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에덴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성당에서 L신부님께 물었다. "사탄과 성령은 서로 대조되는 존재가 아닙니까?" "아니, 사탄은 천사와 대조되는 존재인데, 결국 그렇군요. 잘못하면 이단에 빠집니다. 조심하십시오." 집으로 돌아와 나름대로 에덴과 관련된 천국과 지옥을 그려본다.
에덴은 창세기에서 지적한대로,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East)에 있는 에덴(Eden)이라는 곳에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창세기 2:8-9)에서 생겨났다. 필자는 서쪽(West)에 있는 웨덴(Weden)에 사탄이란 악령이 살고 있다고 본다.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실낙원>(밀튼저)의 사탄은 어디에서 나타났는가. 지옥이라 한다. 지옥이 어디있는가? 가상하여 에덴의 동쪽이 천국이라고 친다면, 서쪽의 에덴(필자는 웨덴으로)은 지옥이라고 생각해보자. 사탄이란 원래 천사였다가 타락하자 악마가 되었다. 악마란 악령이다. 악마의 우두머리를 베엘제불(마태복음 12:24)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서 인간보다 나은 존재를 천사라고 한다. 천사란 아직도 낙원에 거주한다고 믿고 있다. 웨덴에는 악령과 그 추종자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에덴도 낙원이다. 하느님이 아담을 흙의 신화로 창조한 후에, 갈비뼈의 신화로 이브를 창조하였다. 갈비뼈가 심장이 있는 곳이라고 하여 중요한 뼈로 보았다. 인간은 결국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선하면 천국으로 가서 천사들과 거닐 것이고, 악하면 지옥으로 가서 악마와 생활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속성(선성과 악성) 때문에 선인과 악인 사이를 헤멘다. 그러나 <무상을 넘어서>에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을 선인이라 생각하는 악인과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는 선인이 있다."는 생각 속에 살고 있다.
소설 <에덴의 동쪽>(스타인 벡 저)을 읽었다. 악녀 캐시의 발악은 지옥의 사탄에 물든 여자다. 그리고 <성서>를 통독하였다. 신구약을 한 번 통독하였다. 대서사시 <실락원>도 읽었다. 사탄의 딸 신(Sin, 죄)와 손자 데스(Death, 죽음)가 나타나지만, 지옥문을 통과하려고 하다가 사탄과 데스의 혈투가 벌어진다. 지옥은 싸움의 연속이고 평화가 없다. 웨덴은 지상의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아닐까?
목사와 교사도 <신곡>(단테)의 지옥편에 나타난다. 목사는 성서를 옆구리에 끼고 거룩한 하느님 행세를 하였고, 교사는 지식이 아닌 몽둥이로 권위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미국의 달동네에서 거주하는 어린이 200명에 대한 성분조사를 하고 미래를 예측하라고 하였더니, 한결같이 범죄자가 된다고 하였더란다. 그러나 20년 후에 180명(200명 중에)을 조사하니 겨우 4명이 범죄자였다고 한다. 생활철학을 바뀌게한 사람이 교사였다고 176명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웨덴을 정화한 사람이 교사의 역할이었다.
대서사시를 <일리어드>와 <오딧세이>(호오머저), <신곡>, <실락원>과 <복락원>(밀튼저), 소설 <전쟁과 평화>(톨스토이)에 두고 있다. 여기는 공통적인 주제가 두 가지이다. 즉 애국심과 개인간의 연애가 겹쳐져 나타난다. 다만 호오머의 작품이외는 성서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결국 대서사시란 웨덴속에서 민족의 자존심과 연애를 겹쳐서 주제로 삼고서 이를 찬양한 문학작품들이다.
따라서 헬레니즘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와 <신곡>외의 다른 작품은 헤브라이즘이다. 이는 문예사조의 두 가지 흐름이 되었다. 현대는 부조리에 집착한 존재론을 전개하므로, 헬레니즘의 시대로 볼 수가 있다. 까뮈의 <부조리>존재론은 시지푸스의 신화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현대종교로서 <성서>신화는 인정받지만, <그리스-로마>신화는 불인정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의 불일치가, 바로 논리의 존재론과 부조리의 존재론 사이에 놓여있고 가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현대의 시대상을 부조리의 존재론에서 읽고 그만둔다면 혼란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약하다 그러나 신은 강하다. 인간이 의지해야할 자신의 종교를 통하여, 부조리라는 현대의 존재론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을 깨드리고 확실성을 가지고 일상생활에 임할 필요가 있다. 부조리는 문학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존재론의 우상으로 의지할 것이 못된다. 아직 확실치 않지만 필자는 존재론의 다른 이름인 형이상학을 다시 재정립하여야할 필요를 느낀다.
형이상학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하는 철학 이어야한다. 형이하학으로서 자연과학은 끝없이 발전을 하고 있다. 문학도 형이상학이다. 문학은 미학에 속한다. 쾌락가치를 추구한다. 가치론과 관련되면 미학도 형이상학이다. 윤리학만 형이상학이 아니다. 논리학도 형이상학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앞으로 존재론과 가치론과 인식론에 모두 관련된 철학 이어야한다. 필자의 <문학에서 트리오 미학>도 이런 맥락에서 트리오 미학과 형이상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세상의 낙원은 마음에 있다고 한다. 불교든 기독교든 천국이 마음에 있으며, 인간의 마음의 반쪽은 낙원이고 나머지 반은 지옥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도 인간의 이드(본능)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리비도의 반은 에로스(삶의 본능)요 나머지 반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란 말을 비추고 있다. 인간을 성선설과 성악설로 구분하는 것도 인간에 내재된 두 가지 속성을 한 가지로 묶을 려는 시도의 결실이다. 웨덴의 다른 이른 이름은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대조어로서 지옥)이다.
인간의 생활을 올바로 이끄는 존래론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에덴의 신화 속으로 아니 에덴의 존재론 속으로 들어가서, 성령이 이끄는 논리적인 존재론과 악력이 이끄는 부조리의 존재론을 분석하여 보았다. 헬레니즘의 부조리 미학은 문학에서 다루어도 충분하다. 더 이상 종교와 부조리는 어울리지 말자. 인생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존재론은 행복은 사랑에서 그것도 이웃 사랑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웃을 돌아보면 불쌍한 형제자매가 많다. 물론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불쌍한 존재로 비쳐질 것이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거의 제도가 우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과거는 그래도 꿈이 있었으니 그래도 행복했다. 지금은 차거운 현실 위에 놓여있고 부조리는 무수히 발생하고 있다. 통제불능이다. 어디부터 수술을 해야할지 모른다. 그래도 역사는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민족에 대한 자존심과 에덴은 다시 찾아오고 있다는 믿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