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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지음,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 행성B, 2020초판3쇄(초판1쇄 2019년 8월)
아브라함시대의 다신교 사회
낙원설화-
고대의 종교와 신화 대부분에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수메르신화에도 낙원설화가 있다. 구약성서의 에덴동산을 수메르 신화에서는 ‘딜문’이라 했다. 딜문이란 ‘정토, 밝은 세계’라는 뜻으로 병도 죽음도 없는 생명의 땅이다. 딜문동산은 태모신胎母神, 곧 모든 신의 어머니 신닌후르샤그가 동쪽에 만든 낙원이었다. 그래서 물의 신 엔키가 태양신 우투에게 명하여, 땅의 물을 길어 딜문 동산에 채우게 해 푸른 초장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되었다.
딜문동산에 여러 신이 모여 살았는데 그 가운데 태모신 닌후르사그가 여덟 그루의 나무를 동산에 심었다. 닌후르사그는 땅의 번식도 주관한 지모신이었다. 닌후르사그는 땅의 번식도 주관한 지모신이었다. 닌후르사그는 나무들을 키우는 데 성공한다. 나무 열매를 먹고 싶어하는 물의 신 엔키의 눈치를, 그의 하인 두 얼굴의 이시무드가 알아채고는 과일을 따주어 엔키가 먹었다. 이에 분노한 닌후르사그는 엔키에게 죽음의 저주를 퍼부은 후 사라진다. 과일을 먹은 엔키의 오장육부가 썩기 시작했다. 엔키의 병이 급속히 악화되자 수메르 신들은 닌후르사그를 만나 타협을 보았다. 이때 엔키에게 병이 난 곳 가운데 하나가 갈비뼈였다. 닌후르사그는 갈비뼈를 치료해 엔키의 병을 완치시킨다.
닌후르사그는 닌티라는 생명의 여신을 만들어, 닌티가 엔키의 병을 고쳐 둘이 함께 살도록 했다.
수메르의 딜문동산 신화에서는 창조주가 여신이었는데 에덴동산 신화로 넘어오면서 창조주는 남신이 된다. 모계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부계사회로 바뀌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06~107쪽)
종교와 문화에 나타나는
정주민족과 유목민족의 차이-
정주민족과 유목민족의 차이는 농경과 유목만큼이나 극명하게 대조적이다. 한쪽은 한곳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돌아다니며 더 좋은 초지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한쪽은 계절의 순환에 맞추어 기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은 수많은 변화에 재빨리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한쪽은 자기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이고 다른 쪽은 남의 것을 빼앗아야 생존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문화나 종교 역시 극명하게 대조적이다. 한쪽은 자기 것을 지키려는 습성이 강해 배타적이고 다른 쪽은 변화를 수용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정주민족의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반면 유목민족의 종교는 다른 종교를 수용하고 포용하여 자기 것에 융합시킨다. 동서 문화의 차이도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서양은 분리를 추구하고 동양은 조화를 추구한다. 서양은 개체를 중요시하고 동양은 관계를 중요시 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도 서양은 ‘내’가 중시되는 반면, 동양에서는 ‘우리’가 중시된다.
서양종교에 의하면, 신은 자연을 창조하여 인간에게 주고 이것을 지배토록 했다.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자연보다 우월해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는 당연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모두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나 정신의 육체로부터의 격리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반면에 동양종교는 범아일여 사상 등 포용과 융합의 종교이다. 그렇다 보니 동양철학 역시 분리나 격리 대신 통합과 일치를 먼저 생각한다.(163쪽)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그가 믿는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랐다. 이 종교는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를 지항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가 보는 이 세상은 선한 영과 나쁜 영의 대결장인데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영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고레스왕은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의 뜻에 따라 선한 영의 전사로서 싸울 것을 다짐하고, 신의 뜻을 헤아리는 의로움과 자비로움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평등’을 구현하는 데 앞장섰다.
바빌로니아 정복 직후부터 고레스왕은 절대군주국이었던 바빌로니아와는 아주 다른 정책을 폈다. 그는 ‘고레스 원통’이라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1879년에 발견되었다. 여기에 보면 “바빌론 거주민에 대하여는 … 나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 주는 제도를 폐지한다. … 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랬동안 폐허가 되어온 거룩한 땅으로 … 나는 역시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보냈다.”라고 적혀있다.
곧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노예 제도를 금지하며,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에게 급여를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노예제도와 부역제도가 일반화되어 있던 고대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이었다. 심지어 전쟁포로들에게까지 자유를 허락해 자기 나라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영국 역사학자 찰스 프리먼은 고레스의 업적을 다름과 같이 평가했다. “고레스가 이룩한 업적이 알렉산드로스대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기원전 320년에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를 파괴했지만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203쪽)
유대인들 ‘고레스 칙령’으로 귀한-
유대민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50여 년을 역사에서는 ‘바빌론 유수기’라 부른다. 기원전 586~538년의 기간이다.(205쪽)
<조로아스터교>
불을 숭배, 배화교라고 부름. 빛을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으로 봄.
성상숭배 금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않았으며, 신상이나 신전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그리스인과 달리 신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 않기 때문이다.”
그 무렵 인근 정주민족은 모조리 신상과 신전을 짓는 문명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닮은 신을 만들어 모셨으나 아리안들은 달랐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추상적인 신을 모셨다. 이후라 마드다만 하더라도 아후라는 빛을 의미하며, 마즈다는 지혜를 뜻한다. 이름 그대로 ‘지혜의 신’이다. 지혜의 신이 얼굴이 있을 리 없었다.(226쪽)
<인도-그리스 왕국 건국->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동서양의 중요한 교통 중심지에 있었는데, 유목민족 월지에 쫓낀 스키타이가 몰려들면서 이들에게 밀린다. 그러자 기원전 180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인도로 팽창을 시도한다. 이때 인도로 원정 갔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적지인 인도에 고립되자 아예 인도 북부 ‘인도-그리스 왕국’을 건설한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비옥한 토지, 중앙아시아와 이란, 인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로 이집트, 바빌론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다. 두 세기 동안 존속했던 인도-그리스 왕들은 처음에는 제우스와 포세이돈 같은 그리스 신들을 믿으며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인구의 절대다수인 인도인을 지배하며 살아가다 보니 자연히 인도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그들의 주화에서 보여주듯이 그리스어와 인도어 문자를 조합하고 그리스 종교와 철학, 힌두교, 불교를 혼합했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그리스 문화의 용광로가 되어 복합문화인 ‘그레코 불교’를 만들어냈다.(306~307쪽)
<월지족이 세운 쿠샨왕조->
그 무렵 중국 북서부 타림분지, 곧 지금의 신장위그르와 감숙성의 타클라마칸사막 주변의 초원에서 동서무역을 독접하던 인도유럽어계 유목민족 토하라인들이 살았다. 중국인들은 그들은 월지(月氏, 월씨)족이라 불렀다. 타림분지는 동양에서 가장 높은 고원과 드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지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동서문화가 최초로 교차한 지역이다. 타림분지는 북으로는 알타이산맥과 해발 7천 미터대의 천산(텐산)산맥, 서로는 파미르고원과 해발 8천 미터대의 카라코람산맥, 남으로는 해발 7천 미터대의 곤륜산맥에 둘러싸여 있다.
월지에 대해 처음 알려진 언급은 기원전 646년 관중의 <관자>라는 책에서다. 이 책에서는 우씨를 감숙성 근처의 우씨산에서 비취를 채취해 중국인에게 제공했던 북서부 사람이라고 했다. 그 무렵 고대 중국인들이 하늘의 돌이라며 좋아했던 양질의 비취는 대부분 타림분지의 곤륜산과 허톈에서 월지족이 채취했다. 훗날 중국에 4곳의 옥 생산지에 추가되고 미얀마가 옥의 주 생산지가 된다. 월지는 목축을 하는 한편 비취와 금제품을 중국에 팔고 비단이나 중국 기물을 사와 이를 서방에 파는 중계무역을 하며 살았다.
이후 월지족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흉노에게 패해 더 서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월지가 흉노에게 쫓겨나면서 자리 잡은 곳은 신강성 서쪽 끝 이리지방이었는데, 그 지방마저도 오손에게 빼앗기고 다시 서남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기원전 130년경 월지족은 소그디아나로 건어와 대하, 곧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그 땅을 다스렸다.
이후 한나라의 장건이 흉노를 같이 협공하자며 동맹을 맺으러 찾아오지만 흉노의 무서움을 잘 아는 그들은 한나라의 제의를 거절햇다. 장건이 돌아와 한 무제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월지는 유목국가로 떠돌아다니며 가축을 따라 거처를 옮겨 다닙니다. 활을 당겨 싸울 수 있는 군사는 10만, 20만에 달합니다.” 장건은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동서교류의 물꼬를 튼 인물이었다. 그가 선물로 가져간 비단이 중앙아시아 지배층을 사로잡아 이후 한나라와 서역의 각국이 사신을 교환하며 비단을 교역했다.
그 뒤 월지족이 인도로 처들어와 인도-그리스 왕국을 무너트리고 쿠샨왕조(30~375)를 열었다. 인도의 쿠샨왕조는 이렇게 북방의 유목민족인 월지족이 세웠다.
유목민족은 기본적으로 동강서약東强西弱의 세력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곧 동쪽의 유목민족이 서쪽의 유목민족보다 훨씬 강했다. 동방에서 밀려난 스키타이가 서쪽으로 와 흑해 초원에 자리 잡고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가 그랬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그들은 마사게타이라 불리는 더 강한 유목민에게 밀려 볼가강을 건너, 먼저 자리 잡은 킴메르인들을 몰아내고 흑해 북쪽에 터를 잡았다. 흉노에게 밀려난 월지가 천산을 넘어 쿠샨왕국을 세우고 번성한 것이나 동방에서 쫓겨난 훈족이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비슷한 이치다. (307~309쪽)
<그레코 불교, 대승불교를 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왕의 인도 침략 이후 박트리아와 인도 북부는 헬레니즘 문화를 접했다. 이후 많은 외지인이 박트리아와 인도대륙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특히 박트리아지역에 그리스계 통치가 수세기 동안 이어지면서 그리스철학과 종교,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가 공존하며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레코 불교가 형성됐다.
쿠산왕조의 월지족은 그리스-인도 왕국을 계승하였기에 초기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그들은 유목민족답게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의 불교를 동시에 받아들여 양 문화를 융합하여 그레코-불교 문화를 재창조함으로써 불교사에 획기적인 분수령을 만든다. 쿠샨왕조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불교문화를 동아시아로 전파시켰다. 특히 그레코 불교는 1세기경의 대승불교 부흥기에 이념적 동기를 부여했으며, 대승불교의 미술, 조각, 건축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승불교를 탄생시켜 동아시아로 전해주었다는 점이다.
월지족이 쿠산왕조를 세웠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그리스인과 이란계 박트리아인으로 여러 언어가 공존했다. 종교도 다양해 불교, 힌두교, 샤머니즘, 조로아스트교, 마니교, 그리고 박트리아(이란)와 인도계의 소수 종교들이 있었다. 쿠산왕조의 역대 왕들의 뒷면에는 여러 신이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이 여섯, 인도 신이 다섯, 이란 신 열일곱을 비롯해 불상을 새긴 것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이렇든 쿠샨제국은 다언어 다종교 사회로서 국제성을 띤 다문화국가였다. 대승불교는 이런 다문화의 영향을 받아 촉발된 개혁성향의 새 불교였던 셈이다.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불교 사상은 힌두교의 박티(헌신) 사상과 박트리아에서 걸러진 그레코-로만(그리스-로마) 신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승이란 자기 자신만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데 그친지 않고 많은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한다고 ‘스스로’ 주장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이전의 불교를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는 작은 가르침이라 여겨 소승불교라 칭했다.
흔히 대승불교하면 2세기 쿠샨황족의 카니슈카대왕을 떠올리는데, 그가 제4차 경전 결집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때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제4차 경전 결집에서 채택된 산스크리트 텍스트를 한역漢譯한 것이다. 주로 쿠샨왕조(월지) 출신이나 페르시아계 승려들이 역경에 참여했다. (309~311쪽)
<헬레니즘과 간다라문명->
헬레니즘이 실크로드를 통해 낳은 문화사적 열매로는 단연 불교문화의 전파를 들 수 있다. 또 헬레니즘은 인도에 영향을 미쳐 간다라 양식이란 예술조류를 낳았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 인도 동북부 히말라야산맥 기슭에서 발흥했지만, 기원전 3세기 아리안족 아소카왕의 포교로 서북 인도 간다라에 진출한 뒤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만나 세계종교의 뼈대를 세운다.
그 뒤 간다라문명이 꽃을 피웠다. 간다라 문명은 헬레니즘문화를 받아들여 여기에 인도 고유의 불교문화를 합친 것이다. 이후 두 문화가 본격적으로 섞인 것은 기원전후에 인도 북부의 쿠샨왕조와 로마제국이 빈번한 교류와 통상을 가지면서부터였다.(311쪽)
그리스인에 의해 서양인 모습을 한 초기 불상이 탄생하다
헬레니즘문화와 불교문화가 만나 꽃ㅍ운 간다라문화의 가장 극적인 예가 초기 불상의 모습이다. 원래 초창기 불교에는 붓다의 열반 이후 약 5백 년 동안 불상이 없었다. 곧 붓다는 위대한 선각자로 여겨졌을 뿐 그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존엄한 붓다의 모습을 인간이 감히 상상한다는 것이 엄두가 안 날 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습이 당시 인도 북부에 진출한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이상했다. 그래서 변화가 생겨났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이 주도한 간다라문명에 의해 탄생한 것이 곱슬머리에 서양인 모습이 완연한 초기불상이었다. 붓다가 그리스인의 옷을 입고 심지어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알다시피 스님들은 삭발을 한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名草라 하여 욕망과 번뇌의 상징으로 여긴다. 곧 스님들이 말끔히 깎는 머리는, 세속의 명리名利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직 수행정진에만 몰입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다. 비구들의 계율생활을 설명한 책 비니모경에는 “머리를 깎는 이유는 교만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믿기 위함이다.”라고 적혀 있다. 수행자들의 삭발은 고대인도 때부터 전해 내려온 풍습이다. 붓다 역시 출가하면서 맨 먼저 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랐다. 그런데 간다라문명의 붓다에는 머리카락이 있다. 게다가 곱슬머리다. 그리스인들이 자기들의 석고상 제우스나 플라톤처럼 붓다도 그들 스타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간다라 불교미술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 전역으로 전해져 불교미술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의 대승불교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쳐 경주 석굴암 불상의 미소와 조각양식도 간다라 미술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불교가 동양에 뿌리를 내리면서 불상도 동양인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311~313쪽)
<대승불교-
고타마 붓다는 45년 동안 승단을 이끌고 80세에 입멸하여 반열반般涅槃에 들었다. 그 뒤 승단은 제자 마하가섭이 중심이 되어 붓다의 율과 법을 유지했다. 불교는 붓다가 입적한 후 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불교로부터 정리‧해석을 위주로 하는 부파(部派)불교로 발전했다. 그러나 복잡한 이론으로 자기 혼자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가르침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일체중생의 구제를 이상으로 대중 속에 파고들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설법하는 보살의 가르침이 차차 융성해졌다.
불교는 깨달은 자를 아라한이라 했다. 아라한은 원래 ‘(공양을 받을)가치가 있는 자’라는 뜻이지만, 이것이 발젆애 ‘번뇌를 완젆이 여윈 자’라는 의미도 갖게 됐다. 실제 초기경전에서 붓다는 종종 아라한이라고도 일컬어졌다. 대승불교 이전의 초기불교에서 수행자의 최고 목표는 바로 아라한이었다.
그러나 대승적 관점에서 아라한이라는 목표는 이기적일 뿐 아니라, 그 깨달음의 경지는 붓다가 도달한 최고 깨달음에 비해 한결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진정한 해탈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중요한 차이점은 전자가 아라한ㅇ라는 자리自利적 목표를 추구하는 데 비해, 후자는 보살이라는 이타적 목표를 지향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곧 부파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이상으로 삼는 반면,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자신이 성불하기 전에 다른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이타를 실천하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이 실천의 뒷받침이 되는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등과 중론中論과 섭대승론 등이 편찬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났다. 자신의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중생들의 교화르 위한 보살 사상이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득도자 중심의 신앙체계는 불교를 소수에 머무르게 했는데, 대승불교의 ‘일반 대중도 성불할 수 있다’라는 적극적인 개혁은 불교를 대중을 위한 보편불교로 이끌었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이전 6세기의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라 불렀다. 대승大乘은 큰 수레, 곧 큰 가르침을 뜻하며, 반대로 소승小乘은 조그마한 수레, 곧 작은 가르침을 의미했다. 대승불교가 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서역에 전파한 거점이 동서문화의 교차로이자 불상의 탄생지인 인도 서북의 간다라지방이었다. 우리나라는 4세기에, 일본은 6세기에 대승불교가 들어와 번성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그 무렵 불교의 본고장인 인도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불교를 소승불교라 하며(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가르침을 소승이라 하지 않는다),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에서는 대승불교가 발전했다.(313~315쪽)
<범신론을 받아들인 유대인,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
17세기 네덜란드에 살았던 스피노자는 유대인임에도 유대교의 인격적 개념의 유일신이 아닌 우주만물과 신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받아들였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은 동일한 것이고, 정신도 육체도 하나’라는 일원론적 사상을 1677년 그의 저서 《윤리학》에 썼다. 이는 서양철학에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인 자연과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묵화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사탄’으로 규정했다.
스피누자는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해 종교적 자유를 찾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 가정에서 1632년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이미 영재로 소문이 나서 탈무드 학교의 랍비 밑에서 유대신학을 공부하며 훌륭한 랍비가 될 것으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라틴어를배우고 기독교를 접하면서 유대교리에 만족하지 않고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과 문학 작품을 공부했다. 또 근대 사상가들의 저작도 탐독했는데 특히 데카르트의 이뤈론에 반대했다. 세계 내의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이 그의 철학적 입장이었다.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 안에서만 존재하며, 생성하는 모든 것도 오직 자연(신)의 본질직 법칙에 의해 생긴다고 믿었다. 스피노자에게 자연, 신, 그리고 단 하나뿐인 실체는 모두 같은 개념이었다.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곧 모든 것이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 ‘신 이외에는 어더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파악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생성하는 모든 것은 오직 신의 무한한 본성의 법칙에 의해 생기고, 또 신의 본질의 필연성으로부터 새긴다.’(《윤리학》 첫 페이지)
이는 유대교 유일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결국 그는 유대교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1660년경 저주의 파문선고를 받는다. 이후 그는 유대교 뿐 아니라 가톨릭, 개신교 모두로부터 공격받았다. 그 뒤 스피노자는 명예와 부, 권위까지도 스스로 물리치면서 오로지 철학적 진리를 탐구했다. 이어 1660년 《지성 개선론》, 《데카르트 철학의 여러 원리》를 출간했다. 그의 책들은 유대교와 가톨릭의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책을 읽다 걸리면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는 1675년 필생의 저작인 《윤리학》을 완성했으나, 《신학 정치론》의 악평과 위협 때문에 생전에 출판하지 못했다. 이 책은 데카르트보다 더욱 엄밀한 기하학의 논증법을 응용하여 ‘정의-공리-정리-증명’의 순서로 자기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서술하여 윤리학을 정리한 것이다.
공포의 시대에 스피노자는 긍정과 자유의 철학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살해 기도가 있었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비난과 증오에 시달렸다. 그는 목숨 걸고 철학을 사유했고 열악한 환경에서 안경렌즈를 연마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독일 최고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으나 자유로운 철학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며 이를 사양하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생애 내내 검소하게 살면서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부유한 독지가가 연금을 주겠다고 하면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그는 빈곤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다가 안경가루로 인한 폐질환으로 《국가론》을 최후의 저서로 남기고 44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스피노자는 독일 관념론은 물론 계몽주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레싱은 “스피노자 철학 외에는 진정한 철학이 없었다.”라고 할 만큼 격찬했다. 괴테는 이렇게 스피노자를 평했다. “분명 그의 정신이 나의 정신보다 더 심오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자기가 이해하는 신은 스피노자식 범신론이라고 밝혔다. 그도 유대인이지만 범신론과 진화론을 받아들였다. “나는 자기가 지은 피조물을 상 주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신을, 또는 의도적으로 우리가 현세에서 당하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하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육체적 죽음 후에도 살아남는 개인을 상상하기도 싫고 원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이나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생각은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도록 하라.” “보호받고 사랑받고 도움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도적적인 신의 개념을 만들어 냈다. 보편적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사를 간섭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인정할 수 없다.” “인류의 정신적 계발의 초기단계에서 인간의 공상이 인간과 닮은 신들을 생각해 냈다. 종교에서의 하느님은 그 오래된 개념의 신들을 승화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적인 진리에 대해 그에게 문의한 어느 일본 학자에게 회신하기를, “모든 고도의 과학적 업적의 바탕에는 이성적 세계관이건 지적 세계관이건 종교적 측면의 확신이 깔려 있다. 세상의 경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초월자의 존재에 대해 마음속 깊이 느끼는 이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신이다. 흔한 표현으로 이것은 스피노자식 범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썼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의 진화를 3단계로 설명했다. 첫 단계는 ‘두려움의 종교’다. 고대인들이 가졌던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횡포한 야생동물과 자연의 힘에 대한 공포로 인해 탄생한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등 원시종교이다. 두 번째 단계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보여주는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신에 대한 관념의 종교이다. 그가 제시한 세 번째 단계의 종교는 인간이 처한 역사적인 순간 속에서 스스로 발견한 신으로, 그 신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며, 어떤 도그마나 교리로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이를 ‘우주적인 종교 감정’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예를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에서 찾았다. 그의 신은 삼라만상에 숨겨진 신비를 찾는 탐구과정에서 비로소 발견된다는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 그 신은 이 세상이 규칙적인 조화 안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로서 그는 과학과 종교를 하나로 묶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와 과학을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했다. 그는 이성적 사유에 의해 진리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 의해 찾아진다고 보았다. 이렇게 찾은 진리를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미래의 종교는 그 교리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미래의 종교를 ‘우주적인 종교’라고 불렀다.(316~3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