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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덕수궁 돌담길’ ‘바보처럼 울었다’의 가수 진송남, 노래인생 55년 이야기[2] | ||||||||
정글의 나라, 베트남전에서의 낮과 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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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 ‘바보처럼 울었다’, ‘오 님아’, ‘시오리 솔밭 길’ 등 많은 히트곡과 더불어 시대를 함께 노래한 미남, 미성의 스타 진송남. ‘부산항 제3부두’는 그의 삶, 한 부분이 소중히 담겨 있는 노래다. ‘나란히 걸읍시다’의 잉꼬 듀엣 ‘진송남 부부’의 음악적 끼와 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2세 진민기 또한 최근 ‘그런 거야’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 뮤지션.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환송공연무대에서 직접 불러야 했던 ‘바보처럼 울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백차는 그를 실고 용산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8시 기차로 포항 월남파병교육대에 입소된다. 해병대 연예대의 동료가수 남진, 태원, 박일남 등과 함께였다. 본인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개된 이 파병 결정은 ‘근무 이탈, 영리 행위를 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 그러나 당사자들은 연예대 지원동기 자체가 연예활동을 허용한다는 조건이었다고 항변해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배경에는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을 베트남전에 파병시킴으로써 파월장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겠다는, 관계 당국의 계산된 전략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게 대부분 주위의 시각이었다. 이들은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향하던 시각, 도착하자마자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른바 ‘군기 잡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튿날 곧바로 양포훈련장으로 이동하는데 이미 많은 파월 예비 장병들이 훈련 중이었다. 60리 길을 걸어야 하는 훈련장 가는 도중 몇몇이 대열에서 낙오, 엠블런스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진송남은 끝까지 훈련을 소화했다. 3주간의 특수교육을 마치고 이들은 결국 베트남 행 군함을 타기 위해 부산항 제3부두에 도착한다. 1969년 7월26일. 환송식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나온 인파들로 가득했다. 정작 가족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떠나온 탓에 뒤늦게 가족, 친지들이 달려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진송남씨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으나 ‘사병들과의 접근 금지, 개인 이탈 금지’ 등의 통제로 상면하지 못했다. 떡을 싸들고 목포에서 달려온 남진씨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환송식을 마치고 우리는 군함에 올랐어요. 훈련을 같이 받았던 박일남은 전날 밤 함께 내무반에서 자고 이곳까지 왔는데 건강 상 이유로 막판에 제외되었다고 하더군요. 군함에 올랐지만 이국만리 낯선 전쟁터로 간다는 게 전혀 실감나지 않았어요.” 그때 갑자기 호송병 하나가 달려와 이제부터 환송 위문공연이 시작되니 다시 내려오라고 했다. 내려 와서 보니 환송식장 앞에는 ‘이기고 돌아오라’라는 큼지막한 플래카드와 함께 임시 간이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환송공연무대에 마지막으로 불려나온 가수는 바로 파병 당사자인 진송남, 남진, 태원이었다. 그들 자신을 위한 파월장병 환송공연을 스스로 해야 하는 심경은 복잡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환송식 무대에서 부른 노래는, 이들의 최고 히트곡이었던 ‘가슴 아프게(남진)’와 ‘바보처럼 울었다(진송남)’, ‘가을의 연인(태원)’이었다. “남진은 방금 올랐던 배를 바라보며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을 열창했고 나 역시 히트곡인 ‘바보처럼 울었다’를 비통한 심정으로 불러야했죠.” ‘그렇게 그렇게 사랑을 하면서도/어이해 어이해 말 한마디 못한 채/바보처럼 바보처럼 그님을 잃어버리고/고까짓 것 해 보건만 아무래도 못 잊어/아무래도 못 잊어서 바보처럼 울었다/목을 놓아 울었다. 차라리 차라리 생각을 말자 해도/너무나 너무나 사랑했던 까닭에/바보처럼 바보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해/수소문을 해 보건만 찾을 길이 막연해/찾을 길이 막연해서 바보처럼 울었다/소리치며 울었다.’ 수많은 태극기 물결 속에 울려 퍼지던 함성과 눈물을 뒤로 한 채 배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처음 타보는 배였던 만큼 배 안은 온통 멀미로 인한 토사물 투성이었어요. 우리가 멀미로 고통스러워하자 장교들이 머무는 칸으로 옮겨졌지요. 그나마 그곳은 덜 흔들렸지만 견디기 힘든 고통은 매 한가지였어요. 더욱 참기 힘들었던 것은 앞날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감이었죠.” 몇날며칠의 항해 끝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다낭이었다. 연병장에 선 이들에게 각각 배치될 부대를 알려주는 호명이 시작되었다. 제1대대부터 호명되었는데 맨 마지막에 진송남의 이름이 불려졌다. 그리고 제2대대로 이어졌다. 서로 불안한 얼굴로 마주보던 세 명의 눈빛이 순간 흐려졌다. 서로 다른 대대로 배치, 각각 떨어져 근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제2대대의 마지막에 김남진(남진의 본명)의 이름이 호명되고 박태원(태원의 본명)은 5대대로 배치되었다. 결국 이들은 각각 다른 대대 소속의 소총수로 배치되어 흩어져야 했다. 진송남은 1대대 3중대, 남진은 2대대 5중대, 태원은 5대대 27중대였다. 무더운 정글의 나라, 베트남의 호이안 지역 중에서도 진송남씨가 배치된 1대대 3중대 지역은 특히 수질이 나빠 소독약을 타서 마셔야 할 정도였다. 샤워를 해도 물이 워낙 탁해 얼룩과 냄새가 몸에서 쉽게 가시지 않았다. 병사들 역시 모두 새카맸다. 이들에게 진지 구축, 매복 작전, 보초 근무 등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전투병 소총수로서의 임무가 맡겨졌다. 그렇게 정글의 나라, 한창 전쟁 중이던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머나먼 이국전선에서 날아온 ‘대한뉴스, 월남 소식’ 베트남에서 이들의 활약상은 국내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손에는 마이크 대신 M16 총이, 어깨엔 4개의 수류탄, 허리엔 탄띠를 두르고 방탄조끼에 철모를 쓰고 근무하면서 수시로 위문공연까지 하는 이들의 늠름한 모습이... 당시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던 ‘우리는 청룡이다’ 노래가 그렇듯 ‘귀신 잡는 해병’, 이들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열광했다. 장병들의 사기는 물론 파월장병가족들에도 큰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아들이라는 국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해병대/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월남의 하늘 아래 메아리치는/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에 담고/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려/삼군의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해병대/얼룩무늬 번개되어 원수를 친다/자유월남 짓밟는 붉은 무리들/청룡이 가는 곳에 어찌 맞서랴/온 세계의 곳곳에 평화 심고자/조국의 명예 걸고 청룡은 간다.’ 당시 ‘파월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위문편지는 초·중·고등학생들의 과제물이기도 했고 동시에 골목골목, 전국에 울려 퍼지던 ‘우리는 청룡이다’, ‘맹호는 간다’, ‘달려라 백마’ 같은 노래들은 동네꼬마들의 전쟁놀이 주제가였다. 월남 파병과 때를 같이 해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월남치마’가 대유행했다. 때와 장소의 구분 없이 입을 수 있는 이 월남치마는 심지어 시골 아낙네들이 농사일을 할 때에도 간편하게 입을 수 있어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여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이들의 활약상은 당시 대한뉴스의 ‘월남소식’을 비롯해 각종 신문과 잡지의 뉴스를 장식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월남파병 장병들은 머나먼 땅, 이국만리 전쟁터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머나먼 쏭바강(박영한, 1978년)’, ‘하얀 전쟁(안정효, 1989년)’, ‘랍스터를 먹는 시간(방현석. 2004년)’, '무기의 그늘(황석영, 2006년)’을 비롯해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년)’,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 1987년)’ 같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드러난 베트남전의 실체는 참혹, 그 자체였다. 죽음의 위협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건기, 우기로만 나눠진 베트남 날씨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고 발바닥이 뜨거워 걷지 못할 정도의 무더운 날씨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오죽하면 ‘월남에 가려면 별을 달고 가던지 치마를 입고 가라’는 속어까지 회자되었을까. “힘든 일도 많았지만 가능한 한 좋은 것만을 기억하려고 애쓰죠. 그러나 그러기 쉽지 않을 만큼 크고 작은 사고도 많았어요. 야전에서 용변 보는 중 총알 세례를 받아 죽을 뻔했던 일이나, 군용버너에 불을 붙이는 순간 지뢰가 터져 동료가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장면도 목격했죠.” 언제 베트콩(월맹군)의 습격이 있을지 몰라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전쟁터, 그 공포가 크게 느껴질수록 셋은 동료애를 발휘해 서로 의지했고 때로는 장난스런 행동으로 긴장감을 풀었다. 때문에 웃지 못 할 일화도 많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한 번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작전을 나갔어요. 속칭 ‘방석을 잡는다’고 말하는 작전으로 땅의 지면과 수평이 되게 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매복을 하는 중이었죠. 담배 불빛이 조금이라도 새나가면 곧바로 베트콩의 습격을 받을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는데, 그 때 남진에게서 무전이 왔어요. ‘지금 대대장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대대장이 ‘바보처럼 울었다’를 듣고 싶다며 무전기로 노래를 불러 달라’는 거예요. 정말 난감했죠. 그러나 남진의 부탁인지라 할 수 없이 모기 소리만 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다짜고짜 ‘피죽도 못 먹었느냐, 안 들린다’며 더 크게 부르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던지...” 월남전의 꽃, 위문공연에 대한 기억 각각의 중대로 나뉘어 근무하던 이들은 한 달 쯤 지나면서 여단본부 경비중대로 합쳐지며 같은 막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또한 소총수로 근무하는 동시에 가수로서 위문공연에도 참여, 근무를 병행했다. 파월장병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위문공연이다. 흥겨움과 눈물바다가 동시에 교차되는 감동의 순간이기도 했다. 특히 고국에서 위문공연단이 한 번 올 때마다 3개월 일정으로 청룡, 맹호, 백마부대 주둔지역까지 함께 다녔다. 불과 10명 내외의 초소까지도 우리 장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당시 많은 베트남 위문공연단원들이 훈장처럼 가슴에 간직한 이야기가 있다. 갈 때마다 사병들과 기념사진을 몇 백 장씩 찍었던 순간이다. 이처럼 위문공연단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인기 또한 대단했다. 에피소드 또한 많다. 어느 날 위문공연 중 빨랫줄에 널어놓은 공연단의 여자속옷이 없어졌다. 사병들이 훔쳐간 것. ‘여자 속옷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부적처럼 총알이 피해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 이후 위문단원들은 아예 여성속옷을 따로 몇 벌씩 챙겨가서 다음날 전투에 나가는 사병들에게 일일이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틀어주던 대한뉴스 화면을 통해 전해지던 월남위문공연 장면은 국내에 있는 많은 국민들의 가슴까지 뭉클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전쟁터에서 노래와 춤이 왜 필요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 현장에서 진송남씨는 자신이 가수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자랑스러웠다. 베트남 현지주민들에게도 인기 있었던 따이한 군인 특히 진송남씨는 현지 베트남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위문공연단은 현지주민들을 위한 공연도 이따금씩 펼쳤는데 이때 그는 베트남 노래, '담 끄어이 냐 빈(군대 결혼식)’을 무대에서 종종 부르곤 했다. 배트남 미군방송TV에도 출연해 이 노래를 부르자 현지인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따이한 병사가 자신의 나라 노래를 자기네 말로 부르는 게 신기하고 또 친숙하게 느껴졌는지, 거리나 식당 등에서 그를 알아보며 반가워했다. “당시 베트남 하사관이 발표했던 노래였어요. 가사에 ‘탱크’, ‘군대’... 이런 단어가 들어가 있는 노래인데 무슨 내용인지는 사실 잘 몰라요. 가사를 우리말 발음으로 표기해 외워 부르곤 했었지요. 한 번은 선배가수 도미 형님이 부대에 오셔서 여단장님께 우리들을 휴가 보내주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휴가 차 사이공 나이트클럽에 갔는데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자 아가씨들이 저를 알아보고 앙코르를 요청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당시 국내의 많은 연예인들이 사업 차 월남에 와있었다. 미8군쇼 대행업체 관계자들을 비롯해 도미, 최갑석, 송민도씨 등이 그들이었다. 결국 이 노래가 진송남씨에게는 베트남 현지에서의 또 하나, 단골 레파토리가 되었다. 반면 남진은 ‘고엽(Autumn leaves)’, 태원은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가 즐겨 부르던 레파토리였다.
호이안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 ‘병사의 음악편지’ 맡아 진행 이들 셋은 청룡부대지역의 호이안방송국에서 번갈아가며 ‘병사의 음악편지’라는 한 시간짜리 음악프로그램을 맡아 매일 저녁 진행했다. 라디오는 파월장병들에게 고국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방송국인 이 주월한국군방송국은 주월사령부가 있던 사이공방송국을 비롯해 맹호부대와 십자성부대 지역의 퀴논방송국, 청룡부대 지역의 호이안방송국, 백마부대의 나트랑방송국 등을 잇달아 개국했다. 방송은 하루 9시간. 그중 두 시간은 자체 뉴스와 신청곡 프로그램, 부대 탐방 등을 내보냈고 나머지 시간은 국내에서 공수해온 인기 프로그램 중 CM을 빼고 방송했다. 당시 국내 인기프로그램들은 KBS의 ‘젊은이의 광장’, ‘노래의 성좌’, ‘노래고개 세 고개’, MBC의 ‘오색의 화원’, ‘전설 따라 삼천리’, TBC의 ‘가요대상 인기열차’, ‘가요 팝송 베스트 10’, DBS의 ‘명랑 백일장’, 국군방송의 ‘우리의 군가’ 등, 이를테면 국내 인기방송의 하이라이트, 그 축소판이었다. “셋이 번갈아가며 교대로 맡았던 ‘병사의 음악편지’는 고국에 보내는 가슴 찡한 사연과 더불어 신청곡을 받아 틀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사연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가슴이 뭉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그의 회고다. 파월장병들의 주제가처럼 불린 ‘남국의 향수’
공교롭게도 진송남씨는 월남 파병 이전에 ‘향수’ 관련 노래를 유독 많이 취입했다. 운명적이라 여겨질 정도다. 1967년에 발표한 ‘향수에 울었소(백영호 작사, 백영호 작곡)’, ‘향수의 밤(반야월, 라화랑)’, ‘고국 땅(김영곤, 박춘석)’, ‘사나이 향수(남국인, 백영호)’, 그리고 이듬해 발표한 ‘남국의 향수(이장희, 나음파)’, ‘그리운 어머니(김진경, 나음파)’, ‘고향 달(김진경, 이재현)’, ‘향수의 별(박영신, 서영은)’까지... 이중 파월장병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노래가 ‘남국의 향수(이장희 작사, 나음파 작곡)’였다. 마치 자신들의 주제가인양 애창되었다. ‘십자성 반짝이는 이국전선에/병사의 나팔소리 울려 퍼지면/잊었던 고향생각 부모님 생각/가슴을 찢어내는 남국의 향수/아-- 아--- 남국의 향수. 포성도 고이 잠든 이국전선에/야자수 가지 위에 달이 떠오면/그리운 고향생각 가슴 설레며/방아쇠 잡은 손을 적시는 눈물/아-- 아--- 남국의 향수.’ “위문공연을 갈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달라는 요청을 유독 많이 받았어요. 그때마다 병사들과 함께 목 놓아 합창하곤 했죠. 온통 눈물바다였어요. 어떻게 노래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놓을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죠.” 이후 이 노래는 그의 대표곡 모음집에도 실릴 정도로 그에게 반드시 따라다니는 노래가 됐다.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전쟁터였지만 그 속에서도 나름의 위트와 낭만이 넘쳤다. 매일 밤 두 시간 씩 서야 하는 보초근무에도 익숙해졌을 무렵, 어느새 근무기한 1년이 채워져 가며 귀국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1년 간 근무를 연장 신청한다. “이 무렵 여단장으로 부임한 이동용 준장이 먼저 제의해왔어요. 어차피 고국에 가도 남은 군 복무를 해야 하니까 아예 월남에 남아 위문공연을 하면서 남은 군 생활을 마치는 게 어떻겠느냐, 는 일종의 권유였죠. 공교롭게도 여단장님은 처음 우리에게 해병대 연예대 입대를 권유했던 인물로 우리와는 특히 인연이 많았던 분이죠. 특히 함께 더 있어주기를 바라는 전우들의 눈빛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1년 간의 연장근무를 신청한 이들은 그 사이에 20일간의 특별휴가를 받아 귀국한다. 70년 9월, 파병 14개월만이었다. 처음 베트남에 올 때는 군함으로 몇날며칠이 걸렸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휴가는 군용기 편으로 불과 네 시간 남짓 거리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