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인생을 포기하십시오???
주위에는 근 2만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눈물과 통곡이 극에 이르고, 개중에는 총독을 잡아 죽이라고 외치는 무리도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흥분한 군중은 십자가에 매달린 사도 안드레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사도는 십자가 위에서도 계속 설교했습니다. 그에게 십자가형 판결을 내렸던 아가야 지방의 로마 총독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그를 다시 십자가에서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거절했습니다. 그리운 스승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어, 스승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기를 얼마나 사모했던가! 아, 그리운 스승님! 갈릴리 해변에서 큰 사랑의 눈빛으로 제게 다가오셨던 스승님! 처음 뵈었을 때의 그 압도적이고 신비롭고 기이했던 풍모와 인상. ‘오! 메시아!’
웃으며 울며 함께 보냈던 3년 세월. 나를 향해 미소 지으시던 스승님의 환한 얼굴. 함께 밤을 지새우며 나누었던 이야기들. 스승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아, 스승님, 어서 빨리 스승님을 보고 싶습니다. 스승님 계신 그곳으로······.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아아, 그대(십자가)도 나를 기쁘게 받아 달라. 나는 그대에게 매달린 분의 제자이며 항상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 끌어안기를 동경하고 있었노라······. 나는 오래 동안 그대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오직 한 마음으로 그대를 생각해 왔노라. 끊임없이 그대를 찾아 헤매었노라.”
이런 눈물의 염원을 피력했던 사도는 십자가에서 일련의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와, 그 빛이 반시간 동안 사도를 감싸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이틀은, 사도의 영광스런 죽음을 이렇게 종결했습니다. 사도 안드레는 서기 70년 경 그리스의 아가야 지방에서 X 형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치구, <열두 사도의 생애>).
사도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의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대부분의 사도가 순교했는데요, 그 중 몇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인생 포기가 필요하다?
“혜진 자매도 죽고 싶은가요?” 사도들의 순교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혜진의 큰 눈도 휘둥그레졌다. “저요? 살고 싶은데요?”
유진이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자지러지게 웃었다.
박관준 장로님 순교 기념비가 서 있는 ‘에덴동산’은, 봄빛의 충만한 생명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 자기인생을 포기해야 해요.”
“······?”
인생포기란, 세상적 의미에서 자신을 성공시키고 흥하게 하고 잘 살게 하고자 하는 온갖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포기는 곧 탐욕포기입니다. 세속적인 모든 야망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 곧 인생 포기이고,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죽음이자 ‘십자가 지기,’ ‘자기 부인’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자신에 의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십시오. 외적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이것은, 큰돈을 벌지 말라거나 성공하지 말라는 뜻이 결단코, 절대로 아니며, 하늘이 무너져도 외치고 또 외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아니고 또 아니고 천백번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도 절대적으로 아니고, 아니고 억만 번 또 아닙니다!!! 성공탐욕을 버리는 것과 성공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명심하고 명심하고 또 명심하십시오!!!
또한, 자기 인생을 포기하라는 것은 지금 잘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라는 뜻이 아니며,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가 결단코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 실력을 연마하지 말라거나 꿈과 비전을 가지지 말라는 말도 절대적으로, 골백번도 더 절대적으로 아닙니다!!!
제가 왜 이렇게 “아니라”고 강조하는지 애독자님은 깊이 명심하고 결단코 “탐욕포기”라는 말을 오해해 심령이 눌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탐욕포기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삶을 결단코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포기는 놀라운 능력의 통로입니다(고후 4:10-12).
탐욕포기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준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아들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 포기하고 자기를 비워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곧 탐욕포기입니다.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혜진의 얼굴이 심드렁해보였다.
“잠시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예요. 우선, 왜 자기 인생의 탐욕을 포기해야 하는가에 관해, 몇 가지만 말해 볼까요?” 베이지색 남자가 미소를 띠며 준범과 유진을 바라보았다.
“인생의 탐욕을 포기해야 만, 우리가 진정으로 신나는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유진이 자기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하고 있었다.
“제 경우를 보면, 옛 사람의 탐욕을 포기한 후부터 비로소, 자유, 기쁨, 만족, 감사, 여유, 쉼, 행복 등을 맛보기 시작한 것 같아요.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그 경험 이후.”
“그래요. 세속적 탐욕과 허영, 성공탐욕을 버리지 않고는 예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탐욕은 이 좋은 인생을 아주 괴롭게 합니다. 그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본성을 억눌러요. 이것을 포기할 때부터 ‘참 나’가 해방되어 희망이 용솟음쳐 오르고 감사와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죠.”
야망과 탐욕을 포기하면, 현실에 항상 만족하며, 외적인 환경 때문에 괴롭지 않고, 가정경제나 사업, 직장생활 등에서 양적인 발전이 없어도 늘 평안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해집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가시적 성과가 없어서 마음이 괴롭다면, 당신은 자기 인생탐욕을 포기하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무사안일주의와 무능력을 칭찬하는 게 아니며, 양적으로 성장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건 괴로워할 문제가 아니라, 진단, 분석, 평가, 개선, 기도해야 할 문제겠죠.)
목회자들의 교회성장 갈망에도, 세속적 야욕의 동기가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는 참 많습니다. 그 동기가 평소에는, 혹은 교회가 내외적으로 성장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이 정체하거나 인적 물적 현황이 감소할 때 그 동기는 강렬하게 나타납니다. 그 때 야망의 동기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가슴을 찌르기 시작합니다.
자기 탐욕 때문에 괴로운 것과 주님의 심정으로 아파하는 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나아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골 3:3). 내가 죽었다는 것은, 곧 ‘거짓 나’(‘참 나’와 대비되는, 나의 옛 자아, 죄악의 성향)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뜻입니다(갈 5:24).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미 죽은 옛 사람의 탐욕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땅에는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저는 죽은 자이며, 지금의 생이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내 탐욕의 성취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므로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들입니다. 자기 성공탐욕을 위해 살지 맙시다.
법적으로, 궁극적으로, 신비한 영적 차원에서는 죽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옛 자아의 탐욕이 살아 날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죽었다”고 말한 다음, 한 절 건너 뛰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고 명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무엇입니까?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세상에서 자기를 멋지게 성공시키고자 하는 욕망 이면에도 탐심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명예 체면 부요 출세에 대한 탐심이죠. 내가 성공해야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탐욕 섞인 변명은 버리십시오. 인간들이 볼 때,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 사형당한 실패자였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최고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일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님을 위한, 주님에 의한,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롬 14:8), ‘자기의’ 인생을 포기해야 합니다. 종은 모든 자주적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종에게는 자기 인생이란 게 없습니다. 종의 모든 삶은, 오로지 주인을 위한, 주인에 의한, 주인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 살 때, 우리에게는 참 자유와 행복과 온갖 권리가 주어집니다. 주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면, 비참하게도 탐욕과 죄와 허무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자기의’ 인생탐욕은, 실패시키고 망하게 하고 죽게 해야 합니다. 세속적 탐욕을 죽이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무언의 주장이며,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153평의 기적”을 경험한 어떤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교인 수 40명밖에 남지 않은, 청주의 전통있는(?) 교회에 부임해 교회당을 이전하면서, 153평의 대지에 멋진 7층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는 주목받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듣는 기도’를 하던 중 그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떠나라!”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습니다. ‘떠나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떻게 이루어 놓은 사역인데······.’ 하지만 결국 두 손 들고 주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 호주로 간 후, 그는 자신의 한국 목회, 특히 성전건축이 (그 자신의 경우에는) 야망과 교만이었음을 깨닫고, 한없이 울며 회개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현재 목회와 여러 가지 사역을 행복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탐욕에서 떠나라, 성공탐욕에서 떠나라, 자유를 누리라, 언제든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를 하라. 버리고 떠남. 그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맞아야 할 운명적 현실입니다.
인생 포기하면 어떡하라고?
“때로는 미혼자들의 경우,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애인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어요.”
“목사님은 미혼시절 그런 경험이 없었어요?” 혜진이 웃으며 물었다.
“하하! 혜진일 속이진 못하지. 스물네 살 때 어떤 자매를 사귀었죠. 어느 날 기도 중, 비몽사몽간에 한 폭의 선명한 풍경화가 눈앞에 나타나는데······. 아무튼 그 자맨 네 배우자가 아니라는 뜻이었죠.”
어느 중국인 이야기입니다. 그가 21세 되었을 무렵, 그에게는 열렬히 사랑하는, 비슷한 또래의 미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한 후 그는 애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에 무언가 껄끄러움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내면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라.”
“주님, 제발 이 일만은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주님이 명하시면 제가 티베트까지라도 가서 복음을 전할 터이니 나의 사랑하는 사람만은 버리지 말게 해 주세요.”
“안 된다. 너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마음을 다해 나만을 사랑해라.”
“주님, 안 돼요······.” 그 때부터 기도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주님, 그녀와의 관계를 포기하겠습니다.”
이전에 누리지 못하던 큰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옛 애인과 재회하게 됩니다. 다시 만나 보니 그녀는 그 동안 많은 공부를 했고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연정이 되살아 피어올랐습니다.
그는 오랜 동안 이 문제로 기도를 드린 후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대학가의 절세미녀를 배우자로 맞이합니다.
기도의 사람이었던 그는 후에 유명한 설교가, 전도자,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그는 중공 치하에서 2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1972년, 69세의 중국인 성자는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주님이 옛 사람의 탐욕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좋은 보물들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성공탐심을 포기한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만이 부활할 수 있습니다. 탐심과 야망이 처리된 사람은, 주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으며, 행복하고 멋진 새 인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탐심과 야망을 해결하시는 방법은, 철저한 낮춤과 실패와 망함과 죽음입니다.
노예로 팔려갈 때, 감옥에 갇힐 때,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 후 그를 잊어버렸을 때, 이렇게 세 번 죽고 나중에 이집트 총리로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은? 요셉.
화려한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나며 당대 최상의 스승들로부터 최신 고급 학문과 최고의 무술을 전수받은 한 왕자가, 야망을 철저히 죽이는 데는 몇 년이 걸렸죠? 40년.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여인들의 노래 따라, 인기가 욱일승천하고 야망이 커질 대로 커졌던 다윗은,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완전히 죽었습니다.
“근데, 목사님,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은데요, 자기의 인생을 포기하면, 누구의 인생을 살아야 하나요?” 혜진이 철쭉을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아, 멋진 표현이에요. 우리 인생은 주님을 위한, 주님에 의한, 주님의 것이라고 했죠? 당연히 주인이신 예수님의 인생을 살아야죠(고후 5:15).”
“······?”
“쉽게 말해, 예수님의 지휘에 따라, 예수님처럼 사는 거죠. 달리 표현하면,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을 사시는 거예요(갈 2:20).”
“좀 더 현실적, 구체적으로······.”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고후 4:12,15, 5:13-14). 그게 예수님처럼 사는 겁니다. 예수님도 오로지 남을 위해 사시다 남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그 은혜로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거죠.”
“아, 자기 성공 탐욕을 버리고, 남을 위해.”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위한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론 그리스도와 천국을 전해주는 삶입니다. 그것이 남에게 가장 유익하기 때문이죠.”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성공시키려 하다보면, 가장 먼저 성공하는 자가 자신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 결단코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십시오!!! 다만 마음의 모드를 이타주의로 설정하면 됩니다.
남을 위한 삶이란,
첫째, 남을 사랑하고
둘째, 시간과 여건과 내 의향이 허용하는 대로 남을 도우며
셋째, 마음의 모드를 이타주의적인 방향으로 설정해 놓고
넷째, 신나는 자기 꿈과 비전을 이루어가며 최선을 다해 내 할 일을 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남을 위한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사회 각 구성원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남에게 피해가 가며, 내가 내 일을 최선으로 잘 할 때 그 자체로 남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점 주방장인 내가 최고의 솜씨로 멋진 음식을 아주 잘 만들면, 그것을 먹는 사람이 기쁨을 누리겠죠?
반대로 각종 인재人災는 왜 발생하나요?
결국 내 일을 가장 잘 하는 자가, 남을 위해 가장 잘 사는 자입니다.
“이젠 혜진 자매의 애인 이야기를 좀 들어야 될 것 같은데?”
“전 애인이 없는데요?”
“하하! 숨겨놓은 애인이 있잖아! 성은 ‘허’씨, 이름은 ‘영심’이.”
“네?”
“황제가 되고 싶었다는 건 철없는 어린 시절의 몽상이라 할 수 있지만, 실상 거기에는 세속적 ‘허영심’이 깊이 잠복해 있습니다. 혜진 자매가 그토록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남이 감탄하는 미모를 소유하고 있지만, 슬픔과 외로움, 괴로움이 가득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아요.”
“······?”
“혜진 자매의 내면에는 아마 강한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을 거예요. 이와 함께, 모든 사람이 나만을 위해주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인정받고 싶은 탐욕, 남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 등이 혜진일 힘들게 했을 겁니다.”
“사실은 지금도 황제가 되고 싶어요. 돈과 미모로 세계를 주름잡는 금융가의 황제······. 제가 대학에서 한국사를 선택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아요. 먼저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이어서 세계사를 공부한 다음, 본격적으로 경제를 연구하고 싶었어요.”
“큰 일 낼 여자구만.” 준범이 웃었다.
“혜진 자매는 그렇게 될 만한 재능도, 열정도 있어요. 하지만 내면의 은밀한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면, 주님이 혜진 자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실 겁니다.”
혜진이 한숨을 쉬었다. “이 꿈을 포기한다면, 제 인생은 어떻게 하라구요?”
“꿈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꿈의 내면에 잠재한 야욕을 버리라는 뜻이에요. ‘돈과 미모로 세계를 주름잡는 황제?’ 표현 자체에 벌써 탐욕, 권력욕, 야망, 위험 등이 가득하지 않아요? 꿈이 정화되어야 합니다.”
“꿈의 정화요?”
“그래요. 자기분야에서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국가와 세계, 사람들을 섬기다 죽겠다는, 자아포기의 마음가짐이 깊이 천착해야 해요.”
그의 어조는 차분했다. “그 꿈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면, 주님이 꿈을 이루십니다.”
“주님이 이루어요?”
“주께서 이루시는 그 길은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죠. 그러나 야망을 가슴에 담고 내가 이루고자 하면, 바다보다 넓은 그리스도의 평화도, 자매의 두 뼘 가슴을 결코 채울 수 없어요. 망망대해의 바닷물이, 공기로 가득 찬 작은 공을 뚫고 들어갈 수 없듯이.”
그가 혜진의 표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야망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자매의 가슴은 오히려 허무에 빠집니다. 그 모든 수고는 나중에 불타 없어집니다(고전 3:10-15). 반면 자매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이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면, 그 일엔 큰 상이 주어집니다.”
혜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여전했다.
“혜진인 우리가 계속 돕기로 해요.”
유진이 입을 열었다. “근데 목사님, 탐욕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거머리 같이 다시 달라붙어 있는 걸 느낄 때가 가끔 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 평안하다가도 별 이유 없이 자유, 쉼, 평화, 행복이 상실된 채 마음이 고달프고 힘들어지면, 내 안의 탐욕이나 어떤 불만이 다시 발동하지 않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이 네잎 클로버가 신앙점검의 바로미터죠. 매우 중요하니 꼭 명심하세요. 자유, 쉼, 평화, 행복.”
일행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서녘에서 동편까지 뻗은 하늘의 붉은 구름이 장엄한 빛으로 아직 대지를 밝히고 있었다.
“남을 위해 사는 게 ‘참 나’를 완성하는 길이에요. 결국, 자기탐욕 포기가 자기인생 얻기죠(마 16:25). 그 삶이 예수님 닮기입니다.”
그가 마지막 메시지를 던진 후 네 사람은 풀 위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주 예수님, 저는 쇠하여야 하겠고 주님은 흥하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인생을 포기했으니 주님이 제 인생을 사십시오. 제 인생은 남을 위한 인생입니다. 주님, 진심으로 비오니, 주님처럼 저를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로만 가게 하소서. 오 주여, 세상이 나에 대해,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주님, 저의 꿈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저 하늘입니다.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닮으면 그것이 저의 성공이고 부흥이고 형통이고 번영입니다. 주님, 내 전체를 다 바쳐 주님만 사랑합니다.
오 나의 주님, 이 가련한 모래알갱이 하나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소서. 모래알갱이 하나도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면, 오, 주여! 저의 작은 영혼도 주의 빛을 받아 반짝이며 오직 주님의 빛만 드러내게 하소서!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오, 저는 버리고 죽었으니 행복합니다.
기도 후 베이지색 남자가 하늘을 쳐다보며 물었다. “각자 숨겨놓은 애인 버릴 거죠? 허영심. 자기 성공 탐욕.”
“네!” 유진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애독자님, 당신도 버리세요!)
“버린 후에는, 남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준범이 물었다.
“간단해요. 자기 은사, 재능, 사명, 직업에 따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남을 섬기면 됩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준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사업을 막 시작한 후 어느 날 희한한 꿈을 꾸었는데요, 그 꿈이 오늘의 주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요? 다음 주엔 목사님 몇 분이 우리 놀이에 동참하시기로 했는데, 준범형제의 꿈 이야기가 기대되네요.”
***************
(다음장으로 계속)
샬롬.
2020.8.29.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