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사건
황태성 사건과 박정희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63년 12월 14일 북에서 내려왔던 황태성이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황태성을 둘러싼 논란은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후보가 유세 과정에서, 공화당이 간첩 황태성의 자금으로 사전 조직되었고 공화당 요원들이 황태성에 의해 밀봉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과거 여수· 순천 사건에 관련이 있었다는 '사상논쟁'이 이미 윤보선에 의해 제기된 마당에, 황태성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또다시 박정희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른바 황태성 사건의 전말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에 앞서, 우선 박정희에게 황태성은 누구였던가?
앞에서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박정희와 황태성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경북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같이 했던 인물로서 황태성은 주로 김천에서, 박상희는 주로 구미에서 활동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황태성이 박상희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웠다.
황태성이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던 시절, 박정희는 형의 친구인 황태성에게 자신의 진로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일제의 만주 육사로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는 이후 단절되었다. 그후 해방이 된 이듬해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인민항쟁이 발생하자 그 와중에서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피살당했고 황태성은 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피신했다가 월북하게 되었다. 북으로 올라간 황태성은 북에서 부무역상까지 올라갔다.
박정희와 황태성의 관계는 남한에서 5.16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시 한 번 운명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남한에서 예상하지 못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자 북한의 대남전략은 잠시 혼선을 빚었다. 미국의 뒷조정 없이도 쿠데타를 일으켜 새 군사 정권을 창출했던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주목했던 그들은 남한의 쿠데타 세력과 접촉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남북 대화를 모색했고 그 결과 서해 도서지방에서 몇 차례에 걸쳐 남북간의 비밀 접촉이 이루어졌다. 남한의 쿠데타 세력 역시 군정에 대한 외부 위협을 완화시킬 생각에서였던지 이 접촉에 응했다.
한편 북한은 남북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과거 박정희와 관계가 있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파견했다. 당시 신장도 하나 떼낼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황태성은 그 일에 자원했다 한다. 남으로 내려온 황태성은 과거 자신이 중매했던 박상희의 처 조기분을 통해 박정희 및 그녀의 사위가 된 김종필과 접촉하고자 했다. 그러나 추후 발표에 의하면 그는 '조 여사의 고발'로 남한 당국에 의해 1961년 10월 20일 검거되었다 한다.
황태성이 접촉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검거되었는지, 아니면 접촉을 하다가 검거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검거된 황태성은 한동안 반도 호텔에 머물다가 그해 12월 초 서대문 형무소로 넘겨졌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황태성에 관한 비밀이 시중에 누설되어 공화당 사전 조직설과 연계되고, 황태성에 대한 재판이 군법회의와 대법원을 왔다갔다 하는 사이 그 사건의 전모가 미 정보당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박정희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쩍어 하던 미군정 당국은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렇게 확산되자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대법원에서 황태성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마자 그를 사형에 처해 버렸던 것이다.
일제하의 젊은 시절에 5년여의 감옥 생활을 감수하며 항일 운동에 투신했고, 말년에는 병든 몸으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으로 내려왔던 황태성, 반면 일제하 젊은 시절에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일본 근대에 투신했고 해방 이후에는 쿠데타의 꿈을 실현했던 박정희. 개인적인 관계로 볼 때, 박상희를 통해 서로 얽혔던 이 두 사람의 운명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악연으로 끝을 맺었다.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군부 세력이 황태성을 죽인 것은 이후 1960년대 내내 남북 관계를 격화시키는 전조가 되었다. 북한은 미 사건을 통해 박 정권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박정희 역시 이 사건을 통해 미국에게 자신이 철저한 반공주의자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계속)
첫댓글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경북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같이 했던 인물로서> 무슨 독립운동을 어떻게?
<그러나 박정희가 일제의 만주 육사로 가기로 결정함으로써 황태성과 박정희의 관계는 이후 단절되었다.> 좌빨들에게 만약 혈서 기사라는 것이 있었다면 박상희와 황태성이 모를 수 있었겠느냐고 물어보아야겠군요.
<미군정 당국은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고 나섰다.> 좌빨들에게 미안하지만 미군정은 1948년 7월에 끝났음.
<말년에는 병든 몸으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남으로 내려왔던 황태성> 간첩에 대한 미화가 대단하군요. 거물급 간첩이라고 불러주는 것으로도 충분할텐데.
<박 정권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그런데 실은 김일성이 황태성을 숙청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을 한국전쟁 말기부터 1950년대 후반 사이에 모두 사형시켜 버렸습니다. 윗글 좌빨 주장대로라면 박헌영이야말로 민족주의자 중의 민족주의자였을텐데 왜 김일성이 세퍼트로 온 몸을 물어뜯게 한 다음 총살시켰느지 좌빨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로당 동지들이 어떻게 전부 총살당하였는지를 본 황태성의 심정이 어떠하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는 살아도 산 몸이 아니었습니다. 남로당 씨를 말린 김일성이 자기를 살려둘리 만무하였을테니까요.
김일성과 황태성 역시 남한에서는 남로당이 어떻게 군부에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만약 윗글 좌빨이 박정희가 남로당 명단을 방첩대에 넘긴 것을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김일성 시각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공산당 편에서는 이미 박정희는 십여년 철천지 원수였을 것을 모를리 없을 윗글 좌빨이
<박 정권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라고 썼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