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8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요한 17,1-11) “말하기와 기억하기”
오늘이 가슴 아픈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기에 5.18.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날이 되면 다음과 같은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말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기쁘고 좋은 일만 기억하거나 기념하는 게 아니라
기억하기 싫은 가슴 아픈 역사일수록 잊지 않기 위해서 자꾸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겉으로 드러내놓기 불편하더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론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기와 기억하기”
비유가 될 지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11년 캐나다 영화로서 <라자르 선생님>이라는 영화입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선 어린 학생 ‘시몽’과 ‘알리스’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됩니다.
교실 천장에 목을 매고 숨져있는 담임선생님의 모습...
그 날부터 두 어린이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고
어른들은 서둘러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서둘러 교실을 새로 칠하고
새로운 담임 ‘라자르’ 선생을 채용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모든 질문을 차단합니다. 그래야 빨리 잊을 거라고 하면서...
그러나 라자르 선생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죽음을 잊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니
차라리 죽음을 ‘껴안고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낫다고 생각을 했고
상처는 ‘말’(言) 때문에 덧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단’시키고 ‘침묵’ 때문에 덧나는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숨기지 않고 아이들하고 죽은 前 선생님 얘기를 나누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토닥여 주며 다시 겁에 질린 아이를 껴안아 줍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기겁을 하면서 들고 일어납니다.
부모들에게 라자르 선생은 아이들을 토닥이고 껴안아 주는 선생님이 아니라
겨우 가라앉은 상처를 자꾸 들쑤시는 선생으로 보일 뿐입니다.
이것 역시 적절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저는 제 몸에 남은 이번 수술자국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게 ‘흉터’일까 ‘상처’일까?‘
‘흉터와 상처’는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흉터란 것은 과거가 남기고 간 아문자리이지만
상처는 앞으로도 계속 치유해야 할 생채기인 것입니다.
4.16 세월호, 5.18. 광주항쟁, 또 앞으로 맞게 될 6.25...
이런 것들은 과거의 역사가 남긴 ‘과거의’ 흉터 자국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치유해야 할 상처인 것입니다.
고통이나 상처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분출해 낼 수 있는 비상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부끄럽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우리는 못났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치유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픔을 표현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무조건 덮어두고 차단시키는 태도가 오히려 상처를 키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