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입니다. 이 글을 관계자 및 함안조가들에게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4수의 한시는 조장래(1944년 하림 태생), 조직래님(1947년 하림 태생, 감찰공파)의 조부이고, 남촌 조선제 아재의 부친이신 춘파(春坡) 조용택(趙鏞澤, 1880-1960, 81세졸)의 유작시(遺作詩)입니다. 이 시들은 남촌 조선제의 유고집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춘파(春坡)”라는 호는 시를 뛰어나게 잘 지은 소동파(蘇東坡)의 호를 본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소동파의 본명은 소식(蘇軾, 1036~1101)이다. 춘파 조용택은 지역에서 한시를 가장 잘 지었고, 시조창도 잘 했다고 합니다. 춘파 조용택은 슬하에 1. 조의제(義濟), 2. 조남순(南順, 파수고모님, 남편 재령이씨 이현욱), 3. 조숙제(淑濟), 4. 조선제(善濟), 5. 조원제(元濟), 6. 조상제(相濟), 7. 조해제(海濟) 등 6남1녀가 있습니다.
아래 한시의 번역은 관정 조성래(1959년 하림 태생, 감찰공파)가 했습니다.
시1.
密城明月添愁白(밀성명월첨수백)
巴陵春山入夢靑(파릉춘산입몽청)
밀양의 밝은 달은 애수가 더해져서 더욱 밝고,
함안의 봄산은 꿈속에서조차 푸르도다.
이 시는 조용택님이 밀양에 있는 큰 아들 댁에
몇 달 기거할 때 고향 함안(巴陵파릉)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합니다.
시2.
防禦嶺下叩巖亭(방어령하고암정)
吾祖遺風百世淸(오조유풍백세청)
방어산 아래에 고암정(叩巖亭)이 있는데,
거기에 내 선조님이 물려준 가풍은 백세청풍(百世淸風)이로다.
(시인의 메모) 나의 이 시는 방어산과 고바위, 그리고 백세청풍을 노래한 시(詩)이다.
(번역자 도움말) 백세청풍(百世淸風)은 중국 은나라 말, 즉 B.C 1111년경에 살았던 백이와 숙제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중국 수양산에 그 두 사람을 위한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에 주자(1130-1200)가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글씨를 써서 새겨 넣은 것에서 유래한다. "백세청풍"은 '백세(百世), 즉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절의(節義)를 지키는 가풍'이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님들은 두문동72현 중 한 분이신 전서공(공조전서, 국토개발부장관) 조열(趙悅) 선조님을 비롯하여,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과 판서공 조신도, 감찰공 조민도 등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지켜낸 13충(忠) 선조님들과 상해임시정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냈고, 상해임시정부의 헌법 및 의정원(국회)법과 대한민국 헌법과 국회법의 초안을 작성한 조소앙 선생 및 일제 때 일본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군 육군대장이었던 구미노미야를 단도[독검毒劍]로 찔러서 몇 달 뒤에 죽게 만든 조명하(1905-1928) 의사와 3.1만세운동 때 앞장섰던 많은 혈족들이 있듯이 함안조가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시3.
康命幽谷如此景(강명유곡여차경)
杜嶺消息碧川傳(두령소식벽천전)
강명의 깊은 골짜기는 이러한 풍경이고,
하림 소식을 시냇물이 전해주도다.
이 시는 처가 마을에 있는 강명(康命) 계곡에서
친구들과 유유자적하면서
杜嶺(두령=하림)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합니다.
시4.
投杖石上聲聲玉(투장석상성성옥)
履躪花間步步春(이린화간보보춘)
*履(이) 밟을 이 *躪(린) 짓밟을 린
바위 위에 지팡이를 던지니 “땡그랑” 하며, 옥소리가 나고,
꽃 사이로 걸어가니 걸음마다 봄이로다.
이 시는 삼월삼짇날(음력 3월3일) 녹샘골과 마당바위에서 상춘제(賞春祭)를 지낼 때 함안군수가 “시가 한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춘파를 쳐다보니 즉석에서 지은 시라고 합니다. 위의 4개의 시 중 가장 잘 지은 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실릴만한 명시입니다. 후손들은 모두 이 시를 외우기 바랍니다.
(번역자 도움말) 삼짇날은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세시풍속인데, ‘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한다. 답(踏)은 밟을 답이고, 청(靑)은 푸를 청이다. 이 날 들판에 나가서 꽃놀이를 하고, 새 풀을 밟으면서 봄을 즐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은 춘파 조용택의 장례식 때 하림 압실 할배(조성학, 1891-1965)께서 글을 써서 읽은 만장을 춘파의 아들 남촌 조선제님께서 필사하여, 그의 유고집에 넣어 놓은 것을 남촌 아재의 아들 조직래님이 소장하고 있는 것을 여기에 올립니다.
妨 방해할 방, 遯 달아날 둔(돈), 跡 발자취 적. 蚷 노래기 거. 蛩 메뚜기 공.
위의 글은 해독이 잘 안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는데,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춘파 선생만큼 두뇌가 총명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보지 못했다. 안타갑게도 그는 80년 세월을 그 좋은 머리를 특별히 써먹지 못 하고 지내다가 노년에 맹인(盲人)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파 선생은 마음의 밭을 가꾸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했다. 춘파 선생은 맹인이 된 뒤 자신의 유고집 3편의 원고를 나에게 맡겨두었다. 나는 그 소중한 원고 뭉치를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는데, 육이오전란 때 피난 갔다가 몇 달 뒤에 돌아와보니, 그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도다. .... 4종조 성학(性學) 배(拜) 통곡 만(輓)장" 등의 내용이다.
첫댓글 나는 파수 고모님과 남촌 조선제 님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6남1녀의 부친인 춘파 선생님께[서 시를 잘 지었다고 하니 참으로 그 집안은 특수한 집안임에 틀림 없다. 모두가 언변과 문장에 탁월한 분들이다. 조장래와 조직래도 선조의 전통을 잘 이어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 큰일 났군! 6남1녀 중 막내인 조해제 님이 살아계실 때 집안 문집을 만들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