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웃음 몰아낸 '감동 코드'
합창대회 끝내고 우는 건장한 이종격투기 선수, 레슬링에 몸 던지는 개그맨…
오합지졸의 눈물겨운 도전에 시청자는 함께 울고 웃는다… 생각없이 웃기던 시절은 갔다
때론 강인한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이 연약한 이의 그것보다 더 가슴을 흔드는 법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그 눈물을 오래도록 쫓았고, 시청자들은 함께 울었다. 26일 방송된 KBS2 TV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의 '노래하는 파이터' 이종격투기 선수 서두원 이야기다.서두원은 '남자의 자격' 합창단 33명 중 가장 많이 울었다. 고된 합창 훈련을 마무리하고 순수 아마추어 합창대회인 거제합창대회에서 모두와 함께 '넬라 판타지아'를 부르고 난 직후였다. "챔피언이 무슨 눈물이냐"는 애정 어린 핀잔에 그는 "평생 한 번도 못해 보고 죽을 수 있었는데 드디어 꿈을 이뤘다"고 했다. 누구라도 당장 때려눕힐 것 같은 남자가 고작 합창대회 하나 때문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부조화 속의 감동. 이것이 바로 시청률 31.4%로 주간 전체 시청률 1위를 차지하며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안겨준 '남자의 자격'의 핵심 원동력이다.
- ▲ 아마추어 합창대회 도전기로 웃음과 감동을 함께 준‘착한 예능’의 대표주자 KBS2 TV‘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 /KBS 제공
원래 예능 프로그램의 숙명은 '웃기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예능은 웃기기만 해선 안 된다. '남자의 자격'으로 한때 잊혀졌던 '감동 코드'의 경쟁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웃기기만 해선 싸구려 딱지를 달기 십상이고, 감동만 줘선 안 웃기기 쉽기 때문에 이 모두를 담는 '착한 예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의 자격' 합창대회 프로젝트 '남자 그리고 하모니'는 이런 '착한 예능'의 정답을 보여줬다. 제작진은 이경규·김국진·김태원·이윤석·김성민·윤형빈 등 평균 나이 39.4세 남자 연예인들의 합창 도전기를 전하면서 한 번도 감동과 교훈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저 합창단원들의 고된 훈련 현장을 있는 그대로 중계했다. 시청자들은 알아서 웃음과 눈물을 얻어갔다.
한때 예능판을 좌지우지했던 건 '공익 예능'이었다. MBC '일요일일요일밤에'의 인기 코너 '이경규가 간다'와 '양심냉장고', MBC '전파견문록', MBC '느낌표' 등을 만든 김영희 PD 특유의 '유익한 예능'이 대표적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예능계를 주름잡던 이 '공익 예능'은 '느낌표(MBC)'의 시들해진 인기와 함께 2000년대 중반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MBC '무한도전', KBS '해피선데이-1박2일', SBS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종영)'류의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장난과 현란한 복불복 게임은 감동이나 눈물보다는 '빵빵 터지는 웃음'을 제조해냈다. 그 사이에 '일밤-아버지' '일밤-단비' 등 공익성을 표방하는 '착한 예능'들은 소리 소문 없이 조기 종영의 길을 갔다. 그런데 한동안 잊혔던 '착한 예능'이 다시 예능판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웃겼다가 울렸다가 말이 필요 없다"는 시청자들 찬사가 쏟아진 '남자의 자격'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단기 미션에만 주력해온 MBC '무한도전'은 피와 눈물과 땀이 범벅된 레슬링 도전기를 최근 내놨고, '막장 토크쇼'로 이름을 알린 SBS '강심장'도 이런 코드를 넣었다. 아이돌 스타가 떼로 몰려나와 섹시댄스를 추다가도 결국 끝마무리는 눈물 어린 어려운 시절 고백으로 완성되는 식이다. 장안의 화제인 케이블 채널 엠넷의 '슈퍼스타K'는 어떤가. 필부필녀가 스타가 되는 과정 속에 담겨진 다큐멘터리식 감동 코드로 케이블 역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자연스레 한때 방송가를 주름잡던 '독한 예능'은 설 자리를 잃었다. '공익 예능'을 표방하다가 '이젠 생각 없이 웃겨보겠다'며 올 초 방향을 전환한 MBC '일밤'의 새 코너 '뜨거운 형제들'과 '오늘을 즐겨라'는 시청률 3~4%의 '굴욕'을 당하는 중이다. '아바타 소개팅녀 띄워주기 논란' '퇴근길 지하철 민폐 논란' 등 좋지 않은 가십도 끊이지 않는다. 기존 리얼 버라이어티를 짜깁기한 느낌을 주는 SBS '일요일이 좋다-런닝맨'은 '국민 MC' 유재석의 파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5%대에 머물고 있다. 여자 아이돌을 대거 출연시킨 SBS '영웅호걸'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감동 없이 웃기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한동안 '생각 없이 웃고 떠들었던' 우리나라 예능 판도를 당분간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여운혁 MBC 예능국 차장은 "젊은 PD들을 중심으로 예능에 다큐적인 요소를 섞어놓은 장르가 도입되고 있다"고 했고, 김영수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선임연구원은 "스토리와 서사가 있는 리얼리티 예능 포맷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트렌드"라고 말했다. '착한 예능'은 예능의 주소비층을 10~20대에서 40~50대까지 끌어올리며 대중화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