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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27-36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여호수아서가 가나안 땅 정복 및 분배 이야기였다면 사사기는 가나안 땅 정착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고 정착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사기 1장부터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유다 지파의 정복 이야기로 시작한 1장은 요셉 가문의 온전치 못한 순종으로 이어지더니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정복 실패 이야기로 마칩니다.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다(27-31절)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므낫세는 요단 동편과 서편에서 모두 기업을 얻었는데, 본문은 요단 서편 기업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므낫세 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성읍 중 5개 성읍에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족속은 그 땅에 결심하고 거주했습니다. 므낫세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5개 성읍은 각각 교통, 종교,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중요 거점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가 과연 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쫓아내지 않은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표현은 총 10절로 구성된 오늘 본문에서만 무려 7번 반복될 정도로 본문의 핵심표현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중심을 벌거벗은 것처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처럼 성경은 므낫세 지파의 중심을 간파하고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므낫세 지파는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비단 므낫세 지파만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중심이었습니다. 주어가 므낫세 지파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결합된 왕정시대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일임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것은 애초에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달려있었습니다. 여리고성 전투만 떠올려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인됨을 인정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하나님 되려고 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킬 수 있다는 경제적 논리로 결정했습니다. 가나안 족속 중 거인족들도 있었기에 육체적 힘을 이용할 수 있었고, 가나안 족속은 유목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농경사회 토착민이었기에 뛰어난 농경기술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 가나안 족속은 자신들에게 커다란 유익을 가져다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가나안 족속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신명기 7장 26절입니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을 하나님께 심판받아 진멸할 대상으로 봤다면 결코 그들을 가까이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따라 가나안 족속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아간이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금, 그리고 은을 진멸하여 바칠 물건이 아닌 자신을 윤택하게 해줄 재물로 봤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땅을 소유하기 위한 정복 전쟁으로 왜곡시켜버렸습니다. 그렇게 진멸의 대상을 소유하려 하다가 자신들이 진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위한다고 했던 행동이 결국은 자신을 찌르고 만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행동만이 영원히 우리를 위하는 행동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므낫세 지파 이후로 연이어 나오는 지파들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고, 가나안 족속은 그들의 기업 안에 거주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스불론 지파입니다.
(29-30)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에브라임 지파와 스불론 지파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도하는 여호수아 16장 10절을 보면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고, 그들을 노역하는 종으로 부렸습니다. 이처럼 에브라임과 스불론 지파 모두 므낫세 지파와 마찬가지로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습니다. 머리로는 가나안 족속을 배척해도 마음으로는 원했고, 그 결과 쫓아내지 않고 노역하는 종으로 삼았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머리속으로 되뇌인다 해도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말씀에서 벗어난 행동이 우리의 본심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결과가 갈수록 참담해집니다. 아셀과 납달리 지파는 주객이 전도된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다(31-33절)
(31-33)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아셀 지파는 앞서 5개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므낫세 지파와 달리 7개 성읍을 점령하지 않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을 포함하여 지중해 연안의 매우 비옥한 땅을 기업으로 받은 아셀 지파였지만 7개 성읍이나 점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업 대부분을 점령하지 않았습니다.
납달리 지파도 벧세메스와 벧아낫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 벧아낫은 ‘아낫의 집’이라는 뜻으로 두 곳 모두 가나안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경제적 유익을 위해 그들에게 노역을 부과했지만 우상숭배의 본거지를 진멸하지 않자 후일에 화근이 되었습니다.
앞서 에브라임과 스불론 지파는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했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소수로 끼어사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가나안 족속 앞에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지만 아셀과 납달리 지파에 와서는 가나안 족속 앞에 ‘그 땅의 주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이는 가나안 족속이 주인이고,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손님이 되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진멸의 대상에게 자신들이 통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참상의 끝은 단 지파의 정복 실패였습니다.
기업을 빼앗기다(34-36절)
(34-35)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단 지파는 ‘쫓아내다’라는 동사조차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단 지파가 이 난국을 스스로 타개하지 않고, 후일에 요셉 가문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타개했습니다. 그렇게 단 지파는 요셉 가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습니다. 이때도 요셉 가문은 아모리 족속을 진멸하지 않고, 노역하는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따른 결과를 마지막 절이 보여줍니다.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단 지파의 경계가 나와야 할 자리에 아모리 족속의 경계가 나왔습니다. 단 지파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고 든든히 서가야 하는데 아모리 족속이 자신들의 구역을 갖고 든든히 서갔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자신들의 구역 안에서 안전하게 예전의 세력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한 번, 두 번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 취한 결과 하나님이 주신 기업 자체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타락은 아주 작은 타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자기 과신은 자기 파멸로 이어집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의의 무기로서 가나안 전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나안 족속에게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은 커녕 경제 즉, 돈을 따라 움직이는 우스운 하나님을 내보였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그런 하나님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단 지파를 몰아넣고, 자신들이 든든히 서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우스운 하나님을 보이는 불의의 무기로 쓰였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 욕망을 투영하여 하나님을 나타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로만 말씀을 떠올릴 뿐 생명의 근원인 마음으로는 자기 욕망을 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과의 구별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족속보다 뒤처져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본문 속 북쪽 지파들처럼 가나안 족속을 단호하게 쫓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도 세상에 우스운 하나님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맛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제거하는 정복 전쟁을 끝없이 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우선시하고 있는 우상, 탐욕, 불의, 성적 타락 등 끈적한 죄들을 온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요즘 연일 보도되는 일상에 스며든 마약 소식을 접할 때면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꿈과 소망을 잃고 육체적 쾌락만을 삶의 낙으로 여기며 마약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모습을 볼 때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영원한 소망인 하나님 나라를 이웃들에게 온전히 전해주지 못한 책임에 통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 우리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대로 살아간 죄의 결과로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지 두렵기만 합니다. 이제라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며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정도로 영적 아노미에 빠진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물질의 풍요가 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빛과 소금입니다. 하나님도 그 기대를 갖고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6-28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 다스리며 의와 평강과 희락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로 가꿔갈 사명자입니다. 예수님을 품은 우리가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곧 사회의 타락입니다. 올해 ‘내가 이기었노라’ 선언하시며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단단히 붙잡읍시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자리에서부터 영적 전쟁을 단호히 수행하여 죄를 쫓아내십시다. 결단하지 않으면 결단당합니다. 말씀을 생명 걸고 대하십시다. 그렇게 말씀을 머리에 담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따르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살아갈 때 “내가 이기었노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대한민국 사회에 성취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멋진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에 온전히 쓰이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공의의 하나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 정도 쯤이야”라며 가볍게 여기고 죄와 타협하던 옛 삶을 단호하게 정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부름 받은 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바치게 하시고, “내가 이기었노라” 선언하신 주님의 약속을 신실히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생각하며 되뇌이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좋아하고 따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2. 하나님의 말씀이 내 중심을 훤히 드러낼 때 부끄러운 영역은 없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회개기도를 드립시다.
3. 나는 어떤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기에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갖기 위해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5. “내가 이기었노라”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작성 : 강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