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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바에서 내려다본 타나 시내. 종합운동장(앞쪽)과 아노지 호수 |
ⓒ 김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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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마다가스카르는 어떤 나라일까.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비행장을 걸어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대부분 백인이거나 아프리카인이다. 그중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비행기에 오르는데 무거운 가방을 들고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내가 대신 그녀의 가방을 들어 비행기 짐칸에 올려 주었다. 중국인처럼 보여 “중국에서 왔느냐”고 묻자 역시 중국 사람이다.
유럽이나 미국 등 외국인들은 아시아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지만, 한중일 3국의 사람들은 서로를 귀신같이 알아낸다. 같은 동북아시아라고 해도 풍기는 인상과 느낌이 뭔가 다르다. 그녀는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요하네스버그의 중국 통신회사에 4년째 근무하다 1년 전부터 마다가스카르 지사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아프리카 대륙을 떠나는 아쉬움과 아프리카 배낭여행의 종착지인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기대가 엇갈린다. 마다가스카르는 어떤 나라일까. 나는 내 머릿속으로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태학적으로 가장 풍부한 원시 영장류와 파충류의 천국이고, 곤충류의 보고이며, 거인성 진화와 난쟁이성 진화가 동시에 이뤄지는 ‘진화의 타임머신’이며, 지금은 멸종된 거대한 ‘코끼리 새’와 가장 작은 ‘피그미하마’가 살았던 나라이고, 바오밥 나무와 칭기의 조화가 딴 세상을 만드는 나라. 바닐라 향과 사파이어의 나라이며, 그리고 한때 해적들의 나라였던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는 세상의 끝과 시작이 만나는 신비의 섬이다.
비행기는 3시간을 날아 오후 2시 30분 마다가스카르 수도인 안타나나리보의 이바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마다가스카르는 남아공 보다 한 시간 빨랐다. 비행기 안에서 마다가스카르 섬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뒤에도 1시간 정도 더 날았다.
아프리카 대륙과 마다가스카르 사이에 있는 모잠비크 해협과 마다가스카르를 서해안에서 가로질러 날아온 것이다. 날씨가 화창해 하늘에서도 안타나나리보의 모습이 선명히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는 안타나나리보 교외는 평지에 집들과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찼고, 언덕과 산 위로 올라가면서도 집들이 계단식 논처럼 들어서 있다. 공항 근처에는 호수도 보인다.
프랑스어가 반기는 마다가스카르의 다국적 문화
“봉주르, 마담(안녕하세요, 부인).” “봉주르, 무슈(안녕하세요, 미스터).”
여기저기서 프랑스 말이 들린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오 르브와(안녕히 가세요)”, “메르시 보꾸(대단히 감사합니다)”, “위(예스)” 등도 들려온다. 프랑스 파리 공항이 아니라, 마다가스카르 이바토 국제공항의 풍경이다.
얼굴은 동남아시아인데, 말은 프랑스 말이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련된 마다가스카르 부인들은 반가운 나머지 서로를 포옹하면서 오른쪽과 왼쪽 뺨을 번갈아가면서 볼에 입을 댄다. 인사도 프랑스식이다. 말과 인상에서 프랑스 냄새가 물씬 풍긴다.
오랜 프랑스 식민지 영향으로 공항을 이용할 정도의 마다가스카르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 동남아시아와 프랑스의 만남이라는 이상한 조합을 느낀다. 지방이나 서쪽으로 가면 얼굴 모습과 피부색깔 등에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혼합을 보기도 한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만남에 중동의 아랍과 유럽의 프랑스가 끼어든 느낌이다. 다국적 문화가 함께 하고 있다. 2천 년 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인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살기 시작한 뒤 아랍의 상인들과 아프리카 노예, 유럽의 제국주의가 밀려온 탓이다.
공항의 입국절차는 까다롭기 보다는 복잡하다. 나의 여권을 제복을 입은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일반 공항직원이 아닌 경찰관처럼 보이는, 검사한 뒤 다시 다른 직원이 입국신고서가 제대로 작성되었는지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나이든 여자 직원이 여권 사진과 실제 얼굴을 대조한 뒤 돌려준다. 다른 직원 두 명도 서서 이를 지켜본다. 아직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여권 검사하는 직원들 앞에도 컴퓨터가 보이지 않았다.
일일이 눈으로만 확인하고 기록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공항보다도 훨씬 뒤처진 듯하다. 한 나라 수도의 공항 출입국수속이 아니라, 지방도시의 선박 출입국수속 절차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여러 직원들이 선착장에서 승객들을 쳐다보는 지방 소도시의 항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공항 환전소에서 미국 돈으로 바꾸니 1달러에 2060아리아리(Ariary)로 바꿔준다. 아리아리는 마다가스카르의 새로운 화폐 단위이다. 예전에는 프랑스의 화폐인 프랑과 같은 말라가시 프랑(FMG)을 사용했으나, 몇 년 전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아리아리로 바꾸었다. 5프랑이 1아리아리이고, 2아리아리는 우리 돈으로 1원 정도 된다.
인상적인 빨래하는 아낙네들과 붉은 벽돌공장
비행기 탈 때 내가 짐을 들어주었던 중국 여자가 이번에는 나에게 보답을 했다. 자기 회사 차량이 공항에 나와 있느니, 나를 여행객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중국 여자의 회사 차량을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사라 리(Sarah Lee)’라는 중국 여자는 마다가스카르의 중국 통신회사에 다니는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이었다.
암보히바오 호수를 끼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주변에는 물이 가득 담긴 논들이 많았다. 모내기를 위해 논에 물을 미리 받아둔 것 같다. 교외는 논과 밭이 있고, 시내 입구에는 허름한 달동네 같은 집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시내로 들어가는 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인들이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나와 강가에서 빨래하는 모습과 붉은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벽돌공장이다. 빨래하러 가는 아낙네들의 줄이 끊이지 않고, 붉은 벽돌공장은 왜 그리도 많은지.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는 좁고 우리 70년대 서울 교외의 모습이다. 갑자기 복잡한 시내가 나타났다. 기차역이 나오고 가장 번화하다는 ‘독립로(Ave de l'indépendance)’가 길게 뻗어 있다. 우리말로 쉽게 말하면, 북한 평양의 거리가 그런데, ‘광복거리’이다.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거리와 지명에는 아직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곳이 많다.
기차역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도로 가운데는 중앙분리대 화단이 있고, 도로 옆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인도가 있고 그 뒤로 상가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본떠 만들었다. 작은 샹젤리제이다. 파리의 샹젤리제가 카페와 패션의 거리라면, 안타나나리보의 독립로는 한두 개의 은행과 팔레스 호텔 등 허름한 숙박시설이 많다는 것이 다르다.
안타나나리보는 1625년 호바족의 안드리안자카 왕에 의해 처음 건설되었으나, 오늘날의 도시 형태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도시계획에 의해 이뤄졌다. 기차역도 1903년 프랑스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철도는 안타나나리보에서 시작해 안다시베를 거쳐 동쪽 해안의 항구도시 토아마시나까지 연결되어 있다. 중국 여자 사라 리는 자기 회사가 있는 ‘투어 지탈(Tour Zital)’이라는 빌딩에 먼저 내렸다. 시내에서 가장 높고 새로 지은 깨끗한 건물이었다. 옆에는 역시 새로 지은 대형 쇼핑몰인 ‘좀보 슈퍼마켓(Jombo Supermarket)’이 있었다. 사라 리는 운전사에게 내 숙소까지 데려다주라고 부탁한다. 사라 리는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말한다. 내가 “어디서 프랑스어를 배웠느냐”고 하자 그녀는 “중국에서 대학 다닐 때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가장 싸다는 여행객 숙소인 이소라카 호텔로 갔으나 역시 방이 없다. 마다가스카르에서도 역시 여름 휴가철에는 싼 방을 잡기가 어렵다. 이소라카 호텔에서 소개해준 바로 옆의 자카란다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주인인 50대의 아주머니가 “살라마(안녕하세요)” 하며 반갑게 맞는다. 주인아주머니는 현지어인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혼자 자는 독방인 싱글 룸은 없고, 2인용인 더블 룸만 있다. 3층 방에는 프랑스 젊은 남녀 여행객이 내 바로 앞에 머물고 있고, 라운지에는 젊은 남자 여행객 1명이 책을 읽고 있고, 싱글 룸에는 70대 후반의 프랑스 할머니가 혼자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 할머니는 방문을 열어 제친 채 누워서 내가 올라가자 “봉주르(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유럽 할머니들은 일흔이 넘었는데도, 혼자서도 해외여행을 잘 다닌다. 숙소의 3층 베란다는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았다.
한국식당에서의 저녁 식사
저녁식사는 시내 한국식당에서 했다. 아프리카 여행 중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처음이다. 중국 여자 사라가 자신의 회사 뒤쪽에 자주 가는 한국식당이 있다며 저녁을 사겠다고 초청을 했다. 사라가 근무하는 회사의 중국인 동료들과 함께 ‘뉴 코리아’라는 이름의 한국식당으로 갔다.
한국식당에서 파는 오징어 바비큐를 먹고, 김치를 먹으니 힘이 난다. 중국인들도 김치를 좋아했다. 한국식당 주인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중고 자동차 수입을 하는 50대의 한국인 사업가도 마침 합류를 했다. 해물전을 시켜 먹으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나의 아프리카 배낭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50대 초반의 식당 주인은 케냐에서 3년을 살다가 부인과 함께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6년이 되었다고 한다. 음식은 부인이 직접 하고, 자신은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자동차 수입을 하는 교포는 이곳에서 사업을 한 지 2년이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어디서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중국인 사라와 동료들은 먼저 가고, 나는 두 분의 교포와 밤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이 자신의 차로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여행객 숙소가 많은 어두운 골목길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10여명의 여자들이 차가 지나가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교포는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거리의 여자들이 많다”고 했다. 안타나나리보 시내에는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거리의 여자들이 나타나 손님을 부르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안타나나리보 시내 걷기 여행
다음날 나는 안타나나리보 시내를 온종일 걷기로 했다. 안타나나리보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수도에 비해 치안이 좋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다. 아침부터 시내 활보에 나섰다. 배낭여행객에게 있어 걷는 것만큼 재미있는 여행은 없다. 직접 발로 걸어야 시내의 지리도 한 눈에 들어온다.
차를 타고 구경하게 되면 그 때뿐이고, 바로 망각이 된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케냐의 나이로비와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는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도시의 그림이 흐릿하다. 내가 여행객으로 마음껏 걸어 다닌 도시는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과 잔지바르, 남아공 케이프타운, 나미비아 빈트후크와 스와콥문트,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보 등이다. 당연히 이들 도시는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왼손에는 지도를, 오른손에는 사진기를 들고 나섰다. 지도 속에 미리 걷기 코스를 대략 그려놓았다. 현지인들은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를 줄여서 ‘타나(Tana)’라고 부르고 있었다. 수도 이름이 워낙 길다보니 줄여서 부를 만하다. 마다가스카르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지명이나 사람 이름이 매우 길다는 점이다.
안타나나리보는 현지어인 말라가시어로 ‘천의 도시(the City of the Thousand)’라는 뜻인데, 이 수도를 건설한 안드리안자카 왕이 ‘천 명’의 병사들을 시켜 도시를 지키게 했다는 데서 생겨났다. 내가 거쳐 온 르완다의 대학살을 그린 영화 <호텔 르완다>에 나오는 수도 키갈리의 밀 콜린스 호텔(Hôtel Des Mille Collines)의 ‘밀 콜린스’는 ‘1천개의 언덕'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크고 작은 푸른 언덕들이 많은 르완다를 시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밀 콜린스(천의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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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로 수리중인 로바 왕궁(뒤쪽)과 정문의 상징물 |
ⓒ 김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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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타 수리 중인 왕궁 로바의 아픈 역사
제일 먼저 간 곳은 타나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옛날 왕과 여왕의 궁전인 로바(Rova)이다. 로바는 말라가시어로 왕궁이라는 뜻. 일반인들에게는 ‘만자카미아다나’로 알려져 있는데, 말라가시어로 ‘통치하기 좋은 장소’라는 의미이다.
타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가장 높은 언덕의 로바에서 시작해 가장 낮은 평지의 호수인 ‘라크 아노지(Lac Anosy.아노지 호수)’까지 걸어가는 것이 나의 걷기 코스이다. 로바에서 시내를 쳐다보니 시내 전경이 훤히 보이고, 종합운동장 건너편에 마지막 도착지인 아노지 호수가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바는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지난 1995년 화재로 왕궁의 일부가 불타 버려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수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일반에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로바는 19세기 메리나 왕국의 여왕들이 주로 살아서 ‘여왕의 궁전’이라 불리고, 타나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애초의 왕궁은 ‘왕의 궁전’이라 부른다. 여왕의 왕궁이라는 불리는 이곳 로바는 메리나 왕국의 라나발로나 1세 여왕 때 설계되었으나, 실제 건축은 1867년 라나발로나 2세 때 완공되었다.
외부 벽은 돌로 이뤄졌으나 지붕과 인테리어는 나무로 지어졌는데, 지난 화재 때 나무로 된 내부 인테리어와 지붕이 모두 불에 탔다. 나는 왕궁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입구에서 왕궁 안을 먼발치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왕궁에는 여왕의 궁전과 옛날 ‘왕의 궁전’을 본 뜬 오두막집 형태의 왕궁 모형, 왕의 무덤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는 지난 1885년 타나를 공격했을 때 로바에 있던 왕과 여왕의 시신을 파내 멋대로 옮겨 원성을 샀다. 그 후 지금은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우리나라도 구한말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1866년 통상요구를 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남의 조상을 파헤치는 서양 놈들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금수만도 못한 놈들이니 도저히 상종할 수 없다’는 민심을 얻고 쇄국정책의 명분을 얻게 된다. 유럽인들은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행위가 당시 동양인들에게는 얼마나 불경스런 짓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친교나 외교관계에서도 커다란 후유증을 낳게 된다.
내가 갔을 때 왕궁 안에서는 불에 탄 오른쪽 건물에 공사용 철망을 씌우고 건축용 빨간색 크레인을 높이 설치해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재미난 것은 로바 입구의 정문에 세워진 조각품이다. 왕궁을 지키는 조각품인데 하나는 군사력을 상징하는 독수리상이고, 다른 하나는 할례와 고결함을 상징하는 남근상이다. 남근상은 할례를 한 생김새와 너무나 비슷하게 귀두를 드러내는 모양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포경수술을 받은 남근은 청결함의 상징으로 꼽았던 것이다. 로바에 살았던 세 여왕의 기괴한 이야기는 바로 아래 안다피바라트라 박물관과 교회인 앙파마리나나 교회(Église d'Ampamarinana)로 이어진다.
여행객이 없어 무료한 가이드들
철제 입구문 밖에서 왕궁을 구경하고 있는데, 입구 옆에서 앉아 있던 젊은 남자 대여섯 명 중 한 명이 다가와 안내를 자처한다. 다른 젊은이들은 여행객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멍하니 서 있고, 다른 이는 앉아서 따분하게 땅을 쳐다보고 있고, 어떤 이는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행객이 많지 않으니 이들이 할 일이 거의 없다. 더욱이 왕궁이 공사 중이라 안내자를 붙이는 여행객이 거의 없다. 그냥 대문을 통해 왕궁을 겉에서 보고 돌아갈 뿐이다.
젊은이는 가이드 자격증을 보여주면서 자신은 공식 안내자라고 강조한다. 젊은 안내자는 왕궁이 불타기 전의 사진과 불타는 모습의 사진을 비교해 붙인 사진첩을 보여준다. 정말로 화재 당시의 사진을 보니 내부가 완전히 불에 타버리는 장면이다. 안내자는 “왕궁 안으로는 들어갈 수는 없지만, 뒤쪽으로 한 바퀴 돌면서 전체의 모양을 볼 수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또 다른 젊은이가 같이 안내하겠다며 따라 붙었다. 내가 “한 명이면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돈은 안 주어도 괜찮으니 둘이서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말은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안내를 받아놓고 한 사람에게만 돈을 줄 수가 있나, 양심이 있는데. 오죽 했으면 두 사람이 안내하겠다고 붙겠느냐는 생각이 미치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래서 두 명의 젊은 안내자가 양 옆으로 나를 호위하듯이 안내를 하게 되었다.
로바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니 판자촌 같이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영락없는 달동네 판자촌이다. 달동네 판자촌의 윗길을 사이에 두고 바로 위에는 잘사는 고급주택들이 나란히 있다. 최고급 주택과 빈민층이 섞여 있다. 타나의 특징은 고급주택과 허름한 판자촌이 길 하나를 두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문에서 반대쪽 뒤로 돌아가니 로바의 전체 외형이 나타난다. 네모난 돌 왕궁이다. 정문 쪽에서 보이지 않던 꼭대기에 피뢰침이 박힌 돌기둥 탑이 뒤에서는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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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다가스카르 체스를 즐기는 타나 시내 노인들 |
ⓒ 김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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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조각의 모양으로 말 역할을 하는 마다가스카르 체스
로바 뒤쪽의 허름한 뒷골목 길에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빨간색 벽돌집에 “메신저, 라디오 복음주의(Les Messagers Radio Evangelique). 전화번호 22-344-95”라고 프랑스어로 쓴 작은 간판 아래서 한 젊은이가 서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청바지에 빨간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는 멋진 폼으로 기타를 치고,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와 흰 면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은 젊은 여자가 재미있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기타 소리를 뒤로 하고 옆으로 돌아 나오자 구멍가게가 나왔다. 구멍가게 옆에 돌 의자에 나이든 노인들이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한 노인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고, 다른 노인은 야구모자를 뒤로 젖힌 채 장기놀이에 빠져있었다. 두 명의 노인은 훈수를 두려는 듯 옆에서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 우리 장기 같이 나무에 차와 포 등의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표시도 없는 돌조각을 가지고 종이로 만든 장기판 위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 안내자가 “마다가스카르 체스”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돌조각의 모양이 네모난 것과 세모난 것, 뾰족한 것 등으로 다르다. 돌 모양을 가지고 장기의 짝인 말 역할을 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장기를 두는 모습은 거리곳곳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구멍가게에는 중년의 여성 두 명이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며 수다를 떨고 있다.
로바 뒤편의 골목길은 바닥이 돌길이어서 운치가 있다. 돌 아스팔트에 사람과 차가 지나다니다 보니 미끌미끌 한 것이 마치 기름을 뿌려 놓은 듯하다. 한 바퀴를 돌아 로바 정문으로 돌아오니 여전히 젊은 가이드 4명은 손님을 찾지 못해 따분하게 서 있었다.
엽기적이고 무기력한 여왕의 역사를 보여주는 마다가스카르 박물관
로바 정문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마다가스카르 역사를 짚어보기로 했다. 로바 근처에 왕궁과 박물관, 유적지 등 마다가스카르의 역사가 모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로바 정문 바로 아래 내리막길의 오른쪽 벽에는 옛날 마다가스카르의 왕과 왕비가 행차하는 모습과 프랑스 식민지 총독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판이 붙어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역사를 조각 작품을 통해 압축해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거리의 벽화 같다.
그 밑으로 옛날 법원이 있는데, 안내자가 영어로 “트리뷰널(Tribunal. 법원)"이라며 자신의 목을 손으로 자르는 모습을 흉내 낸다. 그 아래로 안다피바라트라 박물관이 있다. 옛날 메리나 왕국의 총리 관저로 쓰던 곳인데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로크 양식의 3층짜리 박물관 입구 앞에는 “1872년 프랑스 건축가인 풀(Pool)이 총리 관저로 지은 것”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총리 관저의 주인공이었던 ‘라이니라이아리보니’라는 총리는 정말 베일에 싸인 의문의 인물이다. 왕을 죽인 뒤 총리에 올라 왕의 뒤를 이은 세 명의 여왕과 잇따라 결혼해 권력을 좌지우지 했던 사람이다. 세계 역사상 잇따른 세 명의 여왕과 결혼한 사람은 유일할 것이다. 옛날 왕의 초상화와 금관,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고, 박물관 뒤편으로는 마다가스카르의 대표적 여섯 부족의 전통가옥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직원이 프랑스어 밖에 못하고 영어를 못한다. 그러나 박물관의 전시물에는 토착어인 말라가시어와 프랑스어, 영어로 각각 설명을 해놓았다. 옛날 왕궁에서 사용하던 재미난 물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왕관과 금 의자, 나무 술병과 꿀통, 도자기는 기본이고, 구리와 유리제품, 보석이 박힌 방패와 목걸이, 5개의 악어 이빨이 있는 장식품, 벨트, 주교가 종교의식 때 머리에 쓰는 관, 등에 큰 혹이 있는 혹소 뿔나팔(Zebu Horn), 나라의 상징인 독수리상, 긴 장총, 팔찌 등의 장식품이 있다.
역대 왕들의 의상과 신발, 권총도 있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폭군 여왕’ 라나발로나 1세에게 선물한 1m 크기의 양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와 빅토리아 여왕이 라다마 2세에게 1862년 선물한 대형 성경책도 눈길을 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 메리나 왕국의 전성기 때에 영국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선물들이다. 왕자들이 포경 수술을 하는 동안 가톨릭 사제들이 입었던 ‘베탈리(Betaly)’라는 장신구도 전시되어 있어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끄는 것은 19세기 이후 프랑스 식민지 사이의 역대 메리나 왕들의 초상화이다. 마다가스카르 근대사의 영광과 식민지로의 몰락의 과정이 초상화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메리나 왕국은 성군으로 꼽히는 라다마 1세(재위 1810~1828)에 이어 왕비인 ‘폭군 여왕’ 라나발로나 1세(1828~1861), 그녀의 아들 라다마 2세(1861~1863), 그리고 잇따른 세 명의 ‘허수아비’ 여왕인 라다마 2세의 왕비인 여왕 라소아헤리나(1863~1868)와 또 다른 왕비인 여왕 라나발로나 2세(1868~1883), 그리고 마지막 여왕인 왕족출신의 라나발로나 3세(1883~1897)로 이어진다.
박물관 중앙의 오른쪽에는 악명 높은 ‘폭군 여왕 ‘라나바로나 1세 여왕’ 초상화가 있다. 독수리가 있는 왕관을 쓰고 자주색 옷에 흰 손수건을 왼손에 쥐고 있는 모습이다. 약간 뚱뚱해 보이는 게 표독스런 인상이다. 라다마 2세를 암살하고 ‘허수아비’ 여왕 3명과 결혼해 사실상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총리 라이니라이아리보니(재임 1863~95)의 초상화도 빠질 수 없다는 듯이 여왕들 옆에 전시되어 있었다. 작은 키에 야무진 모습으로 긴 검은 구두에 왼쪽에 지팡이를 짚고 여러 개의 훈장을 달았다.
마지막 여왕인 라나발로나 3세는 역대 여왕들이 초상화인데 반해, 얼굴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모습만으로도 어린 티가 풍겨 나온다. 무기력한 허수아비 여왕을 거치면서 마다가스카르는 1896년 프랑스의 식민지로 나라를 잃고, 마지막 여왕 라나발로나 3세는 레위니옹 섬을 거쳐 알제리로 유배되었다가 죽는다. 무기력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나라는 망하고 고통은 민중이 떠안게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7년 프랑스에 빼앗긴 마다가스카르를 되찾기 위한 민중 봉기에서 8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제국주의의 속성을 날카롭게 지적한 120여 년 전의 우리나라 신문
마다가스카르의 식민지배와 관련해 120여 년 전에 재미난 우리나라 신문 칼럼이 있다. 조선 말 박문국에서 발행했던 정부의 관보였던 <한성주보>는 1886년 3월 8일자 ‘논천하시국’이란 제목의 논설에서 당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해 우려하면서 마다가스카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근래 들리는 바에 의하면, 프랑스인이 마도(마다가스카르)에 밀사를 보내어 그곳의 반도(반란무리)들과 조약을 체결하기를 ‘그대들이 뜻을 얻어 성공하면 땅을 분할하여 프랑스에 주기로 한다’고 하였으나, 그 반도들은 끝내 성공을 하지 못한 채 복주(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되고 말았다 한다. 프랑스인이 이 조약을 들고 나와서 마다가스카르 정부에 그 약속을 지키도록 촉구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이를 빙자해 전쟁을 도발, 마다가스카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드디어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스페인(필리핀 루손 섬 침략 의미)과 프랑스가 주모(어떤 일을 도모하는 계책이나 책략)를 마음대로 부려 불의를 행한 짓이 참으로 너무도 심했다.”
유럽 제국주의의 책략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성주보>는 당시 1년 전인 1885년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는 사실과 약육강식의 국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성주보>가 인용하는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에 대한 스페인의 사례는 놀랄 정도로 날카롭다.
“전에 서반아(스페인)가 여송(루손)에 사신을 보내어 소가죽 일장(3m)만큼 크기의 땅을 요청하면서 집 한 채를 지으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왕은 이를 허락했다. 그랬더니, 서양인들이 소가죽을 찢어 실처럼 가늘게 만든 다음 이를 잇대서 이으니 수만 척(1척=30cm)의 길이가 되었다. 이것으로 빙 둘러 재어 일방을 점검하고 나서는 약속대로 하였다고 했다... 이리하여 서양인들이 그 한 지방에다 집을 짓고 군사를 집결시켰고, 끝내는 왕성을 습격하여 왕을 포로로 사로잡고 그 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영원히 그들의 속현으로 만들고 말았다.”
소가죽을 찢어 길이를 늘이는 등 조약의 문구를 교묘히 악용하는 ’제국주의의 교활함‘을 짚어내고 있다. 신문은 미국에 대해서도 “미리견(미국) 또한 유럽 사람들이 침노해 들어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나서 세운 나라이다”며 “그곳의 원주민들은 산골짝 암벽 사이에서 근근히 종족을 보전해 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신문은 나아가 ‘유독 아시아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뿐인데, 동양 각국의 위정자들은 의당 신중히 살펴서 사전에 방지하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유럽 제국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그런데 20여년 후 정작 조선 자신이 유럽 제국주의가 아닌 일본의 제국주의에 나라를 잃어버리는 운명을 왜 몰랐던 것일까.
오른쪽 작은 전시공간은 전통문화관인데, 일반인들의 생활모습과 의복,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장례를 지내는 장면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 시신을 '람바(Lamba)'라는 하얀 천으로 감싼 뒤 상여에 넣고 옮겨 묻는 장면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장례문화는 조상을 섬기는 아시아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왕들의 초상화 옆에도 왕이 죽을 때 시신을 덮는 비단천인 수의가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장례문화는 아시아적 전통이고, 소 숭배는 아프리카적 뿌리이고, 운명론은 이슬람 세계관에서 나왔다. 마다가스카르는 인종적으로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의 문명이 얽히고설키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문화의 다양성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기독교도를 낭떠러지에서 밀어뜨려 숨지게 한 장소에 세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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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들이 숨진 장소에 세워진 앙파마리나나 교회 |
ⓒ 김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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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건너편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폭군 여왕’인 라나발로나 1세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밀어뜨려 숨지게 한 절벽이 있다.
라다마 1세(재위 1810~1828) 때 영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으나 그 뒤를 이은 왕비 라나발로나 1세는 외교관계를 중단하고 기독교를 불법으로 규정한 뒤 박해하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 서니 수백m 아래쪽으로 낭떠러지이고,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숨진 기독교 신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절벽 위에 앙파마리나나 교회(Église d'Ampamarinana)가 세워져 있다.
교회 입구 팻말에는 프랑스어와 토착어, 영어 순으로 “1849년 절벽에서 던져 죽은 14명의 기독교 순교자를 기리기 위하여 1874년 바로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라고 쓰여 있었다.
폭군 여왕의 잔혹한 행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신하들을 죽이는데, 톱으로 신체를 반으로 자르거나 팔다리를 절단하고, 자루에 사람을 넣고 꿰매어 서서히 질식사시키고, 성도착증으로 수많은 자신의 연인들도 차례로 죽였다고 한다.
그녀의 집권 33년 동안 전체인구가 4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이니 얼마나 살인을 즐겼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지금도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악녀의 대명사로 불린다. 젊어지기 위해 처녀의 피로 목욕을 즐긴 16세기말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의 백작 부인이었던 에르체베트 바토리, 수많은 가톨릭교도와 신교도들을 죽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1세, 역시 무차별로 정적을 살해한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와 함께 세계 역사상 악녀의 대열 맨 앞에 있다.
교회를 나오자 왼쪽에 바나나 나무가 우거진 옆에 공동 빨래터가 있다. 10여명의 여자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비탈길을 걸어서 내려오는데, 골목길이 참 예쁘다. 타나는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언덕 위의 높은 지대에 있는 지역은 ‘오트-빌(프랑스어로 높은 마을)’, 낮은 평지에 있는 지역은 ‘바스-빌(낮은 마을)’이라고 부른다. 로바와 박물관 등은 오트-빌 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고, 기차역이나 재래시장, 아노지 호수 등은 바스-빌 지역에 있다.
나는 지금 오트-빌에서 바스-빌로 내려가고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전통 집들이 아름답다. 집이 우선 빨간 벽돌집으로 좁지만 높고 올라가 있다. 삼각형의 가파른 지붕과 작은 창문, 야외 베란다와 베란다를 지탱하는 벽돌 기둥이 특이하다. 해발고도 1400m의 고원지대에 살고 있어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좁고 높으면서도 두꺼운 벽돌을 사용해 집을 지었다. 집의 창문은 모두 북동쪽으로 나 있는데, 자신들의 조상이 인도네시아에서 왔기 때문이다. 동양적 정서가 집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통 집들 사이로 고불고불한 내리막길,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 길게 뻗어가다 왼쪽으로 굽어진다. 오트-빌에는 이런 골목길이 많고, 야생 선인장이 붉은 꽃을 피우고, 이웃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한다. 어찌 보면 탄자니아 잔지바르의 옛 도시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잔지바르의 옛 도시와 신도시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골목길을 걸을 때면 낙후된 도시라는 느낌보다는 사람의 정이 느껴진다. 골목길이 없는 마을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도시에서 골목길은 운치를 주고, 재래시장은 사람냄새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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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노지 호수 쪽에서 바라본 대통령 집무실 |
ⓒ 김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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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원조로 지은 대통령 집무실
평지인 바스-빌로 내려왔다. 눈앞에 아노지 호수가 보이고, 옆으로는 커다란 담에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철조망이 쳐진 담을 따라 걸어가는데, 총을 든 군인들이 건너편 길로 가라고 손짓한다. 길에는 노란색 팻말로 “치 아조 알레하(TSY AZO ALEHA)”라고 쓰여 있다. 짐작으로 알 수 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역시 “갈 수 없는 방향”이라는 뜻의 말라가시어다. 수도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고,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곳은 대통령 집무실뿐이다. 우리나라 청와대와 같은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이다. 대통령 집무실은 한때 돈독했던 북한의 원조로 지어진 건물이다.
현 대통령은 요구르트 사업으로 성공한 이른바 ‘시이오(CEO) 대통령’인 마르크 라발로마나나다. 마다가스카르 시장을 하다 지난 2002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두 번째 임기를 하고 있다. 마다가스카에서 대통령은 5년 임기에 두 번까지 가능한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만들 정당의 이름이다. ‘티아이엠(TIM.Tiako I Madagasikara)’이라는 정당인데, ‘나는 마다가스카르를 사랑한다(아이 러브 마다가스카르)’는 뜻이다. 정말 정당 이름 하나 멋지게 잘 지었다.
마다가스카르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다른 아프리카나 제3세계가 겪었던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뒤 독재와 군사쿠데타, 대통령 암살, 사회주의 정권, 대통령 탄핵, 민주화 시위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사회주의 정권을 제외하면 우리나라가 걸어온 길과 너무나 비슷하다. 젊은 날을 민주화시기에 살아온 우리 세대로서는 남 일 같지 않다. 제 3세계국가의 민주화 과정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다시 높은 언덕길로 올라가면서 보니 대통령 집무실 안의 운동장에서 군인들이 족구를 하기도 하고, 높은 원두막 같은 경비초소에서 군인 2명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언덕 중간쯤에 “라이니하로(Rainiharo) 총리와 그 자손들의 무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공원이 보인다. 그리스 로마 신전의 기둥처럼 세운 흰색의 4각형 건물 아래 무덤이 있다.
라이니하로는 ‘폭군 여왕’이 즉위 한 뒤 그녀와 결혼해 총리(재임 1833~1852)를 역임한 인물로, 그의 두 아들인 라이니보니나히트리니오니(1852~1864. 여왕 라소아헤리나와 결혼)와 라이니라이아리보니(1864~1895. 형의 부인이었던 라소아헤리나 여왕 등 허수아비 세 여왕과 결혼)도 잇따라 여왕과 결혼해 총리를 맡았다. 여왕과 결혼해 대를 이어 총리를 맡은 집안이다. ‘폭군 여왕’의 연인 중 한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엔지니어 장 라보르드(Jean Laborde)가 1846년에 묘지공원을 조성했다는 설명이 있다.
라이니하로 가족의 무덤은 마을 사람들의 놀이터이자 휴식 공원이 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무덤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 젊은 연인끼리 나무 아래서 손을 어루만지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어떤 사람들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고, 젊은 여자 두 명은 레게 머리 모양으로 서로의 머리를 따주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재래시장
최종 목적지로 아노지 호수만을 정하고, 가는 길은 뚜렷한 방향을 정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타나 시내는 워낙 길이 복잡하고 혼잡하다. 더욱이 거리의 표시판이 없고 가끔 있어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으니 방향감각을 잡을 수가 없다. 헤매다 보니 재래시장이 나왔다. 나중에 보니 라침바 거리와 철길 사이의 재래시장이다. 길 양쪽으로 옷이며 철물상, 과일상, 노점상 등이 북적북적 거리며 물건을 팔고 있다. 시장통이 500m가 넘는 것 같다. 사람 체취가 곳곳에서 풍겨 나온다. 다양한 물건과 수많은 사람들에 채이다 보니 여행객은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지 어리둥절하다.
도로의 표지판은 혼자 여행하는 배낭여행객에게는 마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의 등대와 같은 존재이다. 한참을 걸어서야 간신히 시장통을 벗어날 수 있었다. 철길이 보이고, 안드리안자카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강물이 흐르고 강물 옆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철길이 놓여 있다. 강물은 타나 시내를 관통하는 이코파 강으로 마다가스카르 최대의 강인 베치보카 강과 합류해 서쪽의 마하장가를 거쳐 인도양으로 흘러간다. 철길은 옛날에 놓인 ‘쁘띠 비테스(Petit Vitesse)’라고 불리는데, 프랑스어로 속도가 느린 ‘완속 철도’이다.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다시 열차가 달리는 날이 있을 것이다.
쁘티 비테스는 이코파 강을 따라 놓여져 있었다. 이코파 강의 명물은 다름 아닌 빨래터이다. 강 옆에는 빨랫감을 비벼 때를 빼도록 만든 대형 시멘트 공동 빨래터가 있는데, 100여명이 넘는 여자들이 몰려나와 빨래를 한 뒤 빨랫줄에 널기도 하고, 어떤 여자들은 강물에서 직접 빨래를 하고 철길과 강둑사이의 맨 땅에 널기도 한다. 타나 시내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이 같은 공동 빨래터가 마을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강의 다리를 건너자마자 작은 도로변에 세워진, 오래된 프랑스의 푸조 승용차의 뒤 범퍼에 걸터 앉아 네다섯 살 정도의 어린이 두 명이 두 줄짜리 나무로 된 기타 같은 현악기를 들고 연주하면서 놀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멋진 자세를 취한다. 지미 핸드릭스의 폼 같기도 하고, 에릭 클랩튼 같기도 하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갈 때 가지고 간 선물용 한국 전통 신발과 북을 사진 모델 값으로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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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나 시내 호치민 광장의 호치민 동상 |
ⓒ 김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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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광장이 타나 시내에 있는 이유
빙 둘러 다시 아래쪽 이코파 강을 건너 철길을 따라 시내쪽으로 들어가니 호치민 광장이 나왔다. 호치민의 구리상도 보인다. 1976년 대통령에 취임한 라치라카는 북한을 방문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중국, 베트남, 북한과의 돈독한 관계를 가졌다. 호치민 광장은 바로 사회주의 정책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1930년대 식민지 해방운동을 이끌었던 교사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장 랄라이몬고가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할 때 젊은 호치민과 같은 방을 썼던 동지였다.
내가 국회에 있을 당시 함께 일했던 ‘탈북자(새터민)’ 출신 보좌진은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마다가스카르라는 아프리카 나라에 ‘주체사상 연구소’가 설립됐다는 사실을 조선중앙텔레비전과 노동신문 등이 대대적으로 선전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과 마다가스카르의 돈독했던 관계를 알 수 있는 한 단면이다.
호치민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다 식당에서 쌀밥과 닭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가장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쌀밥과 닭고기이다. 바로 옆으로 높은 힐튼 호텔이 보이고 건너편으로 아노지 호수가 보인다.
어릴 적 ‘이발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 타나의 거리 이발소
호숫가 옆에는 칸막이처럼 나무로 된 30여개의 부스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호기심이 발동해 무엇을 하는 곳인가 궁금해 다가보니 머리를 깎는 거리의 이발소이다. 얼굴이 둥근 인상 좋은 젊은 이발사가 나를 보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가위모양을 만들어 머리 깎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머리를 깎으러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나는 젊은 이발사의 나무 칸막이로 들어갔다. 아프리카 여행 오기 전 스포츠형 머리로 짧게 깎았지만 두 달이 넘도록 머리를 깎지 않아 덥수룩하게 머리가 자랐다. 머리가 귀에 닿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나는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
거리의 이발소에 들어가니 0.5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다. 나무의자 한 개에 손님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앉고 이발사는 서서 머리를 깎으니 공간이 꽉 찼다. 이발소나 머리 깎는 과정이 천생 옛날 우리 시골 이발소다. 머리도 감기지 않고 모자를 써서 짓눌린 머리 그대로 깎는다. 머리 모양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는다. 오로지 군인머리처럼 짧게 자르는 상고머리 스타일만 존재한다. 머리 감는 물도 없고, 그럴 공간도 없다. 머리 깎는 기계로 뒷머리부터 밀어버린다. 머리모양은 아예 묻지 않으니 이발사 마음 대로이다. 내 머리에 고속도로 뚫리듯 뭉텅뭉텅 머리카락이 잘려 땅에 떨어진다.
다행인 것은 머리 깎는 기계가 성능이 좋아 머리가 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시골에서 오래된 기계로 머리를 깎을 때면 절반은 기계에 씹혀 통째로 머리가 뽑혀 나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마치 뜨거운 물에 담근 돼지의 털을 한 움큼씩 뽑듯이 머리털이 기계에 씹혀 뽑혀진다. 시골 이발소에 갈 때면 도시의 아이들이 치과에 갈 때처럼 정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히는 것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어릴 적 시골에서의 ‘이발의 추억’은 정말 경기도 화성의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오싹하다.
왼손에 머리빗을 들고 오른손에 가위를 잡은 젊은 이발사는 내 머리카락을 쓱싹 쓱싹 잘라버린다. 가위를 놀리는 솜씨가 만만치가 않다. 머리를 깎지 않을 때도 이발사의 가위는 쉬지 않고 쓱싹 쓱싹하는 소리를 내며 놀린다. 마치 엿장수가 엿치기 전에 가위를 가지고 “찰칵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가위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머리빗 위로 머리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이발사의 빠른 가위놀림에 나머지 머리도 뭉텅뭉텅 잘려나간다. 머리가 갑자기 시원하면서 텅 빈 느낌이 든다. 머리를 모두 자른 것이다.
비누거품을 귀와 뒷머리 부분에 손으로 바른 뒤, 이발소 면도칼로 솜털과 긴 털을 차례로 잘라낸다. 면도차례이다. 귀 뒷부분을 일자로 잘라낸 뒤, 뒷부분 머리를 따라 동그랗게 칼로 잘라내는 느낌이 등쌀이 옴짝하다. 시골 이발소에서 무딘 면도칼을 가죽벨트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날을 간 뒤, 얼굴과 뒷머리에 댈 때면 정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른다.
날이 제대로 갈리지 않은 면도칼로 면도를 하면 머리털이 제대로 깎이지 않고, 너무 날이 센 칼로 밀면 아차 하는 순간 얼굴에 날카로운 면도날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상처가 생긴다. 면도하는 순간은 가장 공포의 시간이다. 면도를 끝낸 뒤 휴지로 거품을 닦아내고 먼지떨이로 잘린 머리카락을 얼굴과 옷에서 털어낸다.
이발과 면도가 5분도 채 안 걸리는 초고속 이발이다. 이발사는 마치 의기양양한 듯 내 머리를 자른 뒤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작은 손거울을 얼굴에 들이대며 보라고 한다.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미 이발사 마음 대로 깎아 놓고 손님에게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랴. 거울을 보니 그 긴 머리는 다 어디로 가고, 논산훈련소에 들어가는 신참 훈련병의 머리처럼 변했다. 갑자기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떠올랐다. “짧게 잘린 내 머리가 처음에는 우습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굳어진다 마음까지….”
내가 워낙 짧은 머리를 좋아하고 머리모양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어서 “멋지다”고 인사하자 이발사도 좋아한다. 2000아리아리(약 1000원)를 줬다. 왼손을 허리에 대고 멋진 자세를 취하는 이발사를 놓칠 수 없었다. 기념으로 젊은 이발사의 모습을 찰칵 사진 한 장으로 찍었다. 거리의 이발소는 1,2,3 번으로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맨 앞쪽의 호수 쪽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았다. 모자를 쓰는데도 왠지 머리 부분이 허전하다. 한꺼번에 많은 머리털이 잘려나가다 보니 그렇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닮은 아노지 호수의 무명용사탑
호숫가 길을 따라 걸으니 칼 마르크스 거리 광장이 나온다. 광장 가운데는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가 죽은 지 100주년을 기념해 1993년 세운 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광장 옆에는 또 여왕의 궁전인 로바를 설계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Ingahy Kama. 1800-1875)의 하얀 얼굴 돌상이 로바를 향하여 세워져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은 말라가시어로 ‘인가히 카마(Ingahy Kama)’로 알려져 있다.
아침마다 길거리 꽃시장이 열리는 곳을 지나 호수 중앙에 세워진 '무명용사탑(Monument aux Morts)'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에서 호수 중앙까지는 폭 3m, 100m 길이의 제방이 만들어져 있다.
호수 중앙에는 30m 높이의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애초 프랑스가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했다 희생된 프랑스와 마다가스카르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리게 한다. 똑 같은 모양의 여신상이 기념탑 위에 세워져 있는데, 오른손에 들고 있는 상징만 다를 뿐이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자유를 상징하는 횃불을 들고 있는데 반해, 아노지 호수의 기념탑에는 애도와 평화를 상징하는 둥근 화환을 들고 있다. 아노지 호수의 여신상 뒤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천사의 느낌을 더 강하게 하는 차이도 있지만. 모두 프랑스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비슷한 의미와 느낌을 준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 1886년 선물했다. 무명용사 기념탑으로 들어가는 데는 5000아리아리를 내야 한다. 1층 계단 입구에는 ‘프랑스 군인과 프랑스를 위해 죽어간 마다가스카르인에게’라는 문구가 써 있다. 무명용사 기념탑 건립의 취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계단 2층과 3층에는 각각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글귀가 쓰여 있다.
탑 주변에 올라가니 시원한 바람이 호수 위를 타고 올라오고, 하얀 해오라기(에그레트.Egret) 몇 마리가 호숫가 얕은 곳에 내려와 먹이를 잡고 있다. 바깥벽을 돌아보니 벽에는 모론다바와 툴레아, 노지베 등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도시 이름들이 빙 둘러 쓰여 있다. 기념탑과 호수사이를 둘러싸고 있는 길에는 젊은 남녀들의 연애장소이다. 젊은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연인도 있고, 남녀가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사랑을 확인하는 커플도 보인다.
내가 출발했던 언덕 위의 로바가 직선 코스로 내 시선에 빨려 들어온다. 언덕 위 로바에서 내려다보면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아노지 호수라면, 아노지 호수에서 올려다봐서 가장 잘 보이는 건물이 로바다. 로바가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것이라는 것은 호수에서도 알 수 있다. 타나 시내의 오트-빌에 있는 모든 건물들은 가장 낮은 아노지 호수로 시선이 모아지게 되어 있었다.
호수에서 나와 돌아가니 오른쪽으로는 종합운동장이 보인다. 호수와 도로 사이에 자카란다 나무들이 가로수로 늘어선 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자카란다 꽃이 활짝 피는 10월에 온다면 맑은 호수 물에 비친 자카란다의 보라색 꽃이 사람들을 빨아들일 것만 같다.
숙소 3층의 베란다에서 시내를 보니 멀리 내가 걸어왔던 로바와 아노지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해가 언덕 위의 로바 뒤로 서서히 저물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타나 시내를 덮기 시작했다. 시장과 거리에서 만났던 타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프리카 중에서 가장 밝은 얼굴이다. 그들의 순수함과 친절함, 해맑은 얼굴과 환한 웃음, 너그러운 여유와 은은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녁에는 근처 식당에 갔는데, 온통 프랑스 사람들이다. 나미비아에서 독일 사람을 만나듯,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프랑스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두 명의 젊은 여자가 다가와 “헤이, 무슈(미스터)”라고 친절하게 인사한다. 나를 알 턱이 없는데 밤에 친절하게 인사하는 여자들은 '거리의 여자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