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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홍지유
관심
지금 한국 출판계의 슈퍼스타는 200년 전 활동한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입니다. 지난해 가을 한 배우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는 모습이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후 이 책은 주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요. 그후로도 4개월 넘게 1위 자리를 지키더니 지난달 판매 부수 20만 부를 돌파했습니다. 베스트셀러 소설가도 10만 부를 팔기 어려운 시대, 철학서가 20만 부를 돌파했다는 건 기념비적인 일입니다.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배우 하석진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를 읽는 모습. 지난해 11월 방송이 나간 이후 책 판매량이 급증했다. 사진 MBC 캡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일종의 '명언 모음집'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깊이 있게 설명하기보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와 같은 짧은 문장에 술술 읽히는 인생 조언을 곁들였습니다. 정통 철학 서적보다는 대중적인 실용서에 가깝습니다.
쇼펜하우어 관련 책 세 권이 2월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탑20에 올랐다. 사진 교보문고
일부 전문가들은 이 책이 '철학서의 외피를 가진 힐링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독자들도 쇼펜하우어의 생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인생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받고 싶어 책을 읽는다는 겁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상한가를 치고 비슷한 내용의 다른 책들까지 베스트셀러 톱10에 올랐을 때도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판매량은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출판업계가 쇼펜하우어 열풍의 본질은 철학에 대한 관심 증대가 아닌 '유사 자기계발서' 또는 '유사 힐링물' 열풍이라고 보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힐링물 중 왜 쇼펜하우어일까요?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곧 고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염세주의적 인생관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라는 말에 극명히 드러납니다.
전문가들은 ‘인생은 원래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현실 인식에서 현대인들이 위로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좋은 날 온다’는 막연한 희망보다 ‘원래 힘들다’는 메시지에서 더 큰 위로를 받는다는 겁니다. ‘정신이 풍요로워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갈 공간이 줄어든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등 타인과 물질에서 행복을 찾지 말라는 메시지가 과시적 소비와 피상적 인간관계에 지친 현대인에게 가 닿은 면도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럽거나 권태롭다고 봤다. 중앙포토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출판평론가)는 "고물가·고금리·저성장의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인생관이 어필한 결과"라며 "기존의 자기계발서가 '노력해라' '애써라'를 전제로 한다면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 그 전제 위에서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라는 가르침이 둘째"라고 했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도전 정신을 불태우게 하기보다 위안을 준다는 것이죠.
'힐링서' 흥행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장르가 달라졌을 뿐 사람들은 늘 책에서 위안을 찾았죠.
쇼펜하우어 이전 한국 출판계를 강타한 건 『달러구트 꿈 백화점』 『메리골드 세탁소』 등 일상적인 장소에 판타지를 결합한 힐링물이었습니다. '마음의 얼룩을 지워주는 세탁소' '죽기 직전 열리는 마법의 도서관' '꿈을 파는 백화점' 등 설정도 비슷합니다. 1) 일상적인 공간에서, 2)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는 평범한 주인공들이, 3) 판타지를 경험하면서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이른바 '힐링 판타지'의 3요소입니다.
최근 몇 년간 인기를 끈 힐링 소설들. 주로 친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판타지를 접목한 잔잔한 내용이다. 책 디자인도 특정 장소와 따뜻한 분위기를 강조한다. 사진 교보문고
이건 한국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2012년 출간된 일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30년째 비어 있는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든 삼인조 도둑이 과거로부터 도착한 고민 상담 편지에 답장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일상적 장소(잡화점), 영웅적인 면모가 없는 주인공(삼인조 좀도둑), 판타지(과거와의 대화) 모두 최근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설정입니다. 죽기로 결심한 주인공이 미스터리한 도서관에서 눈을 뜨며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얻는다는 내용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2020) 영국 작가 매트 헤이그의 작품이죠. 미국 작가 존 스트레레키가 쓴 밀리언셀러『세상 끝의 카페』는 나미야 잡화점보다도 앞선 2003년 작입니다. '세상 끝에서 인생의 두 번째 문을 열어주는 카페'라니, 뭔가 익숙한 컨셉이죠?
영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한 장면. 중앙포토
소설『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표지.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힐링 소설 표지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사진 현대문학
전 세계적으로 이런 판타지물이 흥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전문가들은 『해리포터』와 『트와일라잇』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자란 20·30세대는 기성세대보다 판타지 소설을 더 편하게 받아들인다고 분석합니다. 기성세대가 '구겨진 마음을 펴주는 세탁소' '마법 도서관'을 "터무니없다" "유치하다"고 받아들인다면, 한때 뱀파이어의 사랑 이야기(트와일라잇), 마법사 성장기(해리포터)에 열광했던 2030은 이런 거부감이 덜하다는 거죠.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힐링물을 싫어한다는 건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힐링의 내용이 달라졌을 뿐이죠.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를 풍미한 '국민 힐링물'은 『아버지』 『가시고기』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가족 소설이었습니다. 특히 시한부 가장의 애환을 다룬『아버지』(1996)는 이듬해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300만 부가 팔렸습니다. 금융위기 때 나온 『엄마를 부탁해』(2008)가 200만 부 넘게 팔린 것도 비슷한 현상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가족 힐링물'이 나올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미 '1인 가구'가 대세가 됐기 때문인데요. 2000년 15.5%였던 전체 가구 대비 1인 가구 비율은 2023년 34.5%로 늘었습니다. "인생은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쇼펜하우어 잠언집이 한때 '국민 힐링물'이었던 가족 소설을 대체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힐링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의 말을 곱씹어보시죠.
"국내 순문학 고정 독자는 2만~3만 명입니다. 무거운 이야기로는 10만 부를 팔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뭘 써야 10만 부를 팔 수 있을까요? 가볍게 읽히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가벼운 힐링물이 주류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힐링'의 재료가 조금씩 변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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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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