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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긴 글입니다...거의 11회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것을 간단히 정리하여 하나의 페이지에 올립니다.
대충 읽어보고 저도 자세히 읽고 있는 중인데..여러가지 면에서 아주 섬세하게 자신의 지난 일들을 옆에서 바라보듯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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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15일 금요일 오후 1시 30분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미국으로. 그것도 유학생의 신분으로 이 비행기를 타게 된 거다.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 유학생이라는 이름은 남들에게는 스산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정말 오랫동안 계획하고 갈망하던 길이다.
기내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동안 유학을 결심하고, 계획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지난 시간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9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120시간 일정연수를 받을 때였다. 지금은 그 교수님의 이름이나 강좌명도 기억나지 않지만 교수님께서 EFL/ESL,TEFL/TESL의 텀(term) 정도의 차이점을 설명하셨던 것 같다.
교수님은 한국의 영어교육에 제대로 된 이론적 배경이나 연구가 부족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쪽 방면은 황무지와 같으니 현장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는 격려와 충고까지 덧붙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그것은 언젠가는 꼭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처럼 교사 생활 내내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고 동시에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굳이 5차, 6차, 7차 교육과정이 바뀔 때가 아니더라도 영어 교사들은 한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을 것이다. 영어로 수업하는 교육은 줄기차게 늘 강조되어왔고, 기존의 문법 번역위주의 주입식 교육 방법은 엄청난 비난을 받아왔다. 그 한 가운데 영어 교사들은 한국의 피폐된 영어 교육의 책임자로 늘 죄인처럼 서 있어야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들께서는 묘한 패배감으로 뒷짐을 지어야 했고 토익 세대·해외 연수 세대인 젊은 선생님들은 현장에서 부딪치는 괴리감 속에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그 양쪽 어느 그룹에도 속할 수 없는 어정쩡한 세대였다.
새로 무엇을 시도하기에는 벅찼고 숨이 가빴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의 가사일로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만 일단 학교로 돌아가면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싫다는 내부의 절규가 마음을 짓눌러왔다.
3년 프로젝트
1997년도에 그동안 근무하던 학교에서 현재의 학교(부평여고)로 전근을 오게 되었고 이 학교에서 첫 월급을 타자마자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은행에 가서 내 이름으로 3년 만기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내 프로젝트의 첫 단추를 꿴 것이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는 서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엇을 시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에 대한 결단의 한 증거물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가. 가정을 갖고 있는 여자의 입장에서 목돈을 자기 개인의 용도로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해 뉴욕 출신의 원어민 교사가 에픽(EPIK: English Program in Korea) 일환으로 우리 학교에 배치되었고 그와 관련된 업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그 원어민 교사의 이름은 "메기"였는데 이름이 우리나라 민물고기 메기하고 발음이 비슷해서 우리 선생님들이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네 사람이 쓰는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한국인 교사 세 명과 메기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메기는 뉴욕주립대에서 TESOL을 전공한 전형적인 깍쟁이 뉴요커였는데 초반에는 열정적으로 깔끔하게 수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의 수업을 참관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자극제가 되었다. 공문에 의하면 코 티칭(Co-teaching) 형식, 즉 한국인 교사가 주로 수업을 진행하고 원어민 교사가 보조교사로 수업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조차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업무지침이었다. 코 티칭이 제대로 되려면 영어 교사들의 영어 구사력이 거의 원어민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엄청난 시간투자를 해야했다. 그래야 1시간분의 수업이 겨우 완성될 수 있다.
게다가 메기는 1학년, 2학년을 격주로 들어가야 했고 그러다보니 한번 들어갔던 반 학생들을 다시 만나려면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적어도 학생들의 이름 정도는 숙지하면서 개인성(individual)을 중요하게 여겼던 메기는 연속성 없는 이런 식의 수업 방법을 가장 싫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의사소통 중심의 영어교육 특히, 말하기 능력 향상 배양과 현 입시제도의 경향과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영어교육 목표 사이의 갭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 무렵 한국은 불행하게도 IMF라는 경제난국에 빠지게 되었다. 점점 원어민들이 받는 월급의 액수가 환율 폭등으로 계약 당시의 절반가량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메기는 수업을 소홀히 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학교를 제 마음대로 벗어나곤 했다.
원어민 교사 "메기" 선생님
그런 그녀에게 학교의 규칙과 계약서를 충분히 이행할 것을 말했지만 나의 언어 전달 능력 부족과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차, 문화의 차이가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나는 스스로의 열등감에 괴로워했다.
"You are supposed to stay at school until 5 o"clock"(메기는 5시까지 학교에 있기로 돼 있어요) 라고 내가 말하자 메기는 이렇게 답변했다.
""Be supposed to" means I don"t have to stay at school until 5 o"clock, Right?(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 꼭 5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메기는 말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면서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장난을 하곤 했다. 순발력 있게 받아칠 수 있는 언어 전달 능력 (Oral Proficiency) 부족과 IMF라는 외적인 최악의 요소는 나로 하여금 메기에게 좋은 동료도, 이해자도, 통역자도 되지 못하게 했다.
1998년 1월 말이었던가. 007작전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한국을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렸다. 엄밀하게 말하면 계약을 위반하고 야반도주한 셈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철새와도 같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영어 교육은 우리들 자신, 우리 영어 교사들이 주도적으로 고민하면서 열정적으로 부딪칠 때 희망이 있다고 본다. 원어민 교사 메기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어쩌면 확고한 유학의 동기부여를 안기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EBS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조나단"이라는 외국인이 숙명여대 TESOL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왔다. 순간 쾌재를 불렀고 서둘러 정보를 얻어서 그 과정에 등록을 하였다 1999년, 6개월 집중적으로 하는 단기코스(Intensive Course)에 등록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가는 수요일과 토요일은 비록 몸은 고단했어도 힘든 것을 모르고 수업을 받았었다.
경기도 저 끝, 심지어 충청도에서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와서 수업을 수강하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S사대 부속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나이 지긋한 선생님은 종종 수업 시간에 코를 골면서 졸았기 때문에 옆에서 보기에 민망한 적이 많았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영어 교사들의 애환과 열정인 듯 싶어 마음이 짠했다.
이 과정이 끝나갈 무렵 내 마음에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흠뻑 영어에 노출되고 싶다. 잘 가르치고 싶다."
어느 시인의 시 제목처럼 차라리 타는 목마름이었다.
본격적인 유학준비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남편에게는 충분히 세뇌교육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아이들을 남편한테 맡기고 미국에 2~3년 정도 혼자 공부하러 나갔다 오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3학년 담임을 한해 더 해달라는 교감 선생님의 강권이 이어졌다. 그동안 생각했던 계획을 말씀드리면서 고사했지만 12월에 유학 떠나는 것을 이해해준다는 범위 내에서 고3진학 지도와 나의 유학준비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물밑에서 생각으로만 머물던 때와 그것을 입밖으로 끌어내서 누군가에게 공표하는 것은 그 무게가 본질적으로 달랐다. 필사적인 생각이 들었다. 9월로 접어들면서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토플시험, 학교선정, 입학 허가서를 받기 위한 준비 등등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유학가다
그러던 중 6개월 전에 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있다는 영어선생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선생님과 여러 가지를 전화로 상의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그 당시 딸아이는 중학교 1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3학년)을 미국에 데리고 갈 계획이 없다는 말에 상당히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선생님은 "조기 해외유학이니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을 해외로 내보내려는 상황"이라며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머물면서 거의 무료인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권유했다.
부모가 유학생인 경우(F1비자)와 주재원(J1비자)인 경우 직계자녀(각각 F2비자/J2비자)는 부모의 비자가 유효한 기간 내에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추석이 지나서야 남편과 의논한 끝에 아이들도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친정 부모님들은 내가 공부하러 미국에 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지만 남편 다음으로 가장 큰 힘이 되어주셨다. 미국으로 가는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는데도 교육청으로부터 정식 유학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12월 초까지 무진장 애를 태웠다.
비행기 티켓 날짜는 12월 15일이었는데 교육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그로부터 4일 뒤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정처리였다.
게다가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학생들과 대학입학 상담을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다. 대학 입학 결과며 졸업식 마무리를 못하고 가는 빚진 내 마음의 작은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들이 스쳤다. 걱정과 자랑스러움이 엇갈린 친정 부모님의 얼굴 표정, 마지막 짐을 마무리해서 부치는 순간까지도 스산한 본인의 마음을 열어 보일 여유가 없었던 남편, 부러움을 아끼지 않고 드러내 보이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던 새언니들, 현관까지 나와서 배웅해주던 동료 선생님들, 찬바람이 일 정도로 야멸치게 말씀을 아끼시던 교장 선생님.
내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들의 곁을 잠시나마 떠나서 이제서부터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1996년도 시교육청에서 영어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한 7주일간의 배낭여행에 따라가 본 게 전부였다. 그런 미지의 세계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두 아이를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김포공항 로비에서(지금은 국제공항이 인천 영종도로 이전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국제선, 국내선이 다 김포공항에 있었다) 아빠만을 한국에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 사실 때문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소리 없이 울던 아들 현근이는 무엇이 즐거운지 누나에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사십이 넘은 늦깎이 유학생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2000년 12월 15일 오후 8시 30분 정도면 태평양을 넘어 지구의 반 바퀴 정도 떨어져 있는 오클라호마 윌라져스 공항(Will Rogers Airport)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12시간 소요 되는 장거리 비행기 여행이었는데도 별반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예근(딸아이 이름)이와 현근(아들아이 이름)이는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종알거리고 웃음이다.
아이들의 좌석이 두 줄 건너서 앞자리 창가 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대각선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멀어 질수록 나는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고, 비행기가 날씨 때문에 흔들림이 심할 때면 잔뜩 웅크려들면서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오히려 의연했다.
한국에서 15일의 오전을 보내고 출발해서 비행기 안에서 하룻밤을 자고, 또 다시 한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15일로 다시 돌아갔으니 하루를 보너스로 얻은 느낌이다. 달라스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40분 정도였다.
초행길이나 마찬가지였고, 아이들 두 명을 혼자 데리고 가는 터라 다소 비행기 티켓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항공사를 이용했다.그 덕분으로 달라스 도착하기까지는 승무원이라든가 손님들이 거의 한국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달라스 공항에서 내린 이후부터가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승무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연거푸 묻기까지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첫 기착지인 곳에서 입국신고를 해야 하는데 입국신고를 하기 위해서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오기 전에 크게 나가는 방향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쪽은 애틀랜타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 가는 쪽이었는데 나는 제대로 목적지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내내 신경이 쓰였다. 외국 나들이가 처음이 아니였는데도 모든 것이 새롭고 얼떨떨하기만 했다.
입국신고서에서 약간의 형식적인 질문에 답하고 그대로 통과 되었다. 그러나 2001.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입국 절차는 상당히 까다로워진 것으로 알고 있다. 딸아이가 2003년도 여름 방학을 한국에서 보내고 새로 입학 할 학교의 I-20form을 갖고 출국 했는데, 입국 신고를 할 때 학교의 담당자 싸인 이 자필로 안 되어 있고 타이핑 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어쨌든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수하물 구역( Baggage Claim)의 빙빙 돌아가는 많은 비슷비슷한 짐 보따리 사이에서 초록색 리본을 단 여섯 개의 이민용 가방이 차례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부터 여기 미국 땅덩어리까지 오느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져서 형태가 일그러진 모양 사나운 그 짐 보따리들 속에는 바로 우리 세 식구가 의지하면서 앞으로 입고, 먹고 해야 할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물건들이었다.
무거운 짐들을 카터기에 옮기느라 쩔쩔매고 있는데 키가 큰 흑인 남자가 다가와서 도와준다. 어찌나 고맙던지. 짐 검사를 받기 위해서 세관 신고서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차례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앞섰다.
이런저런 옷가지들, 효자 노릇 할 거라고 하면서 남편이 노인네처럼 궁시렁거리면서 꾹꾹 다져 넣어 준 밍크 담요, 베개, 그 사이 사이에 친정아버지가 요령껏 이리저리 넣어주신 프라이팬, 접시, 밥공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먹어야 할 것이 있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친정어머니가 넣어주신 장 볶음, 김치, 미역, 김, 콩이며 잡곡 등등 이런 것들을 다 쏟아부어서 검사하면 어쩌나 싶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이틀 삼일 걸려서 꾸린 짐들을 나 혼자 다시 꾸릴 생각을 하니 정말 난감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관원은 친절했고, 여섯 덩어리 중에서 한 짐만을 대표로 집어서 집중적으로 검사를 했다. 그 가방에는 김치와 밑반찬이 들어 있었고, 아이들 운동화를 비롯해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가 주로 차지하고 있는 가방이었다. 김치는 몇 번씩 싸고 싸서 넣은 것이었는데 여전히 냄새가 스며 나왔다.
미국인 세관원이 웃으면서 한국말로 "김치……" 한다. 이렇게 해서 세관 검사를 마치고 나오니 대한항공(Korean Airline)에서 파견된 승무원이 조그마한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짐들을 오클라호마 국내선으로 모두 부치고 나니 저 쪽에서 엉덩이가 유난히도 큰 표정 없는 한 흑인 여자가 다가와서 게이트(Gate)22라고 되어 있는 쪽지를 주고 간다.
국내선 델타(Delta)로 옮겨다줄 차를 타기 위해서 아이들 두 명의 손을 꼭 잡고 한국인 승무원이 가리켜준 방향대로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부터는 완벽하게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한없이 위축되어지고 작아져만 가는 것일까.
달라스의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사이에서 휙 돌아가 있는 고가 도로는 마치 놀이동산의 청룡열차처럼 삭막하고 위협적으로 해 보였다. 12월 한겨울의 날씨는 한국 날씨 못지않게 혹독했다. 거리에는 자그마한 밴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의 차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gate 22라는 쪽지를 안내하는 흑인 여자에게 내 보이니까 9인승 정도 되어 보이는 차를 타라고 가리켰다.
혹독한 첫 신고식
아이들과 나는 달랑 그 차를 타고서 운전사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인 노부부가 올라탄다. 공부하는 아들을 만나러 오셨다는 두 분은 이런 나들이가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은 갔다고 생각할 즈음 델타(Delta)항공사에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말한 게이트 넘버(gate number)22 라고 말한 나의 발음을 잘못 들었는지 다시 확인하자 우리를 다시 태우고 조금 더 돌아가서야 내려준다.
한국의 조그마한 버스 대합실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여권과 티켓을 들고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줄은 움직여 갔고 아이들을 뒤돌아보니 조금은 지친 듯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고 절차를 밝고 있던 여자의 무표정한 모습과 느린 손놀림 속에서 뭔가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What"s wrong? What happened?"(뭐가 잘못됐습니까?)
나는 물었고, 여자는 계속 고개만 갸웃거리면서 말할 기미가 안 보인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그 여자는 계속해서 컴퓨터 좌판만을 두들기고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이런 경우 영어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왜 이렇게 적당한 말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입안에서 침이 말라가고 있었다. 분명히 티켓에는 이상이 없을 것인데,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 윗사람으로 보이는 아주 자그마한 흑인 남자가 나와서 담당자와 나에게 간략하게 설명을 한다.
오클라호마에 10년 만에 엄청난 폭설이 내려서 오클라호마로 향하는 모든 비행기가 전면 취소되어졌다는 것이었다. 달라스 공항에서 오클라호마로 부쳐졌던 짐들이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로비의 저쪽 끝 쪽에서 언제부터 계속 돌고 있었다.
어마어마 한 무게의 저 짐들과 어린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 항공사 쪽에서 손님들에게 어떤 조처를 취해 주는 것인지,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 건지 아무 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말은 더듬거리고 머리는 하얗게 비어져가고 있었다.
항공사 직원 중에서 동양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한국말을 말할 수 있는 직원이 있는지 물었다. 그 직원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눈물이 비집고 올라왔다.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었는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키가 큰 친절한 흑인 여자가 나와서 안내를 해준다.
오클라호마까지 가는 대형버스가 올 테니 그것을 타고 가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무거운 짐들을 끌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정도 내려오니 거기에는 나처럼 버스를 타고 가려는 사람들이 열명 정도 넘게 추위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동양인은 우리 세 식구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마중하러 나오기로 되어 있는 조 선생님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그런데 공중전화는 어디에 있나? 코인이 없는데 어떻게 전화를 해야 하나? 한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기본적인 생활 방법까지 다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넉넉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60세 정도의 미국인에게 나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동전이 없는지를 물었다. 자기에게는 동전이 없지만 전화를 걸 수 있는 자기 카드를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시도했으나 조 선생님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선이 잘못 된 걸까? 머리는 뒤죽박죽되기 시작했다.
그 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동양인인데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자유롭게 잘 안되고 있고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연락이 안 되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니 계속해서 "조" 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서 여기 상황을 알려줘라 그런 부탁의 전화를 해주면서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한국에서 영어 교사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온 지 20년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내가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의사전달을 못해서 도와주려는 사람이나 도움을 받으려는 나나 서로가 진땀을 빼고 있었다.
달라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거의 다섯 시 정도였으니 지금은 몇 시쯤 되었나? 저녁 먹을 시간은 한참 지난 듯싶은데…. 델타 항공사 쪽에서 제공한 햄버거와 물 그리고 사과가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아저씨가 우리가 안 되어 보이는지 하나씩 손에 들려준다.
아이들의 표정은 조금은 피곤해 보였지만 계속 밝은 모습이다. 엄마가 있는데 우리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어 하는 완벽한 믿음의 얼굴이었다. 그제서야 한국에서 만들어온 전화번호가 생각났다. 몇 개월 전 뉴욕 씨라큐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동료 선생님의 조언으로 수신자 부담으로 하면 지정된 일련의 번호와 지역번호 전화번호 순으로 누르면 어디에서든지 전화가 될 수 있는 전화를 신청했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국으로 그 긴 전화번호를 틀릴세라 꼭꼭 눌렀다. 남편은 회사에서 근무할 시간이었다. 남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눈물이 났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난후 미국에 있는 조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예기치 못한 긴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사전에 한번쯤 생각해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경험을 통해서 얻었다면 이 끔찍스러운 그날의 기억은 조금은 제몫을 하는 셈이 되는 건가.
주변은 눈이 내려서 어수선하고 질퍽거렸다. 삼사십 분 지났을까 대형버스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추운 시멘트 바닥에 정말 모양새 없이 간신히 세워 놓았던 짐들을 그 차에 어떻게 옮겨 실었는지 지금은 분명한 기억이 없다. 차는 출발을 시작했고 거리는 가로등만이 이따금씩 비추고 있었다.
주변은 점점 깊게 내린 눈 속에서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배가 고픈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차가운 햄버거를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나는 한 입을 베어 물다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고 나머지는 그대로 비닐에 싸서 가방 한 귀퉁이에 처넣었다. 길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지만 버스는 쉼 없이 가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독일 나치들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간신히 기차에 올라 탄 유태인들의 지친 얼굴에 떠오르는 한 줄기의 안도의 빛. 지금은 돌아보면 한번 씁쓸하게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나름대로 비장한 기분마저 들었었다.
화장실이 뒤쪽에 달려 있는 버스였는데, 화장실을 갔다 오다가 보니 아까 친절하게 도와주시던 그 여자 분은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뭔가 너무나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담배를 줄곧 피우면서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었다.
새벽 1시 정도쯤 되어서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윌라져스 공항에 도착했다. 그 긴 버스는 사람과 짐을 내려놓고 사라졌고, 아이들에게 짐을 맡기고 나는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다. 그러나 전화를 걸 수 있는 동전이 없는데다가 10불을 주고 산 전화카드마저 불량인지 전화가 되질 않아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예근이가 달려왔다.
“엄마 어떤 아저씨들이 와서 무조건 우리 짐을 실어가지고 어디로 가버렸어요” 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옆의 사람의 도움을 간신히 받아서 조 선생님에게 전화연락을 한 다음 급히 뛰어갔다. 지금은 어디에 가도 불편함 없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중학교 1학년, 겨우 교과서 속에서만 영어를 접했던 딸아이는 이 물건들은 우리 것이고, 엄마가 전화 통화를 끝마치자마자 금방 돌아 올 거라는 말을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짐이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상황이 악화 될수록 나의 영어 소통능력은 바닥을 헤맸고, 다리는 후들 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정한 시간이 지나도록 물건을 도로에서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그런 경우에 짐들을 한꺼번에 실어다 수하물 구역에 (Baggage Claims) 갖다 놓는 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로처럼 생긴 길을 타고 아이들과 아래로 내려 와 보니 귀퉁이에 짐 더미들이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무릎을 꿇고 소리 내어서 울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입성의 첫 관문을 넘었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부터 전화상으로만 두세 번 정도 짐 꾸리는 거며 아이들 학교문제로 의논했던 것이 인연이 됐던 조 선생님이 급기야는 새벽 1시가 넘어서 눈길을 뚫고 건장한 남학생을 대동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대학교 졸업식이라 졸업하는 한국 학생들끼리 모여서 졸업파티를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 선생님 집에 들어서니 낯선 주변의 풍경 속에서도 우리말 하는 사람이 있다 싶으니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남편이 넣어준 밍크 담요를 꺼내서 거실 바닥에 깔고 잠자리를 마련했는데, 영락없
이 피난민 생활이다.
눈을 붙이려고 하면 할수록 거실의 냉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미국의 주택은 특히 아파트는 우리나라의 온돌 문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벽면 맨 윗부분에 환기통 구멍을 통해서 따스한 바람이 돌도록 되어있다.
어쨌든 이런 미국의 난방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기담요를 한국에서 가지고 오거나 한국시장에 나가서 사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조 선생님이 파티 하는 장소로 다시 나갔기 때문에 난방을 하는 스위치 인 듯싶은 것이 벽면에 있었지만 주인이 없는 상황에 난방을 튼다는 것도 석연치 않아 세 식구가 그저 오돌 오돌 떨면서 하룻밤을 청할 수 밖에 없었다. 자는 듯 마는 듯 하면서 뒤척이다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
우선 제일 급한 것은 아파트를 구하는 문제였다. 그렇지만 아파트가 마음에 든다고 아무데나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만 학군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들도 아이들이 있는 경우에는 아이들 중심으로 살 곳을 정한다. 흑인과 히스패닉 계통의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가능하면 백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안전하다는 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를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특히 미국에 와 있는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이들 때문에 좋은 학교가 밀집해 있는 학군으로 집을 옮기거나, 아예 그쪽 방향으로 정착한다는 이야기를 볼티모어에 있는 친구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강남 지역, 목동 지역 최근에는 분당 지역하면서 돈 있는 사람들이 학군을 따지는 데 반해 미국은 학군이 인종문제와 얽힌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인종이나 빈부의 차와 상관없이 누구나 공평하고 정당한 교육적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이슈가 높아지면서 흑인의 자녀나 백인의 자녀를 분리 하지 않고(Desegregation)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이 강화 되었다. 그러자 흑인 아이들과 자기 아이들을 같이 보내고 싶지 않은 백인들은 외곽으로 빠져나가서 새로운 타운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러자 흑인들은 도시에 남게 되면서(Inner city) 또 다른 차원의 불균형과 불평등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주로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도심지 주변의 학교 상황은 열악하고 학교 분위기도 썩 좋지 않은 반면에 외곽으로 나갈수록 사람들 사는 수준정도가 높다. 거기다 지역 사람들이 내는 세금(Tax)으로 주로 그 지역 학교들이 운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고소득자 주거지역에 있는 학교가 상대적으로 윤택할 수밖에 없다.
법과 실제 사람들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인종에 관한 평등과 형평성의 원리는 이처럼 달랐던 모양이다.
1년 전에 딸 두 명을 데리고 와서 공부하고 있다는 그 한국 사람이 사는 마을로 일단 가서 아파트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다닐 학교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지만 아이들이 다니기에는 좋은 학교가 있다는 지역이었다. 여기는 토네이도로 유명한 지역이라 아파트의 높이는 이층, 높아봤자 삼층 정도인데 지붕 모양새가 넓적하게 된 마름모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이집트의 분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독특한 형태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아파트의 사무실을 찾아 갔다. 미국 아파트의 사무실은 우리 한국과는 달리 상당히 요모조모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카페와도 같은 분위기가 났다. 아파트를 계약하는 절차나 방법이 지역이나 아파트마다 다소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크리스마스 특별 할인가 시즌이니 뭐니 해서 예치금을 받지 않고 (대부분은 예치금(Deposit)을 어느 정도 내야 되는데 이사 나갈 때 파손된 곳이 있거나 원래의 상태로 안 되어 있으면 예치금에서 일부공제하고 돌려준다) 전체적인 계약 기간은 일년으로 하되 매달 초 월세를 내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다.
우리나라 개념의 전세 혹은 아파트 한 채를 개인의 소유로 산다든가 하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개념이다. 보통 우리가 한국에서 아파트라고 말하는 고층 아파트는 미국에서 콘도미니엄이라고 부르지 아파트라고는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뉴욕이나 시카고와도 같은 대도시 근처에 있는 콘도미니엄은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서 한국의 재벌 2세가 살고 갔다느니 하는 풍문이 돌 정도라고 했다.
주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나처럼 일시적으로 머물다 떠날 사람들, 정원이나 집을 관리하면서 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 주택을 구입하기에는 생활 정도가 낮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콘도미니엄은 일단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아파트의 수준도 주(State)마다,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라 딱히 이렇게 획일적으로 말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계약을 어겼을 경우의 벌칙과 공동주택을 살면서 지켜야 하는 규칙 등등을 명시한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볼 틈도 없이 가리키는 대로 사인(sign)을 몇 군데하고 드디어 우리가 살 아파트를 계약해버렸다. 20년도 더 되었다는 아파트였는데도 비교적 깨끗해 보였고 살만하다 싶었다. 물론 미국에서 아파트를 구입해 본 경험도 없었고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계약했지만 다행히도 올 때까지 큰 불편함이 없이 이년동안 꼬박 그 아파트에서 살다가 돌아왔다.
아파트와 자동차 구하기
학교와의 거리, 안정성, 렌트비 등등을 전체적으로 따져 본 다음에는 비어 있는 아파트의 실내를 직접 가서 살펴봐야한다.
아파트의 큰 창문이 남쪽으로 되어 있는지, 공동 세탁실 (Laundry)과 본인이 살 아파트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지 반대로 세탁실과 벽이 붙어서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밤새도록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하수구, 냉장고, 오븐, 난방장치는 이상이 없는지, 카펫트는 새로 깔아 주는 것인지를 꼼꼼히 짚고 넘어가야한다.
집 구하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맨 처음 계약해서 들어간 집의 전 주인이 고양이나 동물을 키웠었는지 보름정도 이 집에서 지내면서 우리 세 식구는 벼룩(flea)한테 엄청나게 뜯겼다. 현근이는 머릿속, 등, 앞가슴까지 마치 호빵 부풀어 오른 것처럼 물렸었고 나와 예근이는 넓적다리와 장딴지가 흉측해서 보지 못할 정도였다.
아파트 임대자 쪽에서 새 카펫으로 교체 해주어야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그냥 기존에 있었던 카펫을 물청소만하고 건조기로 말렸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파트 매니저와 얼굴을 붉히면서 싸움한 끝에 이사비용 200불을 받고 옆 동 아파트로 보름 만에 옮겼지만 그 추운 겨울에 짐 보따리를 또다시 나르고 이미 신청했던 전기와 전화를 다시 끊었다가 연결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옮긴 아파트가 공동 세탁실과 벽이 붙어서 안방에서 잠을 자려면 밤새도록 세탁기 돌아가는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치곤 했으니 어디에 가서 이 답답함을 하소연 했겠는가.
아파트를 계약할 때 처음에는 시간이 걸리고 지나치게 따지고 꼼꼼하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몇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집세를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는지 몰라도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Apartment Complex)있는 똑같은 평수와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아파트라 하더라도 그 가격이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계약 할 때 이런 저런 여러 점을 고려해서 매니저와 집세를 절충하는 시도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아파트를 다른 데로 옮기거나 한국으로 돌아 올 때 아파트 관리자와 이러고저러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 않아서 입주할 때 내부 사진 몇 장과 실내의 상태를 메모로 남겨서 매니저에게 미리 확인을 시켜놓는다는 말을 들었다. 실리주의의 미국인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적인 싸움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물이 더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계약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던 젊은 여자의 정식 직함은 매니저 어시스턴트(Manager assistant)였는데 남부 지역의 전형적인 억양과 귀에 거슬리는 간투사 잉-잉 하는 말을 한마디 할 때마다 부치는 습관을 갖고 있던 여자였다. 그 아파트에 살고 난 이후 한참동안 사무실(Leasing Office)앞에 나와서 줄담배를 피우던 그 여자의 모습을 종종 목격했었다.
매니저가 설명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이해하려 애쓰는 나에게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도 전기 신청과 발신자 추적 (Caller ID), 자동 메시지 녹음 (answering machine) 등 전화옵션에 관한 몇 가지정도를 물어보더니 전화도 알아서 해당 회사에 신청을 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 학교 입학을 하는 기준은 실제로 그 지역주민이냐 아니냐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가지고 가면 되는데 우리나라처럼 주민등록등본 이런 특별한 서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관리 사무실에서 적어준 쪽지를 들고 해당 학교로 가서 신고하고 입학하면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 것도 그녀였다.
새로운 학기부터는 보호자 이름으로 되어 있는 전기세 납입 영수증만을 가지고 가서 그 지역 주민이라는 것을 입증하면 별다른 서류가 필요 없이 계속 똑 같은 공립학교에 다닐 수 있다. 물론 사립학교의 경우는 상황과 서류절차가 다르다.
살집을 마련하면 그 다음 해결해야 하는 것이 이리 저리 다닐 수 있는 기동력이다. 뉴욕, 워싱턴,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등 대도시는 전철 (도시마다 전철을 부르는 명칭이 다 다르다)을 비롯해서 대중교통이 그런대로 갖추어져있지만 미국에서는 변두리로 갈수록, 교외로 빠질수록 자기 차가 없으면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 한 꼼짝 할 수 가 없다.
오클라호마 주에서도 나는 명색이 주도 (Capital City)인 곳에서 살았는데도 워낙 그 지역이 다른 주에 비해서 시골이라 대중교통이라곤 간간히 다니는 버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고 운전 경험이 없었지만 여기에서는 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동차를 사야했다. 아이들 중심으로 아파트를 구하다보니 내가 다닐 학교는 우리 집에서 차로 약 이십오 분에서 삼십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차 없이는 학교도, 간단한 시장도, 어떠한 곳도 갈 수가 없었다.
새 차를 뽑는 것이 아니고 중고차를 구입하는 경우는 차에 관해서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꼼꼼히 점검을 한 다음 사야 되는데 사실 나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유학생들은 자기네들 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큰 서류 절차 없이 적당한 가격에 합의보고 사고파는 경우가 많다.
졸업 철이라든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 게시판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차를 판다는 광고가 덕지덕지 나붙는다. 중고시장 사이트에 들어가서 차종과 차의 상태, 년도를 살피고 거기에 해당되는 가격대를 미리 살펴서 정보를 입수하거나 쇼핑몰이나 서점에 중고차 시세를 알려주는 책자를 참고해서 차를 구입할 때 가격 절충을 시도할 수가 있다. 차 값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몇 개월도 사용하지 못하고 길 한복판에 차가 서버리거나, 수리비로 훨씬 많은 돈을 소비하면서도 마음고생을 톡톡히 하는 유학생들을 많이 봐 왔다. 차는 신중하게 구입을 해야 한다.
정작 나는 중고차 가게에서 몇 시간 만에 97년도 포드를 5000불(그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600만원)에 후다닥 계약을 해 버렸으니 참으로 그 용기가 가상하다 할 수 밖에 없다. 올 때까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이년동안 열심히 타고 다니다가 후배에게 2000불 넘기고 왔으니 그렇게 실패한 거래는 아니라고 해야 되는 건가. 나에게 우리 세 식구가 살 아파트와 발 역할을 해줄 차가 드디어 생겼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의 내 일 단계 정착은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틀을 조 선생님 집에 머무르고 나니 하루도 더 그 집에서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유학생 생활이라는 것이 물질이든, 시간이든 넉넉해서 누구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집을 빨리 구해서 나가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아는 사람에게 미리 부탁해서 예치금(Deposit)을 어느 정도를 내고 집을 구하는 방법도 있지만 막상 와서 지내다 보면 더 싼 가격으로 렌트할 수 있었는데, 혹은 환경이 생각보다 너무 안 좋은데 하면서 애써 구해준 사람과 엇갈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다보면 공연히 좋은 관계가 서먹한 사이로 변할 수도 있다. 하루 이틀 다소 누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머물더라도 본인이 직접 보고 계약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새로 이사할 아파트로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조 선생님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내가 이사할 아파트까지는 자동차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이라 무거운 짐을 가능하면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조심조심하면서 끌어 내리다보니 힘은 두 배로 드는 것 같았다. 미국 사람들은 이웃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참을 수가 없으면, 아파트 관리실에 신고를 한다. 그러면 아파트의 매니저가 소음을 만든 집에 경고를 준다고 한다. 세 번 정도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으면 강제로 그 아파트에서 추방시킨다고 했다.
밖은 혹독한 바람이 불고 추위가 살을 에는 듯했다. 이 지역이 원래 추운 지역은 아닌데 한번 추위가 왔다하면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고 아이스(ice)가 내린다.
우리나라의 추위는 인정이 있고 정겹기까지 하지만 여기의 추위는 바닥 전체가 아이스로 덮여져 쳐다보기도 징그러울 정도였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의 공간은 잔디가 깔려 있고 아파트 단지는 (Apartment Complex)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시멘트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길이 왜 그리도 멀고 멀었는지….
"엄마, 여기서부터 저기 우리 집까지 2분도 안 걸리는데, 난 우리 처음 여기로 이사 오던 날…. 이 시멘트 길이 안 끝나는 줄 알았어요."
아들 현근이는 그 동네에서 사는 것이 익숙한 이후에도 몇 차례나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사한 아파트에서의 첫날밤
조 선생님과 남학생은 짐을 옮겨다 주고 서둘러 돌아갔고 예근이, 현근이 그리고 나만 남게 되었다.
미국의 대부분 아파트들은 내가 아는 한 부엌에 식기 세척기, 냉장고, 오븐 정도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고, 방마다 클라짓(closet)이 부착되어서 웬만한 옷 정도는 수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크게 불편하지 않게 되어있다.
대충 거대한 짐 보따리들은 클라짓 안에 그대로 밀어 넣고 거실 바닥에 밍크 담요를 펼쳤다. 결혼할 때 친정어머니가 해 주셨던 그 담요는 한국에서는 당최 쓸 곳이 없었던 처치 곤란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세 식구가 이 담요에 의지해서 몸을 녹이고 있다.
난방을 틀어도 이미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우리 몸은 쉽게 녹여지지 않았다. 창문은 허술한 듯이 보였고, 바람은 창문을 두드렸다. 당장 누군가가 총을 들고 뒤쪽 창문을 깨고 들어 올 것 같은 이상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머리 끝이 곤두섰지만 아이들 앞에서 무서움을 드러낼 수조차도 없었다. 그냥 누웠다. 아이들을 양 옆에 누이고, 눈을 감았다.
현근이는 아빠가 즐겨 듣던 노래라고 말하면서 장사익씨 노래가 담겨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짐 보따리 어딘가에서 꾸역꾸역 꺼내서 작게 틀어 놓는다.
"찔-레-꽃…, 삼식아…" 테이프는 돌고 또 돈다. 조금 무서움이 가라앉으니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내가 우는 것을 아이들이 들을까봐 숨죽여 울었고, 몰래 몰래 눈물이 볼로 타 내려가도록 그대로 내 버려두었다.
"왜! 이런 엄청난 일을 난 벌였을까. 어쩌자고 아이들까지 이 먼 이국땅에 데리고 와서 이 고생을 시키나."
이런 상태가 계속 된다면 한 달도 되지 못해서 두손 두발 다 들고, 백기 들고 한국으로 철수해야 될 것만 같았다. 냉기는 카펫 위를 뚫고, 담요를 뚫고 몸속으로 계속 파고들었다.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길고도 추운 겨울밤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예년에 없었던 폭설과 아이스가 엄청 내려서 완전히 집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미국 사람들조차도 이상기온 현상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또 나도 학교 생활이 시작되기 전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은행계좌 만들기, 전기, 전화 신청, TV, 컴퓨터, 청소기 및 필수 가전제품 구입.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밥을 놓고 먹을 수 있는 작은 식탁, 침대나 매트리스 구입, 아이들 학교 방문해서 입학 절차 밟기, 수강 신청하고 지도교수 만나서 인사하기 등등.
다행히도 바로 옆 동 아파트에 부부 유학생이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살고 있었다. 어제 밤은 너무나 무서워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고 하니까 웃는다. 자기도 남편보다 아이만 데리고 먼저 와서 혼자 정착하느라 울기도 많이 하고, 힘들었다는 말을 했다.
이 동네는 안전한 지역이니까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고 자기네 딸아이와 현근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될 거라는 귀띔을 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놓였다. 저녁때 그 집 부부가 우리 집에 들러서 가전제품을 사는 것과 시장 볼 것이 있으면 도와 줄 테니 나가자고 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운지.
먼저 TV와 컴퓨터를 사다가 연결을 해야지 집안에서 소리도 나고, 아이들이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와 샤워 커튼이 급했다. 남편과 연락을 취하려면 전화가 우선 급했고, 샤워나 목욕을 하려면 물이 밖으로 넘치지 않도록 샤워커튼을 빨리 달아야 했다.
미국의 집 구조 중에서 난방구조 다음으로 우리와 다른 것이 하수도 처리다. 우리나라 욕실은 욕조안과 세면대 아랫 부분 두 군데 다 하수처리를 해서 물이 빠져 나가도록 되어 있지만 미국의 욕실은 욕조 안에만 물이 빠져 나 갈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한국식으로 물을 있는 대로 틀어 놓고 사용했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가전제품은 써킷씨티(Circuit City)나 타깃(Target)이 다른 곳에 비해서 저렴하다고 했다. 거리는 차선을 분간 못할 정도로 눈이 쌓인 대다가 거리 전체가 빙판이 되어 있어서 운전을 하기에는 굉장히 위험했다. 눈길을 뚫고 우리는 모험을 시도했다. 컴퓨터 구입은 며칠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TV와 간이식 침대로 사용할 수 있는 풋톤 (Futon), 샤워커튼, 그리고 당분간 먹어야 될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서바이벌 잉글리쉬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얼마 안 남았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꼼짝 할 수 없으니 아이들이 TV라도 보면서 간접적으로 여기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 질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말해주는 젊은 부부의 말이 마음에 따스하게 다가왔다.
케이블 TV를 연결할 때 채널권을 선택하는 정도에 따라 시청료가 달랐다. 기본 채널에 아이들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 디즈니랜드에서 주로 만든 만화영화와 어린아이들이 주로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채널과 나를 위한 영화채널을 옵션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콕스 커뮤니케이션스(Cox Communications)라는 곳으로 전화를 해서 TV를 연결해달라고 신청을 해야 하는데, 전화로 무엇을 시도한다는 것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하나하나가 다 도전이 되었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영어였다.
긴장되고 다소 떨리는 기분으로 전화를 걸었고, 드디어 저쪽에서 남자의 저음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게 뭐라고 말을 한 후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Mam, What city do you live in?"(아주머니, 사시는 곳이 어딘가요)
내 귀에는 도시(city)가 내 눈앞에 노여 있던 CD집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내 입에서는 갑자기 "I don"t have any CD"라고 대답을 해버렸다.
전화 저쪽에서는 순간 황당한지 몇 초정도 끊겼다가 다시 Mam- 하는 순간 나는 제정신이 돌아왔고,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각이 온 것은 사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초 정도였을 것이다. 어떻게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I am so sorry. I will call you back later." (죄송합니다. 다시 전화드릴께요)하고 후다닥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고 거실이며, 방이며, 부엌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왔다갔다 서성거렸다. 얼굴이 상기되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에 혼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 아이들은 자기네 엄마가 이 세상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고 발음도 가장 좋은 줄 알고 살아왔던 지극히 순진무구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케이블 TV가 언제부터 연결이 되는 건지 재차 물었고, 그럴수록 나는 곤경에 빠져들었다. 결국 이웃에 딸 둘을 두고 있는 유학생에게 (그녀도 40이 넘은 아줌마였다) 부탁해서 케이블 TV가 드디어 연결이 되었고, 아이들은 덕분에 행복해했다.
CD와 city(CD는 액센트가 뒤쪽에, city는 앞쪽에 있다. 물론 context에서 추측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영어에서 액센트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 두 단어가 빚어낸 웃지 못할 해프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당시에 알았다면 아마 나는 후천성 영어 자폐증에 걸렸거나 심한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예근이 현근이의 눈물겨운 언어 장애 도전기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첫 신호인 셈이었다.
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의 예근이의 그 낭패스러웠던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에 왔을 때 큰 아이 예근이는 중학교 2학년 나이였다.
"엄마, 오늘만 엄마 차로 데려다 주세요. 내일부터 스쿨버스타고 다닐 테니까. 오늘은 첫날이고 학교에 도착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엄마, 오늘만.”
예근이가 약해지고 사정하는 말투가 될수록 나는 냉정해졌다.
예근이가 다니던 학교에는 2년 전에 한국 학생이 한명이 다닌 적이 있었지만 당시는(2001년) 예근이가 유일한 한국 학생이라고 했다. 허허벌판으로 내던져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미국학교생활을 시작했던 예근이는 다행히도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아이들 얼굴표정부터 살폈고 아이들이 말하는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에도 귀를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런 관심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들의 입학수속을 무사히 마치고나니 나의 학교생활이 시작이 되었고, 그 때부터는 고백컨대 아이들의 내면의 어려움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나에게 없었다.
언어장벽, 그리고 친구장벽
예근이가 학교 생활을 시작한 지 한달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공부방에서 책을 보다가 하도 주변이 조용해서 거실과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예근이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둘째 현근이가 학교에서 오려면 한 시간 정도는 더 있어야 되고, 스쿨버스 배차 간격 때문에 예근이가 먼저 집에 늘 와 있곤 했다.
보통 예근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엌에서 냉장고 여닫는 소리, 무언가 열심히 부스럭거리면서 먹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오늘은 완전히 정적이다. 침대 있는 방을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방하나는 책상으로 방을 빙 돌려서 공부방으로 만들고 다른 방하나는 침대 매트리스만을 들여 놓아서 잠을 잘 때는 같은 공간에서 세 식구가 잠을 잘 수 있도록 배치해 놓았었다) 슬며시 열어 보았더니 예근이가 손을 이마에 올려놓고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다. 가려진 눈가 쪽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가 문을 꽉 닫고 혼자 울고 있다니 가슴이 철렁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엄마, 학교생활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 언제인줄 아세요. 공부 시간도 아니고 바로 다른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고 좋아하는 점심시간이에요. 점심을 먹고 난 이후 10분 정도의 시간이 저에게는 지옥과도 같이 길고 긴 시간이에요. 공부시간은 선생님을 향해 앉아서 공부하면 되는데 점심시간이 돼서 서로 가까운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웃고 말하고 즐겁게 지낼 때 정작 저는 소속해 있을 공간이 없어요.
설령 도우미(같이 수업을 듣는 아이들 중에서 세 명의 학생들이 예근이의 학교생활을 돕도록 되어 있었다) 역할을 맡은 아이들이 같이 카페테리아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해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어쩌다 용기를 내서 말 한마디 하면 상대방이 알아듣지를 못하고 그럴 때면 다시 위축 되고.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나면 저는 ESL 선생님이 있는 교실에 가서 선생님하고 이야기해요. 선생님은 멕시칸 선생님이신데도 원어민들과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세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 와서 사셨대요. 그분은 제가 왜 점심시간마다 이 교실을 찾아오는지 잘 아시는 것 같았어요. 말도 많이 걸어 주시고 용기도 북돋아 주시고 하루가 다르게 영어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고 위로해 주시고요."
그러면서 예근이가 또 운다.
가슴이 쿡쿡 쑤셔오면서 아팠다. 아이의 외로움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져왔다. 아이가 이 정도로 힘든 줄 몰랐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결과만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으려니 했었다. 아, 얼마나 무심한 엄마인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내 몫 챙기느라 늘 허우적거리면서 산 세월이었다. 예근이는 항상 바쁘다는 엄마의 생활 속에서 비켜서 있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속엣말을 나한테 털어 놓으면서 자란 아이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초경을 시작했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유별나게 성숙하다는 말을 많이 듣던 아이라 한국에서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언니처럼 늘 들어주는 역할을 해왔지, 자기의 아픔을 드러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친구들이 늘 곁에 있었고 내 나라 말로 표현하니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검정머리, 누런 피부, 아시아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아이, 게다가 언어 소통도 되지 않는 아이를 누가 딱히 알뜰살뜰 이해하고 챙겨서 친구하겠다고 하겠는가. 자기네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혹은 어쩌다 호기심으로 관심을 갖고 말을 시켜보면 이상한 액센트로 겨우 몇 마디 하는 이 아이에게 주변의 아이들은 더 이상 시선이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예근이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이 그래도 나에게 다행이었다. 오래전의 이야기다.
크레파스로 그린 태극기
1996년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 쪽으로 배낭여행을 했었을 때 미국의 한 교포의 집에 초대 받아서 들른 적이 있었다. 그분은 미국에 와서 정착한지가 30년도 훨씬 넘었다. 이미 대학생이 된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대학생이 되었으니 한국이라는 나라는 부모님의 나라 그 이상의 의미가 그들에게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음악을 한다는 아들중의 한명의 방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악기들 틈 사이에 크레파스로 서투르게 그려진 태극기가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었다. 지금도 그 당시의 신선한 충격과 감격을 잊지 못한다.
더듬거리는 아들들의 한국어 솜씨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던 아버지가 간간히 옆에서 보충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흑인아이, 백인아이, 동양계 아이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잘 어울려서 논다. 백인친구도 내 친구, 흑인 친구도 내 친구, 모두가 내 친구다. 중학교 올라가면 백인친구의 절반가량 정도가 떨어져 나간다. 고등학교 올라가면 삼분의 일정도가 남고 대학교 올라가면 주변에 가까운 친구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백인 친구는 거의 없다."
결국 아시아권 학생들은 아시아권 학생들끼리, 백인은 백인들끼리 모이게 되고 각자의 그룹 속에 소속 되어있을 때 편하다는 말을 듣고 묘한 슬픔과 분노를 느낀 적이 있었다.
부모의 모국어를 구사 하지 못하는 교포 2세, 3세들은 미국 아이들로부터는 자기 모국어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라고 은근히 경멸을 받고 동시에 한국계 학생들끼리 모일 때는 한국어를 알지 못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고 따라서 이쪽저쪽도 확실하게 소속 되지 못하는 도깨비 같은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토요일이면 미국 아이들은 가족시간을 즐기며 한가하게 보낼 때 매주 토요일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토요학교에 나가서 한글을 익히라는 부모님을 두 명의 아들은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감사하다고 그들은 고백했다.
그렇다. 영어 습득이론에도 있다. 퓨버티(puberty: 사춘기: 남자13~14세, 여자 11~12세)가 지나고 나면 영어(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퓨버티 이후가 되면 상대적으로 퓨버티 이전에 비해서 영어를 습득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배경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미국인과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attitude)와 그룹 사이의 벽(in-group vs out-group)을 들 수 있다.
어렸을 때는 강하게 의식하지 않던 인종(races), 문화, 사람들 간의 계층, 민족 집단 (ethnic group), 언어 그 자체에 관하여 갖고 있는 태도 (attitude)의 표출 방법이 커 갈수록 부정적으로 단단하게 굳어져 가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퓨버티 이후에는 자기 그룹 속(in-group)에 소속하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다른 문화권과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들(out-group)과의 벽이 높아진다. 에고(ego, 자아)가 높아지면서 상대의 그룹에게 폐쇄적으로 되어진다. 당연히 언어습득 환경에 노출되어 질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12세-14세 이후에는 언어를 익히는 속도가 어렸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예근이가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왔으니 퓨버티를 살짝 넘은 경계에 와 있다고 볼 수가 있었다. 이때까지 예근이, 현근이, 나 세 사람 중에서 예근이가 가장 힘들고 어두운 통로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영어 학습의 이론과 미국학교에서의 현장의 경험을 얻으러 이 먼 곳까지 유학 온 내가 그 이론의 실제의 예가 현실 속에서 그것도 나의 딸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근이는 언어장벽과 친구의 장벽을 혼자서 넘고 있었다. 어른인 나는 일부분 포기하고 접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편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생활에 적응해 들어가는 것이 정신적으로 늘 불안하고 쫒기는 생활이었는데 그 예민한 나이에 예근이는 오죽하랴 싶었다.
예근이는 안간힘으로 돛대를 잡고 있었다.
현근이가 다닐 초등학교는 조용한 마을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자그마한 학교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오솔길을 따라 산책 하듯이 천천히 걸어가면 30분 정도 거리의 위치에 있다.
현근이네 학교는 ESL과정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영어를 배우는 프로그램)이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만약에 ESL과정을 들으려면 버스를 타고 ESL 교실이 열려 있는 학교로 가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오후 수업을 받아야 했다.
현근이 담임선생님이셨던 Ms.Q 선생님은 일부 공립학교에서 열어 놓고 있는 ESL 프로그램을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신뢰하지 않았다.
주로 ESL과정은 스페니쉬 계통의 선생님들(Bilingual Teacher: 두개의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많기 때문에 스페니쉬 억양이 강한 영어를 가르치고, 학급도 각 학교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영어를 배우기 때문에 현근이 영어 습득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다인종을 받아들여서 형성된 국가이기 때문에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기본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미국은 자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과 (무료 영어 교육 프로그램은 엄청나게 많다) 언어 습득에 관한 이론을 정책적으로 펼쳤던 것이다.
현근이의 영어 교육을 위해서 Ms.Q 선생님 외에도 세 명의 선생님이 더 매달렸다. 현근이가 언어 때문에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선생님과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배려를 해주었다.
주정부에서 월급이 지원되는 보조 선생님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자원봉사자들이 학교를 찾아와 현근이의 책읽기(Reading)를 지도하는 일이 같이 병행이 되었다.
Ms.Q 선생님 덕분에 현근이는 그야말로 ‘영어의 바다’에 빠지게 된 셈이다. 영어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갖고 있지 않았던 현근이가 잘 해 낼 수 있을까 내심 불안 했지만, 일단 담임선생님의 생각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선생님들은 굉장한 열정의 소유자로 아이들에 대한 욕심이 컸다.
선생님은 현근이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도와주는 하나의 방법으로 선생님과 나 사이에 교환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현근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전달 사항이 무엇이 있었는지 물어본 후 그 내용을 그대로 영어로 노트에 적어서 학교로 다음날 보내는 형식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노트를 통해서 쪽지 편지 형식으로 간단히 써서 보내면 선생님은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 주시곤 했다. 한동안 쪽지 노트는 계속 되었다.
한 달 정도는 언어 때문에 긴장하고 다소 힘들어 했던 현근이도 두 달째 접어들어서는 대충 눈치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것 같았다. 비교적 빠른 속도로 적응하며 학교 생활을 재미있게 보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다기 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반 이상은 놀다가 오곤 했던 것 같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미국의 초등학교는 학교 도서관(Media Center)에서 빌려온 한 두 권 정도의 책 외에는 들어있지 않은, 거의 빈 가방을 덜렁덜렁 들고 다닌다. 심지어 필기도구, 지우개조차도 학교에 두고 다녔고, 교과서도 개인 소유의 것이 아니라 재적수만큼 교과서를 학교 측에서 확보해서 학생들이 한 학년을 사용하고 나면 다음 학년에 물려주었다.
겉표지 안쪽에는 몇년도에 어떤 학생이 그 책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는 카드가 꽂혀 있다. 일종의 책의 역사인 셈이다. 복습, 예습을 하기 위해서 교과서를 선생님 허락 없이 가지고 오면 오히려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겉표지도 하드 커버이고 크기도 커서 어린아이들이 실제로 이런 책들을 들고 다니기에는 힘에 겨울 수도 있다.
자서전 쓰기와 "아기 돼지 삼형제" 프레젠테이션
3학년 프로젝트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매해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한 가지씩을 선택해서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해당되는 내용을 적는 자서전(autobiography)을 쓰는 것이다.
현근이가 한 살이 되던 해, 돌상을 차려준 그림과 설명을 곁들였더니 Ms.Q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현근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나머지 하나인 3개월 프로젝트는 본인이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을 골라서 인덱스카드(Index Card: 색인 카드)에 책의 내용을 발표하기 쉽게 파트별로 요점 정리를 하고 그 내용을 나타내는 그림이나 물건을 가지고 와서 아이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숙제는 현근이의 숙제인 동시에 나의 숙제이기도 했다. 겨우 알파벳을 끝내고 간단한 단어인 "apple, tiger, good morning" 정도의 표현을 알고 있던 현근이에게 이 두 가지 프로젝트는 높고도 높은 도전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이미 익숙하게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중심의 쉬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교 도서관에서도 빌리고, 이웃에 살고 있는 정아(초등학교 2학년)의 책도 빌리고, 심지어 마을에 있는 도서관에도 들락거리면서 책을 빌려왔다.
큰 그림이 많이 들어 있으면서 문장이 간결하고 대화체 위주로 꾸며져 있는 책들을 선정했다. 우선 발표할 책으로‘아기 돼지 삼형제’를 결정하고, 설명할 때 필요한 그림을 만들었다.
부분별로 이야기의 포인트가 될 만한 내용을 그림으로 재미있게 그려서 가위로 오린 다음 라면 상자의 두꺼운 판자 위에 붙여서 약간 입체적인 느낌이 들도록 한 수업 자료를 현근이가 직접 만들었다.
또 거의 외우다시피 책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재롱잔치에서 하는 것처럼 현근이는 아기 돼지 삼형제의 역할을 화장실에서도, 식탁에서도 되풀이해서 연습했다. 미국 아이들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발표 날. ‘아기 돼지 삼형제’는 미국의 3학년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이야기에 해당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놀림감도 될 수 있었을 텐데, 미국 친구들은 더듬거리는 영어 발음이지만 얼굴을 상기시켜 가면서 열심히 발표하는 동양의 친구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Ms. Q 선생님의 넘치는 칭찬 속에서 현근이의 첫 번째 도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럴수록 현근이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틀 후에 현근이는 다른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Ms.Q 선생님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비디오로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손녀, 손자까지 둔 60이 넘은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운동으로 다져진 늘씬한 외모와 긴 금발의 머리를 머리 꼭대기로 질끈 묶고 전사처럼 아이들을 가르쳤다.
You have many talents. (너는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는 아이다)
You are a great actor. (너는 훌륭한 연기자로구나)
I am very proud of you. (나는 네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You did a great job. (참 잘했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현근이가 배부르도록 많이 들었던 칭찬의 말이다. 현근이는 운이 좋게도 삼박자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선생님의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 눈높이에 맞는 체계적인 독서 프로그램, 격의 없는 미국 친구들과의 놀이를 통해 현근이는 닭들이 모이를 쪼아 먹듯이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acquisition)해 가고 있었다.
흑인 친구 마이커(Micah)
한국 아이들이나 미국 아이들이나 비슷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새로운 아이가 전학을 오거나 하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관심을 표명하고, 아이들간에 눈에 띄지 않는 탐색전도 벌어진다. 특히 기존 아이들 중 친구 관계가 원활하지 않고 소위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일수록 새로 전학 온 아이에게 슬쩍 다가와서 자기 친구로 만들려는 경우가 잦다.
현근이가 처음 미국에 와서 알게 된 친구는 마이커라는 흑인 아이였다. 현근이는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뻤고, 그 친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이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문제아"였던 것. 현근이 설명에 의하면 마이커는 선생님께 늘 야단을 맞고 벌을 받곤 했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은 마이커가 지나치게 장난이 심하거나, 다른 친구의 공부를 방해하는 경우가 몇 번이고 반복되면 교장실에 딸린 작은 방으로 보내 하루 종일 친구들과 놀지 못하도록 한다고 했다. 미국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벌 중에 하나가 "너 교장실에 가고 싶니?" 라는 말이란다. 육체적으로 아프게 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고통을 주는 식이다.
어느날 담임 선생님이셨던 Ms.Q 선생님이 반 아이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 마이커를 가리켜 말했다.
“Hyun Geun, Don"t play with him. OK? Don"t get closed him.
Micah, stop doing that."(현근아, 마이클과 놀지마. 알았니? 그 아이와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마이커, 너 그 짓 그만두지 못해.)
현근이는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다소 한동안 우울해 했다.
“엄마, 마이커가 장난이 심하고 공부는 못하지만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에요. 우리 선생님은 너무 차가워. 선생님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지만, 선생님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야단치고 아이들 마음에 상처를 주세요. 선생님이 나한테는 친절하게 잘해주시만 난 그런 선생님이 부담스러워요.”
Ms.Q 선생님에 대한 현근이의 볼멘소리다. 나도 혼란스러웠다. 일종의 인종차별인가? 정말 그 아이는 문제가 많은 아이인가? 만약에 인종차별(Racism)이라면, 선생님이 마이커에게 하는 것처럼,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 앞에서 현근이에게도 심하게 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학기 초기에는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선생님이 나서서, 문제가 많다는 마이커와 놀지 못하게 적절한 조치를 내린 사실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이기심일 수도 있겠고,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흑인(African American) 아이들에 대한 편견이 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마이커는 3학년 말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고, 현근이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면서 마이커는 서서히 우리 기억속에서 잊혀진 아이가 되었다.
마음에서 멀리 하고 싶었던 친구, 니키
현근이와는 달리 예근이는 친구 문제로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또래 그룹이 형성된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들은 그들 나름으로 상위 계층의 그룹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친구를 만드는 것은 무척 힘들다.
예근이가 만났던 아이들은 주로 멕시칸 계통의 아이로 가정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다정한 말 한마디가 그리웠던 예근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오면서 다가온 니키가 반가운 존재였음은 당연하다.
그런 니키가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놀림을 받았던 아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 예근이는 알지 못했다. 니키는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아이였다.
부모가 이혼을 한 후 각각 재혼을 한 상태라 니키는 어디에도 몸을 의지할 데가 없는 아이였다. 계부는 물론 심지어 친부에게까지 폭행당하는 것이 반복되다 보니, 니키는 정서적으로 정상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거짓말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예근이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예근이 마음 속에 갈등이 일었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친구가 있었다면, 니키를 도우며 친구로서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느냐"고 나한테 몇번이고 되물었다. 사실 예근이는 혼자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든 상태였다. 마음에서 니키를 밀어내고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한동안 예근이는 본인이 갖고 있던 가치관의 혼란을 겪었던 것 같다.
예근이가 친구의 이야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할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미국 아이니?" 하고 묻곤 했다. 내 말은 건전한 미국 가정 속에서 자란 모범적인 백인(white people) 친구인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근이가 그런 아이들을 친구로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을 예근이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확인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짜증을 냈다.
학교에서 친구 관계는 상당히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학년이 올라갈 수록 주류를 이루는 층과 그 주변에 서 있는 아웃사이더 층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반 편성을 새롭게 하는 것도 기존의 틀을 깨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자 하는 면이 있다. 친구 관계가 원만치 못할 때, 아이들의 학교 생활 전부가 흔들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예근이가 주류에서 밀려나 아웃사이더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었다. 이곳에서의 아웃사이더 개념은 사실 한국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인종, 문화적 배경까지 맞물려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그룹 사이의 벽은 상당히 높고 단단하다.
먼저 호감을 표현하며 다가가야 하고 순간순간의 냉혹함을 인내해야 한다. 선생님들과 동료 학생들 사이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는 학업에서나 행동에서 모두 모범적이고, 우수하게 튀어야 한다는 것을 예근이도 오래가지 않아 알게 되었다.
예근이와 현근이는 네 살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기본적으로 상황을 받아 들이는 의식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예근이가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새로운 학년이 시작이 될 때였다. 예근이가 이수하기로 신청한 각 과목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배워야 할 학습 목표와 수업을 받을 때 학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방침이 적혀 있는 편지를 학부모나 보호자(guardian)에게 보내서 서명을 받아오게 했다. 학부형과 교사의 간접적인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면서 약속이었다.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3학년 진학반을 담당했을 때였다. 예근이가 다니던 미국 학교 선생님들의 방법을 나도 학생들과 학부모들께 적용한 적이 있었다. 나에 대한 짧은 소개와 인사, 일년 동안 가르칠 내용과 학습 목표, 수업 시간에 지켜야 할 규칙, 마지막으로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편지를 학생들 편에 보내서 부모와 본인의 서명을 받아 오게 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이런 편지를 어색해 했고, 부모님께 그 편지는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서명을 해서 제출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업 시간에 지켜야 되는 규칙은 나만의 공허한 규칙으로 끝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 간지 일년 후에 시카고에 살고 있는 아는 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분들은 영주권을 갖고 미국에서 생활한지 10년이 넘었다. 미국에서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큰 딸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다.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면 학교에서 학부모들을 초대하는 날이 있어요. 그날은 각 교과목 선생님들이 본인의 교실에서 여러 가지 유인물을 준비하고 학부모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요.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신청한 교과목과 관심 있는 과목의 선생님 방을 방문해서 교과목의 특징과 교수 방법, 수업을 받을 때의 규칙과 벌칙, 평가 방법 등등에 관해서 담당 선생님의 설명을 직접 듣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진지하게 선생님께 질문을 해요. 일단 그런 시간을 갖고 나면 부모들은 학생들에 대한 평가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불만의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단순히 미국 학교 교육제도의 좋은 점이라기보다는 학부형과 교사, 학생들 사이에 열려 있는 마음과 관심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른다. 그분은 이러한 학교 행사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8학년 올라가면서 예근이는 학교성적 관리를 하면서 조금씩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예근이의 8학년 일년 목표는 전 과목 A를 받아서 중학교 졸업할 때 (여기서는 초등학교가 5년 과정, 중학교가 3년 과정이기 때문에 8학년이 중학교 졸업반이 됨)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우등상을 받으면서 졸업하는 거였다.
한국에 혼자 있는 아빠에게 안겨 주고 싶은 선물이라는 말을 예근이는 다짐이라도 하듯이 반복해서 했다. 아이들이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나도 아이들의 학교 성적을 은근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한 학년이 쿼터제로(4/4학기) 되어 있어서 필수과목은 일년 동안 계속해서 들으면서 동시에 사분의 일씩 주기로(9주) 선택과목을 두 가지씩 본인이 하고 싶은 것으로 선택해서 듣게 되어 있었다.
선택과목으로는 페인팅, 컴퓨터, 연극, 사진, 오케스트라, 농구, 등 여러 가지 강좌가 열려 있다. 필수과목으로 영어(ESL를 들어야 하는 학생의 경우는 ESL 성적으로 영어 성적을 대치), 수학, 과학, 오클라호마 역사, 그리고 선택과목으로 컴퓨터와 페인팅을 예근이는 신청했다.
미국 학교의 성적은 평상시의 숙제, 수업 시간에 보는 퀴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합해져서 평균을 내서 성적 처리를 하는데 90-93 A-, 94-96은 Ao, 97이상은 A+이런 방법으로 성적을 산출해 냈다.
평소에 숙제는 얼마나 잘 했는지, 수업태도는 어떤지, 수시로 보는 퀴즈는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성적표에 이런 모든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간고사 성적과 기말 고사 성적을 비교하면서 분석할 수 있도록 과목별로 일년에 4번 성적표가 나온다.
선생님이 기대했던 기준보다 더 숙제를 잘해 오든가, 에세이 식 퀴즈에서 논리 정연하게 잘 준비해서 작성했다든가 하면 100점하고도 보너스 점수라고 해서 5점 10점 정도를 더 가산해서 준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다소 실수를 해도 평소에 가산점을 많이 받아 놓으면 전체 평균 점수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점수 제도는 완벽하게 선생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 한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채점 방법이 낯설고 심지어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수학 숙제를 내주고 집에서 풀어 온 결과를 다음 수업 시간에 선생님 풀이에 맞추어서 각자 채점을 하는데 그 결과가 그대로 여과 없이 성적에 반영된다는 것이었다. 숙제를 안 해 온 학생들이 아침에 와서 다른 친구의 숙제를 베낄 수도 있고 공부를 잘 하는 친구의 노트를 미리 맞추어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데 어떻게 이런 식의 성적 반영이 가능할 수가 있을까.
예근이에게 물어 보았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 중에서 남의 것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거나 답을 미리 다른 학생과 맞추어 보든가 하는 학생의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예근이의 답변이었다.
남의 것을 모방하고 복사하고 더더욱 커닝하는 것은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하는 행위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아 온 그들만의 정서와 문화의 결과 덕분일 것이다. 플레이저리즘 (plagiarism: 표절)한 것이 밝혀지면 성적이 F처리 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학교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미국 대학의 방침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여튼 나로서는 상당히 부러운 평가 방법이었다.
물론 미국의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미국 공교육의 문제점이나 학생들의 사고에 대해서 우려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 미국은 주마다 학교 제도나 강조점이 다소 다르고 학생들의 수준 정도에서도 엄청나게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교육의 좋은 점 또는 나쁜 점을 한마디로 운운한다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단지 내 직업이 교사이고, 게다가 우리 아이들 두 명이 미국 공립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다 보니까 평소에 한국에서 느꼈던 문제를 놓고 상호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내게는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게다가 내가 이수했던 과목 중에 하나가 Sociological Foundations이었는데 주로 미국의 교육의 역사며 미국 학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 및 핫이슈를 다루는 과목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10여명의 학생들과 20년 동안 중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도 하고 교장 선생님으로도 근무한 경험이 있는 헤드릭(Hedrick) 교수님과 미국 학교의 이런저런 문제점을 놓고 토론한 적이 있었다. 이 과목을 수강한 학생들이 서로 자기네 나라의 교육제도나 교사의 사회적 위치(일본, 대만, 중국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미국은 교사의 위치나 존경도가 높은 나라는 아니다. 가르치는 직업은 미국에서 명예직에 해당되는 직업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봉급도 다른 전문직에 비해서 열악한 상태다.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분야라고 치부해 왔고 많은 교사들은 학문적인 분야보다는 가르치는 기교(technique, art, method)를 중점으로 공부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학교수라든가 연구원들에 비해서 박식하고 교육을 아주 잘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교사들을 학부모, 학교장, 정치가, 교육청(board education)의 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보병(foot soldiers) 정도로 간주되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한국의 교사들이나 미국의 교사들이 등뼈가 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최소한 자기의 수업 만큼은 보장받으면서 가르치고 있다. 교사의 결정과 판단은 어떻게 보면 절대적인 것이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우리 아이의 숙제가 80이고 왜 저 아이의 숙제가 보너스까지 받아서 105점인지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보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수행 평가와 수준별 수업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 온 터라 미국학교에서 학생들의 평가 부분이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해서는 저절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 교사, 학생들 사이에 열려 있는 마음과 신뢰감이 무너져가는 한국의 공교육을 살리는 초석이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전제되지 않는 한 교사의 재량권은 축소되고 학생들에 대한 평가 조차도 편의주의내지 형식주의로 그치고 말 것이다.
오늘 따라 현근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신이 났다. 자기네 반 아이들 전부 하루 종일 실내에서 신발을 벗고 지내라고 선생님이 허락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내에 들어설 때 혹은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자란 것처럼 미국 사람들은 잠자러 침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살아왔다.
현근이가 미국 학교에 다니고 몇 개월 지났을 무렵이었다. Ms. Q 선생님은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온 조그마한 아이가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염려한 끝에 여러 가지 방법을 나름대로 생각해 냈던 것 같다.
그중의 하나가 한국의 이런저런 문화를 소개하고 난 후 실제로 그 문화 중의 한 가지를 반 아이들 전부가 같이 해봄으로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게 함과 동시에 학급 친구들로 하여금 현근이를 주목할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준 듯싶다.
미국 아이들은 신발을 벗어다가 복도 한 귀퉁이에 마치 신발장에 신발을 정리해 놓듯이 나란히 진열해 놓고 맨발로 교실이며, 복도며, 카페테리아를 즐거워 하면서 이리저리 걸어다녔다는 것이다.
미국의 학교나 가정집을 방문할 때 현관 입구에 신발장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눈여겨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현관 입구부터 하얀색의 부분 카펫트가 깔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위를 신발을 신고 저벅저벅 들어가려면 주저될 때가 있다.
문화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자기 문화권에 살 때는 전혀 느끼지도 의식하지도 못하던 작은 것들마저도 다른 문화권에 들어섰을 때 낯설고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한 것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Ms. Q 선생님 덕분에 현근이는 오늘 미국의 교실에서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주인공이 되었던 셈이다.
약 5개월 정도의 삼학년 적응 기간이 지나고 8월부터 4학년이 시작되었다. 학교에 등교하기 며칠 전에 새 담임선생님 되실 분이 반 아이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본인 이름을 소개하고 만나게 되어서 반갑다면서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은 서로 전화를 하면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같은 반이 되지 못한 경우는 아쉬워 하면서 새 학년을 맞이할 준비를 나름대로 한다.
4학년 담임선생님의 성함은 MS. Melton이었는데 그해가 정년퇴임하는 해라고 했다. 현근이는 Melton 선생님을 만나면서 더욱 더 학교생활이 안정이 되었다. 여러 가지 대내외상을 탈 기회를 많이 맞으면서 거의 전교생들이 현근이 얼굴을 알게 되었고 현근이는 자기 세계를 만난 것처럼 늘 자신만만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 엄마, 어떤 아이가 노트를 가지고 오더니 나보고 사인을 해 달래잖아요, 허참.”
주(State)에서 주최하는 미술대회에 출품한 그림이 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이후의 반응이었다.
9개월이 지나도록 영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데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수학 시간 만큼은 독무대였다. 미국 초등학교 수학은 기초를 다지는데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곱셈, 나눗셈을 거의 5학년이 끝나도록 반복을 한다. 현근이는 한국에서 남편이 가지고 온 수학책을 하루에 두 장 정도씩 혼자서 읽고 풀다 보니 문제를 푸는 자생 능력이 생긴 것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현근이가 미국 아이들에 비해서 빠른 시간 내에 수학 문제를 푸는 건 당연한지 모른다. 한국에서 수학을 잘하는 아이들에 비해서 현근이가 수학을 우월하게 잘 하는지 않는다는 것을 현근이 본인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주에서 실시하는 STAR Math test에서 실시하는 진단 평가에서 대학을 준비하는 과정의 수학을 이수해도 좋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진단 평가는 학생에 관한 자세한 가이드라인과 어드바이스가 담겨 있다. 현근이는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수학의 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5학년에 올라가서 현근이는 피크 클라스(Peak class)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는 자기가 원래 소속한 반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수학 시간은 전교에서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상급반이나 영재반(peak class)에 가서 (개별 이동 수업) 수업을 받는다.
피크 클라스는 선생님 한분이 전담해서 지도한다. 중학교부터는 보통 반(regular class), 우수반(honor class), 영재반(peak class)이 있어서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수업을 받는다. 본인과 부모들의 생각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성적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7차 교육의 중요한 이슈가 바로 수준별 이동 수업과 개별화 수업 전략이다. 좋은 제도다. 그러나 정작 알맹이는 다 어디 가고 형식적이고 아수라판이 되고 있는 한국의 수준별 이동수업의 현장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 질 뿐이다.
이런 제도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받쳐져야 되는 몇 가지 환경적 요소와 교육부, 관리자, 교사, 학생, 학부모들의 총체적인 의식의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근이가 4학년에 올라가 몇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미국의 아이들 사이에서 슬며시 우상의 대상으로 자리매김을 할 즈음 Melton 선생님이 벽에 걸려 있는 세계지도 속에서 친구의 나라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고 미국 어린 친구들한테 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현근이가 한국의 위치를 가리켰다.
“여기가 바로 내가 살던 한국이라는 나라야” 했을 때 반 아이들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상상하거나 연상하는 모양이었다.
피크 클라스에 가서 수학을 배우고, 자기네보다 엄청나게 계산을 빠르게 해내는 저 아이의 나라는 당연히 미국보다 훨씬 더 큰 나라이겠지 라고 아이들이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도에서 미국보다 큰 나라를 찾으려고 하니 어디 한국을 찾을 수가 있었겠는가.
한국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미국 아이들의 눈은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큰 주 (State)의 하나도 채 되지 못하는 작디작은 나라가 한국이라니. 자기네들 손바닥보다 작은 나라가 어떻게 선생님이 늘 칭찬하는 저 예의바른 친구의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자기네들보다도 수학을 잘하는 아이의 나라가 저렇게 작을 수 있다니 미국 친구들은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이 말을 전달하는 현근이 마음은 나름대로 착잡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작아요? 왜 우리나라는 잘 살지 못해요?” 현근이가 안타까워 하면서 물었던 질문이다. 지도 속에 유독이 작게 보이는 우리나라를 아이들에게 가리켜 보일 때 창피하기도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고 현근이는 고백했다.
어린 아이다운 상상력에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현근이의 복잡한 마음이 안쓰럽기도 했다.
“애국이란 거창한 것도 아니며 더더욱 훌륭하다고 잘 알려져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현근이는 네가 서 있는 자리에서 엄마는 엄마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성실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이 미국 땅에서는 애국이 되는 거다. 만약 현근이가 뒤에서 손가락질 당할 정도로 행동을 반듯하게 하지 못하고 수학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면 아마 미국 친구들이 너를 업신여기고 어느 누구도 친구하자고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들은 없었을 거야. 비록 우리나라는 작지만 너의 미국 친구들 마음속에는 거대한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니. 현근이도 누나도 엄마도 여기서는 모두가 민간 문화 대사다.”
내 입에서 어설픈 애국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건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던 나로서는 미국의 부모들과 자식들과의 관계가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미국의 문화 중에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듯싶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그들의 가족관이다. 부모의 이혼과 별거의 상태가 이리 엉키고 저리 엉키다 보니 아예 확장된 가족개념 (extended family)이 생겨 날 정도가 되었다.
미국 아이들 스스로가 친구들과 가족관계를 말할 때 계부, 계모를 밝히는 것은 더 이상 터부도 아니거니와 별로 그 사실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 친부모, 친형제 자매가 아니면서도 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여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족관계를 구성하면서도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가면서 사는 모습을 볼 수 가 있다.
그들은 전 남편을 현재의 남편에게 소개한다든가 별거 상태에서도 아이들 문제를 자연스럽게 만나서 의논을 하거나 집안의 큰 행사 때는 서로 오가면서 참여한다. 이런 현실속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설령 받아들이는 정도에 문화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자식 입장에서 가장 큰 고통중의 하나는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이지 않을까 싶다.
계부, 계모가 자연스러운 미국
우리나라의 어버이날과 비슷한 날들이 미국에도 있다. 5월 두 번째 일요일이 어머니날(Mother"s day), 6월 세 번째 일요일이 아버지날(Father"s day), 9월 두 번째 일요일은 할아버지,할머니날(Grandparents" day). 이런 식으로 날짜를 달리하면서 그들 방식대로 소박하게 감사의 행사를 한다.
바로 그 뉴스를 들은 것도 5월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도서관에 가는데 오클라호마 공립학교에서는 어머니날 행사를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유인즉슨 어머니날 행사를 학교에서 하게 되면 정상적인 부모를 갖지 않은 아이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만큼 상처를 받을 아이들이 많을 수 있다는 게 행사를 진행하지 않는 이유라는 진행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뉴스를 들으면서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던 기억이 난다.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지내던 메리 ("마마"라고 그녀를 부른다)에게 뉴스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가족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메리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It"s a shame." (부끄러운 일이야.)
미국 사람들은 부부관계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별개의 것으로 금을 긋듯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미국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이혼과 별거를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학교행사라든가 캠프활동, 스포츠대회 등등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부득이 가지 못할 경우에는 친척이든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까지 부탁을 해서라도 아이 혼자 행사에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이 또한 그들의 정서다.
이혼으로 깨어진 부모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자식들이 참여하는 행사에 부모들이 불참함으로써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큰 문제로 간주하는 게 그들이다. 그들의 문화나 정서를 알듯하다가도 어떤 때는 고개가 저어질 때가 바로 이 때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11월 4번째 목요일)이 되기 이틀 전에 학교에서는 "터키(Turkey)데이"라고 해서 전교생의 부모가 학교에 와서 아이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연간 행사인 셈이다. 학년별로 점심 시간대를 조율해서 가정에 가정통신문으로 일정을 보내왔는데 한국에서 늘 해왔듯이 나는 무심히 지나쳐 버렸다. 현근이도 심드렁하게 한마디 툭하고 말았다.
"엄마, 바쁘시면 오시지 않아도 돼요. 나는 상관없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4학년 전체에서 부모가 오지 않아서 점심을 부모 없이 혼자 먹은 아이는 현근이와 여섯 달 뒤에 한국에서 온 같은 반 재구라는 아이 두 명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담임선생님이셨던 미스 멜튼이(Ms. Melton)이 두 녀석들을 같이 데리고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 중학교부터는 학교행사에 부모가 참여하는 기회가 많지 않지만 초등학교는 기금 모으기 행사를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특기적성 발표대회 혹은 학예회와 유사한 행사들이 많기 때문에 부모가 그만큼 학교에 갈 기회가 많다.
미국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비즈니스 때문에 너무 바빠서 아이의 체육대회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이 나온다. 미안해서 쩔쩔매는 아빠와 약속을 어긴 아빠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종종 나온다. 그것은 실생활에서도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공유된 정서다.
현근이와 늘 가까이 지내던 친구 블레이크(Blake)는 엄마 없이 담임선생님과 점심을 먹던 현근이가 내내 마음에 많이 걸렸던 모양이다. 다음날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심각하게 그 상황을 슬픈 표정으로 말하면서 귀띔을 해 주었다.
정작 블레이크(Blake)는 70이 다 된 아버지가 세 번째 이혼 끝에 20살도 훨씬 더 차이가 나는 지금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 부모가 결국 다시 별거상태로 들어가면서 아버지 집과 엄마 집을 매일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아이였다. 블레이크 아버지는 전화요금을 제때에 내지 못해서 전화가 끊기고 그래서 가끔 우리 집에 들러서 전화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현근이와 나의 눈에 비친 블레이크는 온기 없는 곳에서 자라는 아이였다.
가정의 달 5월이다. 아름답고 진정한 가족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게 자식을 사랑하는 표현이 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들었던 뉴스의 한토막이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혼한 가정이 많아서, 언젠가는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편지 띄우는 행사조차도 공교육에서 금지될 날이 올지 모른다
외국어를 공부하는데 지름길이나 왕도가 있을 수 있을까? 독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몇 개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 했던 어떤 분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의 어려움을 마치 망망한 대해에 떠있는 것과 같다고 비교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교실환경이외는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는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 하에서 알맞게 적용할만한 교수법이나 학습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알려져 있는 이런저런 이론도 사실은 ESL(영어권에서 살기 때문에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 환경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실험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환경이든 간에 학습자에게 충분한 투입을(input: 듣기, 읽기) 하지 않고 표출(output: 말하기, 쓰기) 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거다.
외국어 습득이론에 의하면 외국어 학습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어(외국어)를 사용하려하지 않는 기간이 있다고 한다. 이 시기를 가리켜 무성의 기간(Silent Period)이라고 부른다. 무성의 기간을 지나오면서 사실은 학습자들이 읽기나 듣는 것을 통하여 언어에 관한 엄청난 양을 잠재적으로 습득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는 영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거부하면서도 일부 학습자들 중에는 혼자서 독백형식으로 말하기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성의 기간은 후차적인 발화(發話)를 위한 중요한 준비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아기들이 우리말을 배우는 과정을 눈여겨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엄마와 의사소통은 되지 않지만 엄마가 해주는 반복된 말을 듣고, 책 읽어주는 것을 듣고, TV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을 듣거나 하면서 아기들은 우는 단계, 옹알이 단계, 한개 두개의 단어의 단계를 통과하게 된다. 특별히 언어구조나 발음에 관한 의도적인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일정한 준비단계가 끝나면 어느 순간 아이들이 기적처럼 말문을 터트리는 것을 아이를 길러본 엄마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경이로움일 것이다.
언어 습득의 관문
실제로 둘째 아이인 현근이의 영어 습득 과정을 살펴볼 때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처럼 무성의 기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국학교에 입학해서 몇 개월 정도는 "Yes", "No" 의사소통이외는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어에 관한 입력(Input)이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듣고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발화의 단계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끊임없는 담임선생님의 관심, 자원 봉사자들의 읽기 지도, 친구들과의 놀이 활동, 집에 돌아와서 TV어린이 프로그램 시청, 같은 아파트에 살던 친구 블레이크(Blake)와의 놀이와 대화를 통해서 듣고 이해하는 기초적인 단계까지 오는데 반년 이상이 걸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반복해서 사용하는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현근이는 블레이크(Blake)와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캠프활동을 하면서 주로 시간을 보내던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 당시에 현근이가 즐겨 보던 어린이 시트콤 중에 "리즈 멕가이어" 와 "소우 위얼드(So Weird)"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시트콤 형식이었기 때문에 상황전개나 내용을 추측(guessing)하면서 볼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런 프로그램들은 반복되는 표현들과 아이들이 사용하는 재미나는 표현들이 많이 있기 마련이다.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TV를 보다가 말투를 따라하고 흉내를 내곤 하는 모습을 종종목격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매트릭스1 이 미국 아이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현근이는 TV에서 매트릭스1(Matrix1)을 녹화를 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 영화에 깊게 빠져 들었고 무려 현근이 표현을 빌면 50번 정도는 더 보았다고 했다.
9월초쯤 되었을까 (미국에 간 뒤 9개월의 시간 경과) 현근이는 학교를 가기 전 식탁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다가 갑자기 영화배우가 연기를 하듯이 감정까지 넣어 가면서 영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매트릭스 대사였다. TV 화면에서 비추어지는 매트릭스 장면만을 곁눈으로 슬쩍슬쩍 보면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말하기 전에 먼저 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믿겨지지 않았다. 신기했다.
무성(無聲)의 기간(Silent Period)을 벗어나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이었다.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씩 생기고 친한 친구 사이에서 오고 갈 수 있는 토막난 대화나마 가능하기까지는 8-9개월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네 살이 위인 첫째 예근이의 경우는 현근이와 달랐다. 예근이는 영어를 전적으로 습득(자연히 얻어 지는 것) 했다기보다 삼분의 일 정도는 의식적인 학습(Learning)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말할 때도 머릿속에서 한번 휙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한단계 거쳐서 나가야 하는 의식적인 과정이 필요했다.
게다가 예근이는 현근이처럼 친구들과 학교에서든 집에 돌아와서든 자연스러운 놀이 활동을 통해서 영어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다보니 듣기 능력이 현근이에 비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근이 성격 자체가 적극적이고 모험적인 면이 있었다. 잘 되지 않는 표현과 발음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의사소통을 해보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영어습득 이론에서도 성격적인 요소가 영어를 학습하는데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예근이도 현근이와 마찬가지로 여름방학을 고비로 해서 확연히 영어가 향상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름캠프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소규모의 놀이 활동, 스포츠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영어를 듣고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덕분이었을까? 9월 접어들면서 친구들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제법 난이도가 높은 두꺼운 책을 빌려다가 읽는다든가, TV드라마에 몰입한다든가 하는 변화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결국 예근이도 8-9 개월 정도의 발화준비 기간을 겪은 셈이었다.
물론 영어에 노출 될 수 있는 환경, 성격, 나이 그 밖의 여러 변수에 따라 영어의 학습정도가 다를 수 있다. 표출되는 모양새와 시기는 다르다 하더라도 충분한 언어적 입력( language input: 듣기와 읽기)이 우선 되어야지 발화(말하기)로 연결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EFL 환경에 있는 우리나라의 영어학습자들은 의사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많이 듣고 많이 읽어야된다고 본다. 무성의 기간이 설령 길다 하더라도 지치지말고 포기하지 말고 귀와 눈에 넣어보자. 말문이 터질날이 오지 않겠는가.
오마이뉴스한난옥(hanahblue)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