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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8번째 문단 야운선사의 자경문(自警文) 부분은 池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몇 분께 문의를 하여도 지문을 찾지 못하여 처음에는 우리말 풀이로만 썼었는데 , 지존님께서 어렵게 찾아서 보내주셨기에 삽입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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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벗
권 예 자
‘봄비님, 오시기 전에 메일함 열어보세요. 심심풀이 풋 글 한 편 있을 겁니다.’ 현관문을 막 나서는데 모바일 폰에 문자가 들어온다. 봄비란 인터넷상의 내 닉네임이다. 기차를 놓칠까 염려가 되었지만 나는 다시 들어가 메일을 출력하여 상행선 열차를 탔다. C선생님과 나는 같은 수필전문지로 등단하였다. 평소 그의 차분하며 사려 깊고 진부하지 않은 글을 읽으며 좋은 작가란 생각을 자주 해왔다. 더구나 최근 삼년간 매주 수필공부를 함께하다보니 자연스레 좋은 글벗이 된 것이다.
글을 쓰면서 어려운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지만 그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마음이 맞는 글벗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친구가 많지 않은 내게도 동네친구, 학교친구, 직장친구 등 마음을 터놓을 벗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벗들이 생활의 인접성 속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만나진 것에 비하여, 글벗은 글속에 나타난 그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표현방법 등에 공감을 느끼지 않고서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관계다. 그렇다고 하여 사물을 보는 방법이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보는 관점은 전혀 다를지라도 그 다름에 대하여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의 이해가 되는 친구면 된다. 그러기에 글벗들과는 처한 환경이나 개인적인 생활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밤새워 대화를 해도 싫증이 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떤 때는 상대 글의 단점에 대하여 거침없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 지적 때문에 서로 화를 내는 법이 없는 것이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점일 것이다. 나에게는 좋은 글벗들이 있다. 함께 공부하는 교실이나 창작활동을 하다가 만난 벗이 있고, 그가 쓴 글이 내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가까워진 벗도 있다. 더러는 그의 글 쓰는 자세나 심성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게 된 친구도 있다. 처음 내가 글과 접할 때 K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글을 쓴다고 아무 물에나 발을 담그지 마라. 그 것이 흙탕물이면 발을 빼고 나도 그 흔적이 가시기 어려우니, 맑은 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늘 기억하고 있지만 내가 있는 곳이 꼭 맑은 물인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좋은 물이란 생각으로 오늘도 글벗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좁은 의미의 글벗은 또 다르다. 나는 내가 모자란 만큼 벗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글벗은 한 두 사람이면 족하다. 더 늘인다 하여도 서넛을 넘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아무하고나 쉽게 친한 듯 보이는 나지만 글을 나눌 친구 고르기에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우선은 서로 사고의 차이가 많아서 둘 중 하나가 다른 이의 부담이 될 만한 친구는 피한다. 이런 관계는 하나가 다른 쪽에 흡수되거나 기대여야 함으로 좋은 관계라 할 수 없다. 또 글은 잘 쓰되 평소의 생활 태도가 그가 쓴 글과는 전혀 다른 이도 좋아하지 않는다. 웃음과 눈물이 없어 감동을 모르며 모든 일에 칼 같이 이익을 따지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고려말 야운선사는 자경문(自警文)에서 벗에 대하여 이르기를 ‘송리지갈(松裏之葛)은 직용천심(直聳千尋)이요. 모중지목(茅中之木)은 미면삼척(未免三尺)이라, 소나무밭의 칡은 천 길을 자라고, 잡초 속의 나무는 석자를 면할 수가 없다.’ 고 하였다. 이 말은 내가 조금 모자라도 좋은 벗들 속에 있으면 어느 정도 그들과 비슷하게 될 것이요. 좋지 않은 벗들 사이에 있으면 자신에게 자질이 있어도 그 능력을 제대로 펴기 어렵다는 말이다. 비유가 합당한지 모르나 맹자의 어머니가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한 것이나, 정몽주의 어머니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시조를 지은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닌가 싶다.
내가 휘청거리면 바로잡아주고, 글쓰기에 게으르면 빨리 쓰라고 호되게 나무라기도 하는 친구. 나보다 내 글을 더 잘 알아서 남의 글을 흉내 내면 단박에 알아채고 일침을 가하기도 하는 친구. 한밤중에 초고를 보내도 웃으며 나의 첫 독자가 되어주는 친구. 그 반대의 경우에도 나 또한 기뻐하며 짜증나지 않는 친구. 그런 글벗들이 내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서있는 솔밭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들이다. 나는 아직 칡이겠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닮아 소나무 비슷하게 자랄 것이란 기대로 오늘도 그들을 찾는다.
C선생님의 수필을 다시 꼼꼼히 읽는다. ‘마감 후, 징검돌 놓기’ 작가는 생활 속의 마감 후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한 다음, 자신이 직장을 퇴직한 후에 시와 수필을 쓰게 된 것을 징검돌 놓기에 비유하여 글을 쓰셨다. 재미있고 글의 흐름도 상당히 유연하다. 나도 오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늦은 나이에 시와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내 이야기와 비슷해서 많은 공감이 가는 창작수필이다. 그는 '마감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하나의 단계’라고 말미를 쓰셨다. 부러운 글이다. 오늘 글에서 트집을 잡아 큰소리를 좀 하고 싶은데 영 걸리는 부분이 없다. 아무래도 C선생님은 내가 본받아야 할 잘 자란 소나무인 것 같다. 이런 글벗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2009. 9월 14매)
@ 칼칼하게 보시고 되도록이면 따끔한 지적을 바랍니다. 저는 이미 제 수필집에 수록된 글도 볼 때마다 고치는 타잎이랍니다. 부탁드려요. - 봄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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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봄비님, 안녕하세요. 아직 얼굴을 뵈운적은 없지만 여러 사진에서 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친숙함이 느껴집니다. 진정한 글벗을 사귀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글 쓰는 사람들은 개성이 강하고 자존심조차 누구 못지않게 많기 때문에 벗의 글에 대해 평가 하기가 조심스럽지요.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 글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 되기 때문에 감정적인 대응은 금물이지요. 여섯번 째 줄 끝 부분 ' 창작수필이다'라고 쓰셨는데 창작이란 말은 어떤 의도가 있는지요. 글 속에 준치처럼 작은 가시가, ㅎ,ㅎ,ㅎㅎㅎ.
ㅎㅎ 정말 그렇군요. '창작수필'이 우리들의 등단매체다 보니 사실 좀 걸리네요. 제 의도는 다른 기계적인 느낌의 수필과는 다르게 좀 새롭다는 의미였는데 더 생각해 보고 지적해주신 부분에 일단 노란 색연필을 넣어 두겠습니다. 워낭소리님 자세히 보아주어서 고맙습니다.
풋 글이란 표현이 참 싱싱하네요. 봄비님의 각주에 힘입어 감히 한 말씀드립니다. '좁은 의미의 글벗'이란 말이 좀 걸립니다. 진정한 글벗, 참된 글벗? 좀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자경문은, '~~~미면삼척이라(소나무밭~~~).'하고 쓰시면 어떨까요?
' 풋 글' 저도 그 부분이 좋았습니다.
'좁은 의미의 글벗' 역시 노란 줄은 쳐 놓고 살펴보겠습니다.
예시(진정한, 참된)해 주신 내용으로 하면 뒤에 인원수가 걸리네요. 多多益善선이어서. 좋은 수가 없을까요? '이니-이라' 즉시 정정.
그런데 '소나무밭 속에' 가 자꾸 걸리는데 그 부분을 '소나무밭에' 로 할지?
그대로 둘지 생각중인데 찬웅님 의견 좀 주십시요.
에공, 저도 눈이 아파 외출하면서 프린트해서 읽으려했드니 에공공~ 다녀와서 천천히 읽어야겠네요.
후리지아님, 바로 위에 찬웅님 글에 대한 의견도 좀 주시면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글을 풀어 나간 솜씨가 역시 연륜을 말해주시는 둣하네요. 그냥 제 관점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둘째 문단, 세째 문단의 C선생 수필의 내용은 '글벗'이란 이 글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약간의 곁가지로 느껴집니다. 글을 통해 서로 친분을 나누시는 C선생과의 인연으로 인해 이 글을 쓰시게 되었으니, 차라니 C선생과 친교를 맺게 된 이야기가 살짝 삽입되면서, 글벗에 대해 사유하는 내용(네째 문단 이하의 내용은 아주 좋습니다)이면 어떨까요? C선생 수필의 내용은 뒤에서 슬쩍 흘리기만 해도 될 듯하네요. (칼칼하게 보라 하셨다고 겁없이 너무 들이댄것 아닌가 싶네요^^^^)
두레박님, 이래서 제가 두레박님을 좋아합니다. '징검다리 내용 부분' 좋은 의견 주셨네요. 이찬웅님 답글에 제가 쓴 아래 두 줄에 대한 것도 살펴보고 의견 주면 고맙겠습니다.
"소나무 숲의 칡은 ......"은 어떨까요? 그리고 '좁은'을 '진정한'으로 바꾸셔도 괜찮고 또 그대로도 괜찮은데요. 결국은 정말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글벗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너무 좋아!! 두레박님의 앞에 의견이 좋아서 C선생님 수필부분(2, 3문단)을 아래 쪽으로 옮겨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위치에 조언대로 글벗이 된 내용 삽입하고요. 들미소님도 같은 조언 주셨습니다. 나는 안보였거든요. 이것만해도 대단한 수확입니다. 감사.
제게는 어려운 글이군요. 두 번 읽었습니다. 토론 대상의 글이 아닌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예, 토론 대상의 글로 안보이더라도 눈여겨 봐주셔요. 글이 좀 좋아졌으면 싶은 것이 제 바램입니다. 솔직히 엉성한 글이고 순간포착의 가벼운 글이랍니다.
마음 다잡아 난도질 한번해서 그간 맺힌 원한(?)을 갚으려 했는데 다 쓴 글이 등록이 안되어 포기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뜻인가 봅니다. 말미의 c 선생을 글벗으로 너무 쉽게 인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독자 앞에서, 9번째 10번째 문단에서 내세운 조건으로 검증을 해 봐야 합니다. '소나무 밭에'와 '소나무 밭 속에'가 택일 문제가 아니라면 '소나무 밭의'나 '소나무 숲의'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외의 두레박님의 지적도 동감입니다.
ㅎㅎㅎ, 고맙습니다. '소나무밭의'로 결정하고 즉시 정정합니다. 裏가 '속'이란 뜻이 있어서 넣었던 것인데...표시나게 붉은 글씨로 빼고 푸른색 '의'삽입. C선생님에 대한 검증은 서두 한 문장에서 함축적으로 보여지지 않았을까 싶은데, 더 좋은 방법있으면 도움을 받고 싶어요.
말미의 둘째 문장 다음에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아 남을 편케 하려는 그런 마음이라면 글벗 뿐 아니라 삶의 벗으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라는 내용의 문장을 하나 삽입하면 어떨까요? 또 둘째 문단은 <홍길동전의 작가는 홍길동의 삶에 대한 글을 썼다>는 식으로 주어와 서술어가 중복되는 느낌입니다. <'마감후 징검돌놓기'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글에서 작가는----비유하고 있다.>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세째문단의 전반부에서 반 따옴표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안 보입니다. 이정도로 반 분이 풀린 것같고 더 이상 말하면 노여워 하실까봐 이만 줄이겠습니다. 너무 건방을 떨었습니다. 용서하시기를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일반 [벗]과는 다른 [글벗]에 대하여 쓰고 싶었던 것이 제 의도랍니다. [벗]에 대하여는 다른 분들이 너무 많이 썼거든요.
문장 삽입, 좋은 의견이예요.
사실 그 문단은 두레박님의 의견에 따라서 아래쪽으로 고쳐서 옮기려 하고 있답니다. '건방'이라니요? 괜한 걱정 마시고 계속 도와주셔요. 글자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저는 이런 것이 참 좋답니다.
'조금은 엉성하여 어느 한곳을 채워주고 싶은 친구' '내 비어 있는 한곳에도 그런 벗이 들어와 채워 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들리는 주위의 소리는 그렇게 생각지를 않아주니 늘상 안타까와 하며 보냈습니다.「 남들은 어찌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글벗은 한 두사람이면 족하다....」글벗을 고르시는 봄비님의 속내를 너무 솔직히 표현하심이 아니온지요. 이제는 敢히 가까이 닥아가기가 두렵사옵니다.
그렇지요? 벗의 다른면은 지존님이 말씀하신 두 문장이 정말 옳습니다. 사실 글 쓰는 사람들이 순수하여 엉성한 구석도 많답니다. 다른 모임에 가면 저 같은 바보가 드믑니다. 물가도 잘 모르고, 보약 만드는 법도 모르고, 부동산투기로 돈버는 것은 전혀 취미가 없어서 늘 가난하지요. ㅎㅎㅎ, 속내를... 그렇네요.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단지 글벗이 너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저는 그것을 염려합니다. '감히 다가가기가...' 지존님, 이러긴가요? 삐짐.
창작수필 2010년 봄호에 '라면 단상'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그 내용에 '나는 라면 같은 친구가 좋다'란 말을 썼습니다. 귀하고 높아서가 아니라 늘 가까이 있어서 또 대하기 편해서 좋은 친구를 말했지요. 지존님이 말씀하신 친구와 거의 같은 개념입니다만 봄비님의 글 벗과는 거리가 좀 멀지요?
맞아요. 글벗과 벗과는 다릅니다. 읽는 분들이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시는듯 하네요. 제목에 [글벗]이라고 썼을 때는 그만한 의도가 있어서지요. 아마도 제가 처음 써보는 말이라 그런 듯합니다. 제게도 기가막힌 다른 벗들이 또 있답니다. 지금 구상중인 [세 사람의 숙이]는 제 인생속의 다른 벗들 이야기인데 좀 진부하여 쓸까? 말까? 망서리고 있답니다. [글벗]과 [벗]은 작가에 따라 겹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을거예요.
해바라기 Cafe의 '王 언니' 봄비님의 글에 글벗들의 참여가 뜨겁습니다. 이래도 글벗은 한둘이면 족하옵나이까? 그래서 [글벗]이 [참벗]도 되고 (풋글)도 (참글)되는 것이고.......
예, 지존님, 맞습니다. 글벗은 多多益善 임을 알겠습니다.
저희 집 컴이 임종 직전이라 출판사에 와서 잠깐 글을 씁니다. 동반의 길을 함께 가는 우리는 정녕 도반인 셈이지요. 그러기에 글벗이란 주제는 매력있고 정이 갑니다. 복사나 프린트가 되지 않아 불편합니다만 몇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1. 같은 문장의 중복이 심합니다.- 좋은 점은, 그들은, 등. 2. 접속사의 남발이 심합니다.-그런데도, 어떤때는 등.★-자경문 인용 중에-소나무 밭의 칡속에는 소나무 뿌리 속의 칡으로 바꾸면 어떨지요? ★생활의 인접성은 생활의 관계성으로 ★
고맙게 참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소나무 뿌리속의 칡'은 '자경문'이 야운선사의 글이므로 제 마음대로 왜곡할 수 없어 절대로 '뿌리'를 넣지 못한답니다.
-그들은 내가 서 있는 솔밭에서도 에서 도는 빼시는게 좋을 듯 하며, 마지막 단락 C선생님의 수필을 꼼곰히 읽는다 부분을 빼시면 문장이 더욱 깔끔해지실 것 같네요. 아, 참 도입부에 C선생님에 대한 경어체, 쓰셨다는 썼다로 하심이 어떠할지요?
이 부분은 두레박님 답글에 관계되어 조정중입니다. 집에 컴이 고장났는데도 이렇게 보아주고 답글 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본문을 프린트해서 선배님들의 비평을 하나씩 음미해 보면서 공부해 봄이 좋겠군요,, 알찬 좋은 글과 명철한 분석과 평들이 더욱 훌륭한 수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역시 골공부에는 선배님들의 평이 제일 좋겠습니다..
오래된 글을 보아주셨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글 올려놓고
이틀 동안 여러 문우들의 성의 있는 답글을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