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호랑이
이진구
고혈압으로 통원 치료중이던 아내는 1985년 1월 22일 집에서 연탄가스를 맡고 쓰러졌다. 나도 같이 쓰러졌으나, 요행 새벽에 깨어나서 이웃사람의 주선으로 앰블란스에 실려 병원에 갔다. 나는 그날로 돌아오고 아내는 10일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반신불수의 중풍환자로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 생활에 들어갔다. 그 후 다시 입원했으나 효험 없이 돌아왔다. 그 후 조금씩은 회복되어 87년 여름에는 거실에 나와서 줄을 매고 이편 의자에서 저편 의자로 오가는 운동을 하게 된 것이 와병 중 가장 호전되었을 때이고 그 후 다시 조금씩 악화하여 완쾌는 단념하였으나 별다른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없이 식사, 언어, 정신이 거의 다 정상이 되어 담담한 나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휠체어를 타고 목욕탕에 가고 미장원에 들러서 머리를 자르고 오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요 환자의 즐거움이었다. 좀 더 자주 가기를 원했지만 한 번 행차하려면 남편이 휠체어를 밀고 며느리가 뒤를 따르고 이웃집 젊은 부인이 동원되고 목욕탕 아줌마의 협력을 받아야 되는 행차이니 자연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9월 6일 마지막이 된 목욕탕 행차를 마치고 9월 8일 제 63회 생일 맞아 남편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촛불을 밝히고 케익을 자르며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리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9월 13일 밤에는 며느리가 빚은 추석 송편을 깨 송편이 맛있다고 몇 개 먹었다.
9월 14일 추석날 아침이다. 수년간 계속 복용하는 순기환(중풍약)을 먹였는데 삼키지 못하고 토했다. 뒤이어 뱃속의 음식물도 다 토한다. 우황청심환을 먹였더니 그도 토해버린다. 단단히 체했나 보다 생각하며 서둘러 휠체어를 밀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뇌의 컴퓨터 촬영, X레이, 피검사 하며 요란을 떨며 중환자실에 입원시키라 한다. 나는 어제 먹은 송편에 체했나 하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너무 요란스러워서 불만이었지만 의사의 지시대로 할 수 밖에, 의식도 멀쩡하고 말도 정상이고 고통도 없으며 별다른 증상도 없이 의사와 간호원이 지켜보고 있는 중환자실에 입원했음으로 나는 조석으로 문병이나 하고 담당의사의 설명이나 듣는 정도로 집에서 자고 낮에는 볼일 보면서 5일간 지냈다. 뇌 사진은 혈관이 파열된 것도 아니고 혈관이 막힌 것도 아니고 물이 좀 많이 잡혀 있어서 수술을 했으면 좋겠으나 노인이고 수술결과가 확실치 않으며 급한 것도 아니니 좀 경과를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19일 아침에 들리니 음식은 물론 물도 침도 못 삼키니 내시경 검사도 못하고 식도 기관지 등의 컴퓨터 사진을 또 찍어야 되겠다 하기에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음으로 백병원에 있는 처조카를 찾아가 의논하니 곧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옮긴 것이 하오 4시 반경이었다.
담당과장님은 문진, 청진을 마치고 X레이 피검사 등을 지시하고 퇴근했다. 7인용 병실 이하에만 보험이 적용 된다기에 7인용 병실을 배정 받았다. 환자가 5인 뿐이어서 나도 반 침대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20일에는 7인 만실이 되어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12시가 넘도록 앉아서 곰곰히 생각하니 “너는 어찌 그다지도 옹졸하냐? 치료비가 좀 더 나오더라도 보호자가 좀 눈을 붙일 수 있는 병실을 택해야지 어쩌자고 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우려느냐” 하는 음성이 들린다. 둘러보니 보호자가 필요치 않은 환자도 있고 몇 보호자는 환자의 침대에 올라가서 같이 자고 있다. 옳지 나도 그러는 수밖에 없다. 신혼여행이라도 온 기분으로 침대에 올라가 같이 누었다. 환자는 열이 오르고 헛소리를 계속 했으나 별다른 생각 없이 있다가 새벽 5시 반경 간호원을 불러 불을 켜고 보니 손가락이 퍼렇게 질렸으며 얼굴도 한쪽이 좀 푸른 기가 돈다. 간호원은 의사를 부르고 주사를 놓고 산소통을 끌어다가 산소 호흡을 시킨다.
나는 그때까지도 죽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10시경에 중환자실로 옮겼다. 11시경 상태가 좋지 않다는 예고를 받았다. 11시 반경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가족을 불러 임종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12시에 나와 며느리와 백충현 형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나는 상당히 둔한 사람인가보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멍청하니 있다가 일을 당하니 어이가 없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가는 날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몇 일전에 며느리에게 자기의 소지품을 다 배정해 주고 가족들과 친지에까지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무의식중에도 부르심을 본인은 인식하고 있었나보다.
나는 1947년 4월 10일에 결혼 했다. 3월초 어느 날 신부감의 사진도 보지 못하고 약혼 예물을 가지고 노연태 형을 따라 강화에 갔다. 방문에 붙은 쪽유리를 통해 행여나 신부감이 눈에 띌까 엿보았으나 신부감은 보이지 않고 어린 소녀가 간혹 부엌에 드나드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신부감일 줄이야? 하기야 신랑감도 전쟁 말기에 영양실조로 폐병을 앓았고 맹장염 수술, 각기병 등 주접을 떨은 체격이 작은 사람이니 29세라지만 어린 소년이다. 성실하다 착하다 등의 칭찬은 받았지만 늠름한 신랑감은 아니었다. 제 주제는 생각지 않고 신부감이 어린애 같아서 많은 고민을 했으나 피하지 못하고 결혼했다.
송두용 선생은 이 결혼이 잘못 하면 추태를 연출하고 파탄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라도 있었는지 처갓집 안방에서 20명도 못되는 가족이 모여 앉아 새벽6시에 전무후무할 결혼식을 올렸다. 말씀은 다 잊었으나 “결혼은 인간끼리 좋아지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 이라고 강조하신 것으로 짐작한다.
몸이 어린아이 같을 뿐만 아니라 맘씨도 솜씨도 맵씨도 다 어린 아이와 같다. 그리고 성격이 상반된다. 나는 기미생(己未生) 양띠이고 그녀는 병인생(丙寅生) 호랑이띠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슨 물건을 살려면 몇 집을 돌아보고 싼 집에 가서 또 깎을 수 있는 데까지 깎아서 산다. 그는 마음에 들면 달라는대로 주고 산다. 나는 내일의 걱정, 10년 후의 걱정까지 당겨서 하기에 외상거래는 되도록 피한다. 그녀는 “외상이면 검은 암소도 잡아먹는다.” 는 식으로 내일 걱정을 하지 않는다.
나는 옷장에 10년이 넘은 양복은 물론 넥타이, 와이셔츠도 걸려있지만 그는 간혹 있는 이재민 구호물자를 거둘 때에는 한 보따리씩 주어도 여유가 있다. 나는 항상 나는 잘하고 그녀는 잘 못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신길동에서 살 때의 일이다. 대낮에 과년한 처녀가 정신병으로 알몸으로 동네 가운데 큰길에 나타났다. 동네사람들이 낄낄대고 웃고 있을 때 그는 집에 뛰어 들어가 자기 옷 한 벌을 꺼내다가 미친 처녀에게 입혀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동회장이 찾아와서 치하인사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장점이 단점되고 단점이 장점일 수도 있다고 느꼈다.
나는 지금도 외식하고 이쑤시개를 쓰면 쓴 쪽은 잘라 버리고 쓰지 않은 쪽은 조그만 성냥곽에 담아 주머니에 넣었다가 필요할 때에 요긴하게 쓰면서 50% 절약한다고 좋아한다. 요새는 대중목욕탕에도 1회용 면도기, 칫솔, 비누 등을 바구니에 담아 놓고 마음대로 쓰도록 하고 있다. 나는 발길마다 채이게 흩어져 있는 쓰고 버린 면도기를 집어 면도를 한다. “너는 천상 빌어먹을 놈이라” 고 할 분도 있겠지만, 요즘 1,300만원어치 옷을 몸에 감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고 1,000만원짜리 침대에서 자야 잠이 온다는 사람들에 대한 반발인지도 모른다. 좌우간 이러한 성격차이, 암호랑이를 거느리고 사는 수양도 힘들거니와 숫양에게 눌려 살아야 하는 암호랑이도 괴로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극적인 우리 부부가 큰 탈 없이 평생을 무사히 지내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가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사회에서 가정마다 겪어야하는 고부간의 갈등 문제는 심각한 고질적인 문제이다 “며느리의 발꿈치가 계란같이 둥글다고 시비하며 미워한다.” 는 것이 시어머니의 심사이다. 자식이 사랑스러우면 그럴수록 며느리를 미워한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이다. 맘씨도, 솜씨도, 맵씨도 다 구비한 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부족한 며느리가 눈에 거슬렸을 것인데 다른 훌륭한 며느리들보다도 이 못난 며느리를 사랑하고 감싸 주셨다. 4형제 자식들 중에서 가장 많은 세월을 우리 집에서 사셨는데 아마도 며느리의 부족함을 보완해주기 위한 심정이 작용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여름날 대청마루에 누우셔서 며느리를 당신의 팔을 비워 끌어안듯 누워서 젊은 시절에 지낸 이야기, 가까운 집안간에 있었던 이야기 등을 이야기해 주셨다고 한다. 믿어지지 않으리만치 신기한 모습이다. 시어머니의 태도가 놀랍거니와 시어머니의 팔을 베고 시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면서 말씀을 듣는 며느리의 모습도 신기하다. 또 하나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도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 는 시누이가 셋이나 있었지만 한 사람도 다투고 싸워서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에 또 한 번 겪게 되는 고부문제이다. 윗사람이 훌륭하면 그대로 순종만 하면 되겠지만 윗사람이 부족하고 무능할 때에 엉뚱한 명령을 내리고 고집한다든지 공연한 트집을 잡고 야단할 때에 순종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는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간혹 큰소리가 오가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그 자리로 끝나고 어린아이들 싸움과 같이 금방 명랑을 되찾는다. 못이 박히고 응어리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나는 믿는다. 진심으로 며느리를 사랑하고 고마워했으며 며느리도 바보같이 순종해 주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아내는 평생 불평도 많았다. 결혼식에 면사포를 쓰지 못한 것도 한스러웠고,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 다니며 즐거웠던 일, 찬양대에 끼어 찬송하며 주일학교 교사 노릇하던 즐거운 교회생활을 회상할 때 무미건조한 무교회는 지겹기도 하고 옹졸하고 융통성 없는 좁쌀영감 양에게 매어 사는 호랑이가 즐거웠을 리가 없다. 박석현 선생께서 부인의 마지막 병석 6개월이 참사랑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간이었다고 고백하신 일이 생각난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아했으나 이제 좀 알듯하다. 나도 마지막 4년 반이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세월이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었지만 그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불만도 없어졌다. 바램이 있다면 좀 회복되어 스스로 변소출입이나 하게 되기를 바랬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사니 그에게 불평할 조건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나만 옳고 그녀만 틀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사고방식이 수정되었다. 따라서 미안했다는 생각 사과하는 마음은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도 남편과 가족들에게 미워하다 감사하다 하는 생각으로 변하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우리는 평생에 꿀같이 달콤한 연애 생활은 맛보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살아왔으니 그 이상의 행복이 어데 있으랴? 우리가 서로 불평하며 불만 속에 살았다면 복에 겨워서 한 불평불만에 틀림이 없다.
나중에 안 일이었으나 우리가 결혼하기 4년 전에 아내의 큰언니인 권정임 씨가 나를 동생의 남편으로 점을 찍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마디의 귀띔도 없었다. 나는 그 4년간에도 여러 군데의 혼담이 오가고 때로는 결정단계에까지 진행된 때도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은 역시 하나님이 경륜하신 결과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사람을 제각기 다르게 만드시고 그것이 서로 어울리어 조화를 이루게 하신다. 같은 조건하에서도 불만불평에 불행하게도 하시고 서로 보완하여 행복하게도 하신다.
우리도 인간적으로는 불행했던 것 같으나 지내고 결과적으로 보면 천생연분이었고 자각하지 못한 채로 지극히 행복한 생애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모두들 이제 남은 생애를 복음을 위해 열심히 살라 격려들 하시니 아멘 할 뿐이다. (19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