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證道歌)는 영가(永嘉) 진각대사(眞覺大師)가
쓴 1814 字 267 句의 칠언절구로 구성된
시가 형식의 선서(禪書)로 삼조 승찬(僧粲) 대사가 쓴
《신심명(信心銘)》과 더불어 선(禪)에 입문하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문헌으로 선종에서 널리 읽혔던 책이다.
@영가(永嘉: 665?~713) 스님의 휘(諱)는 현각(玄覺)이요,
자(字)는 도명(道明)이며, 절강성 온주부 영가현 사람으로
어릴 때 출가하여 안으로는 삼장(三臟)을 두루 섭렵하고
밖으로는 외전에도 널리 통달하였다고 한다.
교문에서는 영가스님의 휘(諱)를 따서
흔히 현각 진각대사로 불리는데
영가스님은 선천 3년(서기 713) 10월 17일 입적하시니
시호(諡號)는 무상대사(無相大師) 탑호(塔號)는 정광(淨光)이다.
그해에 육조스님도 돌아가시니 세수 76세였습니다.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치고,
깨친 경지에 의지해서 지은 것이 바로 이 증도가(證道歌) 인데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이름이요.
‘도(道)’를 보리(菩提)를 뜻하며 이를 각(覺)이라 하는데
증(證)을 근본으로 삼았다는 의미다.
<도(道)>라는 것은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그 구경처(究竟處)를 말한다.
<가(歌)>란 영가스님 자신이 확철히 깨치시고 나서
그 경계를 시가(詩歌) 형식으로 노래한 것을 의미한다.
남명 법천(南明法泉)이 증도가에 송을 붙인
『남명송증도가(南明頌證道歌)』 에서는
범천언기스님의 주를 인용하여 이를 이렇게 설하고 있다.
「연(緣)을 따라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증득한다[證]’라고 하고,
천성(千聖)이 밟고 지나가는 것을 ‘길[道]’이라 하고,
그 길을 시가로 읊조리는 것을 노래[歌]라고 한다.
이 때문에 증도가라고 하였다.」
@『증도가』는 또한 후대 선서(禪書)에 많이 인용된 이후
동아시아에서 선 사상이 전개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이기도 하다.
특히 송나라에서는 『증도가』에 주석이나
송(頌)을 붙인 책이 여러 편 찬술되었다.
송대 이전에 찬술된 정거(淨居)의 주석이 있고,
송에서는 1097년 범천 언기(梵天彦琪)의 『증도가기주(證道歌琪註)』,
1146년 묘공 지눌(妙空知訥)의 『증도가주(證道歌註)』가 편찬되었다.
원나라에서도 『증도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
한편 1076년 송에서는 운문종(雲門宗) 승려인
남명 법천(南明法泉)이 증도가에 송을 붙인
『남명송증도가(南明頌證道歌)』를 간행하였다.
영가스님이 6조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그 일화를 남명법천의 주석에서 이렇게 전한다.
대사는 『열반대경(涅槃大經)』을 보다가 깨우쳐 들어갔는데,
그러고는 조계(曹溪)로 가서 6조(祖)의 인가를 구하였다.
대사는 도착하던 날 마침 6조 스님은 법상에 앉아 법문을 했는데,
선상(禪床)을 세 번 돌고 석장을 한 번 내리치면서
그 앞에 우뚝 섰다. 6조가 말했다.
“무릇 사문은 3천 가지 위의[三千威儀]와
8만 가지 세행[八萬細行]을 갖춰서
하나하나의 행(行)에 이지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대덕(大德)은 어느 곳에서 왔기에
크나큰 아만(我慢)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말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중대하니, 무상(無常)하고 신속합니다.”
6조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무생(無生)을 체득해서
신속함이 없는 도리를 깨치지 못하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체득하니 곧 무생이라서 본래 신속함이 없음을 요달했습니다.”
6조가 말했다.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잠깐 사이에 예를 올리고 하직 인사를 드리자, 6조가 말했다.
“돌아가는 일이 중대하고 신속한 것이더냐?”
대사가 대답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 신속함이 있겠습니까?”
6조가 물었다.
“움직이지 않음을 누가 아는가?”
대사가 말씀드렸다.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分別)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6조가 말했다.
“그대가 무생의 뜻[無生意]를 깊이 체득했도다.”
대사가 대답했다.
“무생인데 어찌 의식[意]이 있겠습니까?”
6조가 말했다.
“의식이 없다면 어떤 것이 분별을 일으키는가?”
대사가 대답했다.
“분별하더라도 의식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6조께서 찬탄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육조스님이 이와 같이 인가(印可)를 하고
그가 깊이 깨달은 것을 찬탄하자
곧바로 갑자기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6조가 잠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기 때문에
일숙각(一宿) 스님이라고 후대에 이칭(異稱)이 따랐다.
이 대담에서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먼저 칭찬하고 다음에 도의 깊이를 거량(擧量)해 본 것이다.
<의식이 없다면 분별을 일으킬 수 없는데
뜻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것부터가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육조스님의 질책에 <분별하는 것도 뜻이 아니다> 답한 것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이를 「분별하여도 심의식(心意識)의 사량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 대용의 나타남이다」 이라고 설한다.
이 설명은 <수심결(修心訣)>에 나온
자성의 공적(空寂)함과 그 용(用)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면
접근이 쉬울 것이다.
『이미 형상과 모양이 없으니 어찌 또 크고 작음이 있겠으며,
이미 크고 작음이 없으니 어찌 또 끝 간 데(한계)가 있겠는가?
끝 간 데가 없으니 안과 밖이 없으며,
안과 밖이 없으니 멀고 가까움이 없다.
멀고 가까움이 없으니 나와 남이 없으며,
나와 남이 없으니 오고 감이 없다.
오고 감이 없으니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고,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으니 예전과 지금이 없다.
예전과 지금이 없으니 미혹함과 깨달음이 없으며,
미혹하고 깨달음이 없으니 중생과 성인(붓다)이 없다.
중생과 성인이 없으니 오염됨과 청정함이 없으며,
오염됨과 청정함이 없으니 옳고 그름이 없다.
옳고 그름이 없으니 일체의 이름과 언어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일체의 감각기관과 그 대상,
일체의 망령된 생각이 모두 없다면,
갖가지 형상과 모양과 갖가지의 이름과 언어를
모두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이 어찌 본래 공적(空寂: 텅 비어 고요한)하며
본래 어떤 물건(物)도 없는 그 자리가 아니겠는가?
공적(空寂)한 바탕에서의 영지(靈知) 작용이 본래면목이고,
견문과 동작이 가능한 것은 본마음 때문이지 육신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현상과 만물이 모두 텅 빈 그 자리에
영지(靈知: 신령한 지혜)가 어둡지 않아서,
무정물과는 달리 신령스럽게 알아채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영지(空寂靈知) 즉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말을 인용해 보면 대사가 말한 분별심이 아니라는 것은
자성의 공적함에서 나온 영지(靈知)의 작용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제1구)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君不見]
증도가의 서문이다.
성철스님은 이 구절을 두 가지로 해설했다.
하나는 <그대>라는 것은 자성(自性)을 가리킨다고 보아
<자성을 깨치지 못했느냐>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뒤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할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을 보지 못하였느냐> 고 해석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보아도 같은 의미가 되므로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남의 집을 찾을 때는 제일 먼저 주인을 찾듯
불교 공부의 주인은 참된 마음(眞心)이다.
따라서 불교 공부는 진심(眞心)을 찾는 것이 된다.
보조국사의 《진심직설(眞心直說)》의 설명을 따르면
허망을 떠난 것을 진(眞)이라 하고
영감(靈鑑)을 심(心)이라 했다.
영감(靈鑑)이란 신령 신령한 거울처럼 맑고 밝아
빛을 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진심을 불교에서는
경(經)에 따라 심지(心地), 보리(菩提), 법계, 여래, 열반,
법신, 진여, 불성, 여래장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조사들 또한 이를 같은 의미로 응감(應感) 수기(隨機)하여
달리 명명하여 자기(自己), 정안(正眼), 묘심(妙心),
몰현금(沒絃琴), 취모검(吹毛劒) 등 여러 명을 사용한다.
증도가에서는 진심 곧 자성(自性)을
군(君)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 것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에서는
이를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 ‘군(君)’이라는 한 글자는 지적해서 결정하는 말[指決之辭]이다.
바로 여기에서 총지문(摠持門)의 열림을 체득하고
조사(祖師)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친견하는 것이며,
백천 가지 삼매[百千三昧]의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모두 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재가 *중예동자(衆藝童子)를 참방해서
친견하고 말하기를 “나는 항상 이 자모(字母)를 노래하면서
반야바라밀문(般若波羅密門)에 듭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자법문(一字法門)은 바닷물처럼
많은 먹으로 써도 다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밝히지 못하면 설사 언사가 유창하고[同輠]
언변을 도도히 흐르는 강물[懸河]처럼 솟아낸다 해도
문자(文字)와 어언(語言)에 휩쓸려서 요달할 날이 없다.
일월(日月)이 왕래하여 한묵(翰墨:필묵)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세월과 시일이 장구하게 흘러서 편찬한 책이 산처럼 쌓이더라도,
구경의 심회는 길이 탄식하고 답답해하니,
심지법문(心地法門)과는 멀고도 멀어진다.
고덕(古德)이 말하였다.
도를 배움에는 반드시 먼저 깨달아야 하는 법이니
일찍이 *쾌룡주(快龍舟)와 다투었던 것처럼 해야 한다네.
비록 옛날의 누각이 한가로운 전원에 있다고 해도
한 번 건너서 넘어가야 비로소 쉴 수 있다네.』
<수심결>을 보면
「돈오(頓悟) 후에 점수(漸修)」라는 말이 나온다.
선오(先梧) 후수(後修)라는 먼저 깨닫고 난 다음에
이를 닦는다는 의미다.
닦는다는 말 <점수(漸修)>는 선가에서 보임(保任)이라고 한다.
그럼으로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반드시 발명(發明)함이 있어야만
비로소 깨달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최초의 일구(一句)를, 동도(同道)들이여,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남명천화상은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선서(禪書)에 보면 서암스님이 매일 스스로 주인공을 부르고
스스로 대답하였다는 <암환주인(巖喚主人)>의 화두가 나오는데
이를 비교해 보면 증도가의 이 서언(序言)이
얼마나 명쾌한 서언(序言)인가?
@注1:
*일자법문(一字法門): 여기에 인용된
선지중예동자(善知衆藝童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온
문자 지혜를 통해 해탈한 선지식을 말한다.
(무비스님이 찬한 화엄경 권76 입법계품/45 참조).
선재동자가 참방하자 선지중예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는데
이름이 여러 예능을 잘 앎(善知衆藝)입니다.
나는 항상 이 자모(字母)를 부릅니다.」
여기서 말한 字母는 <四十二字門>을 말하는 데
이는 화엄과 반야 二經에서 설한
자의(字義)를 보는 일종의 법문이다.
『반야경사념처품(般若經四念處品)』에서 설한
이 42字門 은 아(阿)자로 시작하여 다(茶)에서 그친다.
『智度論四十七』에 <42자는 일체의 根本字가 된다.
字에 인하여 말하고, 말에 依하여 名이 있고,
名에 依하여 義가 있다. 보살이 만약 字를 들으면
그 字에서 그 뜻을 아는 데까지 이른다.
처음에 아(阿) 뒤에 다(茶)까지 40이 있다.
(中略) 茶외는 다시 字가 없으며 만약 있다면
이는 42자의 枝波이다> 라고 했다.
간략히 화엄경에 나온 것을 일부만 올려본다.
<아(阿)>자를 부를 때 반야바라밀문에 들어가니
이름이 보살의 위력으로 차별이 없는 경지에 들어감입니다.
<다(多)>자를 부를 때 반야바라밀문에 들어가니
이름이 가없는 차별문입니다.
<파(波)>자를 부를 때 반야바라밀문에 들어가니
이름이 법계에 두루 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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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2: 쾌룡주는 증투쾌룡주(曾鬪快龍舟)의 고사에 나오는
굴원(屈原)의 古事에서 따온 것이다.
굴원(屈原)은 초나라 시인이며 정치가로
이름은 평(平)이고 원(原)은 별명으로,
초나라 무왕의 방계에 속하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전국 시대 말기 전국 7웅 중 세력이 가장 컸던 진나라,
제나라, 초나라는 모두 천하 통일의 꿈을 꾸었지만
결국 초나라는 끝없는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고,
굴원은 피폐해진 조국의 산천에 절망하여
돌을 품고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졌다.
후세 사람들은 굴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강에 몸을 던진 음력 5월 5일을 제일(祭日)로 정해
용머리로 장식한 용선(龍船)을 타고 강을 건너는 시합을 개최한다.
이는 굴원의 시체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갈댓잎으로 싼 송편을 빚어 강에 던지는데
이는 교룡(蛟龍)이 이것을 먹고
굴원의 시체를 해치지 말라는 기원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인용은 『선문염송』 제899則에서도 인용되어 나온다.
@사진은 중국 서호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