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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은 일종의 화강암 개석분지를 이루고 있으며,시의 남서는 비교적 평탄하나 북동은 산이 험준하여 농경지는 거의가 산간에 위치하며, 풍산평야를 제외하고는 평야가 극히 적은 편이다. 중앙은 왕달봉(王達峰 일명 太華山, 264m)·병산(甁山, 240m) 등 사방이 200∼300m의 저산성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이 구릉지 중앙의 침식분지에 도심지가 위치하고 있다.
시의 북서부를 따라 태백산맥이 줄기차게 뻗어 보문산(普門山, 643m)·학가산(鶴駕山, 870m)·불로봉(不老峰, 482m)·봉수산(烽燧山, 570m)을 연결하는 일련의 편마암계 산맥을 형성하여 영주분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시의 남동부는 두름산(485m)·와룡산(489m)·사일산(649m)·화부산(626m)·임봉산(687m)·금학산(577m)을 연결하는 화강암과 신라통의 지질경계부를 따라 형성된 500∼600m의 분수령에 의해 시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략 반변천(半邊川)을 경계로 시의 북부지역은 화강암지대로 사질토양이며, 남부지역은 혈암(頁岩)의 신라통지역으로 토질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남은 거의가 점토질이 풍부한 토양이고, 강북은 사토질로 형성되어 있다.
하천은 낙동강의 본류가 시의 중앙부를 남류하면서, 도산면의 용두산(龍頭山, 661m)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하는 온혜천(溫惠川)을 합치고 있다.
또 시 도심지 동부에서 반변천(半邊川)·길안천(吉安川)을 합류하여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안막동 저수산(猪首山)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안막천(安幕川)과 왕달봉의 남쪽사면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안기천(安奇川)을 합하고, 영주시의 봉수산(570m)에서 발원하여 북후면·서후면을 남류하는 송야천(松夜川)과 풍산읍 막곡리에서 합류한다.
이들 강 유역에는 평야가 형성되어 경작지와 주거지로 이용된다. 또한, 시 동부의 낙동강을 따라 양안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나타난다. 특히 북동부의 풍산평야(豊山平野)는 시내 최대의 평야이며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풍산읍 안교리·하리·소산리와 풍천면 가곡리에 걸쳐 형성되어 있으며, 낙동강의 범람과 낙동강의 소지류인 상리천(上里川)·매곡천(梅谷川)이 운반한 토사에 의해서 형성된 충적평야이다.
저수지로는 안동호(安東湖)와 만운지(晩雲池)·여자지(女子池) 등이 있어 관개용수를 공급해준다.
기후는 내륙분지기후의 특성을 나타내어 연교차가 심하고, 안개가 연간 79일로 많으며, 계절풍은 동계에는 북서풍이고 하계에는 서북서풍이다. 1월 평균기온 ·1.6℃, 8월 평균기온 27.4℃이며 연평균 기온은 13℃이다. 강우량은 연간 1,513.7㎜정도인데 6∼9월이 1,135㎜로 75% 정도를 차지한다.
시의 초기 역사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와룡면 가구리와 산야리, 예안면 신남리, 남후면 하아리 등지에서 선돌·고인돌·민무늬토기 등의 유물·유적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 이래 사람의 거주가 많았던 것 같으며, 점차 사회 분화가 이루어져 BC 57년 신라 혁거세 원년에 염상도사(念尙道士)가 창녕국(昌寧國)을 세웠다.[창녕국과 함께 구영국(驅令國), 소라국(召羅國)도 지금의 안동땅으로 초기 신라의 속국이었다]
현재 변진 24개국 중 기저국(己柢國)과 불사국(不斯國)이 이 곳에 비정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행방은 알 수 없고, 3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 고타야군(古陀耶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신라 북부지역의 중요 거점이 되어 500년(지증왕 1)에는 왕이 이 곳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 때 고창군(高昌郡)으로 이름이 바뀌고 직녕현(直寧縣 : 지금의 일직면)·고구현(高丘縣 : 지금의 의성군 북부)·일계현(日谿縣) 등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후삼국 쟁패기에 이 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이 치열하던 곳이며, 이 지역 호족들의 향배에 따라 양국의 세력 판도가 좌우되었다. 922년 이래 이 지역을 둘러싼 양국간의 전쟁이 치열히 전개되었는데, 930년(태조 13) 왕건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병산(甁山)으로 진격, 견훤과 격돌하였다.
이 때 고창군의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이 왕건에게 귀부하여 고려가 승리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전투 결과로 후백제 세력은 경상도지역에서 크게 약해졌고, 인근 지역의 30여 군현이 차례로 고려에 항복하자, 왕건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켜 이 지역을 우대하였다.
그 뒤 영가군(永嘉郡)으로 개명되었다. 그러다가 995년(성종 14)에 길주(吉州)로, 1012년(현종 3년)에 안무사(安撫史)를 두었다가 동 9년(1018년)지길주사(知吉州使)로 고치고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安東府)로 각각 개편된 후, 속군 3개, 속현 11개를 거느리는 계수관으로 존재하였다. 1197년(명종 27)경상도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는데 공이 있어 안동도호부로, 1204년(신종 7)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원 압제 하인 1308년(충렬왕 34)복주목(福州牧)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다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 온 공민왕을 성심으로 섬긴 공으로 다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다. 1383년(우왕 9년)에 안동도로 고쳐 원사 겸 부사를 두었다가 동 14년(1388) 부사로 환원하였다.
그리고 13세기 이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이 몽고의 침입으로 크게 황폐해지자, 이 지역은 국가의 물적·인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곳 출신의 김방경(金方慶)·권부(權溥) 등과 이들의 후예들이 고려 후기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안동지역은 읍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경상도의 중심지역으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세조 때 잠시 진(鎭)이 설치되어 부사가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 지역의 토지는 척박했으며, 풍속은 농상에 힘쓰고 예양과 절검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호구수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안동부 지역은 847호 6,859인, 예안현은 174호 1,445인이었다고 한다. 또 이 지역은 고려후기 이래 정치적·학문적으로 중시되었고,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렸다. 또 선비들의 동족마을이 많이 있어서 여러 성씨들의 명문(名門)이 대를 이어 살아 천년(千年)의 명촌(名村)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였다. 1576년(선조 9)에 부(府) 관내에 패륜아가 그 어머니를 죽인 변이 있어 현(縣)으로 격하되었고, 1581년(선조 14)에 고장 사람들의 상소로 다시 부로(府) 회복되었다. 1776년(영조 52)에 도현(道縣)의 역변(逆變)으로 다시 현(縣)으로 격하되었고, 1785년(정조 9)에 다시 부(府)로 회복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난을 극복해 간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이 지역에서도 김해(金垓)·유종개(柳宗介) 등이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에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팔도를 폐하고 전국을 23관찰부로 고치면서 안동에 관찰부를 두고 경상도 동북부 17개군을 관할토록 하였다. 다음해인 1896년(건양 원년) 양력 8월 4일에 23 관찰부를 폐하고 13도로 개편하게 됨으로써 안동관찰부는 만 1년 1개월만에 폐지되고 안동군과 예안군이 분리되면서 안동군으로 고쳐짐과 함께 감천면은 예천군에, 내성면·춘양면·소천면·재산면은 봉화군에 각각 편입되어 읍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예안군이 다시 안동군에 편입되었고, 1931년 안동면을 안동읍으로 승격시킴과 동시 일부면을 통폐합함으로써 1읍 15개면 218개동으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에 유림들은 광명학교(廣明學校)·협동학교(協同學校) 등을 세워서 신교육 보급에 힘썼고, 항일의병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의병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16일예안 장날, 18일의 안동 장날을 기하여 수천 명의 민중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각 지역의 장날에서 시위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63년 1월 1일 안동읍이 시로 승격되어 안동시와 안동군이 나누어졌다. 1973년 7월 1일풍산면이 읍으로 승격된 이래 행정관할구역의 이동이 약간씩 있었다. 1974년 11월 1일 안동댐 건설로 월곡면이 없어지면서 1읍 13면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개편으로 와룡면, 남후면, 남선면, 임하면 일부가 안동시로 편입(서지1·2리, 수상1·2리, 수하1·2리, 정상리, 정하1·2리, 송천1·2·3리)되었고, 1987년 1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풍산읍 단호1·2리가 남후면 단호1·2로 편입되고, 와룡면 서현2리가 북후면 대현리로 편입되었다. 1991년 4월 15일임동면 지례출장소 폐지, 1993년 11월 6일 임하댐 건설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하면 사의 1·2리 폐지, 임동면 지례 1·2리, 수곡 2리 폐지되고, 1995년 1월 1일 시군의 통합에 따라 안동군과 안동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안동시가 되었다. 1997년 7월 1일 행정동 통합(1읍 13면 13동 3출장소)으로 중구동(화성동 제외)과 동남동을 중구동, 명륜동과 안막동을 명륜동, 옥률동과 신흥동을 동구동, 대흥동·대신동·당북동을 서구동으로 통합되었고, 중구동의 법정동인 화성동을 법상동, 안기동의 법정동인 운안동을 평화동으로 편입하였다. 1998년 12월 1일 행정동 통합(1읍 13면 10동 3출장소)으로 중구, 동구동을 중구동으로 통합, 용성, 송천동을 용상동으로 통합, 서구, 강남동을 서구동으로 통합하였다. 2005년 9월 1일 행정동 통합(1읍 13면 10동 3출장소)으로 법상동의 법정동인 법상동·금곡동·화성동을 서구동으로 통합하고 법상동 폐지되었고, 서구동의 법정동인 정상동·정하동·수상동·수하동을 옛 강남동으로 신설되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와룡면 가구리, 풍산읍 하리리, 서후면 금계리, 풍천면 어담리의 선돌과 풍천면 금계리·어담리, 남선면 신석리, 예안면 신남리, 녹전면 원천리, 북후면 장기리의 고인돌군이 있다.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신안동·태화동, 풍산읍 막곡리, 와룡면 나소리·가구리, 풍천면 어담리, 일직면 평팔리·조탑리, 임하면 신덕리, 도산면 서부리의 고분군이 있다. 이 밖에도 서삼동벽화고분(西三洞壁畵古墳)이 있다. 성지(城址)로는 학가산성·개목산성(開目山城)·선성산성(宣城山城)·송리동산성·신석동산성·왕모산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서후면 태장리의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제15호)·봉정사대웅전(鳳停寺大雄殿, 보물 제55호)·봉정사화엄강당(鳳停寺華嚴講堂, 보물 제448호)·봉정사고금당(鳳停寺古今堂, 보물 제449호)·봉정사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개목사원통전(開目寺圓通殿, 보물 제242호)·안정사 석조여래좌상(安定寺石造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이 있다.
또, 안동신세동칠층전탑(安東新世洞七層塼塔, 국보 제16호), 운흥동의 안동동부동오층전탑(보물 제56호), 일직면 조탑리의 안동조탑동오층전탑(安東造塔洞五層塼塔, 보물 제57호)이 있고, 안동옥동삼층석탑(보물 제114호), 나소동 삼층석탑(羅所洞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가 있다.
이 밖에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 임하면의 안동 임하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안동 임하동십이지삼층석탑(臨河洞十二支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안동 임하동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풍산읍 하리의 안동 하리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8호)가 있다.
그리고 죽전리의 안동 죽전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 막곡리의 안동 막곡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안동 운흥동당간지주(安東雲興洞幢竿支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등이 있다.
안동안기동석불좌상(보물 제58호), 속칭 ‘제비원미륵’으로 불리는 안동이천동석불상(보물 제115호), 풍산읍 마애리의 마애동 석조비로자나불좌상(麻崖洞石造毘盧舍那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북후면 장기리의 옥산사 마애불좌상(玉山寺磨崖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도산면 토계리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 제170호)·도산서원전교당(陶山書院典敎堂, 보물 제210호), 풍천면 병산리의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호계서원(虎溪書院) 등이 있다.
건축물로는 풍천면 하회리에는 유성룡을 모신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유운룡(柳雲龍)의 종택 사랑채인 안동양진당(安東養眞堂, 보물 제306호), 임하면 천전리에 팔작지붕의 민도리집인 안동의성김씨종택(보물 제450호), 일직면 망호리에는 중종 때의 학자 서해(徐嶰)의 거처였던 안동소호헌(安東蘇湖軒, 보물 제475호)가 있다.
그 밖에도 풍산읍 현애리의 안동김씨북애종택(安東金氏北涯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7호), 소산리에는 안동김씨종택(安東金氏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5호), 와룡면 중가구리에는 대청을 이층누각식으로 만든 와룡 남흥재사(南興齋舍,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8호), 풍천면 하회리의 하회원지정사(河回遠志精舍, 중요 민속자료 제85호)·하회빈연정사(河回賓淵精舍, 중요 민속자료 제86호)·약계정(藥溪亭), 해평면 일선리에 병와종택 및 침간정(枕澗亭,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8호)·체화정(棣華亭)·삼구정(三龜亭)·시북정(市北亭) 등이 있다.
중요 유물로는 하회탈및병산탈(국보 제121호), 임진왜란 때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 임하면 천전리에 김용(金涌)이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에 대해 기록한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보물 제484호), 풍천면 가곡리에 안동권주종가문서(安東權柱宗家文書, 보물 제549호)가 있다.
성곡동의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보물 제305호), 북문동의 안동태사묘삼공신유물(安東太師廟三功臣遺物, 보물 제451호), 풍천면 하회리의 안동하회마을(중요 민속자료 제122호)에는 유성룡종가유물(보물 제460호)·유성룡종가소장문적(柳成龍 宗家所藏文籍, 보물 제160호), 서후면 금계리에 학봉김성일종가소장전적(鶴峰 金誠一 宗家所藏典籍, 보물 제905호)·학봉김성일종가소장고문서(보물 제906호) 등이 있다.
또한 가곡리의 권주종손가소장문적(權柱宗孫家所藏文籍, 보물 제1002호), 와룡면 오촌리에 광산김씨예안파종가소장고문서(보물 제1018호)·광산김씨예안파 종가소장전적(光山金氏禮安派 宗家所藏典籍, 보물 제1019호), 옥정동에 농암이현보종손가소장전적(聾巖李賢輔宗孫家所藏典籍, 보물 제1202호)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길안면 송사리에 송사동의 소태나무(천연기념물 제174호), 용계리에 용계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 남후면 광음리에 안동구리의 측백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252호), 녹전면 사신리에 안동녹전면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275호), 대곡리에 안동 임동면의 굴참나무(천연기념물 제288호), 주하리에 와룡면의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가 있다. 대표적인 고건축물은 표와 같다.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는데, 향교로 안동향교와 예안향교(禮安鄕校)가 있다. 고려 후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안동향교는 1565년(명종 20)에 중창한 대설위 향교로서 그 규모가 광대하였으나 6·25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그 뒤 최근에 중건하여 송천동에 있다. 예안향교는 1415(태종 15)도산면 서부리에 창건했고, 성종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하였다.
서원으로는 1568년(선조 1)에 설립한 역동서원은 1684년에, 1574년에 설립한 도산서원은 1575년에, 1588년에 설립한 삼계서원은 1660년(현종 1)에, 1613년에 설립한 병산서원은 1863년(철종 14)에, 1612년(광해 4)에 설립한 주계서원은 1693년에, 1785년(정조 9)에 건립한 서장사는 그 이듬해에 1576년에 건립한 호계서원은 1676년(숙종 2)에 각각 사액되었다.
그 중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은 한국 서원의 표상이며 이 서원에는 현재 1300여 종 5,000여 권의 옛 책이 보관되고 있다. 그 외에도 경광서원·물계서원·사빈서원·도연서원·도동서원·덕봉서원·묵계서원·청계서원·분강서원·백록리사·동계정사 등 많은 원사가 건립되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고 역동서원과 도산서원만 훼철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 교육기구인 초등학교로는 1909년에 예안공립보통학교와 안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20년 일진공립보통학교 외에 20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중학교로는 1942년 안동공립고등여학교가, 1933년에는 안동농림학교가 개교되었다.
현재 초등학교 31개 교(분교 4개 교), 중학교 14개 교(분교 3개 교), 고등학교 13개 교, 전문대학 2개 교, 일반대학교 1개 교(안동대학교)가 있다. 특히, 근래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을 설립하여 국학연구와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면으로는 도서관 4, 박물관 2, 문화재 236, 공연시설 7, 전시시설 1, 사회복지시설 10, 문화원 하나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1970년부터 매년 10월에 ‘안동민속문화제’를 열어 다양한 행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 중 '하회 별신굿'(하회탈춤)과 ‘차전놀이’는 유명하다. 종교기관은 불교 사찰 72개, 개신교교회 170개, 유교교당 2개, 원불교교당 1개, 기타 10개가 있다.
별신굿놀이·풋굿·동채싸움·불꽃놀이·화상놀이·화전놀이·지애밟기(일명 놋다리밟기) 등의 다양한 민속놀이가 이 고장의 특색을 보이며 전래된다. 별신굿은 하회리·수동리·마령리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중 ‘하회별신굿’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면극인 탈춤과 함께 전해져 널리 알려져 있다.
별신굿은 3·5·10년마다 서낭신의 신탁으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제이고, 탈춤은 제의 일부로 서낭신을 즐겁게 해주는 행사였다. ‘하회별신굿’은 당내림·탈놀이·지신밟기·모의혼례·서낭제·허천거리굿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탈놀이만 복원되어 전수되고 있다.
별신굿은 음력 정초에서 대보름까지 행해지는데 먼저 산주가 서낭신에게 신의를 물어 별신굿을 할 것인가를 정한다. 마을의 양반들에게 알리고 부정이 없는 목수에게 내림대·서낭대를 만들게 한다. 그믐날에 각성받이 동민과 산주가 서낭당에 모여 15광대를 산주의 당내림으로 결정하고 동사에서 별신굿이 끝나는 날까지 합숙에 들어간다.
낮에는 연습을 하거나 초청받은 큰집에서 놀기도 한다. 정월 2일 아침 서낭당 앞에 제수를 차려놓고 처마에 당대를 세운다. 내림대는 당방울을 달아 서낭당 안에 세운다. 산주가 내림대를 잡고 정성을 드려 신이 내리면 당방울을 당대에 옮겨 달고 서낭대·내림대를 앞세우고 삼신당으로 농악을 치며 내려온다.
삼신당에 참례하고 마을 사람들이 바친 옷가지를 서낭대에 매달면 탈놀이가 시작된다. 무동·주지·백정·할매·파계승·양반과 선비의 여섯 마당의 탈놀이가 끝나면 마을의 큰집을 돌며 지신밟기를 하고 처녀신인 서낭님을 위로하는 모의혼례가 이루어진다. 다음에는 무당을 중심으로 동구 밖에서 귀신들이 마을에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허천거리굿을 한다.
서낭제는 15일 해뜰 때 서낭당과 국신당에서 보통제와 같은 절차로 지내고 끝난 뒤에 음복을 한다. 동채싸움은 동태싸움·차전놀이라고도 하며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내륙까지 분포되어 있다.
후삼국시기에 견훤이 왕건을 공략하여 안동에서 왕건의 삼태사(三太師)와 싸움이 벌어졌는데,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임을 알고 낙동강에 소금을 풀고 안동사람들이 단결하여 견훤을 강물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여 동채놀이를 하게 되었다 하는데, 본래 정월 보름에 하던 놀이이나 요즈음은 큰 행사 때에만 수시로 열린다.
동부와 서부가 겨루는 편싸움으로 추수가 끝난 뒤 양쪽의 원로가 놀이를 결정하면 준비에 들어간다. 먼저 20∼30자쯤 되는 몸채 두 개를 구하여 동채를 만들 준비를 한다. 동채를 만드는 사람은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추어 만드는데 14일 밤에는 제를 올려 필승을 기원한다.
동채는 몸채 두 개의 앞쪽을 새끼줄로 엇물려 묶고 그 사이를 벌려 지름대 두 개를 묶은 다음, 그 가운데에 짚방석을 매단다. 보름이 되면 동채꾼들은 머리꾼을 규합하여 오후에 동채를 메고 싸움터로 나간다. 동채 위에는 대장이 동채머리에 매단 끈을 잡고, 짚방석에 올라서서 지휘한다.
싸움이 시작되면 머리꾼들은 동채를 감싸면서 팔짱을 끼고 어깨로만 상대방 머리꾼을 밀어낸다. 옛날 지렁이인 견훤을 강물 속에 밀어 넣을 때 이렇게 하였다 한다. 대장의 손짓에 따라 동채꾼들이 움직이다 상대의 허점이 드러나면 갑자기 동채를 전진시켜 상대방의 동채를 누른다. 동채 머리가 땅에 닿으면 지게 되어 있다. 이긴 편은 짚신과 상대방 동채의 방석을 뜯어 하늘로 올린다.
화상놀이는 서후면 저전리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것으로 횃불싸움의 한 종류이다. 풋굿은 7월에 농사일에 노고가 많은 머슴을 위로하는 행사이다.
유색(儒色) 짙은 반촌에서는 동제를 지내지 않는 곳도 있으나, 대부분의 자연촌락에서 서낭제 혹은 동제라고 부르는 제를 매년 한 번씩 지낸다. 제일은 대개 음력 1월 15일인데 2·3일경 당주가 서낭집에 있는 서낭대를 동수나무에 가져가고는 새로이 당주가 될 사람 가운데 서낭대를 잡고 나이와 이름을 불러 서낭대가 흔들리는 사람으로 당주를 삼는다.
서낭대를 새 당주집의 처마 밑에 세워놓고 당주는 목욕재계한다. 다음 서낭대를 모시고 집집마다 농악을 치며 걸립하여 서낭제에 사용될 경비를 모으는데, 마을에 따라 집집마다 갹출하거나 마을의 공동경비로 충당하기도 한다.
13일경에는 제관·축관을 깨끗한 사람으로 고르며, 14일 새벽 당주는 값을 깎지 않고 제물을 준비한다. 이 때 소·돼지고기는 쓰지 않는다. 제관과 도갓집에서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고 근신한다.
14일 밤 자정에는 제물을 당으로 가져가 진설하고 술잔을 땅에 부어 강신한다. 제관이 헌작하고 축관이 독축하고 부복·배례하여 유교식으로 제를 지낸다. 제가 끝나면 제물을 나누어 먹고 집집에 돌리기도 한다.
이 고장에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 자연물관련설화, 「아기장수설화」, 장자못유형설화 및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는 여러 유형의 민담과 영남지방의 시정잡배인 방학중·정만서 일화가 널리 퍼져 있다.
이 가운데 풍산면 하회리 출신의 정치가인 유성룡이 작은아버지의 선견지명에 탄복한 이야기가 전한다. 유성룡의 작은아버지는 술이나 좋아할 뿐, 집안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우매하여 치숙(痴叔)이라 놀림을 받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술에 취하여 찾아와 바둑에 일가견이 있는 유성룡에게 바둑두기를 청하였다. 망설이는 유성룡에게 그는 밭문서를 걸고 내기를 청하여 반국(半局) 만에 물리치고 말았다.
그 뒤 유성룡은 작은아버지가 범상한 분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얼마 뒤 다시 유성룡을 찾아온 작은아버지는 한 중이 숙식을 청하거든 거절하여 우리 집 뒤의 모암(茅庵)으로 보내라고 당부하였다. 과연 예언대로 중이 찾아오니 유성룡은 완강히 거절하고 모암으로 보냈다.
중을 맞은 작은아버지는 술을 취하도록 먹이고는, 만취하여 자고 있는 중에게 비수를 겨누고 일본의 첩자임을 자백하라 하였다. 중은 놀라서 자신은 도요토미의 첩자로 유성룡을 죽이러 왔다고 털어놓았다. 작은아버지는 목숨을 애걸하는 중에게 “왜구가 이 땅에 오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쳐서 보냈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안동이 무사하였다 한다.
이황의 둘째 부인 권씨의 일화는 준엄한 유학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권씨는 우매한 숙맥이었는데 제삿날, 제상에 가득한 음식을 보고 이황에게 밤을 한 개만 집어달라고 하였다. 제를 모시기 전이었는데 이황이 밤을 선뜻 집어주니 문중 어른이 나무랐다. 이황은 “어리석은 손부에게 조상께서 밤 한 개쯤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한번은 권씨부인이 이황의 두루마기를 지어왔는데 양 소매의 길이가 맞지 않고 품도 안 맞았다. 게다가 동정에 밥풀까지 달려 있어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이황은 어이가 없어 웃고 나서는 그냥 그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길안면의 용소(龍沼)는 「아기장수설화」가 간직된 곳이다. 월성이씨 가문에 아기장수가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시렁 위에 올라가 웃고 겨드랑이에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이에 집안이 멸족될까 두려워한 부모는 의논하여 아기를 죽이고 말았다. 그 뒤 건너편 산에 용마가 나타나 곤두박질로 물에 빠져죽었다.
이후로 이 물은 하루에 세 번 색깔이 변하며 메우려 하여도 홍수가 나 메운 흙을 쓸어가곤 하였다. 그 후 아기장수를 태울 용마가 빠져죽은 곳을 용소라 하게 되었고, 월성이씨는 점차 멸망하게 되었다 한다.
이 밖에도 「공민왕설화」·「풍수 남사고설화」·「시정잡배 갈로덕섭이설화」·「용동기설화」·「우남촌설화」 등이 전한다.
이 시는 경상북도 내에서 가장 다양한 민요를 향유하고 있다. 「모심기소리」·「논매기소리」·「타작소리」등의 농업노동요를 비롯하여 달구질·톱질·나무하기 등의 잡역노동요, 「지신밟기」·「성주풀이」등의 신앙성요, 「과부소리」·「시집살이」·「바늘소리」·「주머니노래」·「목화따는 처녀노래」·「메밀노래」·「댕기노래」·「딸노래」·「곰도둑노래」·「물레소리」·「화전노래」 등 다양한 부요(婦謠)가 전한다. 「놋다리」·「대문놀이」·「꼬리따기」등의 유희요가 전승되고 있다.
「모심기소리」는 도산면 의촌리에서 남녀 교환창으로 노래했다 하나, 오래 부르지 않는 동안에 곡은 잊혀지고 가사만 남았다. 임하면 금소리의 「논매기소리」는 아이논매기 때에만 부르고, 논매기를 마칠 때면 “이논배미 논을맬때 어느누가 논을매리 울룰룰상사디야…….”하며 상사디야나 “치야칭칭나네 노자노자 젊어노자…….”하며 칭칭이로 넘어가서 일을 빨리 해치운다.
서후면 저전리에서는 아이논매기 때와 두불논매기 때에 각기 다른 노래를 부른다. 아이논매기 때에는 “에헤헤 산천초목이 푸르러도 인간청춘이 어이그리 덧없이도 늙어지노…….”하며 시작하여 그 사설이 대단히 길다. 두불논매기 때에는 “얼럴럴 상사디여 바다같은 이논전에 가여도다 우리농부…….”하며 역시 사설이 길다.
또 이 곳에서는 「망깨소리」와 「달구소리」 등이 전승되고 있다. 「망깨소리」는 망깨라고 부르는 쇳덩이를 들어올려 말뚝을 박을 때 부르는 노래이다. 망깨에 줄을 달아서 여러 사람이 당겼다가 놓으면 말뚝이 박힌다. 앞소리꾼은 장대를 여러 개 엮어 도르래를 달아놓은 곳 위에 올라가 “어어어라 처어라 천근아망깨는 공중에서놀고 열두자말뚝은 용왕국들어가네…….”하며 노래 선창만 한다.
이와 같은 농업노동요와 잡역노동요가 비교적 잘 전승되고 있다. 게다가 마을주민 또한 민요에 대한 열의가 있다. 이에 경상북도에서는 조차기(趙且基)를 농요기능보유자로 지정, 전승에 힘쓰고 있다.
이 밖에 여성유희요로 「꼬리따기」가 있다. 서로 허리를 잡은 수십명을 한 사람이 하나씩 떼어내면서 부르는 노래로, 떼어내는 사람이 선창자가 되어 “저기봤어.”하고 늘어선 사람의 주의를 흐트려서 떼어내는 것이다. 노래가사가 마을마다 차이가 나서 대개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부른다.
총경지면적 200.83㎢ 중 논은 78.28㎢로 40%를 차지하며, 밭은 122.10㎢로 60%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2008년). 풍산평야(豊山平野)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조·수수·메밀 등이 많이 생산되어 도내 제1의 생산지역을 이룬다.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는 파·감자·토마토·고추 등의 소채 재배와 사과 재배가 활발하며, 특산물인 안동포의 재료인 대마 생산농가가 많다. 특산물으로는 안동포·안동소주·하회탈·산약·참깨·고추를 들 수 있다.
안동포는 서후면 저전리와 임하면 금소리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삼을 재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안동포 짜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 물론 아낙네의 손 작업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인 안동소주는 쌀로 세 번 빚은 곡주로 향취가 은은하고 맛이 감칠난다. 하회탈은 하회마을 입구에서 다양한 크기의 하회탈을 구입할 수 있으며 공방을 직접 찾아갈 수도 있다.
전국 재배면적의 70%를 차지하는 안동산약은 위장·폐 등 내장기능의 보강에 좋으며 특히 당뇨와 변비 예방에 효과가 크다. 그리고 순수한 재래종으로 품질이 우수한 참깨와 질 좋은 고추만을 엄선해 30단계에 걸쳐 위생처리를 한 청결고춧가루가 유명하다.
또한 축산업이 예로부터 활발해 풍산읍을 중심으로 한우가 사육되며, 양돈·양계·누에고치도 성하다. 2008년 현재 입목축적은 9.4㎢이며 임산물 생산량은 종실 27만 9,182㎏, 버섯 7만 1,481㎏, 산나물 17만 7,574㎏ 등이다. 광공업은 48개의 광구가 있으나 가행광구는 22개 불과하다. 주로 사문석·석회석이 산출되고, 납석이 일부 생산된다.
상업활동은 일찍부터 발달하여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1830년대에는 신당장, 2일과 7일에 개시되는 부내장·풍산장과 5·10일의 영항장·산하리장, 1·6일의 예안 읍내장, 3·9일의 옹천장, 6·10일의 구미장 그 외 도동장·우천장 등의 5일장이 있었다. 이들 시장에서는 주로 곡물·채소·안동포·소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1909년에 와서는 부내장이 큰 시장으로 번성하여 농산물과 소·생선 그리고 특산물인 안동포와 안동소주 등이 활발히 거래되었다. 그 뒤 1926년경에 원천·신덕·옥천 등의 시장이 더 개설되었다.
그러나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루던 정기시장들은 1960년대에 안동이 시로 승격되고 경제개발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상설점포가 증가하고 정기시장의 기능이 점차 쇠퇴함에 따라 1985년에는 10여 개로 줄어들었다. 1994년 현재 풍산·북후·풍천·일직·길안·임동·예안·도산·녹전 등 8개의 정기시장과 북후면에 일반시장 1개, 연쇄점사업자 1개가 분포하고 있었다. 2008년 현재 대형마트 1개소가 있고 시장은 시내에 3곳, 풍산읍에 1곳이 열리고 있다.
교통은 시내를 중심으로 영주·예천·영양·봉화·의성·청송 등 사방으로 연결되며, 춘천과 대구를 잇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고, 철도의 중앙선이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는 등 대체로 편리하다.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인 이 시에는 서원·사찰·고적 등 많은 문화재가 있어 경상북도에서 경주시 다음가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대표적인 전통문화관광지의 거점이자 유교문화의 요람이며, 조선시대의 풍습을 이어 온 곳으로, 특히 조선시대 건물과 민속품은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1976년 안동다목적댐이 준공됨에 따라 드넓은 안동호와 함께 관광자원이 개발, 정비되어 관광도시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도산면 토계리에는 동방의 주자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영남 유학의 총본산이자 그의 문학과 사상의 산실인 도산서원이 있다. 이는 퇴계가 57세 되던 1557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자그마한 ‘도산서당’에서 비롯되었다.
상덕사와 전교당은 조선시대 목조건물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장판각에는 유명한 도산십이곡의 판목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970년 신축된 옥진각에는 퇴계의 손때가 묻은 매화연 등의 문구류와 베개·자리와 같은 일상용품이 전시되어 있다. 안동댐 건설로 안동호의 물이 서원뜰 앞에까지 넘실거리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우며 매년 10월이면 도산서원에서 도산별시가 재현된다.
풍천면 병산리 의 병산서원은 유성룡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기암절벽에 의해 병풍처럼 둘러쳐진 듯 하다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학가산 남쪽 기슭에는 신라시대의 고찰인 광흥사가 있다.
천등산 아래 봉정사에는 목조건물로서 부석사와 쌍벽을 이루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이 있다. 그리고 정몽주(鄭夢周)가 수학했다는 개목사 등의 유명한 서원과 사찰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또한 풍천면의 하회마을은 민속촌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많은 민속자료와 하회탈을 보관하고 있어 좋은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풍산유씨의 종가인 양진당과 유성룡의 종가인 충효당을 비롯, 300∼500년 된 기와집 120여 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시의 한가운데에는 고려의 건국공신인 김선평·권행·장길의 위패를 모신 태사묘, 1515년 이명이 건립한 임청각 군자정,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신세동칠층석탑 등 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명승지 또한 많아 풍천면 광덕리의 부용대(芙蓉臺), 안동팔경의 하나인 백운정(白雲亭)과 임하면의 경포대(景浦臺), 길안면의 도연폭포 등이 유명하다. 백운정·경포대는 주민들의 여름 피서지로 애용되고 있다.
그 밖에도 낙동강 본류에 건설된 안동댐으로 인하여 생긴 안동호가 주변의 문화재와 함께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호반관광휴양지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안동호의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안동민속박물관에서 귀중한 문화재와 다양한 옛 생활상을 구경할 수 있다. 안동민속박물관에는 이 지방 출신의 시인 이육사의 ‘광야’가 새겨진 기념시비가 서 있고, 민속촌 주변에는 8만3000여 그루의 꽃나무를 심은 아름다운 용성공원(龍城公園)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무형문화재인 안동차전놀이와 놋다리밟기 등 민속놀이도 전승되어오고 있으며, 특산물인 안동소주가 예로부터 유명하여 민속문화재의 보고임을 자랑하고 있다. 매년 10월 초순에는 차전놀이·화회별신굿놀이·성주풀이 등 각종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안동민속축제가 열린다.
1. 풍산읍(豊山邑)
시의 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96.65㎢, 인구 7,783명(2008년 현재). 읍 소재지는 안교리이다. 본래 신라 하지현으로 경덕왕때 영안으로 고쳐 예천군의 연현으로 하였는데 고려 때 풍산현으로 고쳤으며 명종 때 감무를 두었다가 안동부에 예속시켰다. 고종 때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안동군 풍현내면(豊縣內面)이 되었다.1914년 부군면 폐합시 안동군 풍산현 내면 4개 동 및 서선면 일부 7개동을 병합하여 풍산면으로 개칭하고 11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다가 1943년풍북면의 8개 동 및 풍서면의 1개 동을 편입하였다
계평,괴정,노,단호,마애,막곡,만운,매곡,상리,서미,소산,수,수곡,신양,안교,오미,죽전,하리,현애,회곡 20개 동이었다가 1987년 1월 1일 단호(丹湖)가 남후면에 편입되어 현재 19개의 법정동으로 되었다. 1973년 7월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풍산읍이 되었다.
읍의 북부는 보문산(普門山, 643m)을 정점으로 하는 산지이다. 남쪽에는 북부 산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매곡천(梅谷川)·상리천(上里川) 등의 하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며, 이들 하천의 합류점에는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매곡천·상리천·낙동강으로 둘러싸인 충적지는 시 최대의 평야인 풍산평야(豊山平野)를 이룬다.
면의 동부에는 영주시의 봉수산(570m)에서 발원 남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송야천이 있다. 총경지면적은 26.29㎢로 27.2%를 차지하며 그 중 논은 15.23㎢로 57.9%를 차지하고 밭이 11.06㎢로 42.1%를 차지,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쌀생산이 주가 되며, 조·수수·옥수수·메밀·콩·팥 등의 잡곡, 고구마·감자 등의 서류, 수박·참외·상추·무·고추 등의 채소류와 참깨·땅콩·목화·대마·모시·왕골 등의 특용작물이 재배된다. 양돈·양계와 한우·사슴·개·산양 등의 사육도 성하다.
예천·영덕을 연결하는 국도가 읍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으며, 지방도가 남쪽으로 풍천면을 연결하고 있다. 또, 군도가 북쪽으로 서후면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마애리에 연어정·산수정·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상리리에 예안이씨종택·체화정, 하리리에 모전석탑·삼층석탑이 있다. 막곡리에 석문정사(石門精舍)·청성서원(靑城書院), 죽전리에 삼층석탑, 현애리에 안동김씨북애종택, 소산리에 양소당(養素堂)·청원루·삼귀정이 있다. 또한 마애리·막곡리·매곡리에는 고분군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읍, 34개 행정리(안교1,2,3리, 상리1,2,3리, 하리1,2리, 마애리, 수1,2리, 회곡리, 계평리, 막곡1,2리, 수곡1,2리, 노리, 죽전리, 만운1,2리, 서미1,2리, 신양1,2,3리, 현애리, 오미1,2리, 괴정리, 매곡1,2리, 소산1,2리), 19개 법정리(안교(安郊)·상리(上里)·하리(下里)·수(水)·마애(麻厓)·현애(玄厓)·오미(五美)·회곡(檜谷)·계평(桂平)·소산(素山)·막곡(幕谷)·수곡(壽谷)·노(魯)·괴정(槐亭)·매곡(梅谷)·죽전(竹田)·만운(晩雲)·서미(西微)·신양(新陽)), 222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2. 길안면(吉安面)
시의 남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199.93㎢, 인구 3,518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지리이다. 본래 길안부곡(吉安部曲)으로 고려 충선왕 때 길안현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때 안동군 길안면이 되어 1895년고란·대사 등 12개 이를 관할하였다. 1904년 1월 1일길안현과 임남현으로 분리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남면과 임동면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1974년 7월 1일지례, 지리를 임동면으로 편입시키고, 임하면 현하리를 본면으로 편입시켰다. 1993년 11월 15일임동면 지례리 일부를 대곡리로 편입시켰고, 1995년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길안면이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면내에 와룡산(臥龍山, 489m)·화부산(花釜山, 626m)·사일산(士日山, 649m)·금학산(金鶴山, 577m) 등이 있다. 남부 경계에는 연점산(鉛店山, 871m)·산지봉(産芝峰, 890m)·황학산(黃鶴山, 782m) 등의 높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북부 산지간을 반변천이 심한 곡류를 이루고 흐르며, 그 지류인 길안천이 면의 대부분에 걸쳐 북류, 하안에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5.26㎢로 7.6%, 임야면적은 171.12㎢로 85.6%, 기타 6.8%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4.84㎢로 31.7%를 차지하고 밭이 10.42㎢로 68.3%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곡 이외에 콩·녹두·고구마·감자 등이 주로 재배되며, 양봉과 사슴·개·토끼 등이 사육되고 있다. 천지리에서는 수박이 많이 생산된다.
면의 중앙을 부산∼강릉간의 국도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북부에 의성∼청송간 지방도와 길안∼파천간 지방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현하리에 두릉구택, 금곡리에 용담사(龍潭寺), 묵계리에 만휴정, 대사리에 학소대, 송사리에 소태나무, 용계리에 약계정·용계은행나무 등이 있다. 묵계리에 안동김씨 동족마을이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23개 행정리(천지1,2,3리, 만음1,2리, 백자리, 금곡리, 송사1,2리, 대사1,2리, 고란리, 묵계1,2,리, 구수1,2리, 배방리, 용계리, 대곡1,2리, 현하1,2,3,리), 13개 법정리(천지(泉旨)·만음(晩陰)·백자(栢子)·금곡(金谷)·송사(松仕)·대사(大寺)·고란(古蘭)·묵계(默溪)·구수(九水)·배방(杯芳)·용계(龍溪)·대곡(大谷)·현하(縣下)), 96개 반, 7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3. 남선면(南先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59.09㎢, 인구 2,663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미리이다. 본래 안동부의 남쪽이 되므로 부남면(府南面)이라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안동부에 속하였고, 신석·내림 둥 11개 리를 관할하다가, 숙종 때 남선면과 남후면으로 분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안동관찰부에 속하였다. 1895년 5월 26일(고종 32년)에 16개동으로 남선면으로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군·면 폐합으로 10개동으로 축소 개편 때 임서면의 평지리를 병합했으며, 1983년정상리와 정하리가 안동시에 편입되었다. 1995년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남선면이 되었다. 1995년 12월 1일이천3리를 신설(8개반)하였다.
낙동강과 그 지류인 반변천이 면의 북쪽 경계를 흐르고 있고, 남부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면서 남부에 갈라산(葛羅山, 570m)·기룡산(騎龍山, 508m)·둔지산(屯地山, 402m) 등이 솟아 있다. 반변천과 미천의 지류들이 구릉성 산지간을 개석하고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며, 이 곳에 주로 취락이 입지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7.98㎢로 13.5%, 임야면적은 47.02㎢로 79.6%, 기타 6.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3.35㎢로 42%를 차지하고 밭이 4.63㎢로 58%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곡 이외에 팥·호박·토마토·마늘이 많이 생산되며 젖소 사육이 많다.
도로리에서는 고추 재배가 성하고 과수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원림리에서는 고추·잎담배 재배가, 신석리에서는 수박 재배가 행해지고 있다.
면의 북부 경계를 따라 부산∼강릉간의 국도가 지나고 있으나, 면내의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신석리에 봉각영당, 구미리에 구은정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3개 행정리(구미리, 이천1,2,3리, 신석1,2리, 신흥리, 도로리, 현내1,2리, 원림1,2리, 외하리), 8개 법정리(구미(九尾)·이천(梨泉)·신석(申石)·신흥(新興)·도로(道老)·현내(峴內)·원림(院林)·외하(外下)), 72개 반, 3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4. 남후면(南後面)
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63.15㎢, 인구 2,348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무릉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남쪽이 되므로 부남면이라고 하여 신석·내림 등 10리를 관할, 숙종 때 남선면과 남후면으로 나누어졌다.
1895년 마지·수침 등 15개 리로 개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선면의 일부를 병합, 1983년수상리와 수하리가 안동시에 편입되고 풍산읍 단호리가 남후면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남후면이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북부에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미천이 동부에서 곡류하면서 북쪽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며, 그 연안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9.52㎢로 15.1%, 임야면적은 47.07㎢로 74.6%, 기타는 6.50㎢로 10.3%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4.64㎢로 48.7%를 차지하고 밭이 4.88㎢로 51.3%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 비슷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 주곡생산을 주로 하며, 보리·수박·오이·양배추·마늘·양파·포도 등이 많이 재배된다.
양봉과 한우·개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하아리와 고상리·고하리에서는 고추·마늘·참깨 등을 특산물로 재배하고 있으며, 광음리의 한골에서는 야산을 개간하고 포도단지를 조성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도로는 면의 동부를 중앙선과 대구∼영주간 5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면내에도 구당∼무릉간의 군도가 있으며 중앙고속도록 진입로 이기도 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광음리의 분청사기요지와 측백나무자생지가 있다. 하아리에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민무늬토기유적이 있다. 단호리에 낙암정, 광음리에 고산서원이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은 남후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4개 행정리(광음1,2, 무릉1,2,3, 개곡, 검암1,2, 고하, 고상, 상아, 하아, 단호1,2리), 9개 법정리(무릉(武陵)·광음(光音)·개곡(皆谷)·검암(儉巖)·고하(古下)·고상(古上)·하아(下阿)·상아(上阿)·단호(丹浩)), 66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5. 녹전면(祿轉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70.84㎢, 인구 2,140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평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예안현 서면·북면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예안군 서면·북면에 속하였으며, 예안군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면(西面)이라 하여 지례(知禮), 구단(九丹), 녹전(祿轉), 가야(佳野), 신안(新安), 도치(都致), 안지(安知), 이전(梨田), 사천(沙川), 송음(松音), 능리(陵里)의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군면통폐합 행정구역 개편 때 북면의 갈곡(葛谷), 굴현(屈峴), 골매(骨梅), 신정(新井), 사기(沙器), 양천(良川), 방하(方下), 신기(新基), 안흥(安興), 원당(元唐), 어리(於里)의 11개 리와 읍내면(邑內面)의 교촌동(校村洞) 일부와 영주군(榮州郡) 천상면(川上面)의 우천동(迂川洞)과 봉화군 임지면(林只面)의 구천리(九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녹전면으로 고쳐서 안동군에 편입하였다. 현재 녹전면의 법정리는 신평, 갈현, 매정, 원천, 사천, 녹래, 죽송, 구송, 사신, 서삼등 10개 법정리와 신평리, 원천리를 각각 분리하여 12개 행정리로 되어 있으며, 1995년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녹전면이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를 이루며, 남쪽이 낮고 북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중앙부에는 오동산(梧洞山, 349m), 북단에는 파리봉(497m)이 솟아 있다. 총경지면적은 10.78㎢로 15.2%, 임야면적은 51.27㎢로 72.4%, 기타 12.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5.48㎢로 50.8%를 차지하고 밭이 5.3㎢로 49.2%를 차지,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해진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미곡과 메밀·콩·양배추가 주로 생산된다. 양봉·양계와 한우·젖소·사슴·개 등의 사육도 성하며, 특산물인 산약의 생산이 많다. 매정리와 원천리에서는 잎담배가 재배되고 과수원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사신리에서는 감 재배, 서삼리에서는 양계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면을 북서·남동 방향으로 관통하는 임동∼부석간의 지방도와 감애∼구송간의 군도가 있을 뿐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사신리에 마곡서원, 서삼리에 고려벽화고분, 매정리에는 이황이 제자 이덕홍(李德弘)과 함께 놀면서 바위에 폭포명을 새겨넣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신암폭포(新巖瀑布)가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분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2개 행정리(신평1,2, 갈현, 매정, 원천1,2, 사천, 녹래, 죽송, 구송, 사신, 서삼리), 10개 법정리(신평(新坪)·갈현(葛峴)·매정(梅井)·원천(元川)·녹래(祿來)·죽송(竹松)·구송(九松)·사신(四新)·서삼(西三)·사천(沙川)), 80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6. 도산면(陶山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1.90㎢, 인구 2,208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온혜리이다. 본래 예안군에 딸린 의인현의 동쪽이 되므로 의동면이라 하여 가사·송오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04년 10월예안현, 의동면, 의서면, 하남면 일부를 편입하여 도산면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곳에 있는 도산의 이름을 따서 도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5개 이가 수몰되었다. 1974년 7월 1일 안동댐 완공으로 예안면, 서부, 동부, 선양 3개리를 편입하였고 동년 11월 1일에는 서부출장소를 설치 관할하였다. 1995년 현재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도산면이 되었다.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되어 있으며, 북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북부 면계에는 산성산(山城山, 845m)·용두산·국망봉(國望峰, 481m) 등이 솟아 있다. 면의 동부를 낙동강이 사행하면서 흐르고, 그 남동부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1.81㎢로 11.6%, 임야면적은 76.74㎢로 75.3%, 기타 13.1%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3.84㎢로 32.5%를 차지하고 밭이 7.97㎢로 67.5%를 차지, 밭농사의 비중이 높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을 주로 하나, 옥수수·감자·수박·호박 등도 많이 재배된다. 양봉과 개·산양·토끼 등의 사육도 성하다.
온혜리에서는 약초·송이가 많이 생산되며, 단천리의 면천마을은 기후가 온화하여 목화재배가, 태자리에서는 양봉이 행해지고 있다. 면의 중앙을 북동·남서 방향으로 부산∼강릉간 국도가 통과하고, 남부에는 임동∼부석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으나 교통은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서부리에 예안향교, 토계리에는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분천리에 애일당·분강서원(汾江書院)·농암종택, 동부리에 월천서당(月川書堂), 서부리에 용암정, 단천리에 관어대(觀魚臺)·왕모산성(王母山城) 중턱에 토대를 이루고 있는 갈선대(葛仙臺)가 있어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온혜리에는 피부병·신경통에 좋은 약알칼리성의 도산온천이 있다. 원천리에는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비가 있고 원래 생가도 있었으나 태화동으로 옮겨지고 터만 남아 있다. 온혜리·의촌리·토계리에는 진보이씨(眞寶李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9개 행정리(토계리, 분천리, 의촌리, 원천리, 단천리, 가송리, 태자1,2리, 온혜1,2,3리, 운곡리, 의일1,2리, 동부1,2리, 서부1,2리, 선양리), 13개 법정리(온혜(溫惠)·토계(土溪)·분천(汾川)·의촌(宜村)·원천(遠川)·가송(佳松)·태자(太子)·운곡(雲谷)·의일(宜一)·단천(丹川)·동부(東部)·서부(西部)·선양(宣陽)), 55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7. 북후면(北後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76.86㎢, 인구 3,988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옹천리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부북에 속했으며 안동부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부북면(府北面)이라 하여 가수천·미동 등 52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 후 안동시 북후면으로 개칭하여 14개 동으로 나뉘었다. 숙종 때 북선(北先)과 북후(北後)의 두 면으로 갈라졌으며, 그 뒤 안동군 북후면이 되었다. 1941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마사·소부·동음 등 3개 동이 폐지되었고 상마사는 연곡 2동에 하마사는 도진동에 소부는 서후면 자품동에 석탑동 추곡부락은 예천군 보문면 우래동에 황학·벽사장기의 3부락을 장기동으로 하였다. 또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의 일부를 석탑동에 편입하여 11개 동으로 면사무소는 장기동에 있었으나, 1942년 중앙선 개통과 함께 면사무소, 파출소, 시장이 옹천동으로 옮겨졌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북후면이 되었다.
면내에는 산간지대로 불로봉·학가산·조운산(鳥雲山, 639m)·천등산(天燈山, 574m)·갈미봉(葛美峰, 548m) 등이 솟아 있다. 내성천(乃城川)의 지류들이 산지내에 좁은 산간분지들을 형성하며 북류하고 있다.
송야천 이동(以東)의 남동부는 200m 전후의 구릉지로, 송야천과 그 지류들이 구릉지간을 개석하고 옹천리에서 도촌리에 이르는 하안에 약간의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9.47㎢로 25.4%, 임야면적은 50.81㎢로 66.2%, 기타 8.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7.37㎢로 37.9%를 차지하고 밭이 12.1㎢로 62.1%를 차지,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쌀 생산과 조·옥수수·메밀·콩·감자·상추 등의 재배가 성하다.
양돈·양봉과 한우·젖소·산양·오리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특산물인 산약의 생산이 많으며 신전리와 석탑리에서는 잎담배·약초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한 돼지사육이 군내에서 가장 많다.
면의 동부를 중앙선철도와 영풍·의성을 잇는 국도가 통과하며, 남쪽 경계를 옹천·문수를 잇는 군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장기리에 벽계서원(碧溪書院)과 상효사(尙孝祠), 학가산에 공민왕이 쌓았다는 학가산성이 남아 있다. 또한, 물한리에는 작산정사(鵲山精舍), 도촌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 석탑리에는 미림동굴이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특수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7개 행정리(옹천1,2,3, 장기, 도촌1,2, 오산, 도진, 물한, 연곡1,2, 두산, 월전, 신전1,2, 석탑, 대현), 12개 법정리(옹천(瓮泉)·장기(場基)·도촌(道村)·오산(梧山)·도진(道津)·물한(勿閑)·연곡(蓮谷)·두산(斗山)·월전(月田)·신전(薪田)·석탑(石塔)·대현(大峴)), 122개 반, 70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8. 서후면(西後面)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5.35㎢, 인구 4,386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성곡리이다. 본래 안동부의 서쪽에 있어 부서면(府西面)이라 하여 용산·상계곡 등 31개 리를 관할, 숙종 때 서선(西先)과 서후(西後) 두 면으로 갈라졌다. 1896년 8월 4일부서면에서 서후면으로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선면과 북후면의 일부를 11개 법정리, 15개 행정리로 개편하였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서후면이 되었다.
총경지면적은 17.13㎢로 26.2%, 임야면적은 42.35㎢로 64.8%, 기타 9%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7.42㎢로 43.3%를 차지하고 밭이 9.71㎢로 56.7%를 차지, 밭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곡 외에 고구마·감자·호박·시금치·참깨·땅콩 등이 재배되고, 양봉·양계·양돈과 한우·개·오리·산양 등의 가축사육도 활발하다.
저전리에서는 임하면 금소리와 함께 안동의 특산품인 안동포가 많이 생산된다. 명리에는 양돈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송천리에도 양돈·양계단지가 있어 농가소득이 높다.
면의 동쪽과 남쪽 경계를 따라 영풍·의성을 잇는 국도와 예천·영덕을 잇는 국도가 각각 통과하고 있으며, 북쪽 경계를 따라 옹천·문수를 잇는 군도가 지난다. 또한, 면내에도 풍산∼서후, 저전∼봉정사간의 군도 등이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태장리의 봉정사 경내에 봉정사극락전·봉정사대웅전·봉정사화엄강당·개목사등이 있다. 자품리의 광흥사(廣興寺), 교리에 창렬사(彰烈寺), 금계리에 의성김씨의 학봉종택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와 전문대학인 안동과학대학이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5개 행정리, 11개 법정리(성곡(城谷)·저전(苧田)·태장(台庄)·이송천(二松川)·금계(金溪)·광평(廣坪)·이개(耳開)·교(校)·명(鳴)·대두서(大豆西)·자품(者品)), 99개 반, 6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9. 예안면(禮安面)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3.91㎢, 인구 2,253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정산리이다. 안동시청으로부터 24㎞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시대 매곡현, 통일신라시대 선곡현, 고려시대 길주 예안현, 조선시대 예안현에서 예안군으로 칭하였다가 예안군의 읍내가 되므로 읍내면이라 하여 동부·서부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예안군이 예안면으로 개칭되어 안동군에 속하였다. 그 후 1974년 7월 1일월곡면 7개 리, 예안면 9개 리 합병되었다가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예안면이 되었다.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동부로 갈수록 높아진다. 면의 중앙부를 낙동강의 지류인 동계천(東溪川)과 구계천(九溪川)이 흘러 면의 서쪽 경계를 흐르는 낙동강에 합류된다. 동계천 연안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6.04㎢로 9.8%, 임야면적은 123.48㎢로 75.4%, 기타 14.8%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3.43㎢로 21.4%를 차지하고 밭이 12.61㎢로 78.6%를 차지,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총 면적의 75.4%가 임야인 산간오지이며, 동에는 영양군, 북으로는 봉화군과 인접하여 산악으로 형성된 농촌지역이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쌀 생산이 주로 이루어지며, 그 밖에 미나리·고추, 지황, 복숭아 사과, 담배를 경작하며 주민 소득수준이 낮고 영세농이 많으며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주민은 상대적 피해의식과 각종 규제와 제재로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다.
그리고 젖소·개·산양 등의 가축사육도 활발하다. 또한, 미질리와 기사리에서는 고추·깨·땅콩이 재배되며, 인계리에서는 대추·감·옥수수가 많이 난다. 삼계리에는 삼계목장이 있어 젖소가 사육되고 있다.
면의 중앙에서 임동∼부석간의 지방도와 안동∼현동간의 지방도가 교차하여 면내를 통과하고 있을 뿐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부포리에 성성재종택, 기사리에는 이증(李增)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안동댐 건설로 계곡리의 장성배기마을 앞은 댐물이 호수를 이루어 낚시터와 유원지가 되었다. 부포리에 진보이씨, 기사리에 안동권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20개 행정리, 16개 법정리(정산(鼎山)·구룡(九龍)·미질(美質)·천전(川前)·부포(浮浦)·귀단(歸團)·태곡(台谷)·주진(舟津)·계곡(桂谷)·도목(道木)·기사(棄士)·삼계(三溪)·동천(東川)·도촌(道村)·신남(新南)·인계(仁溪)), 70개 반, 92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0. 와룡면(臥龍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16.97㎢, 인구 4,718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태리이다. 본래 안동부의 동쪽이 되므로 부동면(府東面)이라 하여 물야·가구 등 35개 리를 관할, 숙종 때 동선(東先)과 동후(東後)의 두 면으로 나누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을 합해 남동부에 있는 와룡산의 이름을 따 와룡면이라 개칭하고 종래의 24개 동을 13개 동으로 만들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곡면의 도곡동·절강동·가류동·나소동과 예안면의 오천동, 선양동 일부를 편입하였다. 1983년 2월 15일중가구동, 서지동, 산야동 일부가 안동시로 편입되었다. 1995년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와룡면이 되었다.
이 면은 대체로 200∼300m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동쪽과 남쪽 경계를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며, 많은 지류들이 구릉지를 개석하여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23.29㎢로 19.9%, 임야면적은 67.45㎢로 57.7%, 기타 22.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10.14㎢로 45.3%를 차지하고 밭이 13.15㎢로 58.7%를 차지,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을 주로 하며, 감자·상추·고추·참깨 등의 재배와 양계·양돈과 한우·개 등의 가축사육이 활발하다. 특히 태리의 맥서마을에서 생산되는 쌀은 알맹이가 충실하고 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가구리에서는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고, 주계리의 남애마을에서는 경제성이 높은 잎담배와 약초가 재배되고 있다.
중앙선철도가 면의 남서부를 통과하며, 부산∼강릉간의 국도가 면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또 안동∼현동간의 지방도와 감애∼구송간의 군도가 지나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오천리에 탁청정·후조당·침략정, 지내리에 경묵정(景默亭), 주하리의 경류정(慶流亭)이 있으며, 그 앞 정원에는 수령 600여 년으로 추정되는 기이한 형태의 향나무가 있다. 이 밖에도 가구리에 연대미상의 고분군이 있다.
2008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분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20개 행정리, 18개 법정리(태(台)·중가구(中佳邱)·가구(佳邱)·산야(山野)·주계(周溪)·가야(佳野)·지내(池內)·서지(西枝)·이하(伊下)·이상(伊上)·주하(周下)·감애(甘厓)·서현(西峴)·가류(加流)·도곡(道谷)·절강(浙江)·오천(烏川)·나소(羅所)), 125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11. 일직면(一直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5.55㎢, 인구 3,729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운산리이다. 신라시대 직성현, 조선시대 일직현으로 불렸다. 본래 안동부에 속한 일직현의 지역이므로 일직면이라 하여 팔룡보·구천 등 14개 이를 관할하였다. 1895년 5월 26일(고종32년)에 일직면으로 개칭 13개 리가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원동면과 원서면을 일직면으로 합병하였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일직면이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200∼300m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으며, 남동부에 향로봉(香爐峰, 327m)이 솟아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동쪽에 치우쳐 면을 남북으로 관류하고, 그 지류가 구릉지간을 개석하여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0.25㎢로 12%, 임야면적은 65.64㎢로 76.7%, 기타 11.3%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5.41㎢로 52.8%를 차지하고 밭이 4.84㎢로 47.2%를 차지,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하여진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이 주로 생산되며, 그 밖에 오이·상추·당근·파·마늘·양파·포도·감 등이 재배된다. 양계·양돈과 한우·사슴·개 등의 가축사육도 성하다. 또한 광연리는 마늘·양파 산지로 유명하다.
면의 동부를 중앙선철도와 의성·영주를 잇는 국도가 남북으로 나란히 통과하고 있다. 그 밖에 어담∼일직간 군도와 안평∼일직을 잇는 군도 등이 인근의 면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원리에 서산서원, 조탑리에 고분군과 오층전탑, 송리리에는 남시윤(南時潤)의 처 아주신씨(鵝州申氏)의 열녀비가 있다. 구미리에 의성김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20개 행정리(귀미1,2리, 구천리, 망호1,2,3리, 원리, 광연리, 평팔1,2리, 명진1,2리, 용각리, 국곡리, 조탑리, 송리1,2리, 원호1,2리, 운산리), 13개 법정리(운산(雲山)·구미(龜尾)·구천(九川)·망호(望湖)·원(院)·광연(光淵)·명진(明津)·평팔(坪八)·용각(龍角)·국곡(菊谷)·조탑(造塔)·송리(松里)·원호(遠湖)), 88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12. 임동면(臨東面)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51.07㎢, 인구 2,401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평리이다. 본래 임하현(臨河縣)에 포함되었으나, 1895년 고종 때 지방관제 개정에 있어 임하현의 동쪽이 되므로 임동면이라 하여 안동군에 편입되어 임당·사의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8개 이로 개편,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행정구역 변경으로 월곡면의 마동리·사월리와 길안면의 지례리·지리, 임하면의 망천리를 병합하였다. 1993년 임하댐 건설에 따른 행정구역 조정으로 지례리와 수곡리의 일부가 폐지되었고,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되었으며 현재 12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가 있다.
면 전체가 300m 내외의 산지로 되어 있으며, 북부에 두름산(頭凜山), 남부에 아기산(?岐山, 591m) 등이 솟아 있다. 면의 중앙부를 반변천의 지류인 대곡천(大谷川)이 남서류하고, 양안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경지면적은 10.99㎢로 7.3%, 임야면적은 113.21㎢로 74.9%, 기타 18.2%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3.54㎢로 32.2%를 차지하고 밭이 7.45㎢로 67.8%를 차지, 밭농사의 비중이 높다.
임동면은 비옥한 토질로 다양한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으며 주요 농작물로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임동사과와 고추, 콩, 팥, 참깨, 보리, 메밀 등 청정농산물인 산지형 농업이 발전하였으며, 마늘·잎담배가 유명하다. 그리고 양봉·양계와 개·젖소·오리 등의 가축도 사육하는데, 지례리의 천곡마을에서는 송이버섯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한 아기산 등산로를 5개코스로 정비하였으며, 지례예술촌, 수애당 등에서 전통고택민박체험 등 임하호 주변에서 가족 휴양지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유,무형문화재 15종이 소재하고 있다.
면의 중앙을 남으로 치우쳐 당진∼영덕간의 국도가 가로지르고, 중평리에서 국도와 갈라진 임동∼부석간의 지방도가 나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으로 지례리에 지산서당·오류헌(五柳軒)·지촌종택, 수곡리에 수애당, 박곡리에는 삼가정(三柯亭)이 있다. 또 지례리의 천곡마을에는 수십년 전에 특수한 구조와 솜씨로 건축된 한옥민가가 보존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20개 행정리(중평(中平)1·2리, 수곡(水谷)리, 박곡(朴谷)리, 망천(輞川)1·2리, 고천(高川)1·2리, 지(枝)리, 갈전(葛田)1·2리,마령(馬嶺)1·2·3리, 마(馬)리, 사월(沙月)리, 위(渭)1·2리, 대곡(大谷)1·2리), 12개 법정리(중평(中平)·수곡(水谷)·박곡(朴谷)·고천(高川)·갈전(葛田)·마령(馬嶺)·위(渭)·대곡(大谷)·마(馬)·사월(沙月)·망천(輞川)·지례(知禮)·지(枝)), 64개 반 80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13. 임하면(臨河面)
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91.69㎢, 인구 4,002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덕리이다. 안동시에서 남동쪽으로 14㎞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고구려시대에는 굴화군으로 칭하고 신라시대에는 곡성군으로 개칭 고려초에는 지금의 월곡과 임동지역을 포함해서 임하현(臨河縣)으로 칭하였다. 1906년에 임하현을 폐하고 안동군에 붙여 임현내·임남·임동·임북·임서면으로 개편하였다. 본래 안동부에 딸린 임하현의 읍내가 되므로 임현내면이라 하여 송동·송서 등 13개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임하내면(臨河內面)이 되었다. 그러다가 1931년에 임하면으로 개칭되었다. 1974년 7월 1일 안동호(安東湖)가 건설되면서 현하리는 길안면으로 망천리는 임동면으로, 월곡면, 노산, 석동리는 임하면으로 편입되었고,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개편으로 송천·석동리가 안동시로 편입되었다. 그 후 1993년 11월15일 임하댐이 준공되면서 사의리가 임하리와 임동면 박곡리로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임하면이 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남으로 갈수록 높아지며, 남서부 경계에 기룡산(騎龍山, 508m), 남동부 경계에 약산(藥山, 583m)이 솟아 있다. 낙동강이 북쪽 경계를 따라 흐르고 있고, 영양군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면의 중앙부인 임하, 천전, 신덕을 거쳐 흐르면서 동서로 관류하고, 지류인 길안천은, 오대, 금소, 임하, 신덕으로 북류 하다가 신덕 용머리에서 합류한다. 이들 하천유역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있다.
총경지면적은 10.79㎢로 11.8%, 임야면적은 63.27㎢로 69%, 기타 19.2%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5.27㎢로 48.8%를 차지하고 밭이 5.52㎢로 51.2%를 차지,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해진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벼농사를 주로 하며, 메밀·콩·팥·수박·오이·가지·무·대마 등의 농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주요 특산물로는 오대리의 사과, 금소.고곡리의 대마(삼베),임하 신덕.천전1리의 시설채소(느타리버섯, 복수박)이며, 노산, 천전2리의 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양봉과 개 등의 가축도 사육한다. 고곡리의 나릿골에서는 표고버섯을 많이 재배하며, 천전리에서는 소·돼지 등의 가축사육을 대규모로 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금소리에서는 서후면 저전리와 함께 안동의 특산품인 안동포를 많이 생산한다.
면의 북쪽을 당진∼영덕간 34번 국도가 천전리를 통과하고 있고, 중앙부에는 부산∼강릉간 35번 국도가 신덕, 금소, 고곡, 오대리를 지나며, 남부에도 의성∼청송간 지방도가 나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임하리에 사빈서원·송석재사·백운정과 호계서원이 있는데, 이는 본래 월곡면 도곡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현위치에 옮겨졌다. 또, 동삼층석탑과 십이지삼층석탑·원림사지오층석탑·석불, 금소리에 금곡재가 있다. 천전리에는 의성김씨종택이 있다. 그리고 금소리 모심기 노래등 다수의 민요가 전해져 오고 있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13개 행정리(임하1,2리, 천전1,2리, 추목리, 신덕1,2리, 금소1,2리, 고곡리, 오대1,2리, 노산리), 8개 법정리(신덕(新德)·임하(臨河)·천전(川前)·추목(楸木)·금소(琴韶)·고곡(古谷)·오대(梧垈)·노산(老山)), 72개 반, 3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4. 풍천면(豊川面)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93.88㎢, 인구 4,841명(2008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갈전리이다. 삼국시대에는 하지현(下枝縣), 고려시대에는 풍산현(豊山縣), 조선시대에는 풍남면(豊南面), 풍서면(豊西面)으로 칭하였다. 본래 풍산현의 지역으로 1895년풍산읍내 남쪽이 되므로 안동군 풍남면이라 하여 하회·광덕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풍현내면의 일부와 일직면의 일부를 관할, 1934년풍남면과 풍서면의 소산리를 병합하여 풍천면으로 개칭하였다. 1976년 7월 1일 어담출장소(魚潭出張所) 설치하여 5개 리를 관활하였고,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안동시 풍천면이 되었다.
낙동강이 하회리 부근에서 심한 곡류를 이루며 면의 중앙부를 가로지르고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그 남부에는 봉화산(烽火山, 400m)을 최고봉으로 하는 산지가 있다. 낙동강 부근에는 낮은 구릉군이 분포하고, 풍산읍과 경계부에 위치하는 검무산(劒舞山, 332m)이 있다.
총경지면적은 22.17㎢로 23.6%, 임야면적은 59.63㎢로 63.2%, 기타 13.2%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은 12.96㎢로 58.5%를 차지하고 밭이 9.21㎢로 41.5%를 차지, 논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을 주로 하며, 마늘·메밀·땅콩·수박·무·고구마·감자·우엉·파·감 등을 많이 재배한다.
양봉과 한우·젖소·개·산양 등의 가축사육도 성하다. 또한, 어담리와 금계리에서는 잎담배와 고추 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가곡리에는 풍천새마을공장이 있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견직물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면을 횡단하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북에는 상주∼풍산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남에는 구담∼일직간의 군도가 나 있으며, 면의 서부에는 금성∼예천간의 지방도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병산리에 병산서원, 광덕리에 부용대·옥연정, 하회리에는 안동하회민속마을이 있으며, 하회유씨의 대종가인 안동양진당과 충효당이 있다.
그 밖에 하회리의 부용대 부근에는 옥연정(玉淵亭)과 화예서당(花藝書堂)·쟁암정(爭庵亭) 등이 있어서 뱃놀이의 가경을 이룬다. 하회마을 중앙에는 수령 600여 년의 거목 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의 삼신을 위한 당나무로 받들어지고 있다. 가곡리에 가일수곡종택이 있다. 하회리에 풍산유씨(豊山柳氏), 구담리에 순천김씨(順天金氏)·광산김씨(光山金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행정구역은 1개 면, 24개 행정리, 13개 법정리(갈전(葛田)·도양(道陽)·구담(九潭)·광덕(廣德)·기산(箕山)·신성(申城)·구호(九湖)·병산(屛山)·하회(河回)·가곡(佳谷)·어담(漁潭)·금계(錦溪)·인금(仁今), 135개 반 83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