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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기술, 그리고 사회.
I. 노동
1) 노동의 어원: 노동 = 속박
노동이란 말의 어원은 속박과 고문이다. 프랑스어 travail의 어원은 라틴어 tri-pilium(3개의 말뚝)이다. 이 "세 개의 말뚝(tripilium)"은 소나 말에게 편자를 박을 때, 이들을 묶어 놓는 기구, 즉 말뚝을 의미한다. 'travail' 에서 노동하는 사람 travailleor이 나오고 현재의 travailleur로 변한다. travailleor(노동자)란 직공(artis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체형을 집행하는 형리, 고문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travail란 체형집행인이 죄인의 팔다리를 고문하는 것, 산모가 진통 중에 있는 것을 뜻한다. 라틴어 labor는 프랑스어 peine와 마찬가지로 노동(travail)과 고통(souffrance)을 의미한다.
노동은 본질상 자연 속에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고통스런 노력의 뜻하며, 인간의 속박과 인간의 노예상태를 표현한다. 노동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적응해야하는 냉담하고 적대적인 자연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소외의 표시이다.
그리스인들에게서 노동은 인간의 비참함을 표현하는 것이었지, 인간의 고귀함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은 동굴의 세계 즉 물질의 세계에 묶어 놓은 사슬을 의미하며, 현자의 명상은 인간이 물질세계에 매여 있다는 것을 잊고, '영혼의 눈'으로 순수한 이데아의 찬란한 빛을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Platon, 427-547 av. J-C.)의 이원론은 사회적인 이원론이다. 『고르기아스』(422bc)에서 기술자를 경멸하여 "너는 너의 딸을 그의 아들에게 주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너 자신도 그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라틴 민족도 공부하는 여가를 의미하는 otium과 노동, 직업, 사업을 의미하는 negotium을 구별하였다. 이 경우에 노동은 여가의 결여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노동은 벌(punition)이다. 「창세기」제3장에서 신은 이브에게 "너는 고통을 받으면서(en travail)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에게 "너는 네 이마의 땀으로 빵을 먹을 것이다"라고 한다.(3:16-19)
2) 노동의 의미: 노동 = 자유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노동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바꾸어 놓은 견해를 보자. 라크르와(Jean Lacroix)는 『감정과 도덕적 삶(Les sentiments et la vie morale)』에서, 노동은 소외의 표시인 동시에 소외의 치료제이다(p.72). 인간은 자연에서 이방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인간을 피조물로 보는 크리스트교의 입장이다.) 그리고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보는 데카르트(Descartes)경우에서 '노동은 우리를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주로 만든다.'
크리스트교입장에서 노동은 단순한 벌의 표시는 아니다. 노동은 속죄의 가능성을 의미한다(프로테스탄트 입장). 현대 신학자들은 노동이 죄의 대가와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조 당시에 이미 인간은 이미 이 땅에 노동을 가하고, 이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거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헤겔의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자. 여기서 노동은 구원의 수단이며 해방의 도구이라 한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운다. 하나는 용감하여,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싸움에서 졌다. 전자는 주인이 되고, 후자는 문자그대로 노예(servus: 보전된 자)가 된다. 주인은 노동하지 않고 노예의 시중(servis)을 받으면서 한가함에 빠지고, 노예는 끊임없이 일하면서 물질의 법칙을 이용하여 자연을 정복할 줄 알게된다. 이런 변증법적 전환에서 노예의 노동은 노예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 주인은 노예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주인이 노예의 노예가 된다. 노예는 자유인이 된다. 여기서 노동은 자유의 회복의 표현이다.
3) 노동과 표현: 노동과 지성 [인식론적 측면에서]
노동은 인간적 행위이며, 우리들의 지성과 자유의 구체적 표현이다. 베르그송(Bergson, 1859-1941)은 지성이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라 정의한다. (인간은 이성적 인간Homo sapiens이기 이전에 도구적 인간homo faber이다.) 자연에서 추위와 더위 그리고 위험에 떨어야 했던 인간은 자신의 수단의 불충분으로 "선사시대의 자료의 가치를 획득한다. 그래서 본능은 지성으로부터 결정적인 여가(le congé définitif)를 얻게된다(EC 143)." [신비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이 도구적일 경우에는 신비주의와 무의식이 나올 수 없다.] 도구는 수단이기 때문에 지성의 표시, 즉 도구는 우회적으로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 지성의 표시, 자연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 지성의 표시이다. 동물은 단순하게 자연 속에 나타나(présenter) 있지만, 인간은 자연을 자기 마음속에 재현(représenter)시킬 수 있다. 마르크스는 "가장 서투른 건축가와 가장 숙련된 벌과의 차이로 건축가는 집을 짓기 전에 머리 속에 집을 그린다는 점이다." 결국 노동은 물질적 결정론을 지성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며, 행동을 통하여 자연적인 장애물을 변형시키는 '이성의 술책'이다.
4) 노동의 인간적인 의미: 자연의 새로운 창조(?)
노동은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꽁트는 『실증정치학의 체계(Système de politique positve)』에서 노동이란 "인간의 힘으로 외부환경을 '유용하게' 개선하는 것이다." 노동의 인간적 의미는 노동의 유용성, 우주를 인간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노동은 아무쓸데 없기 때문에 노동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은 새로운 자연을 만든다. 그래서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은 "사물을 파악하고 사물들을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시킨다."
5)노동을 통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노동의 형이상학과 도덕
노동에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는가?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순수한 정신도 아니고, 순순한 생물적 존재도 아니다. 순수존재라면, 물질의 장애를 받지 않을 것이며, 생물적 존재라면 자연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본능의 직접적 충족에 만족할 것이다. 라크르와는 "동물의 생명활동도 노동이 아니며, 순수한 정신의 명상도 노동이 아니다. 노동이란 물질 속에 어렵게 침투하여 물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드는 정신이다(Ibid, 73)." 이처럼 노동은 육(체)화한 정신인 인간의 조건을 표현한다. 그래서 노동은 실천적인 도덕 그 자체이라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띤다. 도덕이란 실재 속에 가치를 구현한다는 의미에서, 노동은 세계를 인간화하고, 끊임없이 세계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유용한 작품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자신을 인간화한다. 무니에(Mounier)는 "모든 노동은 사물을 만드는 동시에 인간을 만드는 작업이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은 생래적 이기심이라는 마귀를 몰아내는 최상의 주술, 최상의 푸닥거리이다. 시간에 맞추어(자연의 시간) 일하는 것은 인간이 사물의 절도를 모방하고, 세계의 규칙적인 리듬을 따르게 한다. 노동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는 환자에게 작업요법(l'ergothéraphie)으로 치료하기도 한다. 정신적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꽁트도 "인간을 하늘처럼(천체의 운동, 철-절기) 규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손이 한가하면 마음이 미친다"는 격언도 있고, 쌩 떽쥐뻬리(Saint-Exupery)는 『성채(Citadelle)』에서 "노동은 너를 세계와 결혼시킨다. 밭을 가는 사람은 돌맹이들을 만나게 되며, 하늘의 물을 경계하기도 하고 바라기도 하며, 이렇게 하여 그는 자연과 교류하며, 자신을 확장시키며,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의 발자국 하나 하나가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
노동자는 해방되어서 [형이상학적으로] 우주에 참여하는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한다는 것은 사회조직의 내부에다 자기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부르주아(Léon Bourgeois)가 지적하듯이 인간이 타인의 노동 없이 살아갈 수 없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들에게 빚을 지고 있듯이, 그의 노동은 이 빚을 보상한다. 사회에서 노동의 의무는 명령적(impératif)이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의무(Devoir)는 부채의 주정형(l'infinitif)이다."고 한다. 노동은 횡적 연대성과 더불어 종적 연대성도 있다. 그래서 꽁트는 "쟁기를 발명한 사람은 농부의 곁에서 보이지 않게 밭을 갈고 있다."고 하고, "인류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이루어 놓았다." [모든 생명 종들은 이미 반과거(imparfait)가 현재보다 거의 무한히 크다 - 마치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크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인간은 현전하는(présentant) 사회의 인간이다.]
II 노동의 발달: 기술과 산업, 숙련, 도구, 기계
[인간 활동에는 자연적이란 것은 없다. 이미 습관이란 반복 속에 사회성, 도구성, 인간화, 구체화가 내포되어 있다. 노동은 구체화인데, 어떤 이는 추상화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추상화는 다음측정(recoupement)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반복은 앞선 반복과 차이를 낳는다.]
1. 도구에서 기계로
[도구의 변천은 인간 조건의 변화를 생성한다. 생산양식 변화는 인간 본성의 변화이다.]
* 도구
역사의 발전에서, 석기시대에서 현대의 원자력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로서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 그것은 인간 노동의 변함없는 특징이다.
인간의 도구 사용은 오래다. 석기시대에 도구는 신체에 직접 연결된 도구이다. 이 도구를 움직이는 동력은 육체이다. 고대와 중세에도 인간의 동력으로 도구를 이용하였다. 프리드만(Friedman)은 『인간노동은 어디로 가는가(Où va le travail humain)』에서 "도구는 생산활동에서 사람의 몫을 없애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생산활동을 인간화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혼자서 제품을 만드는 숙련공이 도구의 덕분으로 계속성, 계획, 고도의 정밀성, 전체의 조화를 실천하면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p. 37)"고 말한다. 이 단계는 아직도 인간이 자연환경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인간이 자연환경에서 벗어나서 기술환경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계는 그 자체가 원동력이며, 사람의 육체가 아닌 힘을 사용한다. 살르롱(Salleron)은 "도구는 연장된 손, 보강된 손이다. 망치는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도구이다. 기계는 엔진과 같이 인간이 자신의 손과 도구를 사용하여 만들어 낸 것이지만, 외부의 에너지의 도움으로 혼자서 작동하는 것이다. 도구는 인간과 일체가 된다. 기계는 인간에게서 벗어난다." 이 기계 시대의 동력은 자연의 힘을 기술적으로 연구하여 만들어졌다(물레방아와 풍차). 그러나, 증기기관의 발병으로 1차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전기와 내연기관의 발달로 2차 산업혁명이, 원자력의 이용으로 3차 산업의 시대가 이루어 졌다. [토플러는『제3의 물결』에서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제3의 혁명으로 기술혁명으로 정보산업사회를 말한다. ]
기계는 인간노동을 지배하기도 하지만(공장의 생산기계, 사무실의 컴퓨터), 여가를 주기도 한다(전화, TV, PC-게임). 프리드만은 "도시민들은 하루종일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에로 전전하면서 생활한다."고 표현한다.
기계의 보급은 인간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한편 인간의 능력은 놀랄 만큼 증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인간은 자연에서 멀어져간다. 인간조건의 변화의 경우에 인간은 이제 먼거리에서(à distance) 노동을 하고 전쟁도 수행할 수 있다. - 인간은 자신의 균형을 잃게되지 않을까? [자연 속에서 인간에서 자연에서 벗어난 인간의 과제는 무엇일까? 환경론자는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 자연은 우리가 만든 자연이라는 자각이 이제서야 생긴 것이다. 자연대로 회복은 가능한가? - 우리가 보기에 자연은 불가역적이다.]
2. 기계 사용의 장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384-324 av. J-C.)의 베틀북(navette)
올림푸스 신들의 단순한 표시로서 기적의 삼각발(trépieds)이 있다. 이 삼각발 의자가 있어야 신들의 집회에 참가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삼각발과 같은 "베틀북이 혼자서도 움직이게 되는 날", 노예 없이 살수 있을 것이고 말했다. 고대 말기에 물레방아를 이용하면서 여자노예들은 맷돌에서 해방되었다. 시인 안티필로스(Antiphilos de Byzance)는 "밀가루를 만드는 여인들이여! 맷돌에서 손을 떼라; 수탉의 노래가 아침을 알리더라도 오랫동안 잠자거라. 데메테르 여신이 네 손이 하던 일을 님프들에게 맡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황금시대의 삶을 맛볼 것이다.
중세에는 수도원제도가 발달하였다. 수도원에서 소나 말을 이용하였는데 목에 멍에를 지우는 것을 등에 멍에를 지우면서 끄는 힘이 증가하였다. 이후로 수도원은 만원이 되었다.
*생산과 생산성(production et productibilité)
현대의 기계의 발전으로, 인간은 많은 노예기계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한사람이 일년동안 노동량이 15만 칼로리라면, 1980년 미국 국민 한사람은 100명 이상의 노예기계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생산성, 즉 생산속도(vitesse de production)에서도 발전은 경이적이다. 푸라스티에(Jean Joseph Fourastié)에 따르면, 1800년도에 낫을 사용하여 면적 1아르(100m2)의 밀을 수확하는데 1시간 걸렸는데, 1850년 낫의 자루 길이를 길게 하여 15분, 1900년에는 풀베는 기계를 사용하여 2분, 1920년에는 트랙터에 풀 베는 기계를 달아서 40초, 1980년에는 1980년에는 수확탈곡 결속기를 이용하여 30초 이내가 되었다. 그는 "인간은 자기 조상들의 생활조건을 놀랄 만큼 잘 잊어버리며, 기계 발전의 혜택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의 연간 노동시간이 몇 시간이었으며, 그들의 봉급으로 몇kg의 빵을 살수 있었던가를 아는가?" 선진국에서 대기근이 없어 진 것은 200년이 채 안되며(프랑스의 마지막 대기근은 1709년 겨울이었다.) 19세기만 해도 8살 짜리 어린이가 공장에서 일했었다. 이제는 취업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의무교육의 기간도 늘었다.(현재 프랑스의 의무교육은 16세까지이다.) 의료에서 수세기 전에 신생아의 6개월 살 확률과 지금 50세를 살 확률을 비교해 보라.
3. 현대의 반기계론(Antimachinisme)
문명 비판론자는 기계문명이 인간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제공하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적 만족을 추구하는데 탐닉하여 정신적 생활을 외면한다고 한탄한다.
문명비판론자로서 간디(Mahatma Gandhi)는 "기차는 인간 본성의 나쁜 면을 보강하였다. 이제 악인들은 자신의 악의를 보다 신속하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서구 문명이 인도를 황폐화하는데 대한 저항이다.] 간디는 "인간이 다양한 자연들과 종교들을 접하게 되고, 그 속에서 인간이 완전히 파괴되기 때문에", 기차가 회의주의와 절망의 근원이라 보았다. 또한 고통은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죄(péché)' 때문인데, 의술은 고통을 치료함으로써, 우리를 부당하게 잘못의 결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래서 "병원은 죄의 번식장소이다"한다. 간디가 생각한 문명인이란 자신과 자신의 정념을 다스릴 수 있는 자이다.
그래도 아퀴나스(Thomas d'Aquin, 1225-1274)는 덕을 실현하는데 최소한의 물질적 안정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관중(管仲)은 곡간이 차야 예절을 안다고 했다.]
* 기계문명과 비인간화
한편, 기계문명의 발달에 비하여 인간의 지혜는 빈약한 상태에 머물러있다. 로스땅(Jean Rostand)은 "우리가 인간의 자질을 갖추기도 전에, 과학은 우리를 신으로 만들었다."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MR, 1932)』의 마지막 장에서 기계화를 우려하였다. 기계화는 영혼과 육체의 균형을 파괴하였다. 기계의 힘은 경이적인 발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기계문명에 영혼의 보강(un supplément d'âme)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 기술의 발전이 모든 곳에서 동일한 리듬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진국고 후진국이 있으며, 또한 기술의 혜택도 균형있게 제도화되지 못했다. 의료의 전수에 의해 질병퇴치와 영아 사망율이 줄어든 반면에 농업 생산기술의 증가는 미비하여, 후진국을 질병에서 기아로 몰아넣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한편, 공장에서 노동 조건자체가 비인간화를 촉진하기고 하다. 기계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노동자의 실업을 증가시키고, 노동자를 빈곤으로 몰아 넣고 있다. 리카도(Ricardo, 1772-1823)가 산업혁명을 상상하여, 영국의 국왕이 작은 핸들만 돌려도 모든 것을 생산하게되면, 신하들은 기계 옆에서 굶어죽을 것이라고 보았다. .
*노동자와 자동기계
게다가, 기계화는 현대노동자를 자동기계로 변형시키고 있다. 공장노동자는, 프리드만(Friedmann)의 말처럼, 분업의 희생자가 되어 연쇄작업대에서 규칙적으로 일하는 기계적 작업을 되풀이 할 뿐이다. 이 기계문명은 근본적으로 반인간적이다. 기계문명은 인간을 자연(본성)과 분리시키면서, 아름다움도 없고 생명도 없는 자동기계의 환경 속으로 몰아 넣으면서,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미슐레(Michelet)는 이미 1846년에 "기계는 한 순간의 공상도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당신들에게는 동작을 좀 늦추었다가 다음에 서둘러 일하여 회복하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당신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100개의 북을 가지고도 피곤해지지 않는 방직기계는 끊임없이 직조된 직물을 내보내면서 당신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한다, 손으로 천을 짜는 사람은 자기의 호흡을 늦추기도 하고 빨리 하기도 하면서, 천천히 짜기도 하고 빨리 짜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사는 것과 같이 행동하며, 작업이 사람에 맞추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와 반대로 사람이 작업에 맞추어져야 하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이 변하지 않는 강철을 따라야 한다."
쉴러(Eugène Schuller)는 1백년 전 만하더라도 중류층의 사람들은 유명한 밀레(Millet)의 「만종(l'Angelus)」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 그러나 산업시대의 인간은 「현대(Les temps modernes)」라는 영화의 채플린에서 그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 공장에서 기계의 부속품이었던 노동자가 자기의 일을 마치고, 모자를 쓰고, 짧은 단장을 들었지만, "거리에서도 또다시 기계적으로 나사를 조이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밤에 잠을 자면서도 나사를 돌리는 동작을 되풀이한다."
4. 반기계화론에 대한 보완
러스킨(Ruskin) 이래로 베르그송, 마르셀(G. Marcel), 뒤아멜(Duhamel), 베르나노스(Bernanos) 등은 기계문명에 대한 불안과 분노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비판론에 대한 반론도 있다.
* 자동화에 대한 보완
a) 기계화에 따른 기계화 자체의 불편함을 해소하려고 한다.
해소방식으로, 단순 반복의 행위에 인간 대신에 인공두뇌가 작업을 하게 한다. 그래서, 프라스티에(Fourastié)는 인간의 기계적인 노동은 불완전한 기계화의 과도기적 노예상태라고 한다. 로스땅(Jean Rostant)에 의하면, 전자계산기의 발명은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기계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뷔롱(Robert Buron)은 기계화 뒤에 인간은 기계를 수리하고 조직하는 일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로봇)를 신봉해서는 안될 것이다. (Robot란 말은 슬라브어 robota에서 온 말로 '노동한다'는 뜻이란다.)
* 아직도 비인간적인 노동
b) 그러나 프리드만(Friedmann)은 완전한 자동화는 내일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당분간은 대부분의 경우 세분화된 비인간적인 노동이 규칙으로 남을 것이라고 한다.
뚜렌느(Alain Touraine)는 "체인에 맞추어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리듬은 사람이 조절하는 것이지 기계가 조절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조건을 바꾸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또한 반복적 행위에 대한 불만이 작업에서 기인하기보다, 낮은 임금과 작업의 성취도에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교사는 학생의 답안지의 철자를 100번 이상 반복적으로 고쳐주고, 의사는 같은 처방전을 하루에 30번 이상 쓰는 경우도 있단다.
c) 노동조직의 기계화도 많이 바뀌었다.
테일러식 공장관리체계에서는 인간은 기계에 희생당했다. 인간을 기계에 적응시키는 방식을 심리학적으로 찾으려했다. 즉 적성검사 등으로 사람을 선별하기도 한다.
* 노동과 인간화
그러나 이제는 인간을 노동에 적합하게 만들지 말고, 노동을 인간에 적합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신체에 적합한 기계를 만들고자 한다. 브리쇼(Bernard Brichaud)는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힘들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기계의 효율성 중에서 인간이 사용하기 편리한 것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관계가 심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충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속해 있는 거대한 인간집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식을 가지는 것을 중요하다. 이는 포드(Ford)와 테일러(Taylor)가 주장한 물질적 요인들보다 노동자의 심리적 분위기를 더 강조한 것이다. 밀러(Miller)와 폼(Form)은 한 노동자 조(Joe)의 예를 들고 있다. 노동자의 작업의식 상실은 노동조건에 있기보다 가정사정(부인과 불화)에 있었다. 상담자는 부인을 설득하고, 조는 다시 모범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 그러나 이 일화 속에 인간관계의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실업문제와 저임금문제의 개선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처방은 노동자들의 부당한 조건과 착취를 숨기는데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조의 일화는 사회문제를 은폐하는 수단이다.]
사회심리학은, 반기계론자들이 책임을 로봇에 돌리는 경우처럼, 몇몇 공장장 또는 모범 노동자의 치료로 사회문제를 해결했다고 보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노동조직, 사유재산, 부의 분배 등과 같은 문제의 해결이 진정한 사회문제이기 때문이다.
III. 사회문제
랄랑드(Lalande)는 『철학용어사전』에서 "사회적 문제는 사회계급의 존재와 빈곤이라는 사실이 일으키고 있는 경제적이고 도덕적인 여러 가지의 난점들을 해결하는 것"이라 한다.
1. 경제적 자유주의(le libéralisme éconimique)
*아담 스미스와 시장의 법칙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점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제적 사회적 난점들은 물가, 임금, 거래 등을 규제한다는 구실로 국가가 무시로 개입하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적 경제 매카니즘이 작용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 즉 '내버려두어라, 그대로 통과시켜라!' (laissez faire, laissez passer!)고 주장한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국부론(Richessse des nations, 1774)』에서 자연가격(le prix naturel)은 원가에 적정이윤을 더한 것이며, 시장가격(le prix du marché)은 수요와 공급에 좌우된다. 시장가격은 자연가격과 일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조절역할을 하고 "시장에 출하되는 각 상품의 양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실제의 수요와 균형을 이루게된다."
*국가와 자본주의
그래서 경제적 자유주의 이론에서는 국가의 유일한 역할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사유재산은 노동 의욕을 고취하는 최상의 자극제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유익하며, 자기 자신의 노동과 절약의 결과를 약탈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일이다. 즉 소유은 인간 본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관계맺음은 인간본성에 고유한 것이다. 타자에게도 타자의 자기 방식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19세기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산업 자본주의의 철학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산업자본주의는 생산수단(공장 토지 기업체)의 사적 소유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사회계급은 3가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임금노동자를 생산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본가계급(capitaliste), 자신을 생산수단으로 이용하는 수공업자 계급(artisan), 가진 것이 노동력 밖에 없는 임금노동자 계급(salarié)이다. (계급(la classe)은 사회적 신분인 카스트(la caste)와 다르다.)
2.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마르크스 사회주의
*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실패
자유주의의 낙관론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는 적은 임금으로 하루 15시간 일하며, 심지어는 8살 짜리 어린이도 광산에서 갱도 노동을 했다. 소유주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노동의 결과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인 소유의 정당성은 터무니없는 착각임이 밝혀졌다. 죠레스(Jean Jaurès)는 "'그대로 두라, 그대로 내버려 두라'라는 말은 '자유로운 닭장 속에 자유로운 여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소유의 권리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실제로 소유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기원이 된다.
* 마르크스와 잉여가치(la plus-value)
마르크스(Marx, 1818-1883)는 『자본론(Le capital)』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순수 과학적 관점에 선다. 변증법적 전망에서 모순은 역사의 동인이다. "자본주의는 내부의 모순 때문에 스스로 붕괴될 것"이라 했다.
상품의 가치(valeur)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따라서 결정된다. 노동자는 다음날의 노동력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만큼 받고 그 이상도 이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travail)은 가치를 생산하는 특성을 지닌 특별한 상품(marchandise singulière)이며, "상품으로서 가치보다도 더 높은(plus que élevée) 가치"이다. 노동자는 고용주가 자기에게 지불하는 비용보다 더 많은 것을 고용주에게 가져다준다. (즉 잉여가치의 본래적 의미는 노동을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것과 관련 있다.)
a) 경제공황
고용주는 관심은 잉여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임금을 가능한 한 줄이고 제품의 값을 가능한 한 높여서 파는 것이다. 임금이 적은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상품을 살수 없다. - 이것이 소외이다 - 상품이 팔리지 않아서 재고가 쌓이고, 공장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그래서 실업자가 늘고, 구매력을 더욱 줄고... 이것이 공황이다.
b) 전쟁
이상적인 것은 항상 구매자가 있는 상품을 찾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품이 전쟁물자(군수품)이다. 조레스는 "구름이 천둥과 번개를 품고 있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는 전쟁을 품고 있다."고 한다.
c) 자본의 집중
마르크스는 고정자본(le capital constant)과 유동자본(le capital variable)을 구분한다. 고정자본은 기업주에게 직접적으로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에 고정 또는 불변 자본이며, 기계의 가치와 원료의 가치를 말한다. 가변자본은 화폐이며, 임금을 지불하여 노동자를 일하게 하는 화폐, 상품을 생산하여 화폐를 재생산하는 화폐이다. 대기업이 고정자신을 확대(기계의 고급화와 수의 확장)하여 더 많은 생산으로, 중소기업을 도산시키고, 이들을 무산자로 만든다. 그래서 결국에는 무산대중을 착취하는 소수의 대자본가들만 남는다. 이것이 자본의 집중이다. 이 자본의 집중은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스스로 자신의 파멸을 준비한다. 첫째는 다수의 소자본가들을 무산계급으로 만들고, 둘째는 이들 스스로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또 중간과정 없이 집단 경제의 도구가 될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한 독점을 조직하면서 자신의 파멸을 준비한다.
결론
소련이나 중국에서 실현되었던 마르크스주의 체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소련과 중국도 공산주의 혁명이전에는 산업국가가 아니라 봉건주의 국가였고, 또한 농업경제 국가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예언에 결함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폭력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부분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이 있었다. 변증법적 전복대신에 점진적 개선을 진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법을 개정하고 최저 임금을 제도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불간섭 문제보다 어느 정도 간섭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교황의 회칙, 케인스(Keynes)의 이론, 분배경제의 풍요이론이 있다.
***참고***
전쟁이 경제를 살릴까?/ 김수행 (한겨레 2001년10월29일(월요일))
이번의 미국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음모설'이 나오고 있다. 이 음모설의 `이론적 토대'는 미국경제는 군수산업의 팽창에 의해 호황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고, `정황적 근거'는 2000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신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금년에 들어와 산업생산이 감소하고 실업률이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최고위 정보팀이 전쟁을 통해 미국의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테러와 탄저병균 배달을 스스로 조직했다는 주장이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의 발발과정에서 미국의 최고위 정보팀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음모설이 나와 있으며, 이번의 테러사태와 전쟁에 관해서도 앞으로 수많은 음모설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문제를 삼는 것은 이번 전쟁이 과연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전쟁을 통해 군수품에 대한 수요를 확대하면 군수산업이 확장하고, 또한 군수산업의 관련산업이 확대되어 경제 전체가 호황으로 갈 수 있다는 주장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전망은 지금과 같은 구체적 상황에서는 실현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첫째, 이전의 전쟁에서는 미국 본토에 대한 적의 침략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은 전쟁을 비디오 게임 보듯 남의 일로 간주하면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관련이 있는 테러단체가 했건, 또는 전혀 의외의 제3자가 했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이 무너졌고, 탄저병 공포가 미국 전역에 퍼졌다. 미국 국민들이 `공포에 질려' 집 안에서 텔레비전에 매달려 있을 때, 미국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 소비지출이 줄어드니까 기업은 상품을 팔 수 없어 생산을 축소하거나 도산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해고가 늘고 투자는 줄면서 경제활동은 점점 더 불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미국경제가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미국 정부는 재정지출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군수산업은 군수품을 외국에 대량 판매하는 경우다. 미국이 오직 무기상인의 역할만 하면 미국경제에는 가장 좋지만, `세계의 경찰'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에게는 이것은 불가능한 선택이다. 지난 걸프전쟁에서도 미국 정부는 다른 나라에게 전쟁비용을 분담시켰는데, 이번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로 전쟁비용의 분담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헐벗은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키는 데 대량의 살상무기가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테러국'으로 전쟁을 확대해야만 전쟁경기의 덕을 볼 수 있을 것인데, 다른 아랍세계로 전쟁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전쟁비용을 분담하기가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셋째, 전쟁비용은 사실상 미국의 `국가경쟁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과 일본이 미국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두 나라가 군사비로 인적·물적 자원을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미국 정부가 적자재정으로 군수품을 조달해 전쟁을 수행한다면, 미국 정부는 수많은 반대에 부닥칠 것이 뻔하다. 우선 `작은' 정부를 요구하며 정부의 지출은 모두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반대할 것이고, 전쟁비용을 사회복지비로 전환시키라는 양심세력이 반대할 것이며, 달러가치의 폭락으로 말미암은 뉴욕증권시장의 붕괴를 우려하는 국제금융가들이 또한 반대할 것이다.
전쟁을 통해 군수산업을 확대함으로써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나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복지비의 증대를 통해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모두가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에 의거하고 있는데, 미국의 최고위층이 전자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김수행/서울대 교수·경제학
중앙일보에서 펌(2001/11/02)
[정운영 칼럼] 연횡보다 합종이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세계에 평화를 이루는 두개의 질서가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어떤 강력한 맹주가 다른 나라들을 누르고 힘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소위 '팍스 로마나' 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힘을 가진 나라들이 어느 하나의 독주를 막고 합의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견제와 균형' 체제이다.
현재의 세계화 질서 아래 모든 고래와 새우들이 공평한 기회를 누리는지, 아니면 몇몇 고래의 기득권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지 그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겠다.
지난해 11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담에서 동아시아경제협력체 창설을 제의했었다. 그리고 관련 보고서 작성을 13개 회원국 26명의 학자로 구성되는 동아시아비전그룹(EAVG) 에 위임했다.
그 때 나는 세계화 시대에 아시아의 이익을 지키는 자구책의 하나가 이 지역의 경제통합이라는 글을 썼었다.
*** 아시아 경제 이익 지키기
동아시아의 협력과 단결 논의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동아시아경제회의(EAEC) 발족을 제창했고, 일본 역시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제의했었다. 역내 국가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미국 때문에 주저했었다.
EAEC는 미국을 제쳐놓는 '괘씸죄'에 걸렸고, AMF도 국제통화기금(IMF) 에의 '반역 음모'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술로도 땅덩이를 옮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 재주만 있으면 총성으로 지새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을 멀찍이 떼어놓을 수도 있고, 미국 좋아하는 어느 나라를 로스앤젤레스 - 당분간 뉴욕은 금물이니 - 앞 바다쯤에 떠메다 놓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궁즉통(窮卽通) ! 미국은 육지 대신 바다를 내세워-일례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를 통해서-아시아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시아나 동아시아로 명패를 박을 때는 이런 편법마저 통하지 않는다.
정부는 5일 브루나이에서 개최되는 아세안+3 정상회의에 비전그룹이 준비한 6개 분야의 57개 권고사항을 제출할 예정이다. 그 중에는 동아시아자유무역지대(EAFTA) , 동아시아투자지역(EAIA), 동아시아통화기금(EAMF) 설립 등 굵직하고 묵직한 제안들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EAEC가 EAFTA와 EAIA로 주민등록을 바꾸고, AMF가 EAMF로 주소를 옮겼지만 미국이 불청객이란 사정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마하티르와 달리 미국에 괘씸죄를 지은 적이 없고(!) , 한국 또한 일본과 달리 미국에 반역 음모(?) 를 꾀할 리가 없으므로 이번 비전그룹의 보고서는 미국의 반발에 부닥칠 소지가 적다는 것이다.
예컨대 EAMF는 절대로 IMF의 라이벌이 아니고, 금융 위기에 안전망 노릇이나 하는 보완장치일 뿐이라고 미리 '알아서 기는' 마당에,9.11테러 이후 여러모로 걱정이 많을 미국이 전처럼 '무조건 안돼'만으로 밀어붙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김칫국'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니버의 심심한 강의보다 한층 더 흥미진진한 현실이 있었다.
기원전 4세기 일곱 나라가 천하의 주인을 다투던 중국의 '전국시대'에 소진은 여섯 약소국들이 힘을 합쳐서 한 강대국에 맞서는(合衆弱以攻一强) 합종책을 역설했다. 반면에 장의는 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기며 그의 도움으로 이웃 나라를 치는(事一强以攻衆弱) 연횡책을 설파했다.
모두가 난세를 살아가는 약자의 계책이지만, 합종의 약점은 새우 진영 내부의 이해 충돌로 동맹이 깨지기 쉽다는 것이고, 연횡의 약점은 고래한테 도움받는 대가로 그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다가 마침내 속국이 된다는 데에 있다. 아무래도 내 귀에는 연횡보다 합종이 솔깃하게 들린다.
*** 지역 경제블록 구축해야
다시 한번 나는 동아시아의 협력과 단결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국에 적대적일 이유가 없다. 동북아 경제의 재도약 방안을 묻는 질문에 최근 미국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아시아가 통합된 경제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경제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체제를 구축했으면 한다"라고 대답했다.
한.중.일 3국의 교역이 더욱 확대되어 '지역경제 블록'으로 발전하라는 그의 조언은 현대판 합종책이다.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지역경제 블록을 만들라니!
"나 지금 떨고 있니?"
"떨 것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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