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대창중고등학교 병설 시대
(大昌中高等學校竝設時代, 1953-현재)
1. 대창고등학교 개교(1953.4.15)
한국전쟁 수복 이후에 김석희(金碩熙) 교장 선생의 아들 김교용(金敎容) 선생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 후임 교장에 취임하였을 때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져 있었으나, 한 채 뿐인 교사(校舍)가 일부 폭격을 당해 지붕이 뚫어진 것부터 수리하고 학생들을 다시 모아 수업을 시작하였다. 1952년 12월 9일에 고등학교(高等學校) 인가를 받아 1953년 4월 15일 입학식을 거행하여 예천 인문계 고등학교의 문을 처음 열었다.
이때 중학교 건물은 아름드리 기둥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舊 客館 建物, 現 行政室, 校長室, 謄寫室, 松臺室)이 그런 대로 우람하고 명문 사학(名門私學)으로서 품위도 갖추었으나, 고등학교 건물은 향교(鄕校)의 명륜당(明倫堂)으로서 교실 한 칸 뿐이었다. 흙바닥에 책상을 놓고 58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공부하였다.
개교 당시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국가 재정은 물론 학교 재정도 말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강당(現 柔道室)을 짓는데, 학생들이 벽돌을 찍고 목수 일을 도왔다. 운동장도 좁아서 기념일을 제외하고는 각 학급 교실에서 조회를 하였다. 당시에는 현 교장실 남쪽 과학실이 서 있는 자리가 운동장이었다.
2. 재단이사회, 김교용 선생을 대창고등학교 교장으로 임명
1953년 3월 5일 대창중학교 재단이사회(大昌中學校財團理事會)에서는 대창고등학교(大昌高等學校)가 신설될 예정이므로, 대창중학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을 대창중학교 겸 대창고등학교 교장(大昌中學校兼大昌高等學校校長)으로 임명하였다.
3. 군민체전 우승(1953.가을)
1953년 가을 군민체전(郡民體典)에서 수백 명의 이웃 학교 학생들과 신설교(新設校)로서 1학년 학생들만으로 겨루어 대창고등학교가 우승하였다. 이때 교사들은 등사 원지를 긁어 속보를 등사해서 즉시즉시 종목마다 승리의 전적(戰績)을 장내에 배포하여 대창(大昌)의 기개를 높이어 주었다.
4. 흙벽돌 교사 신축
1952년부터 흙벽돌로 교사 신축(校舍新築)을 시작하여 연차적으로 10여 개 교실을 지었다. 이는 신임 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1953년 9월 15일 제3차 증축 공사를 준공하여 토조(土造) 50평 교실 2개를 낙성시켰다. 다시 1954년 4월 1일에는 재단 증자(財團增資)로 6학급의 인가를 얻어 제2회 졸업생부터 2학급 120명씩 모집으로 교세(敎勢)가 확장되었다. 1954년 9월 30일 제4차 교사 증축으로 비로소 목조(木造) 50평 2개 교실, 1955년 8월 23일 제5차 증축공사로 120평 교실이 토조(土造)이나마 완공되었고, 이어서 매년 교사 증축 및 교세 확장(敎勢擴張)에 노력하여 명실 공히 이 고장 문화, 교육의 전당으로 발전해 나갔다. 본교의 창학이념(創學理念)인 실력 향상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의 교육과 아울러 지방 문화 창달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1956년 12월 20일에는 제6차 교사 증축 공사가 완공되어 벽돌 2층 6개 교실이 군원 자재(軍援資材)에 의하여 완공되어 이 고장 명물로 등장하였다.
당시 운동장이었던 자리에 이 2층 교사(校舍)를 신축할 때, 학생들이 그 공사에 소요되는 벽돌, 자갈 등을 운반하였다. 한천 백사장(漢川白沙場)에 마련해 둔 시멘트 벽돌과 자갈들을 학생들이 체육 시간이나 방과 후를 이용하여 학교까지 옮기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좁고 가파른 학교 진입로 때문에 학생들은 책보, 대야, 양동이 등 갖가지 도구를 동원하여 열심히도 날랐다. 이는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의 집념과 전교직원, 학생들이 한데 뭉쳐 몇 년 간에 이루고야 말았던 대창인(大昌人)의 땀과 의지의 결정체였다.
5. 대창고등학교 입학식
1953년 4월 15일,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역사적인 개교식(開校式) 겸 제1회 입학식(入學式)이 있었다. 이날 김교용(金敎容) 교장 선생의 감격에 찬 식사(式辭)는 조리 정연하고 감명적인 언변(言辯)으로 학생들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때 입학한 54명은 제1회생이라는 책임감도 강했다. 그해 가을 군민체전(郡民體典)에서 수백 명의 이웃 학교 학생들과 겨루어 우승하였고, 등사 원지를 긁어 속보를 등사해서 즉시즉시 종목마다 승리의 전적(戰績)을 장내에 배포하여 대창의 기개를 높이기도 하였다.
대망의 고등학교 개교는 1953년 4월 1일 자로 초대 교장으로 중학교장 김교용(金敎容) 선생이 취임하였고, 1학급 60명의 신입생으로 개교하여 같은 해 4월 15일 경북도지사를 비롯하여 각 기관장 및 내빈 다수의 참석 하에 개교 기념식 및 입학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힘찬 출발을 시작하였으니, 이 고장의 영예이요, 우리 학교의 영광이었다. 고등학교 교육의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타지에서 훌륭한 교사를 초빙 진용을 보강하였으니, 교감(校監)으로 예천여중고(醴泉女中高)에 근무하던 이재녕(李載寧) 선생이 취임하였고, 교무과장에 장석조(張錫祚) 선생, 학생과장에 홍창주(洪唱疇) 선생 등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여러 선생이 와서 교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이 후 고등학교 졸업생은 1회 때부터 서울대, 체신대, 경북대 등에 합격하였다.
6. 1950년대 학생들의 상황
본교 학생들의 생활도 도시락을 지참하는 학생이 50% 미만이었고, 비오는 날 우산없이 등교하는 학생이 거의 전부였고, 중학교 3개 학급, 고등학교 2개 학급의 신입생 정원을 채우기가 어려웠고, 중학교 제12회 졸업생은 61명으로 한 학급 만이었을 정도였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로 특대생(特待生)과 우대생(優待生), 송대장학생(松臺獎學生) 등으로 가난하고 우수한 학생의 진로를 개척하여 주었으나 학비 부족과 교육열 부족으로 중도 제적(除籍)하는 학생이 너무나 많아 교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도 이 시대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