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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상 조건-3
선심은 선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빳타나에 이렇게 나와 있다.
“선법은 대상 조건으로 선법에게 조건이 된다.
보시한 다음, 계를 지킨 다음, 포살을 행한 다음에, 그는 그것을 회상한다. 선정에서 나온 다음에 그는 그것을 회상한다. 그는 전에 잘한 행위들을 회상한다. 유학들은 종성의 마음을 회상한다. 유학들은 ‘청백의 경지’를 회상한다. 유학들은 도에서 나온 다음 그 도 마음을 회상한다. 유학들과 범부들은 선법이 무상하고, 괴로움(둑카)이고, 무아임을 대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
선법은 불선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빳타나에 이렇게 나와 있다.
“선법은 불선법에게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보시한 다음에, 계를 지킨 다음에, 포살을 행한 다음에, 그것을 즐기고 기뻐한다.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탐욕을 일으키고, 사견을 일으키고, 의심을 일으키고, 들뜸을 일으키고, 슬픔을 일으킨다.
선정에서 나온 다음, 선정을 즐기고 기뻐한다. 선정을 대상으로 삼아, 탐욕을 일으키고, 사견을 일으키고, 의심을 일으키고, 들뜸을 일으킨다. 선정이 사라졌을 때, 아쉬워하고 슬픔을 일으킨다.”
일상생활에서 대상 조건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숙고해야 한다. 자신의 선행에 집착하지 않는지, 자만하지 않는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자신을 위해서 선행을 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 화를 낼 수도 있다. 선물을 너무 비싸게 샀기 때문에 보시한 것을 후회할 수도 있다. 우리는 불선업을 축적하고 있으며, 불선법은 항상 대상을 구할 수 있는데, 심지어는 선법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불선법은 불선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빳타나에 이렇게 나와 있다.
“불선법은 불선법에 대하여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그는 탐욕에 빠져서 즐기고 기뻐한다.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탐욕을 일으키고,
사견들을 일으키고, 의심을 일으키고,
들뜸을 일으키고, 슬픔을 일으킨다.”
우리는 탐욕을 좋아하고 탐욕을 즐기지 않는가?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순간을 즐기고 싶어 한다. 그러면 더 많은 탐욕이 생긴다. 탐욕을 조건 따라 생긴 법이라고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나의 탐욕’이라고 여긴다. 탐욕이 성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탐욕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수 있고, 화를 낼 수도 있고, 후회할 수도 있다. 어떤 번뇌라도 불선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불선법은 선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바른 견해를 계발하고 번뇌들을 숙고하고 그것들이 자아가 아닌 조건 따라 생긴 법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이다. 빳타나에 이렇게 나와 있다.
“불선법은 선법에게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유학들은 근절된 번뇌들을 회상한다.
그들은 근절되지 않은 번뇌들을 회상한다.
그들은 전에 탐닉했던 번뇌들을 안다.
유학들이나 보통사람들은 불선법이 무상하고,
괴로움(둑카)이고, 무아임을 대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
아라한은 무기법(abyākata dhamma 아뱌까따 담마)인 작용 마음으로 전에 일어났던 선심과 불선심을 회상할 수 있다. 그러면 선법과 불선법은 무기법에게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열반과 열반을 경험하는 8가지 출세간 마음들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깨달음의 여러 단계인 도 마음(출세간 선심)들은 번뇌들을 근절시키고, 아라한 단계에서는 최종적으로 모든 집착을 근절시킨다. 빳타나에 이렇게 나와 있다.
“유학들은 낮은 단계의 과 마음을 회상한다.
그들은 열반을 회상한다.
열반은 종성의 마음, 청백의 경지, 도 마음에게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열반은, 열반을 경험하는 8가지 출세간 마음들인 네 가지 깨달음의 단계에서 생기는 네 가지 도 마음(출세간 선심)들과 네 가지 과 마음(출세간 과보심)들에게 대상 조건이다.
열반은, 지혜가 있는 욕계 선심인 종성의 마음에 대해서도 대상 조건이다. 종성의 마음은, 깨달음이 생기는 인식과정에서, 수다원도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며, 열반을 가장 먼저 경험하는 마음이다. ‘청백의 경지’는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깨닫는 도 마음 앞에 나타나는, 지혜가 있는 욕계 선심이다. 열반은 이런 종류의 마음에 대상 조건이다.
출세간 마음들이 사라진 다음에, 아라한이 아닌 성자들인 유학들의 지혜가 있는 욕계 선심들은 열반을 회상하는데, 이 마음들은 열반에 의해서 대상 조건으로 조건 지어진다.
아라한인 경우에는 지혜가 있는 욕계 작용 마음들이 열반을 회상하는데, 이 마음들도 열반에 의해서 대상 조건으로 조건 지어진다.
개념들은 선심, 불선심이나 작용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소유물에 집착하고, 돈, 옷이나 자동차 등을 가지려고 한다. 개념들은 불선심에게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
집착이 즉시 근절될 수는 없지만,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우리는 이해를 계발할 수 있다.
사람이나 자동차 등의 개념들은 관습적인 의미에서 실재이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실재가 아니다. 개념들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점점 더 그것들에 집착하게 되는 성향이 있다. 개념들을 자신의 인생 목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자신이 인지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심취해서, 그 순간들에 그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마음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모른다. 눈-감성물질을 통해서 형색을 단지 경험하기만 하는 안식이 있다는 것, 형색과 색깔에 주의를 기울이는 마음들, 그리고 개념들 즉 영원히 지속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사물들이라는 관념들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개념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개념들은 일상생활에 속한다. 개념들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른 견해가 계발되고 있을 때, 수행자는 보거나, 인지하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들은 항상 변하고 있는 마음들의 다른 순간들이다. 수행자는 마음의 대상이 형색일 경우와 개념일 경우를 알게 될 것이다.
개념에는 직접 경험될 수 있는 특성이 없다.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지속하는 것 같은 어떤 ‘전체’를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생기고 사라지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을 만지면 지대가 나타날 수 있다. 지대는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궁극적 실재이다. 지대는 언제나 지대이어서 직접 경험될 수 있다. 그것에 다른 명칭을 붙일 수도 있으나 그 특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때로는 지대 등의 궁극적 실재가 경험되고 있고, 다른 때에는 개념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생각 자체는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는 궁극적 실재이고, 있는 그대로 즉 ‘자아가 아닌 조건 따라 생긴 법’이라고 알 수 있다. 아라한은 개념들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집착하지는 않고, 작용 마음으로 생각한다.
즐거운 대상을 경험할 때에는 탐욕이 일어나기 쉽고, 괴로운 대상을 경험할 때에는 성냄이 일어나기 쉽다. 이러한 대상들은 불선심들에게 대상 조건이 된다. 우리는 어떤 특정 조건이 불선심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믿지만, 마음들에게 조건이 되는, 각각의 역할을 하는 다른 요소들도 있음을 잊기 쉽다.
어떤 대상이 스스로 나타나면 지혜로운 주의나 어리석은 주의가 있을 수 있다. 선한 자와나 마음들이 생긴다면 대상에 대한 지혜로운 주의가 있는 것이고, 불선한 자와나 마음들이 생긴다면 어리석은 주의가 있는 것이다.
사왓티 시 제따와나 숲에 계실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의 경’(맛지마니까야. 2)에서 비구들에게 모든 번뇌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법을 모르고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법도 모른다.”
그러므로 경전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면,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하고 있다. 잘 배운 제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맛지마 니까야의 주석서(빠빤짜수다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법(대상)들의 본성에 그것들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확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확정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이다. 불선법을 생기게 하는 기반이 되는 주의 기울이는 태도, 그런 종류의 주의를 해당 대상에 기울여서는 안 된다. 선법을 생기게 하는 기반이 되는 주의 기울이는 태도, 그런 종류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누가 맛있는 사탕을 주었을 때, 그것을 맛보자마자 좋아할 수밖에 없고, 탐욕이 생기게 마련인 것 같다. 그러면 그 대상에 대한 어리석은 주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지혜로운 주의가 있을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사탕을 준 사람의 친절함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할 때이다. 혹은 그 맛과 기쁨은 영원하지 않으며, 모든 실재는 무상하다고 숙고할 수 있다.
누가 우리에게 거친 말을 하면 소리는 불쾌한 대상이고 화가 날수 있다. 그러면 어리석은 주의가 있는 것이다. 화내는 대신에, 그런 거친 말을 하는 사람에게 연민을 갖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안다면, 지혜로운 주의가 있을 수 있다.
심한 통증 때문에 화가 난다면 어리석은 주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증이란 업에서 생긴 과보이고 피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면 지혜로운 주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몸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숙고할 수 있다.
생기는 모든 실재에 대한 사띠가 가장 이익이 된다. 몸은 여러 가지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증이 있을 때에는 뻐근함이나 뜨거움이라는 특성들이 나타난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몹시 아플 수 있지만, ‘나의 아픔’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실재에 대한 사띠가 생길 수 있다. 그러면 뻐근함이나 뜨거움은 그것들 자체의 조건들 때문에 생긴 것이며, 그것들을 통제하는 힘을 가진 자아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통스러운 느낌은 그것 자체의 조건들 때문에 생기는 정신이며 통제할 수 있는 자아란 없다.
통증에 대해 성냄이 생길 수도 있지만, 성냄이 사띠의 대상이 되면, 성냄을 조건 지어진 정신일 뿐이라고 알 수 있다. 실재에 대한 바른 견해에 의해서만 ‘나의 몸’이나 ‘나의 마음’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 수 있다. 바른 견해가 있는 순간 진정한 지혜로운 주의가 있는 것이다.
무아의 뜻을 이해하려면 대상 조건만이 아니라 빳타나에 분류된 다른 조건들도 숙고해야 한다. 조건들에 대한 가르침은 이론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일상생활의 조건이 되는 실재들과 조건 따라 생긴 실재들에 관한 것이다.
지금 스스로를 드러내는 대상을 더 많이 이해한다면 대상 조건도 이해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몸의 문을 통해서 지대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면, 지대는 그것을 경험하는 신식(몸 의식)에게 대상 조건이며, 그 마음의 다음에 사띠와 지혜가 생긴다면, 지대는 사띠와 지혜에게 대상 조건이 된다. 그러나 대상 조건을 조정하는 자는 없다. 다음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마음에게 대상 조건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대상 조건을 숙고할 때, 그것이 즐거운 대상이거나 괴로운 대상이거나, 그것이 선법이거나 불선법이거나, 자신을 드러내는 실재는 무엇이든지 알아차리라고 스스로 일깨울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대상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집착하지만, 모든 경험은 조건 지어진 것이며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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