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 1
"우리나라 역사상 어느 시대가 가장 태평성대 였을까요?"라고 물으면 우리나라 사람 십중팔구는 "당근 세종시대"라고 말 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 받고 있다.
세종이 재위한 조선 초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와 과학을 꽃 피웠고 정치적 안정도 이루었다.
그 시기는 큰 전쟁없이 백성들도 나름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세종시대가 우리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였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정답은 아니라고 한다.
세종시대는 우리 생각보다 왜적 외침이 많았고 전염병과 가뭄등도 심했다.
그래서 세종 1년에 박위장군과 1만5천명의 군사로 대마도 정벌이 이루어 진다.
또 세종시대에는 북방에서는 여진족의 침탈도 많았다.
그래서 최윤덕장군에 의해 4군, 김종서장군에 의해 6진 개척도 이루어 진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상 가장 태평시대 정답은 어떤 시기였을까?
왕들의 치적을 떠나 조선시대 가장 태평성대였던 시대는 뜻밖에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시대 초기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연산군시대 초기는 조선건국 후 100년이 넘도록 큰 외침이 없었고 가뭄, 홍수, 전염병도 없었으며 민란 같은 것은 더욱 더 없었다.
조선 건국 후 100년이 넘어 정국도 아주 안정 되어 있었다.
연산군 즉위 초에는 연산군이 해동성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그래서 연산군시대 초기 십 년 간을 우리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든 세종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고시대 중 하나였음은 틀림없다.
세종은 어쩌면 태종의 철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왕이라고 볼 수 있다.
태종이 처음부터 세종을 왕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태종은 '제1, 2차 왕자의 난'으로 골육상쟁을 겪으면서 왕위에 오른 만큼 자기 아랫 대에서는 '장자승계원칙'이 확실하게 자리잡아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게 하려 했다.
그래서 태종은 일찌감치 장자인 양녕을 세자로 정한다.
양녕은 1404년 열살의 나이로 세자가 된다. 세자시절 양녕은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양녕은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양녕의 이런 모습에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다.
태종은 양녕에게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양녕은 변하지 않았다.
양녕이 한 술 더 떠 궁으로까지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으로 궁궐이 떠들썩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이후에 양녕은 태종에 더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반감을 표현하는 상소까지 올리는 등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다.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양녕을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양녕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뜻밖에 세종의 충신 당시 이조판서 황희였다.
황희는 이 일로 귀양까지 간다.
1418년 양녕은 세자 책봉 14년만에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진다.
그리고 태종이 그동안 눈여겨 보아왔던 세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사실 세종시대는 요즈음 와서 드라마 화 되기도했지만 그 동안은 유명한 소설, 드라마, 영화가 없었고 있었다면 양녕의 이야기가 소재로 사용되곤 했다.
그 이유는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가 되려면 심한 갈등과 복선이 많이 깔려있어야 하는데 세종시대에는 그러한 갈등이나 복선이 많지 않았을 만큼 정치나 정세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야사에서는 세종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양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우선 양녕의 세자폐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김시양은 저서 자해필담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양녕이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세자(양녕)의 계속된 비행으로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양녕이 이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이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나온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권력무상을 느껴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일부러 미친 짓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양녕은 어쩌든 세자를 포기하고 왕 대신 자유를 얻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까지 거치며 당시로서는 장수한 69세의 나이까지 슬하 10남 17녀를 두며 별 탈없이 한 평생 호화스럽게 잘 지내며 살다 간다.
개인사로만 본다면 어쩜 왕을 포기하고 자유를 택한 양녕이 세종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행복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양녕의 말로는 아주 추했다.
수 없는 엽색행각을 마다않던 양녕은 급기야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 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 이야기는 이완용에게서도 나오는 이야기다
양녕은 1453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한다.
그리고 쿠데타 성공 후에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
단종을 죽이라고 한 사람도 양녕이라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양녕에 대해서는 전설처럼 여러 설들이 있고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양녕의 폐세자로 느닷없이 왕위에 오른 세종은 1397년(태조 6)에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다.
동복형제로서 위로는 14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폐위된 양녕대군과 세종의 세자 책봉 후 불가에 귀의한 효령대군이 있으며, 아래로 성령대군이 있다.
세종은 1418년(태종 18) 6월에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두 달 뒤 태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부왕인 태종이 건강을 염려해 책 읽기를 금할 정도였다.
이처럼 남달리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자신의 넓고 깊은 학식을 국가 경영에 직접 도입해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의 시대에 조선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안팎으로 안정된 정국 속에서 한글 창제, 예치주의의 실천, 천문학 및 농업의 발달 등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어서 세종 2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