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관음성지●
3대 관음성지(1)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와 홍련암이 창건된 때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으로
창건주는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625~702)이다.
창건연기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제3권
‘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조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대사는
곧바로 낙산의 해변을 찾는다.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해변의 굴 안에
상주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해에 간 스님은 재계한 지 7일만에
좌구(座具)를 물 속에 띄웠더니,
천룡 등 8부 신중이 관음굴 속으로 스님을 인도했다.
굴 속에서 공중을 향해 예배하자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므로 받아 가지고 물러 나왔다.
동해 용으로부터 여의주 한 알을 받았지만
관세음보살의 진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7일 동안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정진하자
마침내 바다에서 붉은 연꽃(紅蓮)이 솟아나고,
그 꽃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말했다.
“좌상(座上)의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다.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나오니 과연 대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스님은 대가 솟은 곳에 낙산사를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봉안했다.
뒷날 원효스님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낙산사를 찾았다.
도중에서 스님은 벼를 베고 있는 흰 옷 입은 여자를 보았다.
희롱 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벼가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았다며 희롱 섞어 대답했다.
계속 걷다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속옷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스님이 먹을 물을 청하자 여인은 피빛 어린 물을 떠주었다.
물을 더럽게 여긴 원효스님은 냇물을 떠 마셨다.
그 때 소나무에 않았던 파랑새가
“제호(醍호=佛性)스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라고 하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소나무 아래에는 짚신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스님이 절에 이르러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신 한 짝이 벗겨져 있는 것을 보고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스님이 성굴(聖窟)에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하니,
풍랑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도력에 있어서 원효 스님에 미치지 못했다는 의상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원효스님은 관세음보살을 보지 못했다는 얘기다.
낙산사와 관련된 영험담은 이것말고도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조 범일(梵日)스님의 정취보살 친견기와
춘원 이광수가 소설로 꾸몄던 조신(調信)의 설화다.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간 범일스님이
명주 개국사에 이르렀을 때,
왼쪽 귀가 없는 스님 한 분이 말석에 앉아 있다가 말을 붙였다.
“저는 신라사람인데,
집은 명주 익령현(지금의 양양)의 덕기방에 있습니다.
스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
847년(문성왕 9) 중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범일스님은
먼저 굴산사를 세우고 선(禪)을 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뒤 10년이 지난 858년 2월 15일 밤,
중국에서 보았던 스님이 창문으로 와서 말하는 꿈을 꾸었다.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저의 부탁을 승낙하셨거늘
어찌 실천이 그리도 늦습니까?”
스님은 잠을 깬 즉시 익령현으로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마침 낙산 밑의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고 하였고,
그녀의 8살된 아들이 들려 준 말을 스님께 전한다.
“나와 함께 노는 아이 중에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아이는 돌다리에 이르러 물속을 가리켰다.
그 속에 금빛 나는 돌부처가 있었다.
왼쪽 귀가 없는 것이 중국에서 만난 스님의 모습과 똑같았다.
정취(正趣)보살이었던 것이다.
간자(簡子)를 만들어 모실 곳을 점쳤더니,
낙산 위가 좋다고 나와 3칸의 불전을 지어 모셨다.
정취보살과 관음성지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그 비밀이 있다.
선재동자가 도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
스물 여덟 번째로 만난 분이 관세음보살이고,
스물 아홉 번째로 만나는 분이 정취보살이다.
다른 선지식들은 선재동자가 찾아가서 만났는데
정취보살은 금강산에서 관세음보살이 계신
보타낙가산까지 일부러 와서
선재동자에게 보살행을 가르쳐 주었다.
낙산사를 찾는 이들을
선재동자라고 생각하면 설화의 의미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관세음보살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한 그들에게
정취보살은 새로운 확신과 구도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낙산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소실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뜻 있는 이들의 원력으로 관음성지의 맥을 이어왔다.
고려 초기에는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으나
관음상만은 약간의 화를 입었다.
1468년(조선 세조14) 세조가
학열(學悅)스님으로 하여금 중창하게 했다.
1631년(인조 9) 화재로 다시 불타자
종밀(宗密).학조(學祖)스님이 중건했고,
1643년(인조21) 다시 불타자
도원(道源),대주(大珠) 스님등이 중건했다.
현대에 들어 오현(五鉉), 지홍(知洪) 스님 등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켜
보타전과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 마두(馬頭)관음,
11면관음, 준세(准提)관음, 여의륜(如意輪)관음의 6관음과
관세음보살 32응신상(應身像) 등을 봉안했다.
낙산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이다.
돌과 기와 흙을 함께 이용한 낙산사의 담은
소박하면서도 미적 감각이 뛰어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그 밖에도 세조 12년(1466)에 세운 홍예문,
최근에 다시 중수한 의상대,
1972년에 착수해 5년 만에 완공한 해수관음상 등도
관음도량 낙산사를 돋보이게 하는 문화재들이다.
낙산사의 산내 암자인 홍련암(紅蓮庵)은
의상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인
관음굴 위에 지은 암자다.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은
창건 당시부터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여의주를 바친 용도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홍련암에는 신비로운 창건설화를 이어가기라도 하듯
이적들이 계속 나타났다.
1185년(고려 명종5) 독실한 불교신자인
병마사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관음굴 앞에서 분향하고 배례했을 때
청조(靑鳥)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렸다.
관음굴 앞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예배하면
청조가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유자량은 크게 감격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다.
바다 벼랑 높고도 아득한 곳 그 가운데 낙가봉
보문은 닫아도 닫히지 않네
명주는 내가 바라는 바 아니지만
청조와 이 사람은 상봉하였네.
오직 바라옵나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을 뵈옵게 하옵소서
홍련암의 이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683년(조선 숙종9)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는
공중에서 한 알의 명주(明珠)가 내려 오는 이적이 있기도 했다.
이를 목격하고 환희에 찬 석겸(釋謙)스님은
곧 사리탑을 건립하고 탑의 이름을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라 했다.
1694년에는 사리탑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공중사리탑비를 세웠다.
현대에 들어서는 1930년 2월 25일,
현대 고승 경봉(鏡峯)스님이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시작했는데 13일째 되던 날
참선 중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큰 정진력을 얻었다 한다.
스님은 이러한 인연으로
낙산사 원통보전과 홍련암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3대 관음성지(2) 강화 낙가산 보문사
보문사는
‘차별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
‘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한다(普門示現)’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루에 일어난 일이다.
설을 맞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
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수 십명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겨우내 꽁꽁 얼었던 임진강이
갑자기 녹아 얼음덩이가 외포리 바다로 흘러내렸다.
배는 빙산에 밀려 먼 바다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며칠,
추위와 굶주림은 날로 더하고
성난 파도는 더욱 거세게 뱃전을 때렸다.
죽음의 공포가 배안에 가득했다.
그 때 어느 사람이
“우리 모두 보문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고 외쳤다.
사람들은 간절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보문사를 향해 절을 했다.
그러자 홀연히 낯선 스님 한 분이 뱃머리에 나타나
얼음덩이를 밀어내고 노를 저었다.
배는 순식간에 보문사 앞바다에 이르렀다.
스님은 배에서 내리자 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승객들 중 다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관음성지 보문사는
특이하게도 영험있는 나한기도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9년(640) 4월의 일이다.
어느날 매음리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
어부는 그물을 쳤다가 한참만에 걷어 올렸는데
고기는 없고 이상스럽게 생긴 돌들이 그물에 가득하였다.
어부는 그 돌들을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다시 그물을 쳤다.
한참 만에 어부는 그물을 걷어 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좀 전의 그 돌덩이들이
그대로 그물에 걸려 있었다.
놀란 어부는 황급히 그물을 바다에 털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는 꿈을 꾸었다.
해맑은 얼굴에 수려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 천축국(天竺國)에서 왔느니라.
나를 포함한 스물 두 명의 성인이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있다가
그대의 그물에 따라 올라왔는데
그대는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넣어 버리더구나.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무진(無盡) 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법을 전하기 위해서다.
마을 뒤 낙가산에 가보면 우리가 오래도록
편안하게 쉴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이 인연과 공덕으로 그대의 후손들까지
길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어 노스님은 낙가산으로 어부를 인도,
보문사 앞에 있는 석굴을 보여 주었다.
스님은 이곳에 쉬게 해달라고 다시 이르고 바다로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어부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웠다.
어제 석상들을 던져 버린 곳에 그물을 쳤다.
조금 후 가슴을 조이며 걷어 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석상 22위(位)가 고스란히 따라 올라 왔다.
어부는 정성스레 석상을 모시고 뭍으로 올라와
물로 깨끗이 씻고 꿈에 본 석굴로 향했다.
굴 앞에 다가서니 안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내음이 굴 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어부는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굴 안은 마치 사람이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좌대가 있었다.
좌대에 석상을 모시고
어부는 거듭거듭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었다.
그날밤 노스님이 다시 어부의 꿈에 나타났다.
“그대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함부로 쓰지 말며,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 들일 것이니라.
그대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보문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이다.
보문사에는 고려 때 왕실에서 하사한 옥등이 있었다.
이 옥등은 석굴 법당의 안등으로 사용되었는데,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사미가 실수로 법당 바닥에 떨어뜨렸다.
등은 마치 칼로 자른 듯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기름이 흘러내렸다.
사미승은 울면서 주지 스님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옥등은 절에서 소중히 여기던 것이었으므로
주지 스님도 깜짝 놀라 석굴 법당으로 뛰어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두워야 할 법당안이 환하게 밝았다.
의아하게 여긴 주지 스님은 불리 켜진 등을 만져 보았다.
바로 그 옥등이었다.
깨어졌던 옥동이 감쪽같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등에는 그전보다 더 많은 기름이 채워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보문사에 전하는 사지에 의하면
635년(신라 선덕여왕4) 금강산 보덕굴에서 수행하던
회정(懷正) 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스님이 이곳에 와서 산세를 살펴보니
인도의 보타낙가산과 비슷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보문’, 산이름을‘낙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정 선사는 옛 기록에는 전혀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근대에 작성된 <유점사본말사지>에
“금강산 보덕굴을 고려 의종 10년(1156)에
회정 선사가 중창했다”는 내용이
회정 선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옛 고려 조정에서는 보문사를 지키는데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고려 현종 1년(1095)에
중국 자은종(慈恩宗) 소속의 혜인(惠忍)스님이
31인의 성인과 함께 낙가산의 성굴(聖窟)을 친견하고자
고려 조정에 간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친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신성시 하고 보호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보문사는
1812년(순조12)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으로 이뤄진
대대적인 불사로 중흥의 기틀을 다진다.
1893년(고종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원(大圓) 스님이 화주가 되어 관음전을 중건했다.
그 후 1928년 주지 선주(善周)스님의 원력으로
마애관음보살상 조성불사가 이루어져 보문사는 명실 공히
전국적인 관음기도 도량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법당,관음전,종각,석실 등이 있다.
석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석실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설치돼 있고,
동굴 안에는 21개소의 감실이 마련돼 있다.
석실 법당 좌측 위에
천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암반인 천인대가 있다.
길이 40m, 촉 5m의 위용을 자랑하는 천인대는
이 절 창건 당시 인도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마애관음보살상은
절에서 1km 가량 뒤쪽으로 올라간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높이 32척,너비 11척인데,
각각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
낙조에 붉게 물드는 보살상의 모습은 관음진신 바로 그것이다.
고해(苦海)에 허덕이는 중생을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는
대비보살의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다.
보살상을 덮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눈썹바위는
보살상을 외호하는 천혜의 지붕으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마애관음보살좌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사의 볼거리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다.
수령(樹齡) 600년이 넘은 향나무는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 32m, 둘레는 굵은 곳이 2.8m이며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나무와 성보문화재들이
보문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3대 관음성지(3) 남해 금산 보리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히는 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683년(신라 문무왕3)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放光)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 스님이 이 절을 짓고
<화엄경>에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보광궁(普光宮)이라 한 데서 착안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고 하였다.
그 후 1660년(조선 현종1) 현종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하여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한 것이다.
1901년에는 낙서(樂西),신욱(信昱)스님이,
1954년에는 동파(東波)스님이 각각 중수하였고,
1969년에 양소황(梁素滉)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옆에는 이성계가 기도했던 자리인
이씨기단(李氏祈壇)이 있는데 매년 가을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이름이 바뀐 금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창건하기 전,
이성계는 전국의 이름난 성지에서 기도를 올렸다.
계룡산과 지리산에서의 기도가 응답이 없자
마지막으로 보광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절박한 심정이 된 그는
“나의 기원을 들어준다면 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산신령에게 약속했다. 기도의 영험이 있었던지
이성계는 훗날 개국해 왕이 되었다.
나라를 새로 열고 갖가지 제도를 정하고 궁을 옮기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기도했던 남쪽 끝의 작은 산을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약속도 생각났다.
그러나 상민들에게 평생 한 두번 만져볼 기회가 올까 말까 한
비단으로 산을 덮는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약속한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답답해진 태조는 묘책을 짜내고자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신하들도 뽀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어느 신하(정도전<鄭道傳>이라는 설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해도 그 산을 비단으로 직접 감싸지는 못합니다.
어명을 내리어 이제부터 산 이름을
비단 금(錦), 뫼 산(山)자로 해
금산이라 부르게 함이 옳을 줄 압니다.
뭇 사람들이 그 산을 금산이라 부르면
실제 비단을 두른 것이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묘책이었다. 왕도 매우 흡족했다.
이후 보광산이란 명칭과 함께 금산이 혼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부분 금산이라 쓰여지고 있다.
보리암에는 현재 보광전을 비롯하여
간성각(看星閣),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의 당우가 있다.
문화재로는 큰 대나무 조각을 배경으로 좌정하고 있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관음상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모셔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상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보리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이다.
‘빛(光=깨달음)을 널리 펴겠다’는 의미를 가진 보광전은
바로 관음보살의 중생구제 원력을 현실화시킨 당우다.
칠난삼독(七難三毒)에서 미혹한 중생들을
인도하겠다는 서원이 담긴 건물이다.
보광전 뒤편에 있는 간성각은 별다른 특징이 없다.
옆에 있는 산신각도 간소하기는 마찬가지다.
보광전 맞은 편 바위 끝에 있는 해수관음상은
헬리콥터로 이곳에 이운될 때
찬란한 서광을 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 옆에 있는 3층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보주(寶珠)만이 놓여 있다.
높이는 2.3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며
원효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세울 때 건립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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