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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 성지순례 안내 ㅇ 일시 : 2016년 4월 19일 06시 출발 출발장소 : 남부소방서앞 ㅇ 장소 : 천안 각원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김룡사 ㅇ 교통편 : 차량 3대 ● 천안 태조산 각원사 041-561-3545 충남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산 98-83 충청남도 천안시 안서동 태조산에 자리한 각원사는 개산조(開山祖) 경해법인(鏡海法印) 조실(祖室)스님의 원력으로 1975년에 창건되어 대한불교조계종에 직할교구로 등록된 사찰이다. 경해법인 조실스님께서는 한국전쟁(6.25사변)때 통일염원 성전건립의 서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교학과 수행정진 과정에서 태조산에 인연되어 재일동포 ‘각연(覺然) 김영조(金永祚) 거사’와 ‘자연심(自然心) 부인 정정자(鄭貞子)보살’의 시주로 1977년 5월 9일 좌대를 포함해서 높이 15미터, 무게 60톤의 거대한 아미타불 좌불상 "남북통일기원 청동대불"(南北統一祈願 靑銅大佛)을 태조산 중봉에 봉안하였다. 각원사 입구 연화지(연못)에서 203계단인 무량공덕계단을 오르면 청동대불(아미타불)이 자비로운 미소로 참배자들을 반긴다. 개산조 법인스님과 현 주지스님이신 대원스님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대 도량을 이룩하겠다는 일심(一心)으로 청동대불을 봉안한 이래 많은 국내외 불자들의 정성어린 동참과 함께 불교문화 창달에 기여할 대작불사(大作佛事)를 계속 해 나아가고 있다. 경해원, 반야원, 영산전과 개산기념관이 있으며, 특히 대웅보전은 건평 200평으로 34개의 주춧돌과 100여만재의 목재가 투입된 외(外)9포, 내(內)20포, 전면7간, 측면4간의 규모로 국내에서 목조 건축물로서는 가장 큰 기념비적인 법당이다. 또한 태조산루는 2층의 누각식 종각으로 건평 329평에 20톤에 달하는 "태양의 성종"이 2층 성종각에 걸려있다. 이곳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맑고 웅장한 범종소리는 세파에 시달리며 번뇌로 얼룩진 중생들에게 향기롭고 맑은 대자대비의 음성으로 사생(태,란,습,화)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각원사는 2002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부터 인가 받은 "각원사 불교대학"을 설립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는 일본 동경 "명월사" 및 야마구치현 "광명사", 미국 필라델피아 "관음사", 그리고 국내에 경주 "대원사", 울산 "연화사", 오산 "현암사"를 포교원으로 두고있다. 이와 같이 각원사는 태조산의 풍광과 승가의 조화속에 수행과 기도도량으로서 그 연륜을 더해가며 부처님의 가르침인 만고불변의 진리를 탐구하고, 수행정진과 교육, 포교등 불교문화 창달에 앞장서는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큰 가람으로 발전하고 있다. ● 문경 사불산 대승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사불산의 산마루에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587년(진평왕 9)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옆에 절을 창건하고 대승사라 하였으며, 망명비구(亡名比丘)를 청하여 절을 맡기고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다. 망명비구는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였으며, 죽고 난 뒤 무덤에 한 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고종 때 상주목사 최자(崔滋)는 대승사의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조선 초기 기화(己和)가 이 절의 조전(祖殿)에 있으면서 《반야경》을 연구하였고,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법당을 비롯하여 승당(僧堂)·동상실(東上室)·관음전·조전· 미륵전·중실(中室)·시왕전(十王殿)·향로전(香爐殿)·천왕문(天王門)·만세루(萬歲樓)·침계당(枕溪堂)·금당(金堂)·영자전(影子殿)· 향적전(香積殿)·응향전(凝香殿)·나한전(羅漢殿)·청심전(淸心殿) 등을 신축하였다. 이 중 금당은 1692년(숙종 18)에 지었는데, 미면사(米麵寺: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1727년(영조 3) 종각을 단장하였 고, 1730년 금강문(金剛門)을 지어 금강역사상과 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모셨으며, 다음해 천왕문과 금강문·일주문을 단장하였 다. 그 때의 산내 암자로는 미륵암(彌勒庵)·사불암(四佛庵)·상적암(上寂庵)·대비암(大妃庵)·묘적암(妙寂庵)·묘봉암(妙峰庵)·윤필암 (閠筆庵)·문수암(文殊庵)·보현암(普賢庵) 등 9암이 있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이때 아미타불의 복장(腹藏)에서 사리(舍利) 1과와, 신룡(神龍) 1년(705)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862년(철종 13) 명부전(冥府殿)과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의운(意雲)·취월(就越)·덕산(德山) 등이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 누각 등을 건립하였다. 1872년의운이 극락전을 중건하였고, 이듬해 누각 밖으로 석축을 쌓고 회랑 30여 칸을 신축하였다. 1899년 월파(月波)가 중심이 되어 염불당(念佛堂)을 만들고 미타계(彌陀契)를 설치하였으며, 환경(幻鏡)·화응(華應)·학송(鶴松) 등은 동별당(東別堂:祖師堂)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여 7년 동안 정진하였다. 이때 동별당이 좁고 퇴락하여 많은 승려들이 정진할 수 없었으므로 1906년 동별당 동쪽에 건물을 짓고 쌍련암만일회(雙蓮庵萬日會)를 개설하였다. 1956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6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나한전·시왕전·선원·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묘적암·윤필암· 상적암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75호인 대승사목각탱화부관계문서 4매, 보물 제991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 사적비와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금자 《화엄경》 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있으 며, 창건설화에 얽힌 사불암과 그 아래에 세워진 대웅전은 조화를 이루어 신비감을 준다. 054-552-7105 문경시 산북면 대승사길 283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25.5㎝, 가로 81.5㎝.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봉안되어 있는 나옹화상진영은 1803년에 신겸(愼兼)이 조성하였다. 나옹화상은 오른쪽을 향해 결가부좌한 전신좌상(全身坐像)에 주장자와 염주를 든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얼굴과 신체 및 장삼과 가사의 옷주름 표현에서 제작자인 신겸의 화풍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나옹혜근은 1347년(충목왕 3)에 원(元)의 연경에서 지공(指空)선사의 법을 계승하였다. 공민왕 때 고려로 귀국해 회암사의 주지가 되고 왕사(王師)로 봉해졌으며 보제존자라(普濟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나옹혜근은 1340년 (충혜왕 1)에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묘적암에는 나옹화상진영이 봉안되었다.
나옹화상진영을 그린 신겸(愼兼)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를 이끌었던 수화승(首畵僧)이다. 사불산에 위치한 대승사는 신겸의 옹사와 스승인 괄허취여(括虛取如)와 취운의정(醉雲義貞)이 주석했던 사찰이다. 대승사에 기반을 둔 화승 신겸은 산내 암자인 묘적암의 나옹화상진영의 제작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화상진영은 화면 왼편에 “공민왕사나옹대화상(恭愍王師懶翁大和尙)”이란 영제(影題)가 적혀 있다. 나옹화상은 고려왕사로서 위엄있는 모습보다는 조선 후기 선사(禪師)로 표현되었다. 화면 중앙에 나옹화상은 청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있으며 한 손에 주장자(拄杖子)를 쥐고 다른 손에는 단염주(短念珠)를 쥐고 있다. 등 뒤에 가리개가 있으며 가리개에 용두불자(龍頭拂子)가 걸쳐 있다. 배경은 바닥에 화문석과 가리개로 이분화되었다. 화문석과 가리개는 19세기 진영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며, 배경과 가리개의 격자문은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문양이다.
나옹화상의 청색 장삼과 홍가사, 단염주·주장자·불자의 표현 등은 신겸이 1795년에 제작한 김룡사 화장암의 침운당선사 진영과 구성이 유사하다. 다만 얼굴과 신체 비율에 있어 나옹화상진영은 사실성이 크게 떨어진다. 즉 얼굴은 타원형에 이마와 광대가 둥글게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신겸이 불보살과 나한을 그릴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넓은 어깨에 긴 허리와 팔, 상대적으로 좁은 무릎 폭으로 이루어진 신체 역시 신겸의 보살도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신겸은 나옹화상 진영을 제작하면서 실존 인물보다는 보살이나 나한에 가깝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과 신체 표현 외에도 가사 끈을 고정하는 금박의 가사 고리, 무릎 위에 과장되게 너풀대는 소매자락 또한 신겸의 특징적 표현이다.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聞慶 大乘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및 關係文書)_보물제575호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및 관계문서(聞慶 大乘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및 關係文書)은 원래 부석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대승사로 옮겨 놓은 것으로, 후불탱화를 나무로 깎아 돋을새김, 또는 뚫을새김으로 표현한 것 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일종으로, 대개 법당 본존 불의 뒤에 후불탱화로 걸린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목각탱이 꽤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 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깎은 아미타불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들을 안치하고 있다.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완의」등이다.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聞慶 大乘寺 金銅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_ 보물 제1634호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과학적 조사(성분분석, X-ray)를 하던 중 불상의 머리에서 “大德五年辛丑五月二十日 宮闕都監錄事別將丁承說印出”의 묵서가 적힌 기록이 발견되어 연대는 1301년 에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다라니를 포함한 복장물은 처음 불상을 제작하였을 때에 납입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아미타여래좌상이
14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표현이 원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도 확인된다. 대체로 13세기말 14세기의 고려불상이 원의 영향 을 받은 티베트 불상 계통이 개성지역에서 유행하였던 것에 비해 이 문경의 대승사 불상은 그 이전 시기인 고려중기 불상의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고 이 전통은 역시 13세기로 추정되는 서울 수국사의 아미타불상이나 청양 장곡사의 약사불상(1346년)으로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 으로 평가된다. 조각사 연구에 기준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특히 이 시기 유행한 금동불상 중에서 조형적 완성도가 비교적 높고 보존 상태 또한
양호하다. 판각 또는 인출되어 금동아미타불조성시에 불복장에 납입(納入)되어진 것으로 “大德五年五月二十日 宮闕都監綠事別將丁承說 印出”의 묵서명은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미타불조성에 있어 필수적인 다라니로 흩어져있는 불복장 일괄유물을 체계화시키는데 보완이 되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別將丁承說印出’의 墨書가
있음) 묵서있음) 묵서(墨書)가 있음) ● 문경운달산 김룡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588년(진평왕 10) 조사 운달(雲達)이 창건 하여 운봉사(雲峰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사적은 전래되지 않고 있다. 1624년(인조 2) 혜총이 중창하였으나, 1642년(인조 20)에 소실되어 1649년(인조 27) 의윤(義允)· 무진(無盡)·태휴(太休) 등이 중수하였다. 절 이름을 김룡사라 한 것은 문희(聞喜 : 지금의 聞慶)부사 김씨가 이 산에 은거하고 불공을 드려서 처음에 는 신녀(神女)를, 두번째는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용(龍)이라 하였더니 가운이 번창했으 므로, 이에 불공드리던 곳을 김룡동이라 하고, 그 북쪽에 있던 운봉사를 김룡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금선대(金仙臺)의 금자와 용소폭포의 용자를 따서 금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 31본사의 하나로서 50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교통의 불편으로 옛 말사였던 직지 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1940년 요사와 종루를 개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김룡사 일원의 계곡을 운달계곡이 라 하는데, 맑은 물과 짙은 녹음이 어우러져 ‘문경8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응진전(應眞殿)·금륜전(金輪殿)·명부전(冥府殿)· 상원전(上院殿)·영산전(靈山殿)·원통전(圓通殿)·첨성각·범종각·수월당(水月堂)·만월당(滿月堂)·연하당· 일주문(一柱門)·천왕문·요사 등 전각 48동이 있다. 일주문에는 문 윗부분에 ‘紅霞門(홍하문)’, 아랫부분에 ‘雲達山 金龍寺(운달산 김룡사)’라고 쓴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고, 대웅전에는 1644년(인조 22) 조성된 천장(天藏)·지장(地藏)·지지(持地) 보살상을 묘사한 삼장탱화(三藏幀畫)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다시 지은 건물로서, 16나한상과 나한도가 모셔져 있다. 절 입구에서 보면 정면에 ‘慶興講院(경흥강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300인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온돌방으로서, 자연 지층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축한 것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시대를 알 수 없는 석조 약사여래입상과,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맷돌·떡시루·쇠북·범종, 지옥의 염라왕청에서 죽은 이가 생전에 지은 선악의 행업이 나타난다는 업경대(業鏡臺) 등이 사물(寺物)로서 남아 있다. 부속 암자로는 대성암(大成庵)·화장암(華藏庵)·양진암(養眞庵)·금선대(金仙臺)·토굴 등이 있다. 양진암은 1658년(효종 9) 설잠(雪岑)이 창건하였으나, 1664년에 불탄 뒤 1749년(영조 25) 환월(幻月)이 중건 하였다. 그 뒤 1769년 무영이, 1825년 해운과 경봉이, 1840년 정봉이, 1929년 인택이 각각 중수하였다. 대성암은 1800년(정조 24) 영월(潁月)이 청하당을 옮겨 창건하였고, 1886년 혼성(渾性)이 중수하였다. 현재는 여승들만의 수도처로서, 이곳에는 고승의 진영이 담긴 영정과 동물 그림의 병풍 등 많은 현판들이 있다. 전래되는 대표적인 전설로는 산너머의 대승사(大乘寺)에 불이 났을 때, 일심으로 염불하면서 바가지에 시냇물을 퍼서 불을 끈 동승(童僧)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운달산 김용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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