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14일
숙모 장례를 치르고 귀경하는 길에 들렀던
댜섯 살 때 까지 내 유년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늘 내 가슴을 가득 메워오는 정경이다.
아버지의 친구이신 김동선 아저씨네 셋방에서 살았는데
오른쪽 의자가 놓인 쪽문으로 들어가면 그 셋방이 나온다.
우리가 살던 셋방은 마루도 없이 그냥 방 한 칸이고 그 앞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지금은 약간 달라졌지만
자전거 앞쪽에 보이는 문이 우리가 살던 셋방으로 가는 좁은 통로였다.
김동선 아저씨네 자녀분은 화자 누나 용섭이 형 그리고 혜숙이가 있었는데
용섭형은 누나와 동창이었고 혜숙이는 나보다 후배였다.
동선 아저씨와 아버지는 종종 술을 드시고 저 마루에 앉아 기타를 치시며 뽕짝을 부르셨다.
아버지도 기타를 만지셨지만 연주는 할 줄 모르셨고
대신 구성지고 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셨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추억속의 기둥과 마루가
60년 가까이 그대로 있다니~~
어느 날 함께 살던 막내 삼촌이 불장난을 하다 집안으로 불이 붙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가장 먼저 삼촌의 책과 공책 등을 밖으로 던지셨는데
하필 삼촌이 쓰던 플라스틱 책받침이 떨어져 불에 붙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그 밭침을 주었는데
이미 불이 붙은 그 받침이 녹아내려 어머니의 손바닥에 붙었고
어머니는 손바닥에 큰 화상을 입으셔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
손에 화상을 입었어도 밥, 빨래, 사 남매 돌보는 일은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날을 기억하면 꼭 떠오르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서너 살 된 내게 '그 때 어머니가 얼마나 뜨겁고 아팠을까?" 라는 생각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고, 종종 꿈에 그 광경이 재현되기도 했었다.
그 아픈 기억이 함께 서려 있는 곳이다.
길가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면 첫 번 째가 애란이네 집이었고
그 다음이 김동선 아저씨네 집이었으며
우리는 동선 아저씨네 셋방에 살았다.
애란이네는 길가에 옷가게를 하고 있었고
옷가게 옆은 동선 아저씨가 세를 내어서 자전거포를 하셨다.
올해 87세니 우리 어머니보다 세 살이 많으신 애란이 어머니는
치매는 아니지만 연세 때문인지 우리 어머니는 기억을 못 했고
당신 자녀들과 동생들을 종종 혼동하셨다.
애란이네 집에는 애란이 이모가 함께 살았는데
늘 우리 기억속에 맘씨 좋은 이모로 기억되어 있는 '순임이 이모'다.
우리 어머니와 찍은 사진도 남아 있어서 친척처럼 생각나는 분이다.
사진 속의 순임 이모와 애란엄마는 쌍동이처럼 닮았다.
애란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안타깝게도 50대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 형제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진이다.
왼쪽 위가 순임이 이모 오른쪽이 지난 7월 12날 돌아가신 숙모
아래 왼쪽이 아직도 외갓집 동네(장성군 삼계면 사창리 가마수 부락)에 살고 계신 이모
그리고 오른쪽이 어머니다.
김정식 사 곡 엄마얼굴(1)2.9.mp3
첫댓글 우와~~~ 그랬군요...
저도 제 어린시절 집과 사람 엄마 아빠 떠올렸습니다 다 어디로 간 것 일끼요? 세월도 이사를 갔나 봅니다
왜 이리 마음이 짠하지요...
지나간 것은 다 그리움으로 남나봐요~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따뜻한 정감 넘쳐나던 좋았던 60년대? 였죠.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시울이...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