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전능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주의 종들 가운데 주의 성령으로 함께 내주하시고, 우리 속에 주시는 구원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의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도록 이끌어 주시고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조명하시고 기도하는 중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를 이끄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을 조명하시고 이 말씀에 담겨진 계시의 뜻을 분별하여 알게하사 어린아이 같은 우리로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게 하시고 복음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우리 어깨에 달려 있사오니 주여, 주의 종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고 주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주님, 사도들이 걸어갔던 그 믿음의 길, 헌신의 길을 우리도 뒤따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소망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정진하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가정마다 또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에 따라 간구하는 기도의 소원이 있사오니, 기도하는 중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기도하고 부르짖게 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됨을 믿고 확신 가운데 거하도록 기도의 문을 열어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시간도 주께서 함께 하시고, 이 말씀을 배우는 모든 종들에게 복을 주시며 구원의 확신을 얻을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은혜의 수단을 동원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권념하는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지난주에 믿음과 확신에 대해서 설명했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로, 믿음의 본질로서의 구원의 확신을 가르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참되다면 그 믿음 안에는 확신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칼빈은 뭐라고 했냐면, 확신은 믿음의 본질로서 수반된다고 했지만 동시에 무엇을 말했냐면 믿음과 확신은 실제로 언제나 같이 가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 안에서는 믿음과 확신은 언제나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나란히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이 있을지라도 확신이 없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의 어떻게 보면 확신에 대한 가르침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칼빈의 가르침에 나오는 특징이다.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의 정의를 할 때, 믿음은 이러한 것이라고 지난주에 소개했다. 믿음의 정의를 다룰 때 그 믿음은 반드시 확신을 수반한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 믿음이 크든 작든, 예를 들어 주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지만 그 작은 믿음이라도 참된 것이라면 그 안에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인간적인 협력을 요청하지 않는다. 믿음의 정의에 있어서는. 그래서 믿음의 정의를 내리게 되면, 정의를 할 때는 반드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같이 간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정의가 아니고 이제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경험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믿음이 참될 지라도 반드시 확신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참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확신이 그리고 확신을 가졌다가도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혹은 삶의 어려움이 닥쳐오게 되면 확신이 흔들려서 애초에 확신이라는 것을 갖지 않은 것처럼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을 서로 나누고 그 둘의 상이한 관계를 동시에 말하고 있으므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주석을 뒤져보면 이런 서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믿음을 정의할 때는 확신을 얻기 위한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도 필요가 없다. 그냥 믿기만 하면 확신은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의 영역에서는 믿어도 확신이 없을 수도 없고, 또 뭐라고 하냐면 나중에 넘어가면,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주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돕는 2차적인 은혜의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1차적인 것은 본질 안에 있는 것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경험에서는 확신이 믿음이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하냐고 물으면 확신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신을 갖도록 돕기 위한 2차적인 은혜의 수단을 동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서 확신을 갖도록 권면해야 한다고 이렇게 가르친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확신이란 굉장히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고 노력했다는 결과물인 것처럼 말한다. 한편에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해놓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인간의 노력여부에 달린 것처럼 말하고. 이렇게 됨으로써 이 둘 사이에 뭐가 있는 것처럼 보이냐, Contradicting(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이것 때문에 첫 시간에 소개했던 소위 말하면 칼빈에 대한 해석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생각나는가? 그것 잘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칼빈 후예들 간에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믿음의 본질 안에 확신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이 칼빈이 주장하려했던 원래의 입장이라는 입장이 있고, 어떤 쪽에서는 어떤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 혹은 다른 은혜의 수단을 동원해서 확신을 얻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인간 협력적 요소가 있다. 인간이 노력을 함으로써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때는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협력적인 요소가 사실은 후대에 칼빈주의자들, 혹은 칼빈의 계승자들이 칼빈의 신학의 의도와는 다르게 발전시킨 형태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결국 이런 칼빈의 신학 안에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주장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런 논쟁이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일단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난주 여기까지 강의하였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모순에 대한 칼빈의 인식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칼빈 자신은 모순되어가는 듯한 두 주장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혹은 좀 다르게 칼빈 자신은 이것을 모순이라고 인식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단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칼빈은 한번이라도 이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이런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논쟁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될 만한 칼빈의 신학적 특징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칼빈이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대답을 시도한 적이 없으나 이 둘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신학적인 구조가 있다. 그 구조가 네 가지쯤 된다. 그러니까 칼빈의 신학 안에 있는 특징들 네 가지는 우리들이 이런 문제를 해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특징들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칼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긴장이나 모순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는 해명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사고에 탁월했던 위대한 신학자 칼빈이 이런 두 가지 주장을 거침없이 펼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신학적인 사고를 되짚어 가면서 모순이 되어 보이는 듯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믿음에는 필연적으로 확신이 따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칼빈의 모순되는 듯한 칼빈의 주장과 관련한 칼빈의 해명은 네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1.1. 칼빈의 모순되는 듯한 주장과 관련한 해명들
당위와 현실 사실의 대립과 긴장. 현실과 당위 사이에 긴장과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1.1.1.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현실 사이의 괴리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실제 믿음의 경험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설명하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일단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것은 긴장과 대립을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처럼 던져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것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경험 안에서 일정한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완전한 구원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약속이 아직까지 그림자, 혹은 상징, 혹은 소망의 형태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믿음이 필연적으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태이고, 실제로는 믿음을 행사하는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만큼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있으리라고 했던 그 확신을 우리의 경험 안에서는 일정하게 보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이다. 따라서 바로 이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현실 사이에 이런 괴리가 생기게 되고, 그 괴리가 결국에는 이와 같은 긴장이 있는 것처럼, 대립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말을 한다. “신자의 경험은 상당히 다르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종종 그들에게 닥치는 불안과 심각한 두려움으로 흔들리곤 한다. 그들의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는 시험이 너무나 광포해서 믿음의 확신을 거의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확실하고 분명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의심에 물들지 않거나 곤경을 당하지 않는 확신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이 말에서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냐면 믿음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믿음은 성령의 역사, 성령의 씨라고 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성령을 씨뿌리는 자로 설명하였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이 믿음을 농부가 마치 씨를 뿌리듯이 뿌린 것이다. 그런데 그 성령이 주신 그 믿음은 에베소서 2장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은 크든 작든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선하고 완전하다.
믿음 자체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믿음을 행사할 사람은 누구냐면 나 자신이다. 나는 그 믿음의 완전함에 이르지 못할 만큼 나 자신은 언제나 불신과 곤경에 허덕이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믿음을 가진 나는, 그 완전한 믿음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수준만큼 행사하지 못하는 연약함 속에 있기 때문에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주신 믿음은 완전하고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믿음은 나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 밖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안에서 조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의 인간적인 본성과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결과 내 안에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을 행사해야 될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런데 나는 두려움과 근심과 생활의 곤란함과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아 늘 흔들리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수준만큼은 그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한 믿음을 하나님의 기대만큼 행사하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꾸지람이 있는 것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말은 믿음이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이 말이 아니라 그 믿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꾸지람이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사실 작은 믿음이 있고, 큰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행하기를 기대하는 만큼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을 주님이 작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사실 믿음이 작은 것이 아니고, 그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한계가 작은 믿음이라는 질책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바로 그 차이,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 사이에 괴리가 있고, 그 괴리 때문에 필연적인 구원의 확신이 때로는 우리의 역사적인 경험 안에서는 우연적인 것으로 가변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1.1.2. 성령과 육신 사이의 대립
첫 번째 설명은 뭐냐 하면 믿음의 정의와 경험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을 하였고, 두 번째 설명은 육신과 성령의 대립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면 여기 믿음의 경험은 사실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 세상의 근심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에 언제나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 세상의 근심 등등의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믿음의 정의의 영역, 당위의 영역은 전적으로 성령의 영역이다. 따라서 저렇게 육체와 성령의 대립으로 인해서 무엇이 생기냐면 긴장과 괴리가 생긴다고 설명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예를 들면 로마서 8:2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보면 해방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미 종결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해방은 이미 선언되었고 종결된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 장인 7:14-15에 보면 무슨 말씀이 있느냐면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을 받는 신자들이 승리와 안전의 경험과는 다른, 패배와 고투의 경험을 거의 불가피하게 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8장에서는 성령의 법이 너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켰다고 종결된 행위로서 말씀했다. 그런데 7장에서는 뭐라고 하면 여전히 우리 신자의 경험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좌절과 고투,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이런 상황이 예외 없이 불가피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모순이다. 방금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면서.
그러면 더 이상 신자들의 영적인 고투는 없어야 한다. 죄에서부터 해방되었는데 뭐 더 이상 죄 때문에 고민해야 되겠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신자의 경험에 정말 죄로부터 완전한 경험이 있느냐, 우리 경험에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자신을 잘 보라. 여러분,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가 더 날카롭게 인식된다. 그래야 정상이다. 자신의 부패성이 더 심각하게 인식되어야 그게 정상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점진적인 성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자신의 죄성과 부패성은 더 깊이, 더 날카롭게 인식을 해야만 정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이전보다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어야 정상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야 한다. 나는 무가치하고 부패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전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오늘 나의 나됨 사이의 감격이 어느 때보다 정말 철저하게 벌어지는 상태, 그게 무엇이냐면 점진적 성화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외적 증거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20-30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회개할 기도가 없다고 말하면 지금 신앙생활이 정상적으로 되고 있지 않다는 신호이다. 여러분, 기도의 내용도 신앙의 성숙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기도의 깊이와 폭도 신앙의 성장과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의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사람이 있다. 젊은 날 한때는 선교를 위해 기도하다가 나이가 들면 이제 결국 기도의 바운드는 가기 가족이다. 나중에는 자신 한 몸이다. 그렇게 되면 그거 문제있는 것이다. 사실은 기도의 깊이와 폭이 신앙의 연륜과 함께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야 정상이다.
좀 더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기도제목이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기도로 바꿔져야 하고, 진취적인 승리를 위한 기도바다는 자신의 내면을 조명하고,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깊은 죄성 때문에 진짜 몸부림칠 줄 알아야 그게 신앙성장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깊은 좌절감이 없으면 그거 신앙생활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이 50-60이 되어서 사업 성공만 부르짖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표기도할 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기도는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해야 한다. 대표기도는 공적인 기도이다.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전체 교우들을 위해서 우리의 눈을, 세상에 붙어있는 시각을 떼어서 해 너머의 세상으로 우리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제대로 구해야 한다.
그런데 신자의 삶의 경험에 무엇이 있느냐면 죄로 인한 깊은 좌절과 고토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 여러분, 죄가 정말 지긋지긋하게 사람에게 달라붙는다. 그리고 이 죄가 어제보다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 나이가 들수록 죄의 강이 조용히 흐른다. 깊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자신은 안다. 자신 속에 죄의 강이 깊게 흐른다는 것을 안다. 그것 때문에 참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 홀로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인 것처럼 느낀다고 하였다. 남들은 그런 고민이 없는 것 같고, 자기만 이렇게 죄문제로 고민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그게 잔 오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랬다. 그리고 우리 앞에 산 신자들이 그랬고, 지금 우리도 그렇다. 이게 정상적인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가진 공통된 경험이다. 장담하는데 나이 들수록 죄문제로 깊이 고민한다.
그래야 정상이다. 그게 내가 그 전보다 더 많이 타락해가고 있구나, 실제로 더 타락할 수도 있다. 정말 비통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정말 그 정도와 강도에 있어서 그전보다 죄를 대담하게 짓는 행위가 자행될 수가 있다. 그런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죄에 대해서 깊이 날카롭게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정상이다.
여러분, 롬 7:14-15이 8장보다는 앞에 있지만 앞에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 7장, 늙었을 때 8장, 이러면 오해이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 생애 말년에 쓴 것이다. 그런데 생애 말년에 쓴 로마서의 내용을 보면, 7장은 사도 바울이 순교를 얼마 앞두고 있지 않는 그때도 죄로 인한 갈등과 고투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사도의 내면세계의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면 죄문제였다. 7장에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것보다 더 큰 모순이 없다. 이거야말로 정말 극단적인 모순이고 대립이다. 내 마음의 소원은 율법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몇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원은 실현되지 않고 내가 미워하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중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순 속에 있는 고독한 인간이 느꼈던 영적인 고투와 괴로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 이런 사실에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기 몸에 칼을 대고 거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런다고 유혹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유혹은 고도의 영적인 것이다. 그 정도 팔 하나 자른다고, 눈 하나 판다고 그런 경험이 없는가? 아니다. 이 경험은 오래 전에 아다나시우스의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안토니우스가 한 말이다. 그는 광야에서 들어가 오랫동안 기도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죽은 줄 알았다. 광야에서 소식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무엇을 했냐면 기도하면서 세상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돌아온 그가 한 말이 있다. "내가 광야에 갔더니 세상이 나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 이거 심오한 말이다. 눈을 감는다고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귀머거리가 된다고 유혹이 없는 것 아니다. 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생애 말년까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8장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방금 7장 읽었거든. 8장에 가면 이렇게 말한다. 아멘이 잘 나오지 않는다. 7장의 잔상이 나와서 8장을 읽어도 아멘이 잘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8장 이 말씀은 아멘하기 벅차다. 생각 없이 하면 할 수 없다. 정말로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롬 8:2을 읽을 때 이거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혼란을 느낀다. 그게 정상이다. 무덤덤하면 아직까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니까 옳겠지 생각한다. 한 번 고민해 봐라.
바로 이것이다. 여기 지금 뭐가 있냐면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 사이에 대립과 투쟁이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성령의 영역이었던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은 성령의 영역이다. 마치 이것은 롬 8:2처럼 읽어야 한다. 그런데 경험의 영역, 7장은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성령의 내주를 받은 신자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 안에는 무엇이 있냐면 해방과 승리와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좌절과 투쟁이 연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과 육체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한다면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관계에 있는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칼빈의 주장은 잘 설명이 된다. 그런 도식 안에서 잘 봐라.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남편인 로이드 존스의 생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내가 한 말이 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침상에서 자다 보면 베개를 끌어 앉고 노인이 소리 없이 울더라는 것이다. 비통하게 우는데 잠이 깬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단다.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들어보았더니 자기의 죄때문에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건져주옵소서.
그러면서 비통하게 울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목사님 부인도 그날 밤 한숨도 잠을 못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때 생각했던 것이 '아, 내가 위대한 성자와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자의 길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있다. 누가 성자냐고 물으면, 사실 죄의 고통과 깊이를 아는 자이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깊은 죄인 없다. 남을 뜯어 고치려고 덤비지 마라, 사실은 자기가 문제이다. 죄인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기 잘못을 못보는 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남에 대해서는 눈이 밝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뭐라고 하냐면 죄인이라고 한다. 성자는 누구냐, 자기 자신의 죄를 깊이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성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롬 8:2과 같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기 때문에 이런 투쟁과 좌절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성령과 육체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라는 특징을 띠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성령이 신자들에게 임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상황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들이란 누구든지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자연인들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연인의 마음에는 이런 영적인 고투가 없었다. 평화로웠다. 왜냐하면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어떤 내적인 긴장도 충돌도 없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만약에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는 롬 7:14-15의 경험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 속에서 내주하시는 그 순간부터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서로 충돌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새로운 법을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성령이 우리 안에 믿음을 씨처럼 뿌렸다. 성령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냐면 정말 아름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그 인간의 이상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이다. 거룩함을 알게 하고, 선한 것을 깨닫게 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게 한다. 그때부터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 이전의 편안했던 모든 것들이 마침내 다 실상이 드러나게 되고 그때부터는 그 죄를 벗어버리려는 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내적인 긴장과 충돌이 반복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성령의 내주가 무엇이냐? 한 인간의 혁명의 내적 시발점이다. 새로움에 대한 비전, 새창조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면 옛 질서에 대한 아무런 반감도 없다.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이다. 새로움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 질서의 비참한 상태, 저주스러움을 마침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새로움이 심각한 상태, 저주스러움을 마침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소위 말하면 부정(negation)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본 것은 절대로 부인(deny) 못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보고 약속으로 받은 그것을 좇아가려고 하는 이 강력한 운동은, 한편은 자신의 현 질서를 부정하려는 부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런 충돌이 생기느냐? 성령의 내주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씨를 받은 신자는 성령의 뜻에 따라 그 마음의 소원이 정위(正位)하게 된다. 오리엔틱. 하나님의 뜻에 이제부터는 맞추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질서의 혼란이 온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영광에 들어가기까지는 옛 사람은 죽었지만 육체의 법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인 거다. 이게 핵심이다. 내가 이건 성화론 할 때 말씀 드렸는데, 옛 사람은 죽고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는 예수님 홀로 고독하게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택정한 그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서 다시 못 박혀 돌아가셨단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죽으실 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단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누구냐? 우리의 옛 사람이다. 그런데 옛 사람은 죽었어. 여기서 옛 사람은 죽었지만 뭐가 남았느냐?
우리의 육체의 소욕은 그대로 죽지 않고 남아 있다. 이 육체의 소욕은 언제 죽느냐면 우리의 육체의 죽음을 죽을 때 마침내 육체의 소욕도 멸하기 된다. 육체가 살아 있는 한 육체의 소욕은 있잖은가? 인간의 욕심, 정욕, 악한 부패한 성향 이런 것들은 여전히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세워질 때 우리 옛 사람은 죽지만,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옛 사람이 죽었다고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자.” 이렇게 말할 때도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 'Lust' 이것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영역 안에서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충돌하면서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는 것이다.
로마서 6:6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여기 보면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 못박혔다고 그랬지 않은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옛 사람이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옛 사람이 누구냐? ‘παλαιός’, 이 옛 사람은 ‘새 사람’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대척점이 있는 것이다. 새 사람이 있고 옛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바울 서신에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로마서 6장에서 이 옛 사람은 중생하기 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전에, 자연인이자 동시에 아담 언약 안에 있던 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들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법적인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법인’이라는 말 아는가? ‘법인’이란 실제적인 인격체가 아니지만 인격체와 동등한 법적인 대표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 법적인 자아가 죽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 옛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 것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죽음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할 때 그렇게 하면 다 틀린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설교하면 틀렸다. “우리 자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시다!” 죽이긴 뭘 죽이는가? 이미 다 죽었는데?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그 주체는 옛 사람, 법적인 자아이다. 여러분 ‘신분세탁 한다’는 말 들어보았는가? 일종에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 시민권도 가지고 있고 한국 시민권도 갖고 있어서 이중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이 국적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린다.
하나를 버릴 때, 한국 시민권 또는 미국 시민권을 버리게 된다. 미국 시민권을 만약 버린다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겠다는 포기 서약서를 대사관에 내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미국 시민권을 파기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미국 시민권으로서 나는 죽는 것이다. 미국 시민권이 죽고 난 다음에 미국에 들어갈 때에는 평범한 외국인, 관광객으로 비자를 받아 가야 된다. 바로 그런 개념으로 옛 사람이란 말이다.
우리는 사실 어디에 속했었냐 하면 법적으로는 아담 언약 안에 있었다. 아담 언약 안에서 아담의 죄를 물려받고 아담의 문명 안에서 우린 죽을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이다. 바로 그 법적인 ‘나’,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내가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으로 이제 마침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란 그렇게 아담 언약 안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난 그것이 중생이다, 법적인 의미에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옛 사람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죽은 사건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일어난 사건!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우리의 구속은 그때 성취된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 어떻게 되느냐? 그 구속의 효과가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주체로 거듭나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십자가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옛 사람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한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출애굽기 14:1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간 종살이를 마치고 갈라진 홍해의 마른 바닥을 건너서 애굽을 탈출했을 때 모세가 한 말씀이 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애굽 사람들을 다시 못 본다는 말은 애굽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고 주인으로서의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위해서 군림하고 매를 때리고 노동을 시키고 자유를 억압한 그런 독한 주인으로서의 애굽인은 다시, 이제는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끝났다!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를 건너는 그 날부터이다.
애굽인들은 절대로 그들의 주인으로서 못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면 이 이스라엘의 남 유다가 탈락해 가지고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애굽 사람들을 그들의 주인으로 다시 불러 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의 이 모세의 말씀대로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갈대아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다시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면 가나안 시대에 태어난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에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자신들이 말이지, 노예였던 유대인으로서의 자아는 언제 죽었느냐? 그 홍해를 건넜을 때 이미 다 죽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옛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게 옛 사람은 죽었지만 뭐가 남았느냐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다. 이것을 뭐라고 하냐면, 사도 바울이 ‘육체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의 법’이라고 해서 우리의 육체의 죄의 덩어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돼! 육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이다. 육체는 특별하게 인간의 도덕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단지 이 육체가? 사람을 죄로 끌어 들이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유혹이 이 육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을 통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이 반드시 사탄의 유혹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 안에서도 죄를 짓게 하는 힘이 있다. 강력한 힘이 남아 있다.
갈라디아서에 가면 사악한 욕심을 육체의 소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육체의 소욕이나 육체의 법은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갈 5:17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여기에서 보면 이 성령의 내주하고 있는 사람이 승리를 선포했지만 실제로 그 경험에서는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고투를 계속해야 되는, 싸움을 계속 투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법을 대항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험의 영역 안에서는 성령의 내주가 무엇으로 경험되는가? 우리의 경험의 영역 안에서는 성령의 내주가 언제나 죄와의 싸움으로 경험된다. 죄와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죄와의 싸움이 멈추는 사람, 저 사람은 성령의 내주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 칼빈도 그 말을 한다. 죄의 고민이 없는 사람, 신자가 아닐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의 내주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죄와의 격한 투쟁이 전개되는 것이 당연하다. 어디에서? 경험의 영역에서.
그러나 하나님께로 우리가 눈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는 우리를 뭘 노래하게 되느냐? 로마서 8:2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보게 되면 뭐가 있느냐? 곧 투쟁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괴리가 있다.
믿음과 확신을 이런 관점에 잘 보란 말이다. 성령의 사역, 성령의 내적인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과 확신은 언제나 있다. 복음을 들을 때는 반드시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는 우리 안에 확신이 있다. 그런데 우리 현 경험을 들여다보면, 나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불안이 있는 것이다. 의심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어떤 면에서 확신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반드시 그와 같은 패턴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신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면, 다른 말로 하면 확신이 구원의 서정의 하나라고 하면, 다른 말로 이 확신이 성령의 적용의 결과라면, 확신 역시 바로 이와 같은 로마서 8:2, 로마서 7:14,15이 있다. 그런 구절 사이에 있는 괴리와 긴장처럼 확신도 그와 같은 패턴을 따라갈 것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법에 대한 성령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성령이 반드시 육체의 법을 꺾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육체의 법에 대한 성령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 성령은 언제 나타나냐면 종말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이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체의 법에 대한 성령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육체에 대한 성령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말론적인 소망이고, 그런데 이생의 경험에서는 마지막 종말론적인 상태가 이를 때까지는 투쟁이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내주와 그것으로 인한 신자의 경험의 모순, 로마서 8:2, 로마서 7:15, 16. 그 경험의 모순은 바로 현재적인 경험과 종말론적인 약속 사이의 대립이라고 보면 된다. 현대적인 경험은 불완전하고 종말론적인 약속을 완전하다. 그 종말론적인 약속을 생각하면 우리 안에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험을 생각하면 투쟁이 없다. 그런데 그 투쟁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승리로, 성령의 승리로 끝낼 투쟁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낙관할 수 있지만 그러나 투쟁 자체를 보면 너무나 힘겨운 까닭에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다.
자, 이 원리,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 사이의 대립이라고 이 원리를 어디에 적용해야 하느냐?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 ‘믿음의 경험으로의 확신’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그대로 잘 적용해야 한다. 칼빈이 이렇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아닌데 칼빈의 이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에 대한 그의 논리적인 사고를 따라가면, 이 확신의 문제도 설명이 잘 된다는 소리이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왜냐하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확신도 성령의 씨라고 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단정적이다. 그냥 주신다. 그러나 육체로부터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과 혼란이 초래된다.
성령으로부터는 믿음과 확신과 기쁨이 온다. 그러나 두려움으로부터는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이 온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이 믿음의 경험 안에서는 무엇이 있느냐? 두려움과 의심이 있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 의식 속에 포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것은 믿음과 확신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성령의 사역에 우리가 거기에 우리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역사하는지 이 복음을 통해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린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게 될 때는 뭐가 오냐면 마음의 확신이 확!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는 것 같이 들어오는 것이다. 빵빵하게 들어온다. 그런데 즉시로 이게 마치 바늘에 찔린 풍성처럼 쏵! 꺼진다. 언제? 그 말씀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말씀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가 그 다음에 먹고 사는 것 생각하고 이런 세상을 고심하다보면 확신은 정말 하루아침에 바람 빠진 고무처럼 쑥 빠지는 것이다. 그럴 때 낙심하는 것이다. ‘아 내가 구원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천국 가는구나’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니까 시각에 따라서 우리 마음의 의식이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복음의 소리를 들으면 믿음으로 충만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되고 현실로 돌아와서 현실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좌절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이 두 원리, 예를 들면 성령의 분명한 위로, 그것과 함께 육체의 불완전함이 두 원리로 공존한다. 그런데 이 두 원리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공존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불안과 의심은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과 의심은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믿음과 확신이다. 이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있지만은 혼합되거나 종합되지 않는다. 섞이지도 않는다. 이 둘은 같이 있기도 하지만 둘은 절대로 섞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둘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는 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섞이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는 이 두 원리 안에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위로 받을 때는 확신이 들어오고 때로는 육체로부터 의심과 두려움이 시달리기도 하고, 이게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다. 반드시 성령의 위로가 두려움과 의심을 몰아내고 우리가 확신하는 바 그 영광에 서게 될 것을 어디서 가르치고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도와 성찬이라는 은혜의 수단으로 신자는 믿음의 정신의 힘을 얻고 싸우며 더 분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위로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을 주셨는데 그것이 기도와 성찬(성례전)이다. 그래서 성찬을 받을 때, 기도할 때 사실 우리의 정신이 이 성령의 위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기도의 목표는 은혜이다. 그러나 진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바로 말씀으로부터 온다. 말씀이 먼저요 언제나 그 다음에 기도이다.
1.1.3. 믿음의 본질과 믿음의 현실 사이의 차이
조금 강조점이 다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성령의 씨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믿음과 확신은 불안이나 의심과 섞이거나 혼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선물이요 씨이기 때문이다. 절대 불안이나 의심과 섞이지 않는다. 공존할 수는 있어도 섞이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확실성은 말할 수 없고 개연성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이를 거야’라고 이정도만 말할 수 있지 ‘나는 구원에 이른다’는 확신에 이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속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믿음은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은 성령이 심으신 것이므로 그 안에는 언제나 반드시 확신과 확실성이 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한 가지는 분명이 가르쳐야 한다.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만 하면은 그 믿음 안에는 나의 의식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확실성과 확신이 있다.
따라서 확신은 참된 믿음의 본질이, 확신은 믿음의 크기와 상관없고 오직 믿음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신자가 믿음을 의식하는데 있어서 연약하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믿음의 본질로서 확신은 소멸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신자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확신은 없어진 게 아니고 단지 확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확신이 없는 신자가 그건 확신을 새롭게 받아드릴 문제가 아니고 믿음 안에 있는 본질로서의 확신을 자기의식 세계 안에서 다시 되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확신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니고 확신을 새롭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확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르짖어야 한다. 왜냐면 이미 믿음이 들어올 때 확신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비상금을 어디다 깊이 넣어놨다가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뒀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된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뜻밖에 내가 먼저 발견하게 되면 기쁘다. 그런데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도 그러나 그때도 그건 거기에 있었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이다. 확신이란 바로 그렇다.
확신이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있는데 육체로부터 의심과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오기 때문에 그 확신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엇을 구해야 하느냐? 그 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제 2의 은혜의 수단을 구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고 꾸짖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미 있고 믿음이 있다면 확신이 있기 때문에 뭘 해야 하느냐? 믿음과 확신은 유기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므로 확신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서 확신은 갖도록 노력하기를 촉구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은 무엇이냐? 기도와 성례전이다. 그 외에도 칼빈은 은혜의 수단을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칼빈 신학, 개혁주의 신학에 속해 있는 특징이다.
하나님의 1차적인 이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약속 외에도 우리의 속에 있는 믿음과 함께 확신을 되살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성령이 동원하시는 수단이 있다는 것이다. 선행의 열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교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 그런 것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확신을 되살리는 것은 대단히 목회적인 것이다.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확신을 더 갖게 하는 것은 신학적인 일이라기보다는 목회적인 것이고 그것은 기독론적이라기보다는 성령론적이다. 한마디로 목회자가 열심히 교인들에게 확신을 갖도록 힘을 보태주고 독려하는 일이다.
1.1.4. 구속경륜(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관점
다른 말로 하면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 믿음과 확신 사이에 있는 긴장과 대립의 문제를 설명해 낼 수 있다. 자, 구속경륜의 핵심은 무엇이냐? 아버지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속을 성취하시고, 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는 십자가에 죽으심.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실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정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부터에서 그가 이 땅에 떠나실 때까지 모든 생애가 구속 사역이었다. 그런데 그 구속 사역을 마지막 종결하는 정점은 무엇이냐?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그 때 우리의 육체의 사람이 함께 죽었다. 우리의 구속의 성취는 그때 이루어졌다. 구속은 이미 성취되었다.
그 다음에 성령은 성취하신 구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심으로서 그들의 주관적 경험 안에서 구원을 수여 하셨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사람을 선택하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속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의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시고 주관적인 경험 안에서 그들의 것이 되도록 하게 하신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언제나 우리 구원을 위해서 협력하신다. 언제나 같이 일한다. 아들이 일할 때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성령이 내주하시고 역사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역사하신다.
자,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함으로써 신자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게 하고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게 하신다. 확신은 사실 성령론적인 사역이다. 칼빈은 모든 구원의 경험 즉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 확신, 견인 이 모든 것을 다룰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보다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
이런 구원의 적용은 성령의 전적인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냐? 믿음도 주시고 의심과 불안을 물리칠 수 있도록 확신도 성령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시고자 할 때 동원하시는 수단 중에 하나가 아버지의 선택과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아 내가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겠구나’ 확신을 갖게 하시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을 신자들에게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이 칼빈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예정론을 지금 어디에 적용하고 있느냐면 신자의 삶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확신의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확신을 강화한다고 가르친다. 이 점이 특징이다. 이해하는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예정론을 가르치면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확신을 갖게 되기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목사님들을 만나서 가르치다보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예정론 가르치게 되면 전도 안 되고 예정론을 가르치게 되면 확신도 흔들린다고 한다. 왜 흔들리냐고 물으면 그 논리가 지극히 단순 논리이다. 무슨 말이냐면 선택됐는지 안됐는지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그러나 칼빈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이 점은 칼빈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역시 신학은 사람의 아이큐만 가지고 지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신학이 고도화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면,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도 몹시 사랑해야 한다. 정말 칼빈이 자기의 모토처럼 내걸었던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즉시로 전적으로 바칩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정말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한 없이 존경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정말 하나님께서 높이신 만큼 높이는 사람이라야 개혁주의의 신앙정신을 도움 받을 수 있다. 정말 사랑해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가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으면 이렇게 못한다. 선택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강화한다는 이런 식의 사고는 나올 수 없다. 가만 보니까.
왜냐하면 칼빈은 이 선택을 잘 가르치게 되면 한마디로 말하면 “예정론을 정당하게 사유하게 되면 매일 확신 가운데 살도록 부름 받은 신자들의 믿음을 확정짓는데 매우 유익하다.”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이냐면 예정론을 늘 가르치게 되면 그래서 매일 확신 가운데서 살도록 부름 받은 신자들 믿음은 확정짓는데 예정론이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자기의 경험이다.
칼빈은 자신의 확신을 어디서 얻었느냐? 예정론을 통해서 확신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에 근거를 둔 확신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결합되어 있다.” 이 칼빈의 머리 속에 있는, 이 확신과 하나님이 선택이라는 이 두 주제를 그가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 그 논리를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자, 한번 논리를 살펴보자.
(1)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그의 논리적 사고에서 첫 번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구원받으면 좋고 불순종해서 구원을 못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아니고 반드시 저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로 하시는 신적 결정이 선택이다. 그러니까 칼빈의 선택을 통해서 확신의 힘을 얻는다는 그의 신학적 사고 논리 안에 첫 번째 스텝이 있는데, 그 첫 번째 스텝이 바로 이것인데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 필요로 한다. 잘 기억하라.
(2) 선택은 선택된 그들 자신의 됨됨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1:5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선택의 근거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근거가 아니다. 그러니까 ‘not in themselves’가 아니고 ‘only in him(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반드시 실제적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그 선택은 선택된 그들 자신의 됨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택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으므로 확신은 결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그들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버지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확신은.
(4) 따라서 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확신의 기반이 된다.
칼빈의 신학이 이렇게 아주 논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확신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누가 하는가? 성령이 하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중생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확신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 무엇이 없냐? 육체로부터 두려움과 의심과 공포 때문에 이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확신이 소멸 되었다. 확신이 우리 의식 세계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거기 어디 있긴 있는데 확신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깜깜한 밤중에, 어두움 가운데서 뜸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확신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때 칼빈은 어떻게 했느냐? 다시 어디로 돌아갔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논리를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확신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우리들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택자를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그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로 한다. 나는 데까지 올라가게 되면 ‘아, 내가 구원에 이르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이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무엇을 하시느냐? 아버지의 선택, 그리스도 안에 잇는 아버지의 선택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회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확신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과는 별개로 신자들에게 확신을 갖게 하실 때 동원하시는 제 2의 은혜로운 수단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선택의 회상이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 실제적인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예정에 대한 확신만 가지면 오늘 현실적인 의심과 두려움은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사닥다리이다.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선택을 보고 복음을 들을 때 선택을 듣는다.”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보는 것이다.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복음을 들을 때 우리 선택에 느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 가는 사닥다리요 동시에 확신에 이르게 하는 사닥다리이다. 확신이 들게 한다.
다음 시간에 4)번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설명하겠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믿음과 함께 확신을 주셨사온데 우리의 삶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표류하던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잃어버린 확신을 되찾아 날마다 확신 가운데 살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시고, 기쁨과 소망 가운데 주를 섬기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오늘 가르친 신학의 핵심이 장차 그들의 사역에 좋은 도구가 되게 하시고 그들 자신의 신앙을 위한 터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구원의 확신(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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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연약한 인생을 위해서 자비로운 손으로 붙잡아 주시고 오늘도 말씀을 연구하는 자리로 부르셔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 마음과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죄 지었던 것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시고 새롭게 되게 하시며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공부가 학문에 그치지 않게 도와주시고 장차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현장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 우리와 함께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지난번 강의에서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소개하면서 역설적인 요소를 칼빈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강의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대해서 강의했다.
말하자면 칼빈의 믿음의 해명에 모순인 듯이 보이는 요소들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칼빈은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고 언제나 가르쳤다. 그래서 언제나 믿음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확신이 필연적으로 함께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칼빈은 동시에 확신은 믿음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식 가운데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믿음 있는 곳에 확신이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인 듯이 보인다. 이런 소위 말하면 믿음과 확신 사이에 한편으로는 동시성, 일치성을 강조하다가 동시에 그것과 믿음과 확신 사이에 단절, 말하자면 경험에 있어서 오차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실제로 경험에 영역에 있어서, 실천적인 영역에 있어서 확신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그의 설교집, 그의 소논문에 보면 믿음과 확신 사이에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가르치고 있음으로 해서 피상적으로는 칼빈의 신학이 어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은 이런 모순을 스스로 모순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하고, 그것은 믿음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는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실제로 이런 설명은 칼빈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학에서 이와 같이 설명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은 믿음과 확신이 언제나 동시에 있다고도 가르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실천적으로는 언제나 확신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에 대한 구체적인, 명세적인 설명을 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자신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모순되는 듯한 주장이 칼빈 본인에게는 그것이 모순으로 감지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칼빈 본인에게는 이것 두 가지가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그만한 신학적 시스템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강의에서는 그의 신학에 있어서 네 가지 정도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첫 번째, 당위와 현실 사이에 대립과 긴장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어떠해야 된다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당위성은 믿음은 언제나 구원의 확신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정의에 따르는 당위성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경험 안에서는 당연한 주장, 믿음의 정의가 반드시 의식적 수준 안에서 포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실제 믿음의 경험을 구분해야 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이것은 믿음과 확신은 필연적인 관계이면서도 그러나 반드시 경험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해명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두 번째, 육신과 성령의 대립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성결하다. 믿음에는 언제나 확신이 수반된다. 성령의 선물이므로 완전하고 어떠한 의심도 혼란도 없다. 그러나 믿음을 구사해야 하는 사람은 영적인 존재인 동시에 우리들 역시 육신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머물고 있는 한 육신으로 인한 한계 때문에 불안과 의심은 거의 불가피하게 믿음과 함께 표출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믿음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으로부터는 뭐가 오냐면 불안이 오고 의심이 오다. 이 두 가지는 결코 섞이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은 구원하는 믿음을 신자가 소유하고 있으면 그 믿음 안에는 언제나 구원의 확신이 따라오고, 또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약속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다. 그러나 신자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의심이 수반된다.
그러나 그 의심은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육체의 한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는 믿음과 불안은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처럼 보여서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음이 있으면 그 안에는 확신이 있는 것이고, 육체로 말미암는 의심도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확신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믿음의 본질과 믿음의 현실을 비교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성령의 씨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개연성을 말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가진 영속적인 속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 참된 믿음은 성령이 심으신 것이므로 그 안에는 반드시 확신과 확실성이 함께 따른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믿음 안에 본질이 무엇이냐, 확신이다. 그래서 확신은 믿음의 크기와 그 성숙의 정도와는 상관없고 그것은 진정성과만 관련 있다. 믿음이 참되다면 반드시 확신은 따른다.
신자가 비록 믿음의 의식에 있어서, 믿음을 자기 개인의 것으로 향유하는데 있어서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하고 미약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믿음의 본질로서 확신은 소멸되지 않고 구원하는 믿음과 함께 거기에 여전히 있다고 칼빈이 가르쳤다. 쉽게 말하면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고 확신이란 언제나 구원의 본질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구원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물었을 때, 저는 아직 그런 확신이 없는데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원칙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확신이란, 사실은 근본적으로 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칼빈에게는 본질의 문제이다. 인간이 의식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확신의 관건이 아니다. 비록 인간이, 신자가 확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확신은 믿음의 본질로서 자리한다 그것이다. 이 세가지가 지난주에 강의한 내용이다.
오늘은 네 번째를 설명할 것이다.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구속경륜이라고 하면 아버지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성취하신 구속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기로 예정된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신다. 이것이 구속경륜이다. 언제나 포맷이 있다. 아버지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들을 위해 속죄를, 구원을, 구속을 성취하고, 성령은 그렇게 아버지께서 영원 전에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구속을 개별적으로 적용하신다. 그것도 개별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그들에게 개별적인 것으로 적용하신다. 적용하신다는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자기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주관적인 체험 안에서 그들의 것이 되도록 하신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께서는 구원을 받을 자를 정하시고 아들은 구원을 완성하시고, 성령은 완성하신 그 구원을 아버지께서 주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그들의 것이 되도록 적용하신다. 이것이 구원의 경륜이다. 바로 이러한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도 믿음과 확신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괴리를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아버지께서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그들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되면 그들은 제일 먼저 구원을 받는 순간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 복음 안에 있는 그 약속이 자기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알고 그 선물을 힘있게 붙들게 된다.
그런데 붙들게 되는 그 단계에서는 아직까지 그것이 명확하게 자신의 의식 세계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것이 나중에 청교도 신학자들이 조금 더 세분화하고 체계적이고 정밀하게 발전시키는 여지가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처음에 성령께서 부르심을 받을 때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자기를 위한 약속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약속이 자신의 의식세계 안에 분명하게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단계까지 즉시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이 약속이 자기를 위해서 예비된 것이라는 사실만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이후에 성장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성장의 과정을 거치게 될 때는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깨닫게 된다. 깨닫게 되면서 약속이 진실하고 확실할 뿐만 아니라 이 약속이 아름답고 참되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깊이 있게 깨달아 간다. 깨달아 가는 중에 믿음에 따른 확신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게 된다. 이것은 조금 있다가 다루게 되는 청교도의 신학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이 성령은 신자들에게 그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먼저 깨닫게 하시고, 그 결과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때는(이거 중요하다) 아버지의 선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존에 대한 지식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확신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서 성령이 동원하시는 수단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버지의 예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신자들을.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그 사람들이 창세전에 속해 있고 영원토록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마음의 안도감과 확신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아버지의 선택, 아들의 속죄 이 사실들을 신자들에게 확신케 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그들을 안내해 가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한 성장의 과정이 따른다. 구원받는 순간에 완전한 상태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끊임없이 사역하신 결과로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예정론을 정당하게 사유하게 되면, 매일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신자들의 믿음을 확정짓는데 매우 유익하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칼빈이 기독론적인 영역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원래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을 쓸 때는 예정론이 신론에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3판을 고쳤을 때는 예정론을 옮겨서 기독론으로 가지고 갔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면 사실은 예정론은 어떤 신론의 영역에서, 혹은 관념론적인 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예정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말이다.
그러니까 예정론은 매우 실천적인 것이고 목회적 차원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칼빈이 제대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신론에 있던 예정론을 기독론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그래서 1판과 3판 사이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몇 판, 몇 판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다. 칼빈의 예정론을 잘 활용하면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여러분의 목회 현장에서도 반드시 상기되어야 할 사실이다. 예정론을 가르쳐 놓지 않으면, 칼빈의 논리에 따르면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확신에 이르게 하시는 수단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예정론은 단순하게 사변적인 논쟁을 위한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신앙의 성장과 확신을 가지게 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이 언제나 즐겨 동원하시는 교육학적인 수단이 무엇이냐,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자신의 영원 전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 예정의 결과 우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자, 또 지금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앞으로도 영원토록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됨으로써 신자는 마침내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제 1문에 제일 먼저 물은 질문이 이것이다. “지금 살 때와 죽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에 진정한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뭐냐면, “나는 영원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내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확신하는 사실에 내 마음에 위안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바로 그것 때문이다.
바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1문은 확신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자가 어떻게 확신에 이를 수 있냐고 물으면 그것은 자신이 창세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정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기로 작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실과 확신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목회적으로 매우 유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가르치는 교회의 교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목회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무엇보다 예정론에 대해서 부지런히 정밀하게 성경이 의도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쩌면 성경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완전한 확신의 상태에 이르는 데는 실패할지 모른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구속 경륜이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괴리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무슨 말이냐면, 한마디로 말하면 제일 먼저 약속을 받을 때는 우리가 창세전부터 아버지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작정했다는 그 단계에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약속을 받고 난 이후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을 통해서 마침내 무엇을 깨닫게 되냐면, 아버지의 예정,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 깊이 있게 성경이 가르치는 바대로 체계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무엇이 오냐, 구원에 대한 확신은 증대된다는 그 말이다. 그래서 경험의 영역에서는 일정한 괴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무슨 말이냐면 부르심을 받을 그 초기에 약속을 붙잡는 그것도 믿음이고, 성장의 과정을 거쳐서 확신에 이르게 되는 그때의 믿음도 이때 믿음과 동일한 참된 믿음이다.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단지 차이가 있다면 믿음 안에 있던 확신이, 잠자는 상태로 있던 그 확신이 하나님의 예정이나 성령의 부르심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깨달으면서 잠자고 있는 확신이 표면화되는 것이다. 의식 안에서 표면화되는 것이다. 의식 위로 마침내 올라오는 것이다.
땅 속에 떨어져 있던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봄이 되고 그것이 마침내 싹을 틔우고 올라올 때는 아, 땅 속에 있던 씨앗이 살아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확신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처음 믿음이 떨어질 때 그 믿음은 참된 믿음이다. 그 참됨 믿음 안에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서 성장을 거듭하게 되면 잠자고 있던, 의식 저변에 있던 믿음 안에 원형으로만 남아 있던 그 확신이 마침내 의식 안으로 분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 아 이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칼빈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구원의 확신이 의식의 수준 안에서 분화되었다고 말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런 분화의 과정을 거칠 때 성령이 동원하시는 도구가 무엇이냐, 예정론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성령이 동원하시는 또 다른 도구가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확신이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아버지께서 선택하실 때, 엡 1:1-5에서 특별히 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아버지께서 우리를 예정하실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예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되도록 먼저 그를 예정하신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를 개별적으로 예정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우리들의 구주가 되도록 먼저 예정하신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구주로 예정하신 아들 안에서 구원 받을 자를 예정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 전에 그가 기뻐하신 뜻의 성취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셨던 그리스도 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회복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를 이루시는 것이다.
성령은 자신의 일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구속을 적용하는 게 아니다.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보면 전부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구속경륜은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로 이렇게 확신이란 무엇이냐, 칼빈에게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같이 맞물려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믿음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확신을 가질 방안도 없는 것이다.
특별히 칼빈은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를 뭐라고 별명 붙였느냐면, 선택의 거울이라고 하였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우리가 거울을 보면 얼굴이 비췬다. 얼굴이 고체적인 사물을 통해 반영된다. 그런데 내가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마치 사람이 거울을 들고 얼굴을 보듯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쳐다보면 마침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의 선택을 거울을 통해 나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선택의 거울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분명하고 오류 없이 우리 자신의 선택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신앙하고 고백하는 그 사람은 바로 그 고백하는 신앙 안에서 자신의 선택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내 죄가 속해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 신앙 안에서 예수님의 속죄가 나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짓는 죄가 사해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만 가능하다.
칼빈은 이렇게 하나님의 객관적이고 영원한 선택과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이 주관적인 확신 사이의 간격을 그리스도로 다리 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들어오시게 되면, 그리스도가 우리들 면전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나에게는 현재로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 지금 확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정말로 선택하셨던가. 선택하셨던 아버지의 그 의지 안에 정말 내가 있었는지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리스도에게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 서는 순간에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과 오늘 현재의 경험 사이의 괴리가 싹 매어진다는 것이다.
신학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열렬히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사랑했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칼빈의 신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러분, 신학은 냉담한 마음으로 못한다. 차가운 마음으로 못한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신학이란 의지로도 하고, 이성으로도 하고, 감성으로도 하고, 온 몸으로도 한다고 하였다. 신학의 정도와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을 보면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과 현재, 신적인 선택과 나의 확신 사이가 아무런 긴장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마침내 화해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 예정은 확신의 의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확신을 도리어 강화한다. 예정론이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정당성, 전도의 효능을 더해 준다고 하였다. 예정론은 한 사람의 확신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화한다.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칼빈은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을 열거한다. 예를 들면 믿음의 환상, 믿음의 그림자 현상, 잠정적 믿음, 위선의 탈을 쓴 믿음 등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런 믿음들은 거짓 믿음이고, 참된 믿음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검증은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늘 자기를 검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 검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신자들은 자신들의 의식의 저변으로 내려가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내 믿음이 참된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지 아닌지 그것을 먼저 물어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참된 믿음의 검증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구사하고 있다.
자, 하나님의 선택과 확신에 있어서 그 상관관계를 말할 때 칼빈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로 한다. 실제적이라는 말을 꼭 강조해야 한다. 실제로 그들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그 구원의 마지막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을 하나님의 선택은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그들 자신의 됨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 위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위에서 구원받을 자를 예정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위에, 그리스도 안에 근거한다.
(3) 그들의 선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으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도 그들 자신의 됨됨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어떤 자질이나 인격적인 성숙과 관련되어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버지 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확신은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연합은 확신의 기반이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 단계를 꼭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신자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도 칼빈은 확신은 어디 있는 것으로 보는가? 확신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심리적 상태나 인간의 능동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의 연합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 확신이란 인간의 의심이나 혼란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에 머물기만 하면, 확신은 믿음과 함께 그들과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비록 확신이 없을지라도 확신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이 참된 구원하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확신이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확신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확신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믿음이 그들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확신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바로 이것 때문에 이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이 비롯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확신시켜 줌으로서 성령은 선택된 신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을 적용한다.
가. 칼빈의 믿음 이해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견해
자, 오늘은 이런 칼빈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실제로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이런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어떻게 수용하고 설명했는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금 있다가 설명할 텐데 확신이 없다고 해서 그 안에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말 이해하는가? 왜냐하면 구원할 믿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 구원하는 믿음의 속성으로서의 확신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구원하는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느냐 묻는다면 믿음 밖에 있는 확신은 그 믿음의 초기상태에는 마치 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의식 저변에 놓여서 포착이 잘 되지 않는다. 않고 있다가 신앙의 성장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마침내 그것이 성령의 내적인 사역을 통해 의식적 상태로 분화한다. 의식적 상태로 분화시킬 때 성령의 동원하시는 도구 중의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이다. 이런 것을 가르침으로써 마침내 믿음의 본질로 자리 잡고 있던 잠자고 있는 듯 한 확신이 한 사람의 의식적 상태로 분화된다.
그것을 나중에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확신의 충만한 상태’(Faith in it's fullness)라고 하였다. 충만한 확신 가운데 있는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교적 초기에 이런 상태에 이르기 전의 믿음을 무엇이라 했느냐? ‘작동하는 믿음’(Faith in exercise)이라고 했다. 이런 식의 구분을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칼빈은 인정하지 않았다. 믿음을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마 칼빈은 이런 식의 구분을 한다면 동정적일 것이다. 내 마음에 쏙 와 닿지 않지만 영 틀렸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그런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면 왜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이렇게 믿음을 두 계층으로 구분했느냐면 초기의 신자가 가졌던 믿음과 확신과 함께 있는 믿음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을 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확신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원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이게 결론이다. 그러니까 “확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멘 못해도 괜찮다. 거기에 기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확신을 갖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칼빈이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자기 검증해야 한다. 믿음 안에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들이 확신 안에 있는지 검증하란 말 없다.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하라고 하였다. 믿음만 있으면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경우를 설명한다. 본인은 확신을 가졌다고 하나 실제로 구원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이는 정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믿음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고자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신 자들이기는 하나, 그들은 아직까지 구원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은 목회자들에게 맡겨진 자들이다. 목회자들이 그들을 더 완전한 확신을 갖도록 열심히 그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하게 자신의 믿음의 진위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것이다. 자기 검증을 해야 한다. 만약에 내가 다이아 반지를 샀다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누구든지 믿음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만약에 믿음에 대해서 무관한 자들은 질문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믿음을 가진 자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자기 믿음이 얼마나 참된 믿음인지 날마다 검증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1) 콤리(A. Comie), 브라켈(W. Brakel)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이런 믿음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가장 신학에서 잘 반영한 사람, 그것을 좀 더 체계화 한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알렉산더 콤리(A. Comrie 1706-1774)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누구냐? 화란의 ‘제2 종교개혁’, 혹은 ‘철저한 종교개혁’, 오히려 ‘철저한 종교개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신학사전을 찾아보면 화란의 ‘제2 종교개혁’, ‘철저한 종교개혁’이라고 나온다. 그게 바로 이 콤리를 비롯한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들이 주도한 운동이다. 그런데 이 화란의 ‘제2종교개혁’은 영국의 청교도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쉽게 말하면 영국의 청교도운동과 마찬가지의 성격이 화란의 ‘제2 종교개혁’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영국의 종교개혁, 특별히 청교도 사상이 이 화란의 콤리를 비롯한 ‘제2종교개혁’를 주도한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당시의 청교도들의 저서들이 거의 대부분 빠짐없이 화란어로 번역되었다. 화란의 ‘제2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 하면 G. Voetius와 W. Brakel이다. 이 두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의 책은 거의 다 화란어로 되어 있고 번역된 책들이 거의 없다.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지 못했다. 왜냐면 청교도들에 대해서 많이 연구가 됐는데, 이 화란의 ‘제2 종교개혁’은 그렇게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되는 것이 미진했다.
어쨌든 화란의 ‘제2종교개혁’의 주역이었던 콤리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이다. 콤리는 18세기 화란의 개혁파 진영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다. 18세기 중엽에 화란에서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가?’에 대해서 열띤 논쟁이 전개되어 있었다. 이 논쟁에서 콤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믿음에 관한 칼빈의 이해를 해명하는데 집중하였다. 단순하게 해명한 것이 아니고 좀 더 정밀하고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 안에는 칼빈이 시도했던 믿음의 이해가 좀 더 정교한 학문적인 형태로 잘 구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하면 콤리는 많은 책을 썼는데 그가 지향한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바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믿음의 분명한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확증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확신이 구원하는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왜냐면 어떤 사람들은 확신이 없으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확신이 없어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에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만약에 확신하는 믿음 없으면 구원하는 믿음은 없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반대하면서 비록 확신하는 믿음이 없다 할지라도 구원하는 믿음이 반드시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콤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확신은 믿음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확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양식과 정도로 소유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확신의 정도, 확신의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설명했지만 믿음이 주어지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확신은 발아되지 않은 씨가 땅속에 묻혀있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앙의 성장과 함께 그 자신이 믿음으로 이미 확고한 것을 의식 안에서 분명하게 잡게 되는 진보를 보이게 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확신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비교적 초기 상태에는 확신이 발아되지 않는 씨처럼 땅 속에 묻혀 있다가 진화의 성장을 거치면서 그것이 점점 의식의 차원에서 분화되고 마침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간다.
따라서 확신이 씨앗의 형태에 있든지 아니면 성장가도에 있든지, 아니면 그것이 이미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든지 간에 그것은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확신이 발아되지 않는 씨앗의 형태로 있든지, 성장 중에 있든지 안 그러면 상당한 완성의 상태에 이르렀던지 간에, 어떤 상태든지 간에, 확신이란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다. 그것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콤리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매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많은 신자들이 이 확신을 한 개인의 공로나 혹은 능동적 참여의 결과물로 인식하려고 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결국에는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헌신했는지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는 요소인 것처럼 생각한다.
콤리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이 확신 역시 칭의나 성화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라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나가시는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고, 그리고 신자들이 각자 노력할 수 있는 성경적인 2차적 수단을 찾아야 한다. 1차적 수단은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조금 더 상술해 보자. 당시 개혁파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첫 번째 입장은 Brakel이 주장하는 것이다. 이 사람 뿐만 아니라 F. Lampe도 있는데 이 사람은 독일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무엇을 주장했느냐면 “확신은 믿음의 열매에 속한다”라고 했는데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그들은 도피성을 찾는 믿음(refuse-taking Faith)라고 했는데 구약성경을 보면 도피성이 나온다.
부지불식간에 살인한 자가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서 도피성으로 달려가게 되는데 구원을 호소하면서, 바로 그런 믿음. 도피성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싶은 사람은 과거의 도피성을 향해 뛰어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과 목마름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그 믿음을 무엇이라고 했냐면 도피성을 찾는 믿음(refuse-taking Faith)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확신하는 믿음(an assured Faith)이다. 이렇게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누었다. 도피성을 향해 나가가는 믿음. 이 믿음은 아주 초기적인 믿음의 단계이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 그리스도를 만나야겠다는 그 절박함. 그것으로 대변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의 단계를 지나고 나면 어디로 향하게 되냐? 확신하는 믿음, 소위 말하면 구원하는 확신을 가지는 믿음이라는 더 높은 단계의, 좀 더 정제되고 성숙한 단계에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계단으로 따지면 두 계층으로 나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은 칼빈의 신학에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의 서술이다. 칼빈은 믿음을 정의할 때, 매우 단순하게 정의했다. 무엇이라고 정의했는가? 바로 ‘참된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하나만 정의했다. 그 구원하는 믿음이 작든지 크든지, 초기든 확신을 동반한 믿음이든지, 믿음의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확신을 의식화 단계를 수반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단계가 있지만 그것은 믿음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화된 확신이든 발아 상태로, 발아되지 못한 상태로, 수면 상태에 있는 확신을 가진 믿음이든 믿음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말로 한다면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구원하는 믿음만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영광에 이른다.
확신의 문제는 누구에게 남겨져 있는가? 바로 목회자들의 과제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과제이다. 그러나 확신은 목회적 과제이다. 그러나 이 목회적 과제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다. 이 때 목회적 과제로서의 확신이 무엇이냐면 바로 의식화된 확신이다. 아버지의 일로서의 확신은 무엇인가?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인 것이다. 칼빈은 단지 확신을 두 계층으로 나누었을 뿐이다.
그런데 후기 18세기 화란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특별히 Brakel 같은 경우에는 확신을 이중으로 나눈 것이 아니고, 믿음을 2가지로 나눈 것이다. 여기에 중대한 변화가 있다. 잘 봐야 한다. 칼빈은 단지 확신을 두 가지 상태로 구분했다. 그러나 이런 확신에 대한 두 가지 구분은 믿음의 본질과 상관없는 것이고 믿음은 단일한 하나의 참된 믿음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쯤 돼서 화란으로 넘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면 이 확신을 이중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런 확신의 이중의 구분이 뭘 낳는다고 보느냐? 믿음의 구분을 낳는다고 봤다.
이건 신학적으로 큰 변화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이런 우를 범하고 있다. 확신이 있으면 참된 믿음이고 확신이 없으면 좀 문제 있는 믿음이라고 본다. 그것이 잘못이다. 이것이 18세기 화란에서 있었던 일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확신이 본질로 있든, 확신이 의식화되었든, 그것이 믿음의 속성, 믿음의 진정성에 어떤 변화를 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성경적이다.
예를 들면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려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워했다. 그 풍랑에 걸어오신 주님께서 배위에 오르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이 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이렇게 꾸지람하셨다. 그 적은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큰 믿음을 본적이 없다”라고 백부장을 칭찬했다. 그 큰 믿음도 그 배 위에서 무서워 떨던 저희의 마음의 믿었던 적은 믿음도 동일한 참된 믿음이다.
크고 작음을 결정하는 근본이로서는 무엇이냐, 확신과 신뢰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 기대하는 만큼 그 믿음을 사용할 수 있는 단계, 큰 믿음이다. 믿음을 사용해야 하는 그 특정한 상황에서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 적은 믿음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 믿음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배위에 오르신 것이다. 아주 상징적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의 배위에 영존하시는 아버지, 야훼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 것이다. 그리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 믿음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지금 큰 변화가 온 것이다. 확신에서 이중으로 본 칼빈의 신학을 사실 어떻게 들고 있냐면, 이런 것들이 어떤 두 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믿음이 있는 것처럼 지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확신을 믿음의 본질로 보지 않고, 믿음의 열매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계층, 어떻게 보면 초기 단계의 믿음과 성숙한 믿음, 이런 식의 두 계층으로 나누었는데 이 두 계층을 나누게 되는 결정자가 의식화된 믿음의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러면 왜 이들을 이렇게 둘로 나누었냐면 그 동기가 있을 것인데 확신과 믿음을 본질적으로 하나로 여기게 되면, 만약에 확신을 믿음의 본질로 여기게 되면 목회적인 관점에서는, 목회자들로서는 초신자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태는 곧 그들이 중생하지 못한 것으로 믿게 하여 낙심에 이르게 할 위험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로 나눈 동기는 초기 단계, 도피성을 찾는 믿음’refuse-taking Faith)에는 확신이 없다.
그러면 남들은 다 확신을 갖고 있는데 나는 확고부동한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초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제대로 중생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하고 불필요한 낙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낙심을 막기 위해서는 믿음을 두 단계로 나누는 것이 초신자들로 하여금 예기치 못한 낙심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로 나눈 것은 신학적인 동기보다 목회적인 동기, 실천적인 동기인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괜찮은 방법인가? 여기에서 좋은 예가 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실천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째든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때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목회적 동기로 인해서 성경의 계시에 대한 어떤 가르침을 왜곡하거나 그것을 굴절시키는 것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되 그것을 최선을 다해 사람들이 받아들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마디로 텍스트를 왜곡시켜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계시를 목회적 의도로 왜곡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맞서서 두 번째 그룹은 무엇인가?
2) 그로에(Theodore van de Groe), 투이넨(Theodore van de Thuynen)
이 두 사람은 Brakel의 주장에 맞서서 무엇이라고 주장했느냐? 확신이 결여된 사람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칼빈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칼빈이 확신이 만약에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믿음이 없다고도 하였다. 앞에서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다고 해서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고 보는 이 모순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때 칼빈이 말했던 확신은 본질로서의 확신을 말한다. 칼빈이 그때 확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화된 단계의 확신을 말하기보단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정의를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무엇을 주장했느냐면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게 되면 목회적으로 도리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앞에서는 분리하는 것이 목회적으로 안전하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차라리 분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이 두 그룹의 주장이 무엇이냐면 믿음과 확신을 하나로 볼 것인가, 분리해서 볼 것인가이다. 왜냐? 그 이유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칼빈은 의식화된 확신이 끝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끝내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이 죄 가운데 있거나 하나님의 뜻을 어김으로서 그들이 구원하는, 자기의 구원에 이르렀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태로 생을 종결지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그룹은 확신하는 믿음이 없으면서도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섣불리 구원에 이르렀다고 오판할 수 있기 때문에 믿음과 확신을 분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두 그룹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한쪽 그룹에서는 믿음을 두 계층(도피성을 찾는 믿음, 확신을 갖는 믿음)으로 나누었는데, 이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누게 된 근본적인 결정자는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확신이 없는 상태 단지 그리스도를 찾는 믿음은 무엇이냐, 도피성을 찾는 믿음, 그러나 좀 더 성숙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의식화된 확신하는 믿음. 이렇게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서로 분리해서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초기에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졌지만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확신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믿음과 확신이 같이 공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초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그룹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런 식으로 믿음과 확신을 서로 분리해서 다룰 것이 아니고, 칼빈의 주장대로 언제나 믿음과 확신은 같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를 물으면 그들은 도피성을 찾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러나 끝내 확신하는 믿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그들이 볼 때는 구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Brakel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나 Groe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나 이들이 공통적으로 무엇을 믿었느냐 하면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구원하는 믿음으로 보았다.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했다. 이들 두 그룹은 공통적으로 믿음을 두 계층으로 나눈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 두 번째 그룹은 뭘 더했느냐하면 이것이 이렇게 나눌 때 한 가지 믿음을 정의하면서 본질적으로 언제나 확신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 단계의 확신이 없고, 단지 확신을 결의한 믿음의 형태로만 말하게 되면 결국에는 확신하는 믿음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도피성을 찾는 믿음만 가지면서도 자신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둘로 구분하더라도 언제나 믿음과 확신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의 주장은 칼빈의 생각을 구현하고자 했었다. 콤리의 주장을 들어보면 좀 더 칼빈의 사상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의 입장은 칼빈 정통주의이다. 성경에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사람이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면 구원하는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 이제 이 부분을 끝내고 나면 실제 성경본문을 가지고 와서 칼빈이 해왔던 것이 옳다는 것을 성경신학 쪽으로 뒷받침해야 교리가 선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구원하는 믿음 안에 확신이 수반된다. 수반되는 이유는 믿음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참된 선물이기 때문이다. 꼭 잊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 안에 확신이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말하는 구원에 대한 확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하는 믿음 안에는 확신이 본질로서만 때로 있을 뿐 그것이 의식화 단계 또는 한 인간의 경험 안에서 주관적인 확신 안에서 그것이 제대로 분화되지 못한 상태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확신이란 사실, 칼빈이 ‘확신’을 정의할 때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우리는 보통 ‘확신’이라고 하면 어떤 마음의 상태를 생각한다.
그런데 칼빈은 마음의 상태라는 확신보다 좀 더 넓고 더 초월적인 단계를 생각한다.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잠재된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때 확신은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것이 실현된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실현된 실체가 되기 이전에 단지 잠재된 가능성의 상태로서의 확신도 확신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고 성령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되다고 말해야 하고, 우리의 개인의 경험이 어떠하던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던 칼빈의 신학의 동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우리 인간의 개인적인 노력이나 혹은 의식화된 단계가 구원의 진성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한다면, 전적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교리가 손상을 입게 된다. 그것 때문에 칼빈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로서의 구원하는 믿음, 그리고 구원하는 믿음 안에 잠재된 가능성으로서의 확신 그것도 참되다고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두 논쟁은 첫 번째 그룹은 구원하는 믿음과 확신을 분리해서 다룰 수도 있다. 두 번째 그룹에서는 절대로 분리해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분리해서 다루다가 자칫하면 초기 단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확신에 이르는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 평생 신앙생활 열심히 했는데 정신차려 보니까 지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초기 단계의 믿음도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칼빈의 사상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두 그룹 다 동기는 무엇이냐 하면 목회적인 동기 때문이다.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목회적인 동기가 신학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칼빈은 그런 철저한 목회적인 동기보다는 교리적인 동기가 더 강했던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뛰쳐나와 가지고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배격해야 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심보다는 교리적인 관심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개신교가 정착 단계에 들어가고 그런 단계에서 신학을 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목양하는 교회 교인들의 실천적인, 또 실제적인 유익이 더 급선무였다. 바로 실천적인 동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 삼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로 하여금 구속받게 하사, 구원하는 믿음을 선물로 얻게 하시고 그 믿음 안에서 우리가 날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과 소망에 대해서 확신하며 생존할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받은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도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도 분명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진리의 영을 더하여 주시고 지식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
다.
박혜근 교수, 구원의 확신(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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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리의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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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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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살아계셔서 믿는 자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주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자비를 받게 하시며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걷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시간 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종들에게 동행하시고 듣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확신 가운데 설 수 있도록 붙잡아 주소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되 늘 죄와 싸우기를 힘쓰는 자들 되게 하시고 날마다 죽고 거듭나며 그리스도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 시간에도 주님 함께 하시길 간절히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주에 알렉산더 콤리에 대해 설명하다가 말았다. 화란에서 제2 종교개혁이 있었는데 그 주역 중의 한 사람이 알렉산더 콤리라고 하였다. 알렉산더 콤리는 주로 믿음과 칭의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하였고, 특별히 확신과 관련해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는데 지금 현재 콤리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공부했던 내용을 상기하라.
당시의 개혁파 칼빈주의 정통 안에는 확신의 문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쪽 진영에는 Brakel, Lamped 같은 사람이 있었고, 또 한 쪽에는 Groe, Thuynen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브라켈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과 목마름을 도피성을 찾는 믿음이라고 부르고, 이들은 확신을 믿음의 열매라고 하였다. 믿음의 열매라고 할 때는 믿음의 본질이 확신이라고 했던 칼빈의 가르침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들은 확신하는 믿음과 도피성을 찾는 믿음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믿음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칼빈은 단순한 믿음을 주장했다. 구원하는 믿음 그리고 거짓 믿음 두 가지로만 나누었다. 그러나 브라켈 같은 경우에는 도피성을 찾고자 하는 믿음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믿음이라고 두 가지로 나누었다. 두 종류라기 보다는 믿음의 두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확신은 믿음의 열매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브라켈의 주장이다.
여기에 맞서서 Groe, Thuynen 같은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칼빈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강변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게 되면 도리어 목회적으로 위험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으면서도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섣불리 자신들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오판을 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주저했고 대신에 그것을 동시적인 것으로 또 필연적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두 진영의 논쟁이 계속 되고 있는 중에 콤리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저술에서 나타난 믿음에 관한, 믿음과 확신에 관한 가르침을 재정립을 해 나가게 되는데 단순하게 반복한 것이 아니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그것을 좀더 분석적이고 좀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구조 안에서 재정립을 했던 사람이다.
자, 오늘 어떻게 했는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콤리는 제일 먼저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동을 둘로 구분했다. 그래서 라틴어로 하면 habitus and Actus of faith. habitus는 원리 혹은 본질 그런 뜻이다. Actus는 영어로 action인데 믿음의 표출, 겉으로 드러난 가시적인 결과, 행동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말로 믿음의 원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믿음의 원리, 믿음의 행위 이렇게 둘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콤리의 주장이다.
이렇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칼빈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이미 암시된 바 있다. 칼빈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과 확신은 언제나 같이 있다”고 한편 다른 곳에서는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듯 한 두 가지 주장은 믿음에 대한 그의 이해 안에서 설명된다고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런 가르침을 콤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좀 더 자신의 시대에 논쟁과 관련된 흐름 안에서 믿음을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두 가지 관점에서 나눠봐야 된다고 말한 것이다. 아까 브라켈 같은 경우에는 믿음의 두 가지 스텝을 말했다.
그러나 콤리는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두 가지 스텝을 나누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믿음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얼핏 매우 비슷한 접근 같은데 그 안에 차이가 있다. 믿음의 원리는 한 사람이 중생할 때 새로운 본성과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여하시는 감화, 감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정말 감동이 일으키게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학개서에도 나오지만, 에스라에도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다리오의 마음을 감화하사(우르),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해서(우르) 그로 하여금 유대인들로 하여금 고토로 돌아가게 했다. 감동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우르는 일깨운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고레스의 마음을 감화하실 때 고레스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그는 아마 그 당시는 감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정치적인 이해관계 안에서 유대인을 돌려보내는 것이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레스라는 사람의 의식 세계 안에 작용했던 표면적인 이유 말고, 그 모든 이유보다 더 깊은 심연의 자리에는 모든 사고를 지배했던 하나님의 우르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감동이 본인이 감지하지 못하는 매우 신비로운 방식으로 한 사람의 지적이고 의지적인 결정을 이끌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를 빌리면 제1원인으로 자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이사야에서 예고되었다. ‘내가 장차 한 사람 고레스를 세우고 그를 감동하여’라고 할 때도 우리를 사용한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에서 총독에서 업무를 볼 때 이런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감동하시매” 감동하다는 말이 우르이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감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줄로 알고 그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능력은 고레스가 받았던 그런 식의 그런 감동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작용이라는 면에서는 고레스에게 있었던 그 감동이나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있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나, 둘 다 저자는 성령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지만 그 특징은 다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나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성령의 감동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때 그 믿음을 콤리는 믿음의 원리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변모되어가는, 소위 말하는 중생적 변화의 시작, 그 첫 번째 나타나는 변화가 믿음이다. 믿음이 먼저 들어와야 한다. 믿음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믿음이다. 그래서 은혜로운 선물이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은혜 위에 또 은혜이다. 언제나 은혜가 또 다른 은혜를 부른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은혜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더 큰 은혜를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모든 은혜는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 믿음, 하나님의 더 큰 약속의 은혜를 불러들이는 그 첫번째 은혜가 믿음이다. 바로 그 믿음을 콤리는 믿음의 원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주어지냐면 사람이 중생할 때 주어진다.
그런데 이 믿음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향해서 가졌던 순종하는 믿음, 완전한 믿음.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모든 권능과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같이 받아 누리는 것이다. 어쨌든 중생할 때 주어지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는 본질적인 원리로서 믿음을 그는, 믿음의 원리하고 하였다.
자, 이렇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분리할 수는 없다. 분리할 수는 없는데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분리해서 이렇게 다루게 될 때의 유익은 믿음의 행위가 신자의 공로로 간주될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여지를 차단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있다. 결국 믿음의 행위는 어디서부터 오냐면 믿음의 원리로부터 오는 것이다. 믿음의 원리가 없다면 믿음의 행위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원리는 본질이고 Actus는 그 본질에 따르는 가시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믿음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원리로부터 비롯되는 가시적인 결과임으로 사람이 자신의 공덕으로, 혹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믿음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도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원리에 따르는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하게 되면 인간의 공로주의가 개입될 수 여지는 차단될 수 있다. 콤리는 그런 점 때문에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화란개혁파 가운데에서 당시에 번지고 있었던 믿음과 확신에 대한 논쟁은 중생할 때 주어지는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다양한 행위로서 믿음의 Actus(표출)를 구분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중생할 때 주어지는 믿음의 원리가 있고, 그 믿음의 원리 때문에 나오는 다양한 믿음의 행위들이 있다. 믿음의 행위 그것들이 믿음의 Actus(표출)이라고 보는데 이 둘, 원리와 행위를 구분하지 못해서 당시 화란 개혁파 안에서 번지고 있었던 논쟁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믿음의 원리를 말하면서 중생할 때 하나님에 의해서 신자의 마음에 주입되는 새로운, 전혀 새로운 것, 그 전에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으로 감지하거나 확인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원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존재론적인 자질인데, 우리 안에 존재론적 자질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믿음의 원리라고 설명했다.
반면에 믿음의 행위는 믿음을 실천적인 실체로 만드는 능동적 행위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원리는 중생할 때 주어지는 신자의, 택자의 존재론적인 새로운 자질이 하나 생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존재론적인 자질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가 무엇이냐면 믿음의 행위이다. 이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원리를 실천적인 실체로,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실체로서 믿음의 원리를 말했던 것이다.
자, 그는 이렇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나누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유익을 나열했다. 언급해 볼 테니 잘 듣고 잘 정리하기 바란다.
1.1. 콤리의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나누게 될 때의 유익함들
첫 번째, 믿음의 원리를 강조하게 되면 믿음의 특정한 행위가 신자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하는 힘을 지닌 것처럼 만들 만큼 그것을 높이는 행위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믿음을 원리를 강조하게 되면 믿음의 원리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다양한 믿음의 행위들을 신자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처럼 믿게 만들만큼 그런 행위들을 높이는 신학적 과오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원리를, 믿음의 행위와 나누게 되면 믿음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과오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원리를 분리하게 되면 믿음의 원리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다양한 믿음의 행위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만들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높이는 신학적 과오를 막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든지, 선행을 하게 된다든지, 혹은 기도를 한다든지 이런 믿음의 특정한 행위는 바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두 개를 이렇게 분리하지 않으면 ,예를 들면 믿음의 원리로부터 믿음의 행위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사람들은 믿음의 행위만을 강조하게 된다.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 나중에 이런 식의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신이란 믿음의 행위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율법주의에 떨어질 공산이 크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인간 행동주의만 남는다. 결국에는 우리 한국교회 그렇게 하지 않는가. 확신이 없으면 기도하고 말씀보라고 한다.
그런데 확신과 행위 사이의 관계가 확신이 믿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확신의 근거는 어디냐면 칼빈은 믿음 위에 확신이 선다고 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믿음이 크든 작든 간에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인이 감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자신이 구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좌절할 수 있다.
그래서 매튜 리더라는 청교도 신학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까이 떨어진 것처럼 괴로워하는데 그는 결국 신자로 드러나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 다 간 것처럼 생각했지만 나중에 지옥에 가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왜 생기냐면, 확신이 때로는 구원하는 믿음과 함께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본인이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지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이란 그 믿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결국에는 믿는 자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위선자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는 천국에 가까이 간 것처럼 확신하고 살았는데 그 사람의 최선은 결국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런 일이 왜 생기냐면, 확신이 가진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살아있을 동안에 목회자들이 신앙적으로 잘 가이드 해야 한다. 가르치고 교육을 해야 한다. 또 확신을 얻게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 있다. 그 수단은 선행이다. 선행이 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소위 말하면 확신을 갖게 해 줄 수는 없다. 없는 확신을 기도나 선행을 통해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만들어 내면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구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선행은 확신을 인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하는 믿음을 먼저 갖도록 하는 것이 확신에 이르는 유일하고 최선을 길이다.
그러나 확신을 갖는다는 말은 매우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확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확신과 구분되는 것이다. 확신은 저기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른 채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확신이 있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실체와 주관적인 경험 사이의 괴리를 매우는 작업을 목회자들이 도와줘야 하고 메우는 수단 중의 하나가 선행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이 남북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해방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 주관적 확신은 노예 해방선언이 이루어지고 난 20-30년대까지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자유 시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그들의 신분이 법적으로 자유 시민이 된 것하고는 무관하다. 아무 관계없다. 단지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기회를 향유하지 못한 것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자유 시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확신을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지,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 질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가지 habitus하고 actus를 구분할 때 생기는 유익이 무엇이냐, 결국 중생할 때는 habitus가 들어온다. habitus가 들어오면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부터 actus가 비롯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게 되면 나중에 actus를 강조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행위가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신학적 과오는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콤리의 생각이다.
그는 행위로서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말할 때, 행위로서의 믿음이 신자의 공로로 인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행위로서의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이렇게 말하면 결국에는 행위로서의 믿음이 그 행위의 주체인 나의 공로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위험은 가능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제인 하지(Zane Hodge)는 견인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견인하지 않아도 한번 딱 고백만 하면 그 한 번의 고백이 그 사람의 고백을 확정짓는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따라서 신앙을 고백한 그 이후에 믿음을 설령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그 사람의 구원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것이 제인 하지이다. 우리는 그들을 비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무상 은혜의 교리를 주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무상은혜의 교리와 맞선 사람이 누구냐면, 주권 구원(Lordshipsalvation)-교리의 핵심은 믿음과 제자도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권 구원이다. 그러니까 결국 주권 구원에서는 구원과 제자도는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주권 구원의 대표적인 사람은 잔 맥아더이다. 그가 주권 구원을 부르짖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권 구원의 교리적인 핵심은 구원과 제자도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은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곧 제자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청년집회 가면 이런 소리 많이 한다. 제자 됩시다! 제자 되는 것 좋다. 다 제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뭐냐면 제자도라는 삶의 순종, 그것과 구원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실천적인 순종, actus가 없으면, 제자도하고 구원이 동일하다는 말은 제자도가 신분으로서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서, 행동으로서의 actus를 말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실천적인 삶의 순종과 구원은 동일한데 만약 그런 순종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제자도의 삶을 삽시다. 그게 주장이다. 그 순간은 두 발로 천국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 다 자빠져 있다. 끝까지 못 간다.
이 주권 구원의 결론이 은혜의 재발견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아! 은혜가 없이는 주님의 나라에 못 간다는 이 사실을, 처음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의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의 완성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은혜의 재발견을 못하면 잔 번연의 은혜의 세계로 귀착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실패자로 끝난다. 느브갓네살로 끝나고, 고레스로 끝난다. 그런데 이 주권 구원은 actus를 강조한다.
잔 맥아더의 주권 구원을 반박하려고 제인 하지가 「완전 공짜」라는 책을 썼다. 1989년에 나왔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단 한 번의 수납으로 인해서 신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기적적인 내적 변화를 겪게 된다”라고 한다.
4영리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 빌 브라이트인데, 그것을 처음에는 “나는 이 시간부터 주님 앞에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끊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죄에 대한 인식과 회개를 먼저 삽입을 하였다. 그런데 기도해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생략했다. 그래서 4영리에 그것이 빠졌다. 치명적인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토록 죄에 대해 싸우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는 회개에 대한 요청이 없다. 그런 식으로 예를 들면 내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것, 아주 기계적인 것이다. 기계적인 그것, 아멘 오케이 하면 끝나는 것이다. 마술 같은 몇 개의 문장만 나열하면, 그리고 그 문장에 동의만 하면 신자가 되는 것으로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찰스 피니가 이렇게 하였다. 정말 그러하냐는 신학적 반성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 반성이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다 그렇다. 이것을 안일한 믿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믿음을 계속 존속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런 점을 주장하다가 자칫하다가는 믿음을 한 번 수반 수납하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라는 말이 그 책에 나온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면 믿음의 존속보다는 믿음의 고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의 존속을 신학적인 용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견인은 있어야 하는데 누가 그 견인을 부정하느냐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한 번의 신앙적 고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계속 책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물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믿음이 계속 되어야 하고, 또 필연적으로 그러하다는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견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의 행위에 따를 뿐 믿음의 지속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도 믿음의 행위라는 말이 나온다. 믿음의 행위를 지금 제인 하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무엇이냐면 신앙
고백, 결심,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고 싶은 열망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그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사실은, 제인 하지하고 잔 맥아더하고 논쟁을 했는데 그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무엇을 강조하냐면 둘 다 actus를 강조한다.
우리가 확신과 선행, 확신과 순종을 다룰 때 설명하겠는데, 여러분 선행 좋은 것이다. 마땅한 것이다.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시는 실천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성화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을 행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예정의 실천적인 목적은 우리의 선행이고 성화이다. 그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기의 영광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세세토록 찬송을 우리들로부터 받으시려고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예정도 믿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선행없는 예정론을 함부로 떠벌리면 안 된다. 예정론을 가르칠 때 반드시 그 예정론을 가르칠 만큼 자신의 삶이 선한 의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어젯밤에 진탕 마시고 인생 즐기면서 그 다음날 예정론 가르친다면 사탄의 열린 입이다. 그러니까 선행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칼빈도 말하기를 예정론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인 하지나 존 맥아더 둘 다 믿음의 행위를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다. 이런 오늘날의 경향이 지금 화란의 제2 종교개혁 당시에 칼빈주의자들 당시에 있었던 문제였다. 이 말을 그냥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런 위험은 교회 안에 언제나 상존하는 위험이다. 믿음의 행위 좋다. 믿음의 행위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의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콤리는 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믿음의 행위를 견제하고, 그 믿음의 행위를 강조할 때 생기는 신학적인 위험에 대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할 지 고민하다가 믿음의 habitus, actus 두 개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믿음의 행위가 없는 사람이라도 믿음의 본질만 있으면 그 사람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어느 정도 이론적인 주장이지만, 믿음의 원리가 없는 것, 중생할 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선물로서의 믿음이 없다고 할 경우에, 아무리 믿음의 행위가 있어본들 그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안내해지지 못한다. 이렇게 두 개를 구분하였다.
그래서 제인 하지는 믿음을 인간 행위로 돌렸고, 믿음의 행위를 구원의 기초로 삼았다. 하지의 경우에서도 이미 살펴보았지만 믿음의 행위가 구원의 근거로 오인될 위험은 화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 하지는 habiuts와 actus를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하는 것은 행위로서의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믿음의 원리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냐면, 본질적인 믿음에서부터 온다. 이것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오늘날 바울 연구에 있어서 새 관점학파는 여기에 관계된다. 믿음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시도이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믿음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못 한다. 그래서 원리로서의 믿음, 그것을 믿음의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자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떤 식으로든 브라켈이 주장하는 것처럼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는 시도는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두 번째, 믿음의 원리를 믿음의 행위보다 더 높임으로써 콤리는 믿음의 유일한 원인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신자들의 관심과 주의를 모아보고자 했다.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아까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이라고? 예수 그리스도. 이 믿음은 예수님 자신의 믿음이 있고, 우리들에게 나눠주시기 위한 믿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 자신의 믿음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던 그 믿음이 우리가 선물로 받은 믿음이다.
만물을, 눈에 보이는 만물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정말 두려워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게 했던 부활의 영, 성령이 역사했던 예수님의 그 믿음이 우리가 가진 그 믿음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다른 믿음이 아니다.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의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사람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둘을 구분하면서.
에베소서 2:1에 보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들이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인정하기 싫어도 사실이다. 내가 팔팔하게 살았는데 죽었다니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성경에 보면 영적으로 죽었다고 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고, 구원을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도 옹호하고 격려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는 바로 그 상태가 죽은 상태이다.
그의 심장은 뛰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심판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은 정죄 받았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머리 위에 있다. 그것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고 결정적인 일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바로 그런 상태, 그것이 자연인의 상태이다.
전적 부패의 교리를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죽어있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고 결정적인 일을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무것도 못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도 행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전적 부패의 상태이다. 이성도 살아있고 도덕적 양심도 다소간 살아 있다.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고 결정적인 것을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원리를 심어주는 자는 누구냐면 성령이다. 성령의 권능이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환영하도록, 말씀 안에 약속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힘껏 붙들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이라고 기쁜 마음으로 화답할 수 있도록, 강하게 믿음을 원리를 심어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다.
이렇게 믿음의 원리가 심어질 때 신자는 일방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객체에 불과하다. 그냥 수동적인 객체이다. 수동적인 객체를 설명하기 좋은 것은 허수아비이다. 넘어지면 일어설 수 없는 수동적인 객체, 그들에게 믿음을 넣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원리를 심어짐으로써 택자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접붙임을 받아 들어가고,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 받아 들어가게 되고 그와 연합하게 된다.
자,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순간, 믿음의 이식이 완성된다. 그때부터 그는 믿음의 행위를 하게 된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접붙힘 받는 순간, 그 나무에 모든 진기가, 영양분이 가지에 들어가게 된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마침내 열매를 맺고 살아있는 증거를 보인다. 그러니까 Actus, 믿음의 행위는 전적으로 믿음의 원리가 심어지는 사건의 결과이다. 결국 믿음의 원리가 심어지는 사건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지금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못 믿을 것이 없고 보지 못할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것만큼 그들도 살아 있다. 그리스도가 과거에 보셨던 것을 우리가 다 볼 수 있다. 말씀을 통해 다 본다. 더 이상 더 나은 계시도 필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접붙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라는 눈을 통해서 아들이 보셨던 천국의 영광과 아버지의 얼굴도 다 볼 수 있다.
세 번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믿음의 원리를 우선적인 것으로, 믿음의 행위를 차선적인 것으로 구분하게 된다.
그러니까 연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와서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게 되면, 믿음의 원리는 우선적인 것이 되고, 믿음의 행위는 차선적인 것이 된다. 방금 전에 설명했다. 자,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믿음이란 없다.
예를 들면 믿음을 마치 그리스도의 주머니에 있는 어떤 물건처럼 분여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이란 그렇게 분여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참여하도록 초청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에 우리도 같이 함께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가 언약적으로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믿음에 합하게 되고, 그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택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향유하게 된다. 잘 기억해야 한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건을 나눠주듯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 안으로 연합을 통해 불러들이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이 연합의 사건이 믿음의 원리로서의 habitus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은택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된다.
시혜자인 그리스도가 그의 선물보다 더 중요하다. 선물을 주시는 자가 선물보다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가 베푸시는 모든 선물보다 위대하고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선물이 참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 사건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 말 꼭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약속, 그리스도의 선물이 참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확신하게 될 때는 언제냐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은혜를 베푸시는 자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와 하나가 되는 순간에 그의 모든 선물이 마침내 내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콤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의 원리가 택자에게 수여되는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이 대목이 콤리의 신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잘한 점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사건이 믿음의 원리가 수여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콤리가 그 때 주어지는 믿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조금 잘못이다. 섭섭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믿음의 원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새로운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우리가 받은 바 그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왜 참되느냐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면 구원의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 살림 받았다.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약속을 가지게 될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내가 가진 믿음이 그리스도의 믿음이기 때문에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스스로 난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이다. 그래서 콤리는 뭐라고 했냐면,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그리스도의 믿음과의 연합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면 무엇을 구분하게 되냐면 habitus와 actus를 구분하게 되고, 그 habitus가 훨씬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나눈 것은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박수를 보내 주어야 한다. 신학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네 번째, 믿음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믿음의 행위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성을 강조하는데 유리하다고 보았다.
성령에 의해서 신자의 마음에 믿음의 원리가 심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행위가-잘 기억해야 한다- 항상 동일하게 강력하게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믿음의 원리가 성령에 의해서 심어지기는 했지만, 믿음의 행위가 언제나 강력하게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렇게 되지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믿음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로, 스스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의 원리를 받았다고 해서 믿음의 행동을 이루는 능력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거 인정해야 한다. 믿음의 원리가 심어졌다고 해서 믿음의 행동을 이룰 수 있다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원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심어지듯이 믿음의 행동 역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믿음의 행위 또한 믿음의 원리만큼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아, 정말 시원하다. 진리를 드러내주니 시원하다. 믿음의 행위도 믿음의 원리만큼이나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수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았다. 여러분 이 점은 나중에 목회자로서 교인들을 관리할 때, 특별히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자 할 때 이 말 꼭 기억해야 한다. 믿음의 원리가, habitus가 심어지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부터 온다.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믿음이 나온다. 그 때 믿음이 나온다고 할 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도 포함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그 때 그 믿음은 믿음의 원리도 말하고, 믿음의 행위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결국에는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과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는 늘 같이 가는 것이다. 만약 확신을 얻고자 한다면, 믿음의 행위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결심 백 번 할 것 아니다. 차라리 말씀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 믿음의 행위는 가능해진다. 말씀을 듣지 않는데 무슨 믿음의 행위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은 긴밀한 관계 안에 있다. 믿음의 원리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Spirits com verbo.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이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원리를 심어주실 때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을 들을 때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셨다. 루디아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 보고, 환상 보고 믿은 것이 아니다.
고넬료가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말씀을 전해준 자가 없어서 그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사도 베드로를 보내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 거기서 백부장 만나서 백부장이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듣고 그가 성령을 받았다.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마침내 성령이 임하고 그 안에 무엇이 임하느냐면 habitus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방식으로 믿음의 행위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주의 성령이 믿음의 행위를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나의 자의적 결정이나 결심이 부족해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늘 이 시간부터 그거 버려야 한다. 결심 문제 아니다. 결심 백번 해도 안 된다. 성령 충만해야 한다. 말씀 듣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이 내 안에서 강력히 역사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행위가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행위가 계속 나오기 위해서 부단한 말씀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도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기 힘들다. 우리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
믿음의 행위가 종종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을 걷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말씀의 결과라고 믿어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서 믿음의 행위라는 것도 신자 개개인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보게 되어 은혜의 의존성을 더 키우게 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믿음 행위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은혜의 의존성을 더 강화할 수 있다는 말은 옳다.
보통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것은 믿음이 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믿음으로만 이 말이,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해주는 원인이라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믿음으로만’이라고 할 때는 믿음이 무엇을 가르치냐면,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뿐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오냐면,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부터 온다. 단지 그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 무엇이냐면 믿음이다. 은혜를 우리 안에 불러들이는 은혜,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만 은혜를 받는다, 바로 그 뜻이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믿음으로만 믿을 수 있는 원리를 받고, 믿음으로만 믿을 수 있는 행위를 받는 것이다.
1.2.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
콤리는 또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믿음을 나눌 때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로 다시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된다고 했다. 아까는 믿음의 원리, 믿음의 행위 이렇게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된다고 하였다. 또한 콤리는 믿음의 직접적 행위, 믿음의 사색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Directus / Reflectus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로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왜 이렇게 나누었냐면, 이렇게 나누게 된 이유는, 어떻게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점진적으로 확보해 나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답할 때,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확보해 나가게 되냔 말이다. 아까 믿음의 행위로서의 확신은, 주관적 의식으로서의 확신은 즉각적이거나 때로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말씀을 통해 그것이 점점 분명해지기는 하는데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바로 어떻게 라는 말은 그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냔 말이다. 주관적인 체험으로서의 확신,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도달하게 되냐고 물었을 때, 두 가지 관점에서 믿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생각 많이 한 것이다.
그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2항을 근거로 들어 설명하였다. “이 확실성은 허황된 소망에 근거한, 단순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 그럴듯한 확신이 아니라, 신앙에서 무오는 무오한 확신이다. 이 믿음의 절대적 확신은 구원의 약속들의 신적 진리와, 이 같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 이 영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이 영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우리가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니까 믿음의 절대적인 확신은 거룩한 진리 위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의 내적 증거는, 내 마음에 찾아오는 주관적인 확신은 어디에 근거하냐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입증하시는 양자의 영의 증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렇게 나눈 것이다. 아까 말했던, 칼빈이 말했던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반드시 사실로서 존재하는 확신, 그것은 어디에 있느냐면, 말씀을 들을 때 이미 온다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원리가 오고, 믿음의 원리가 우리 안에 심어질 때 이미 그 믿음의 원리와 함께 벌써 절대적인 확신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내적인 증거로서의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증이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성령은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신데 그분에 의하여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여기에서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거룩한 진리들에 대한 확신, 절대적인 확신을 콤리는 무엇이라고 분류했냐면, 믿음의 직접적 행위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을 콤리가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는 믿음의 절대적인 확신, 그것은 믿음의 직접적 행위라고 설명하였다. 그 다음에 성령의 내증에 의해서 영과 더불어 나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해주시는 그것, 지금 우리가 말하는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확신을 무엇이라고 분류했냐면 믿음의 사색적 행위라고 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설명을 시도하였다.
이런 시도는 사실 칼빈의 믿음의 속성 안에 있던 것을 훨씬 더 체계적으로 더 분석적으로 잘 다루어 놓은 것이다. 역시 신학은 발전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조금 더 낫다. 찰스 하지도 그랬다. “내가 소원하는 것은 내 사후에 나의 제자들이 나의 신학을 더 확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시간에는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창세전에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 받을 자로 선택하사 오늘도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며 신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의 믿음에 참여하게 하사 그리스도가 보셨던 것, 들으셨던 것, 마음으로 소망했던 모든 것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믿음, 귀한 줄 알게 하시고, 늘 감사하는 저희가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가 걸어가셨던 믿음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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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근 박사 /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저서> Salvation in Moltmanns Trinitarian Theology The Cross and Prax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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