정하고, 이후 생존자수가 620만명이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순 손실인구수는 170만명이 된다. 하지만 만일 각 통계치마다 3%씩 차감계산되었다고 한다면, 1975년의 실제 인구는 813만 7,000명이 되어야 하고, 1979년의 생존자수 역시 638만 6,000명이 돼야만 한다. 그 경우 순 손실인구수는 원래의 계산보다 5만 1,000명이 많은 175만 1,000명이 된다.
크메르루즈 정권 이전에 캄보디아에서 제대로 된 센서스가 실시된 것은 '1962년 센서스'가 유일하다. 따라서 이 경우 그 불일치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최초의 과소평가가 이후 13년간 거칠게 산정된 연평균 인구증가율에 의해 그 오차를 더욱 넓혔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빅케리의 추정치가 그가 연구할 당시의 제한된 자료로 인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빅케리는 그보다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다. 그는 1994년 <Z 매가진>(Z magazine)에 보낸 한 서한을 통해, "나는 아직도 내 추정치가 상대적으로 정확하다고 믿고 있다. 최근 수년간 나는 만일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보다 많은 사망자수를 산정한 쪽에 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캄보디아 총인구의 약점에 관해서라면", 어떤 통계치라도 20~30만명의 오차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비록 내가 총 사망자수가 적은 쪽을 선호하긴 하지만, 내 추정치는 100만명 혹은 그 이상의 수치를 주장한 바가 없다"고 말하고, "나는 200~300만명이 사망했다는 추정치는 인구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적었다.(주21)
빅케리는 인구 추정치 외에 다른 증거들에는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망자수 추정치는 "전적으로" 그가 인용한 통계치들의 정확성 여부에 달려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이러한 통계치들이 부정확하다는 실체적 증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주10) Vickery, Michael: Cambodia 1975-1982, South End Press, Boston, 1984, p.188. (http://michaelvickery.org/vickery1999cambodia.pdf)
(주11) Vickery, Michael, 앞의 책, p.185.
(주12) Vickery, Michael, 앞의 책, p.185.
(주13) Vickery, Michael, 앞의 책, p.186.
(주14) Vickery, Michael, 앞의 책, p.187.
(주15) Kiernan, Ben: The Pol Pot Regime, p. 457.
(주16) Vickery, Michael: letter, posted to bit.listserv.seasia-l mailing list, 2/17/1997. (Online) http://groups-beta.google.com/group/bit.listserv.seasia-l/browse_frm/thread/d214f7f2017c3b55/abb667a99b4c65c7?&rnum=2&hl=en#abb667a99b4c65c7.
(주17) 앞의 자료.
(주18) Bannister, Judith, and Johnson, Paige: p.91;, Patrick Heuveline personal communication, 4/6/2005.
(주19) Vickery, p.185.
(주20) Heuveline, Patrick, and Poch, Bunnak, "Mortality and fertility changes: Cambodia before, during, and after the Khmers Rouges," p.7.
(주21) Vickery, Michael: Letter to Z Magazine, May 9, 1994; http://web.archive.org/web/20030501180422/www. abbc.com/totus/CGCF/file41MV94.html, 접속 2005년 3월. |
2. 벤 키어난 Ben Kiernan
벤 키어난(Ben Kiernan)은 1980년대 초, 폴 포트 정권 치하의 생존자들과 일련의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빅케리의 연구는 주로 여러 시기에 조사된 인구 추정치들에 의존한 것이었던 반면, 키어난은 생존자들을 무작위로 샘플링하여 사망자 총수를 결정코자 한 것이었다. 키어난은 약 500명의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근거로, 대략 150만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주22)
키어난은 자신의 저서 <폴 포트 정권>(The Pol Pot Regime)에서, 밀턴 오스본(Milton Osborne) 역시 인터뷰를 통해 유사한 결론에 도달한 바 있음을 지적했다. 밀턴 오스본은 1980년에 태국-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위치했던 '난민촌들'에서 100명의 난민들을 인터뷰했다. 이들 난민들의 가족 총수는 대략 500명 정도였고, 그 중 128명이 크메르루즈 정권 치하에서 사망했다. 이는 대략 25%의 인구가 사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키어난은 오스본이 인터뷰했던 난민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붕괴된 인구를 정확하게 대변하진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오스본의 샘플링 난민들 중 42명은 농촌지역 출신이었고, 17명은 도시의 하층 노동자 계급이었다. 키어난은 "만일 오스본의 샘플 집단이 캄보디아 인구를 대변한다면, 25%의 사망률에 총 200만명 정도가 사망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캄보디아의 도시 인구는 20% 정도로, 오스본의 샘플에서 나타난 것처럼 58%나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도시출신자들이 더 많이 사망했기 때문에, 도시출신 인구가 많이 포함된 오스본의 샘플집단의 사망률은 실제보다 클 수가 있다는 것이다.
키어난은 또한 오스본의 조사는 정권을 잃은 크메르루즈 반군들이 통제하던 난민촌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조사대상자 중 일부는 크메르루즈 지지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포함됐을 수도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즉 이들 지지자들은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다른 이들보다 고생을 덜 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키어난은 오스본의 데이타가 "대략 150만명 정도의 사망자 추정치를 갖는 것"이라 주장했다.(주23)
스테펜 헤더(Stephen Heder) 역시 1980년과 1981년에 강도높은 인터뷰를 행했다. 헤더는 태국-캄보디아 국경지역 난민촌에서 약 1,500명의 난민들을 인터뷰했다. 헤더의 조사를 바탕으로, 키어난은 도시출신 "신인민"(new people)의 33% 정도가 사망했고, 원래부터 시골지역에 거주하던 "구인민"(base people) 중 15%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이들 중 약 절반 정도가 처형으로 사망하고, 나머지 절반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추산했다. 키어난은 "이 데이타는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전국민의 20%인 150만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주24)이라 말했다. 키어난은 "현재까지 알려진 개별 지역 공동체를 조사한 결과 역시 20% 이상의 사망률을 보여주어, 전국적으로는 160만명 정도의 사망자 발생을 추정케해준다"고 지적했다.(주25)
사망률에 근거해서 총 희생자 수를 산출하려면, 먼저 1975년의 인구 수를 추정할 필요가 있다. 키어난은 인구학자인 자크 미고찌(Jacques Migozzi)의 추정치를 인용하면서 1970년 내전이 발발할 당시 인구를 736만 3,000명이라 믿었고, 1974년 중반에 유엔(UN)이 추정한 인구수인 789만명이란 자료도 참조했다. 이후 키어난은 1975년 4월경의 인구를 789만 4,000명 정도로 추산했다.(주26) 하지만 이러한 추정치 역시 빅케리와 마찬가지로 의문의 여지가 있는 차감 계산되는 속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빅케리의 추정치는 CIA의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으로, CIA 보고서는 원래 그 이전 유엔의 추정치에 보삽법을 적용해 도출한 것이었다. 유엔의 추정치 자체도 1974년 인구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인구를 산정한 것인데, 보다 낡고 보다 적은 인구로 산정된 수치를 사용해야 할 보다 나은 이유는 없을듯하다.
키어난은 또한 빅케리의 1975년 인구 추정치가 잘못됐을 수 있다는 또다른 증거도 인용했다. 키어난은 1980년에 크메르루즈 정권(민주 캄푸치아)에서 통계 담당자로 일했던 한 전직 교사로부터 들은 바를 전했다. 그 인물은 "내가 통계를 담당하면서 아는 바는, 1975년에 약 800만명의 인구가 존재했다는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키어난은 또한 "민주 캄푸치아 정부 역시 1976년 3월에 감소된 인구인 773만 5,239명이란 수치를 방송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8월에는 733만 3,000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점차로 작아지는 인구규모는 1975년 4월 정권 수립 이후의 사망률 증가로 인한 것임이 명백하다. 이러한 2가지 자료 모두 빅케리가 1975년 4월 인구수라고 추정했던 710만명보다는 많은 것이다. 사망률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수치는 불가능한 것"(주27)이라 적었다.
키어난은 생존자 수에 대해서도 적게는 600만명에서 많게는 670만명 사이로 추산했다.(주28) 빅케리의 경우 이 중 많게 추산한 쪽(670만명)을 선호했다. 하지만 키어난의 사망률 분석은 많게 추산한 쪽이 너무 과도하게 추산한 것으로 보았고, 실제 생존자수는 오히려 최소로 추산한 쪽(600만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했다.
만일 키어난의 1975년 인구 추정치를 맞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추산한 생존자를 고려하면 총 희생자수는 119만명에서 189만명 사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1962년의 인구센서스는 키어넌의 게산에서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키어난이 빅케리보다 희생자수를 많이 추산하는 데는,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추정한 사망률이 커다란 동인이 되었다. 키어난은 사회계층별 인터뷰 대상자들을 분석한 후, 사망자수에 관해 다음과 같은 도표를 제시했다.(주29)
표 1: 캄보디아에서의 사망률 : 1975 - 1979
|
인구집단 |
1975년 인구 |
사망자 수 |
사망률 (%) |
신인민 |
도시 크메르인 |
2,000,000 |
500,000 |
25 |
농촌 크메르인 |
600,000 |
150,000 |
25 |
화교 (모두 도시) |
430,000 |
215,000 |
50 |
베트남계 (도시) |
10,000 |
10,000 |
100 |
라오족 (농촌) |
10,000 |
4,000 |
40 |
신인민의 누계
|
3,050,000 명
|
879,000 명
|
29
|
구인민 |
농촌 크메르인 |
4,500,000 |
675,000 |
15 |
짬족 (모두 농촌) |
250,000 |
90,000 |
36 |
베트남계 (농촌) |
10,000 |
10,000 |
100 |
타이족 (농촌) |
20,000 |
8,000 |
40 |
산악 소수민족 |
60,000 |
9,000 |
15 |
구인민의 누계
|
4,848,000 명
|
792,000 명
|
16
|
총인구 누계 |
7,890,000 명 |
1,671,000 명 |
21 |
출전 : Ben Kiernan, The Pol Pot Regime, p.458. | |
이러한 사망률은 621만 9,000명의 생존자를 상정한 것이고, 이는 1979년의 캄보디아 인구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범위에 들어갔다. 키어난은 "이후의 논문"(The Demography of Genocide)을 통해, 최종적인 인구 추정치를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최초에 제시했던 것보다 사망자 수가 증가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알려진 학살(genocide)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의 인구통계 자료들과 전문적인 인구학적 계산법을 통해, 1975-1979년 사이의 사망자 수가 167만 1,000명에서 187만 1,000명 사이의 규모이고, 1975년의 캄보디아 인구 중 21-24%가 사망한 것으로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주30) |
캄보디아 난민들을 연구했던 이들은 빅케리의 추정치보다는 키어난의 추정치에 더 동조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키어난의 계산방법 중 일부는 다른 증거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의문이 발생하는 부분들도 존재한다.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의 분석방법은 바로 그러한 부분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주22) Kiernan, The Pol Pot Regime, p.456.
(주23) 앞의 책, p.456.
(주24) 앞의 책, p.457.
(주25) 앞의 책, p.459.
(주26) 앞의 책, pp.456-457.
(주27) 앞의 책, p.457.
(주28) 앞의 책, p.457.
(주29) 앞의 책, p.458.
(주30) Kiernan, Ben: "The Demography of Genocide in Southeast Asia", http://www.yale.edu/gsp/publications/ KiernanRevised1.pdf. |
3. 크레이그 에치슨 Craig Etcheson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DC-Cam)는 1994년에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사망한 사람들의 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이그 에치슨은 이후 5년간의 연구결과를 정리한 장문의 논문 <그 수 : 캄보디아의 반-인도주의 범죄에 대한 계량적 연구>(The Number: Quantifying Crimes Against Humanity in Cambodia)을 1999년에 발표했다. 에치슨은 기존 학설에 대해 상당히 도발적 성격을 지닌 이 논문에서,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빅케리와 키어난의 추정치가 너무 적게 추산했다는 것에 대한 일부 증거들을 제시했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이제는 거의 신앙의 수준에까지 이른 한 조사보고서의 결론, 즉 크메르루즈 정권이 300만명 이상을 죽였다는 점을 믿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198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공론화된 것이다. 이 설에 대해 서구의 전문가들은 거의 모두가 "베트남의 선전선동"(Vietnamese propaganda)의 산물이며 정치적 목적에서 치밀하게 조작된 수치라며 평가절하해왔다.
하지만 300만명이라는 수치가 결코 조작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권은 1980년대 초에 전국적인 가구별 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이 조사는 전국적으로 각 가구의 가장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폴 포트 정권 치하에서 그들의 가정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아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폴포트 학살정권 조사위원회"(Research Committee on Pol Pot's Genocidal Regime)는 1983년 7월 25일 각 시도지방별 데이타를 담고 있는 그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폴 포트 정권기에 331만 4,768명의 인명이 손실됐다는 데이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캄보디아 내에서 곧 잊혀져갔고, 1995년까지는 캄보디아 바깥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PRK의 보고서가 발간된지 10년 이상이 지나서야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의 연구원들은 이 주목할만한 조사사업에서 많은 기록들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DC-Cam 연구원들은 당시 PRK 정권 조사위원회가 채택했던 방법을 재구성해냈고, 일부 결점들도 발견해냈다. 이러한 결점들은 희생자 수를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사위원회 인터뷰 담당자들은 1980년대 초에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통해 크메르루즈 정권기의 사망자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이 조사는 캄보디아의 친인척들이 한 가구나 한 마을을 넘어서서 산재해 거주한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고, 따라서 동일한 친인척 집단에 속하면서도 별개의 가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답했을 경우, 사망자수가 중복 계산된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주31) |
에치슨은 더 이상의 방법론적 오류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이 조사결과가 많게는 50%까지 과대평가되었을 수 있다고 하면서 희생자수를 200만명 근처로 추산했다.(주32)
한편 DC-Cam은 이러한 연구와 별도로 전국적으로 산재하는 집단매장지의 위치들을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DC-Cam의 조사팀들은 1995-1999년 사이에 약 20,000개소의 집단매장지를 확인했다. 에치슨은 "이 데이타에 따르면, 이 집단매장지들은 111만 2,829명이 처형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적었다. 더구나 이러한 수치 역시 전체가 다 포함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에치슨은 최종적인 희생자수가 "더 많아질 수도 있어서, 아마도 150만명에 달할 수도 있다"고 적었다.(주33)
그렇다면 만일 집단매장지에 남아있는 추가적인 처형된 사람들의 수가 근사치로 주어진다면, 총 사망자수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에치슨은 설명하기를, 키어난이 오스본의 데이타에서 총사망자 수 중 31%가 처형으로 사망했음을 보여줬다고 말한 점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구통계학자인 마렉 슬리윈스키(Marek Sliwinski)는 사망자 중 약 40%가 처형되었고, 36%는 굶주림(기아)으로, 13%는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투나 자연적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보았다. 또한 정치학자인 스티브 헤더(Steve Heder)는 농촌 인구와 도시 인구 사이에 처형자의 비율이 다르다는 점을 제안했다. 즉 "신인민"(도시출신) 중 33%가 처형됐고, "구인민"(농촌출신) 중 50%가 처형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촌인구만 놓고 보면, 전체 사망자 중 처형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비율은 30-50% 사이의 비율로 나타난다.(주34) |
이러한 비율을 고려하면서, 에치슨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수치들이 주는 함축적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만일 사망자 중 처형된 사람들 외의 사망원인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는 상당히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즉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죽은 사람의 수가 통상 캄보디아인들이 추정하는 330만명에 거의 근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망자 중 최소 31%가 처형으로 사망한 것이라면, 100만명 조금 더되는 사람들이 처형으로 사망한 것이고, DC-Cam이 가진 집단매장지의 처형 사망자 유해 수만 해도 이미 그 수는 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헤더의 제안 중 최대치인 농촌인구 중 처형자 비율 50%를 수용하고 향후 집단매장지에 대한 조사가 더욱 더 진행된다면, 처형으로 인한 희생자 수는 얼추 150만명 선이 될 것이다. 그 경우 폴 포트 정권기의 사망자 총수 역시 300만명 근처로 잡아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경우를 상정할지라도, 우리의 결론은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사망한 사람들의 총수가 100만명이나 200만명이 아니라, 300만명 정도가 비명에(때가 이르게, untimely)에 사망했다는 것이다.(주35) |
에치슨의 보고는 독자적인 사망자 추정치로서 300만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에치슨에 따르면, 이러한 수치는 그 개인의 의견은 아니라고 한다. 그 자신은 사망자수가 대체로 200만명에서 250만명 사이로 보고 있으며, 특히 220만명 정도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밝힌 바 있다.(주36)
그렇다면 법의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더 많은 희생자수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고려해야만 할 점은 무엇인가? 에치슨은 집단매장지로부터 알 수 있는 데이타들 속에 내재된 몇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에치슨은 빅케리의 저서 <캄보디아 1975-1982>를 인용했는데, 이 책에서 빅케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부 집단매장지들은 대량 처형사건이 발생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타 원인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총 사망자 수에서, 처형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수만을 별도로 헤아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타이(Yathay)는 1976-1977년 사이 뽀우삿(Pursat) 도에서 만들어진 집단매장지에는 대부분 병사했거나 굶어죽은 사람들이 매장되었고, 처형의 경우엔 숲 속에서 별도로 진행됐음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내전 중에 사망한 50만명의 전쟁희생자들 역시 그 일부는 집단매장지에 묻혔기 때문에, 법의학적 검사를 해보기 전에는 발굴된 유해들이 1975년 이전에 사망했는지 아니면 그 이후에 사망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주37) |
그리하여 에치슨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DC-Cam의 매핑 팀은 지난 수년간, 크메르루즈 시대에 처형이 있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지역에서만도 많은 수의 집단매장 무덤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1970-1975년 사이의 전쟁에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이거나, 혹은 굶주림으로 인한 희생자들인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1-2개소는 1979년에 베트남 침공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묻힌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집단매장 무덤들의 압도적인 숫자는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생겨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DC-Cam 매핑 팀이 찾아낸 무덤들 중에 1970-1975년 사이의 전쟁 희생자들이 묻힌 집단매장지는 2곳 뿐이다.
그리고 사실상 거의 모든 집단매장지들이 크메르루즈 정권의 보안센터에서 1 km 혹은 그보다 약간 더 떨어진 정도의 근처에 위치했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전해오는 설에는, 당시의 감옥 간수들이나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잊혀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직 크메르루즈 당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장소들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주38)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학적 데이타와 관련해서 한 가지 점은 분명하게 해둬야만 한다. 즉 유해들의 수 역시 여전히 추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치슨은 조사 팀의 경험들이 DC-Cam의 연구에 전반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사망자 수 산정에 도입된 방법론 역시 일반적으로 보수적 관점에서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키어난은 에치슨의 연구가 자신이 제시했던 사망자수 170만명보다 많은 수를 제시한 점에 대해 반박했다. 키어난은 집단매장지에 처형된 사람들이 묻혀있다고 해서, 여타 원인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묻혔을 가능성을 줄여주는 것은 아니란 점을 지적했다. 키어난은 "[에치슨은] 예를 들어 삔 야타이(Pin Yathay)가 보여준 바와 같은 부분들을 너무 간과했다. 야타이는 1976-1977년 사이에 뽀우삿 도에서 만들어진 무덤들이 처형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들을 매장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주39)고 적었다. 이는 빅케리가 지적한 바와 똑같은 언급이다.(주40)
하지만 야타이가 발견한 점이 정말로 빅케리와 키어난의 주장들을 지지해주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키어난이 주장한 바는, 야타이가 말한 바가 집단매장지에 묻힌 사람들이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했고 처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야타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야타이가 말한 뽀우삿 도의 경우가 집단매장지에 대한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야타이가 말한 매장은 실제로 봉분을 높여 만듦으로써 DC-Cam의 매핑 프로젝트가 발굴했던 집단매장지들과 유사한 것이기는 했다. (야타이 논문의 해당 구절에 대한 영어 번역본은 다음을 참고하라: ☞ 인용문 영역 바로가기)
에치슨의 보고서는 집단매장지가 처형된 사람들을 매장했다는 것이고, 기아나 질병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아니라고 가정한 것이다. 만일 야타이의 묘사에 대한 빅케리와 키어난의 해석이 맞는 것이라면, 처형으로 인한 희생자들은 숲속의 고립된 지역에서 살해된 후 그 유해는 아마도 집단매장 무덤에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이러한 시나리오를 상정하게 되면, 집단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의 수만으로도 여전히 총 사망자수는 나오지 않게 된다. 에치슨의 조사는 총사망자 수에서 처형된 사람들의 비율을 30-50%로 보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50%에 이른다면 뽀우삿 도에서 발견된 유해의 절반 역시 처형자 수에 포함되지 않은 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에치슨에 대한 키어난의 반박은 너무 지나쳤다. 키어난은 에치슨의 계산법이 "캄보디아에 관한 인구학적 데이타 모두를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벤 키어난은 "그따위 너절한 글(Such sloppiness)은 DC-Cam에 어울리지 않는 가치를 지녔다. 악몽같은 사망자들의 수를 과장하는 일은 학살 연구에 있어서 인종적 경매행위(ethnic auctioneering)에 공헌하는 것"(주41)이라 말했다. 그러나 "인종적 경매행위"라는 비판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캄보디아 학살에 관한 추정치들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 전혀 무관한 다른 비극들과 관련을 가지는 것인지 말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에치슨의 연구가 인구학적 데이타들을 무시했는가 여부에 관한 의문 제기이다. 키어난이 제기한 의문은 올바른 것인가? 맞든 틀리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에치슨은 집단매장지 매핑 관련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발굴된 유해의 수가 함축하는 의미를 요약했다.
따라서 우리는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사망한 사람들의 총수가 100만명이나 200만명이 아니라, 300만명 정도가 비명에(때가 이르게, untimely)에 사망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여기서 정확하게 단 하나의 단어가 이 문장 전체를 부정확한 것으로 만들어주는데, 바로 "비명에"(untimely)라는 표현이다. 에치슨이 특히 이 부분에서 자연사와 비-자연사 사이의 구분에서 발생하는 난점들이 처형에 의한 사망자 비율과 여타 원인으로 인한 사망자 비율에 얼마마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간과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헤더와 오스본, 그리고 키어난이 조사했던 인터뷰 대상자들이 자연사로 간주해야 될 상황과 초과사망률에 포함되야 할 경우를 구분할 능력이 있었는지에는 상당한 의문이 있다. 따라서 단지 비명횡사한 사람뿐만 아니라 "전체"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에치슨의 발언들이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쟁 전의 사망률을 고려한다면,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자연사한 사람들의 수는 대략 50만명 선이 된다.(주42) 그러므로 300만명의 사망자 중 약 250만명이 초과사망자 수가 된다. 그리고 그 중 30%를 넘는 인원이 처형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치는 인구학적 증거들과 얼마나 합치하는 것인가? 키어난이 자신의 논문에서 인용한 바 있는 인구통계학자 패트릭 휴블린(Patrick Heuveline)은 오히려 키어난 자신의 추정치가 과소 평가한 것이란 점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휴블린의 추정치는 에치슨의 추정치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주31) Etcheson, Craig: "The Number: Quantifying Crimes Against Humanity in Cambodia," http://www.mekong. net/cambodia/toll.htm.
(주32) 앞의 논문.
(주33) 앞의 논문.
(주34) 앞의 논문.
(주35) 앞의 논문.
(주36) Etcheson, Craig: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 중에서, 2003-5-6.
(주37) Etcheson, "The Number" 논문은 Vickery의 Cambodia 1975 - 1982, pp.187-188 사이를 인용하고 있다.
(주38) Etcheson, Craig, 앞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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