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를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벌린다. 상상이 속속 현실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 타워크레인의 20%가 몰려 매일 수십 층이 올라가고, 수십 미터의 도로가 매일 새로 깔리고 있다. 야자수 모양의 초대형 인공섬이 3개나 건설 중이고, 사막의 땡볕을 비웃듯 450미터에 이르는 슬로프를 갖춘 실내 스키장도 문을 열었다. 세계축구장 80개가 들어가는 초대형 쇼핑몰에다, 디즈니랜드의 8배가 넓는 두바이랜드도 조성되고 있다. 전세계 초일류 기업·언론사·대학·병원을 모아놓고 세금을 면제하고 기업활동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주는 인터넷시티·미디어시티·지식마을(Knowledge Village)·헬스케어시티가 속속 완공되고 있다. 에미레이트항공과 제벨알리 항구를 비롯하여 항공과 해운 분야에서 물류의 핵심기지가 되겠다는 전략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90년대 중반부터 두바이 왕세자로서 실질적으로 두바이를 통치해 왔으며, 2006년1월4일 형이 세상을 떠나자 공식적으로 두바이의 지도자가 된 셰이크 모하메드의 진두지휘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는 현재 전세계 리더십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두바이에서는 공식적으로 셰이크 모하메드를 표현할때 ‘UAE Vice President and Prime Minister and Ruler of Dubai His Highness Sheikh 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이라고 적는다. 굳이 번역하자면 ‘UAE의 부통령이자 수상이며 두바이의 통치자인 셰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전하’ 정도가 되겠다.
...당신의 눈망울 속에 나를 담아주세요
그 눈망울 속에서 살 수 있도록
어쩔 수 없더라도 그 눈 깜빡이지 마세요
당신에게 잡혀 있는 나를 떨어뜨리지 마세요
슬프더라도 눈물 흘리지 마세요
그 눈물이 홍수되어 쏟아지면 나도 함께 쓸려가 버리니까요... 오늘날 두바이라는 ‘꿈의 나라’가 건설된 이면에는 무슨 딱딱하고 거창한 국가발전 리포트가 아니라 바로 이 같은 시(詩)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자리잡고 있다. ‘당신의 눈망울 속에 나를 담아주세요’(Place me in your eyes)란 제목의 이 시를 지은 작가는 바로 셰이크 모하메드 지도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와 함께 자랐으며, 지금도 시를 통해 영감과 상상력을 얻는다고 했다. 현재 두바이에서 진행되는 온갖 기발한 이벤트와 건축물은 바로 그의 또 다른 시작(詩作)인 셈이다.
그의 또다른 시를 보면 국가개조에 대한 의지가 잘 나타난다.
...누구든 간구하는 자는 열심히 헌신할지라
영광은 오늘에 있나니
지난날의 영광은 잊어버려라
고난을 사랑하기에 어려움이 밀려올수록 난 의기양양하리라
고난은 나의 친구이기에 기꺼이 맞아들이리라... 셰이크 모하메드는 ‘도전’(Challenge)이란 제목의 이 시에서 두바이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묘사했다.
1995년 그가 왕세자로 지명된 뒤 10년 동안 두바이는 혁명적인 개조(改造)의 길을 걸어왔다.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전 세계를 ‘유혹’하기로 결정한다. 그의 전략은 성공했고, 지난 10년간 두바이의 각종 경제지표는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두바이의 석유 부존량이 2020년쯤이면 바닥날 것으로 판단한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가 관광, 금융, 무역, 엔터테인먼트, 전시회 등의 아이디어로 승부를 건 결과다.
‘두바이의 CEO’인 셰이크 모하메드는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는 통찰력,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발전상을 머리에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불가능은 없다는 자세로 일사천리 밀어붙이는 실천력 등 리더십의 3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는 지도자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1949년 셰이크 라시드(Sheikh Rashid bin Saeed Al Maktoum)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58년 9세 때 할아버지인 셰이크 자에드가 죽고, 아버지인 셰이크 라시드가 지도자가 됐다. 셰이크 라시드는 오늘날 두바이 혁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셰이크 모하메드가 아버지의 뜻을 완성시키고 있다.
지도자는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셰이크 라시드는 제왕학(帝王學) 차원에서 아들 중에서 가장 영특한 셰이크 모하메드로 하여금 은행원, 건축가, 상인, 학자 등 다양한 엘리트 집단과 자주 만나도록 했다. 영국에서 영어교육과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후 그는 경찰국장을 비롯하여 단계적으로 리더십 훈련을 받았다. 매번 자신감과 단호함과 상상력을 동원하는 그를 보고 아버지와 형은 무제한의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고, 1995년에는 당시 두바이 지도자이자 셰이크 모하메드의 맏형인 셰이크 막툼이 가장 영특한 동생인 셰이크 모하메드를 미리 차기 지도자로 지명했다.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셈이다.
그는 이때부터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온갖 혁신적인 국가 건설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차기 지도자로 지명되자마자 그는 두바이의 21세기 비전을 발표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는 일만 남았다”(It will be full speed ahead)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있으면 바닥날 석유만 믿고 있을 수 없다. 석유 이외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도 신속하고 획기적으로
벌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사실 두바이에서 196 년 석유를 발견했을 때 장차 닥쳐올 석유 고갈을 먼저 걱정한 것은 셰이크 모하메드의 아버지인 셰이크 라시드였다. 두바이의 석유 매장량은 40억 배럴로, UAE 전체의 982억 배럴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셰이크 라시드는 냉철한 통찰력으로 당장의 석유 수입을 가지고 학교·병원·도로 등 각종 인프라를 건설하는데 투입했다. 이를 이어받은 셰이크 모하메드도 1996년에 ‘2011년까지 100% 탈(脫)석유 경제구조를 만들자’는 정책을 마련했다. 실제로 오늘날 두바이 GDP(국내총생산)의 93%가 무역·관광·부동산·건설·금융·서비스 등 비(非)석유 분야에서 나올 정도로 그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당초 그의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가 착안한 두바이의 미래상은 관광과 서비스 산업의 중심지로 싱가포르와 미국의 마이애미, 프랑스의 생트로페가 융합된 도시였다. 아라비아와 이란, 이라크 등을 잇는 중개지로서의 전략도 세웠다. 이런 전략이 성공하려면 외국인이 편리함을 느낄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그래서 구상한 것이 인공 신도시였다. 그 꿈을 아들인 셰이크 모하메드가 완성시켰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평소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는 아버지이며, 그로부터 무슨 결정을 내릴 때 인내심과 신중함을 배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보다 무엇이든 한발 더 앞서 나갔다. 그는 “나는 먼저 상황을 지켜본다. 그리고 사람들 표정을 읽고 결정 내린다.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위대한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행정규제로는 경제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는데 있다. 그는 평소 “두바이에서는 실패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서 규제철폐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2004년5월16일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해 “불가능이란 단어는 지도자의 사전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도전이 얼마나 크다 해도, 강력한 믿음과 결단력과 결의는 불가능을 극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 시티, 미디어 시티 등 다양한 형태의 자유지역(Free Zone)을 지정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CNN, 로이터 등 세계적인 업체를 대거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현재 두바이에는 용적률(容積率)이나 층고(層高) 제한이 거의 없어 건축업체에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어디 그뿐인가. 시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아이디어는 멈출 줄 몰랐다. 비수기 전세계 부자의 돈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두바이 쇼핑 페스티벌’이란 대대적인 바겐세일 행사를 진행하고, 6월부터 8월까지도 이와 비슷한 ‘두바이 여름 깜짝 세일 축제’를 개최한다. 지금도 늘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치고 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노예 상태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셰이크 모하메드를 얘기하면서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의 뒤에서 온갖 실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씽크탱크다. 그는 “우리는 비전에 의해 움직이고 용기를 가지고 있다. 내 뒤에는 열심히 일하는 젊은 씽크탱크가 있다. 내가 아이디어와 목표를 제시하면 그들은 실행에 옮긴다”라고 말했다.
두바이 현지에서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면, 이 브레인 집단은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 출신을 주축으로 세계에서 모여든 2000명의 전문가다. 이들은 두바이 시내 빌딩에 사무실을 얻어놓거나 ‘두바이 아이디어 오아시스’ 등의 이름으로 셰이크 모하메드의 뒤에서 씽크탱크를 구축, 다양한 세부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하루 24시간 이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는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들을 수시로 집무실이나 사막 휴양소로 불러 묻고, 듣고, 토론한다.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종교와 국적을 불문하고 세계 최고의 기술과 실력을 갖춘 사람을 유치한다는게 셰이크 모하메드의 전략이다.
그는 “번영은 기술과 돈이 가져오는 게 아니라 오직 사람만이 가져온다”면서 “가장 유능한 팀은 1 더하기 1을 2가 아니라 11로 만든다”고 밝혔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이 씽크탱크를 통해서 나는 과거의 경험을 되살리긴 하지만 누구의 것이든 복사하지 않는다. 두바이에서 추진되는 그 어떤 것도 복사나 복제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140만명으로 추정되는 두바이 인구 중에서 순수한 두바이인, 즉 현지 외국인으로부터 ‘로컬’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30만 명도 채 안 된다. 이들은 대부분 인공낙원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셰이크 모하메드에 대한 국민의 신임과 존경은 절대적이다. 두바이 곳곳에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두바이에서는 셰이크 모하메드가 입을 열면 명언이고, 슬로건이 된다.
그는 체질적으로 불가능과의 전쟁을 즐긴다. 그는 “나는 도전을 좋아한다. 불가능한 것을 보면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어떤 꿈이든 현실화시킨다”고 말했다. 또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내 아버지는 역사가 씌어지길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역사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역사를 썼다”고 말했다.
‘알 사다’(Al Sada)라는 잡지의 기자와 만나서는 “누구든 10년 앞에 무엇이 벌어질지 예언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앞으로 3년 이내에 두바이는 지금보다 2배는 더 부유해질 것이다”고 선언했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지켜졌다.
“중동 붐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두바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내가 계획한 것의 10%에 불과하다. 나는 빨리 나머지도 보고 싶다.” 그의 입에는 거침이 없다.
하지만 셰이크 모하메드는 조심할 줄도 아는 지도자다. 지도자는 위기의식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는 ‘사슴은 사자보다 더 빨라야 잡아 먹히지 않고, 사자는 사슴보다 더 빨라야 굶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깨달아야 한다’는 아프리카의 격언을 자주 인용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두바이가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는 그의 다음 행동을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