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올림픽을 위해 새로 지었다는 '만종'역까지 서울에서 환승한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오지 않는 잠을 포기하고 KTX 잡지를 뒤적였다. 마침 '영광'지역이 홍보주제라 살면서도 몰랐던 명소와 맛집 정보를, '언젠가는 내게도 손님이 오는 날이 있겠지' 여기며 따로 메모해 두었다. 마지막 페이지인 전국철도노선도를 넘기는 순간, '유레카!' 라고 외칠 뻔 하였는데, 방금 떠나온 '광주 송정역' 에서 부산 '구포역'까지 무궁화 열차가 오다니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이용객이 드물었으면.......영광에 이사온 지 꼭 일년(오늘이 광복절이니 정확히 1년이다) 동안 단 한번도 광주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장거리 운전이나 버스탑승이 괴로운 내게는 구원 같은 소식이 아닌가!
보물을 발견한 마음으로 내린 만종역 입구에서 미대 동기동창인 J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 굳이 인연의 밭을 건사할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늘 온기와 신뢰가 흐르는 드문 인연. 생각해보면 이 인연이 이어지는 것도 내 노력보다는, 개인전을 할 때마다 잊지않고 내게 발문을 부탁해 온 그이의 몫이 크다. 그러니까, 30년 가까운 인연의 물질적 증거로 서너 편의 글이 있는 셈인데 상징 과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약소하다. 최근엔 원주시의 예술가지원정책에 힘입어 ' 이제 적어도 재료걱정은 안해도 된다'는 J로부터, 유화물감이며 붓, 오일캔버스 등속을 영광으로 공수받기도 하였으니 아무래도 J쪽이 훨씬 밑지는 인연인데, '친구'사이란 그런 식의 셈법이 적용되지 않는 관계가 아니던가. 지금도 생계를 위해 벽화일을 하면서도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J를 생각하면 늘 감사하고, 알뜰한 정서가 일렁인다.
J의 작업실 동료 Y씨에게, 속성 유화수업을 받는 것이 이번 방문의 명시적 목적이었다. Y씨는, 연배로는 한참 아래지만, 중앙대를 졸업하고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에서 유학을 한 재능있는 (-아직은 유명하지 않은) 화가로, 유화기법에 관한 한 국내에서 독보적이라 여겨왔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꼼꼼하고 전문적으로 이것저것을 일러주었다.
아사와 면캔버스의 차이, 색상별 물감의 특성, 기름 사용법, 붓을 포함한 각종 화구들을 보았고 캔버스 짜는 시연까지 동영상을 찍고 나니 훌쩍 4시간이 지나 있었다. 몇 달 동안 눅혀왔던, '맨 땅에 헤딩'하듯 답답했던 심정이 해소되고, 다음 과제가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유학할 때, '빨간 천 위에 놓인 빨간 사과', '흰 종이 위에 있는 계란' 처럼 동일한 색상을 세부적으로 가려쓰는 트레이닝을 많이 했는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남자들은 색 쓰는 데 취약하고 여자들은 흑백에 약하니까요." 라는 조언은 야무지게 기억해둘 만 하였다.
"대표님이 초대했다" 는 J를 따라 원주로 나가 ' 주담'에 머물렀다. 집을 짓는 목수이자 가양주 연구가이기도 한 사장은, 두어 번 스쳤음에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는 사실은 몰랐었는데, 뜻밖의 환대를 받고, 쾌적한 원목 도미토리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니 심신이 위로받은 듯 청신하고 든든해졌다. '1년 동안 많이 외롭고 지쳤었구나....' (비록 수면유도제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먹는다고 늘 성공하진 않는다) 몇 시간이나마 눈을 붙이게 된 것도 드물게 긴장 아닌 이완의 상태로 이끌어준, 벗들과 나무집과, 강원도의 맑은 기운 덕분인 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