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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대한 역사 개관
1. 인도의 선과 중국의 선
불교에 있어서 불자라면 반드시 공부해야할 것을 일반적으로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戒), 정(定), 혜(慧)라는 것입니다. 또한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 또는 증상계학(增上戒學), 증상심학(增上心學), 증상혜학(增上慧學)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완전한 자아의 완성을 추구하는 수행자와 행복을 추구하는 불자의 마음 구조를 3분하여 의지적인 면을 계(戒), 감성적인 면을 정(定), 이지적인 면을 혜(慧)로 편의상 구분한 것입니다. 서구의 일반심리학에서 인간의 심리를 지(知)·정(情)·의(意)로 구분하여 말하듯이 계·정·혜 삼학도 편의상 분류한 것입니다. 즉 계(戒)인 무억(無憶)·에티켓·생활규칙·불교의 윤리가 잘 지켜졌을 때, 정(定)인 무념(無念)·마음의 통일·마음의 고향을 찾는 것이 잘 이루어지고, 정(定)이 잘 이루어졌을 때, 혜(慧)인 막망(莫忘)·올바른 이해·올바른 분별·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관되어 삼위일체가 되었을 때 진정으로 부처님 가르침이 완전해 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학은 오분향(五分香)·팔정도(八正道)·오정심관(五停心觀)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사무량심(四無量心)·육바라밀(六波羅密)·사섭법(四攝法) 등 갖가지 마음가짐과 실천수행법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그 모든 가르침은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에 포섭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부처님의 교법 일체를 삼장(三藏 ; 經·律·論)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워야할 순수한 인간학인 동시에 진(眞=聖)·선(善=德)·미(美=中道)를 구현하는 실천철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定學 즉 禪에 중점을 두고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선(禪)]은 범어 디야나(Dhyana) 또는 빨리어 갸나(Jhana)를 음역한 선나(禪那)의 약어이고, 의역하여 정려(靜慮)·사유수(思惟修)·기악(棄惡)·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요가(Yoga)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가는 [Yuj]라는 어원에서 나온 [묶다. 매다. 결합한다]는 의미이고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선이나 요가도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통일한 상태를 삼매(三昧, samadhi)라고 합니다. 삼매는 등지(等持 ;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는 것)라고 번역하고 동시에 [정(定)]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마음이 삼매에 머물러 고요해져서 거울처럼 되었을 때 대상의 경계가 마음에 있는 그대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삼매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앞의 선(禪)과 정(定)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말합니다.
어쨌든 선은 정신을 통일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결가부좌하여 편안하게 앉거나 호흡을 세어 마음을 통일한다든지 혹은 백골(白骨)을 관해서 집착을 벗어나는 등의 수단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 선 실습의 결과 마음이 고요해져서 마음이 평정을 얻으면 그 평정을 얻은 마음으로 법을 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법의 이해로 반야의 지혜를 강화하고, 번뇌를 끊어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의 실습으로 마음이 고요한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얻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 선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선종이라고 말하면서도 단지 선을 수행하는 것만은 아니고 공안(公案)을 참구하고 법을 관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각이 없으면 선을 수행하고도 그것으로 얻은 적정의 맛을 즐기는 정도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존시대에 선은 고요한 선에 의해서 마음이 평정을 얻어서 적정하게 된 단계를 [초선(初禪)·이선(二禪)·삼선(三禪)·사선(四禪)]의 네 가지 단계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 위에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등의 네 가지 단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선정을 얻은 마음]에 있어서 오온(五蘊)의 무아(無我)를 관하든지 사념처(四念處)를 관하든지 사성제(四聖諦)를 관하든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관하는 등의 관법(觀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원시불교의 관법도 줄곧 계속해서 수행되었는데 더욱이 그 위에 대승독자의 [동적인 관법]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반야바라밀의 실천은 열심히 수행되었기 때문에 그 맹렬한 수행을 지탱하는 삼매는 반드시 기력이 충만한 열렬한 성격의 선이라 이루 말할 수 없도록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육바라밀의 수행을 지탱하는 삼매를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i)라 하고 [용건삼매(勇健三昧)]라고 번역합니다. 슈라(Sura)는 용기가 있는 전사라는 것이고 성불이란 대망을 가진 보살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보살에게는 열심히 수행을 완수하는 [불요불굴의 기력]이 필요하고, 이 기력을 용맹하게 일으키는 삼매가 수릉엄삼매입니다. {반야경}에는 이 수릉엄삼매를 기초로 한 백팔삼매(百八三昧)가 설해져 있습니다.
이 밖에도 대승불교의 삼매에는 아미타불을 관하는 [반주삼매(般舟三昧)]와 {법화경}에 기초한 [법화삼매(法華三昧)], {화엄경}에 기초한 [해인삼매(海印三昧)와 화엄삼매(華嚴三昧)]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모든 삼매의 근저에는 반야의 공관(空觀)에 기초한 [공(空)의 삼매]와 유식불교에 기초한 [유식관(唯識觀)]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승의 모든 삼매의 동적인 성격은 공관(空觀)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서기전후(西紀前後) 경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해서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불교가 중국의 장안(長安)에 전해진 것은 서기 1세기경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경전이 번역된 것은 서기 150년경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수백 년 동안(약 천여 년)에 서역과 인도로부터 수많은 불교승려가 중국에 와서 불법을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경전을 번역한 역경승도 많았지만 그밖에 계율을 중심으로 한 [승도의 생활작법]을 전한 승려와 선(禪)의 실천을 전한 선승과 그밖에 다른 여러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을 중국에 전한 보리달마(菩提達摩)도 이들의 도래승(度來僧) 중에 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 이외에도 중국에 선을 전한 스님은 적지 않습니다. 오래 전 서기 150년경에 장안에 왔던 안세고(安世高)는 소승선(小乘禪)의 경전을 번역하여 중국에 인도의 선을 소개하였으며, 그 수행방법도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대승선(大乘禪)으로는 406년에 장안에 왔던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유명합니다. 그는 {화엄경}을 번역하였는데 동시에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과 선경수행방편(禪經修行方便) 등을 번역하여 선의 수행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후 담마밀다(曇摩蜜多)와 불타발타(佛陀跋陀), 강량야사(畺良耶舍) 등이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했습니다. 강량야사는 {관무량수경}을 번역하였는데 선을 전문으로 해서 단번에 선정에 들어가서 칠일 동안 선정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삼매정수(三昧正受)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 외에도 중국에 왔던 선사는 많았고 그리고 중국스님들 가운데도 선법(禪法)에 뛰어난 스님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불다발타의 제자인 혜광(慧光)과 도방(道房), 승조(僧稠) 등이 유명합니다.
중국에서 일어난 선종은 달마가 전한 선법이 중심이었지만 당시에 이미 중국에 전해져 있던 소승선법(小乘禪法)과 대승삼매(大乘三昧)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실천가들인 도사(道士)들도 산에 머물면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실천방법 등도 중국의 선종 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인도의 선과는 뉘앙스가 다른 중국의 독자적인 강렬한 선을 말한 선종(禪宗)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보리달마는 남인도의 출신으로 국왕의 셋째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 사람이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출가해서 대승불교를 배웠지만 다른 나라에 불교를 널리 펴려고 중국에 왔던 것입니다. 그가 중국에 온 것은 470년경으로 남방의 해로로부터 중국남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무제(梁武帝, 502-549재위)를 대면하여 선문답을 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고 선종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계보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픽션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그 후 달마는 북방의 위(魏)나라로 갔다고 전하지만 그러나 선법(禪法)을 넓히기에는 아직 시절인연이 성숙되지 않아서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면벽구년(面壁九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동안 반야대승선법을 설하여 제자도 제접(提接)하여 얻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입사행설(二入四行說)]이 전해지고, 제자에 혜가(慧可, 487-592?)가 있으며, 선종의 제2조가 됩니다. 그 후 제3조 승찬(僧璨)·제4조 도신(道信)·제5조 홍인(弘忍) 등을 점차로 걸쳐서 특히 홍인(弘忍, 602 -675)의 문하에 [동산홍인의 십대제자] 등 수많은 제자가 출현하여 점차로 이 계통이 선의 주류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특히 홍인의 제자에는 신수(神秀)와 혜능(慧能, 638-712)이 출현하여 [남돈북수(南頓北秀)]라는 점오(漸悟)를 설한 신수와 돈오(頓悟)를 설한 혜능에 의해서 북종(北宗)과 남종(南宗)으로 나뉘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혜능의 남종이 선의 주류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이 때 스승인 홍인대사로부터 소견을 드러내라는 말에 의해서 신수대사는 [몸은 본래 깨달음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으니, 끊임없이 털고 닦아서(끊임없이 노력하고 연마해서), 한 티끌도 붙지 않게 하라]라고 기술한 것으로 응하였고, 혜능대사는 [깨달음에 나무는 필요 없고, 밝은 거울에도 대는 쓸모 없는 것, 마음의 본성은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어느 곳에 티끌이 끼일 것인가]라고 소견을 드러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혜능대사는 광동성(廣東省)의 출신으로 집이 가난하여 어떤 때에는 시장에 땔나무를 팔아서 생활하였는데 {금강반야바밀경}을 염송하는 것을 듣고 발심하여 홍인대사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후에 홍인대사로부터 동산법문의 발우와 가사를 받아서 고향의 조계산 보림사에 돌아가서 큰 선풍을 선양하였습니다.
혜능대사에게는 사법제자(嗣法弟子)가 40여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청원행사(靑原行思)의 계통에서 석두희천(石頭希遷)이 출현하여 조동종(曹洞宗)과 운문종(雲門宗), 그리고 법안종(法眼宗)이 출현하였고, 남악회양(南嶽懷讓)의 계통에서 홍주종(洪州宗)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를 좀더 자세히 말하면 남악의 제자에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출현하여 강서(江西)에서 교화를 폈는데 그의 제자에 강서성 홍주의 백장산에 백장회해(百丈懷海)가 출현하여 선원의 생활규범을 제정한 {백장청규}를 저술하였습니다. 이 백장의 제자에 황벽희운(黃檗希運)과 위산영우(위山靈祐)가 배출되었는데 전자에서 임제의현(臨濟義玄)이 출현하였고, 후자에서 앙산혜적(仰山慧寂)이 출현해서 임제종(臨濟宗)과 위앙종(위仰宗) 등이 일어나 선종오가(禪宗五家)가 성립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청원행사와 남악회양의 계통에 뛰어난 선사가 출현하여 혜능 계통의 선이 중당(中唐) 이후에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말(唐末) 무종(武宗)의 파불(破佛)을 극복하고 선종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종의 파불로 불교가 전체적으로 쇠퇴의 기운을 향하고 있을 때 오직 선종만이 성대하게 되었던 것은 선종이 중국적인 불교로 되었던 것과 함께 조정과 귀족의 원조에 의뢰하지 않고 산야에 머물면서 간소한 생활로 견디며 노동을 하면서 자급자족의 수행생활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백장청규}는 이러한 선문(禪門)의 생활규범을 나타낸 것인데 그 가운데에는 수행승 모두가 노동을 하는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노령이 된 백장이 제자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노동을 쉬게 하려고 노동도구를 감추었으나 식사 때가 되어도 식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라]는 유명한 명구를 남겼습니다. 이와 같이 선종교단이 권문세가에 아부하지 않고 조정과 귀족의 경제적 원조를 받지 않았던 것에 그들이 스스로 이상이라고 믿었던 수행생활을 행했던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능가경}을 심요(心要)라고 했지만 혜능대사는 {금강경}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종으로서는 한때의 오해이긴 하지만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없다고 여기는 때가 있었기 때문에 [교외별전(敎外別傳), 불입문자(不立文字)]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깨달음의 체험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을 중요하였고, 그 때문에 [어록(語錄)]이 작성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사의 어록을 중요시한 점에서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제자의 교육에도 일정한 규칙은 없고 좌선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제자의 제접에 [불자나 방, 할]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소득(無所得)과 무념(無念)·무심(無心)을 존중하였고, 그리하여 곧바로 인간의 심성을 통찰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은 나말려초(羅末麗初)에 우리 나라에 전해져 구산선문이라는 선가(禪家)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 보조지눌에 의해서 선교일치(禪敎一致)가 시행되고, 고려말에 태고보우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의 법맥을 전해와서 계승되어 조선 중기 서산휴정에 의해 선(禪)·교(敎)·염불(念佛)·주력(呪力) 등의 수행이 하나로 통일되는 수행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한국선의 도입과 전개
우리 나라에 선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나말려초(羅末麗初)라고 합니다. 즉 법랑·신행·무상 등에 의해서 초전(初傳)된 이래 도의·홍척·혜조·도헌·혜철·현욱·무염·범일·도윤·이엄 등에 의해서입니다. 이 밖에도 순지·경유·충담 등에 의해서도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라말 고려초의 선승들은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정리되어집니다. 이 '구산선문'이란 표현은 이의가 있기는 하지만 나말여초에 성립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한국선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는 말로 선문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여졌습니다. 하여튼 이 가운데 각각 산문을 개창한 것을 조선후기(1660)에 성립된 {선문조사예참문}에 의거해서 나열하면 가지산문의 도의국사·도굴산문의 범일국사·사자산문의 철감국사·성주산문의 무염국사·봉림산문의 현욱국사·희양산문의 도헌국사·동리산문의 혜철국사·수미산문의 이엄국사·실상산문의 홍척국사·중흥조 보조국사 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문은 중국의 오종가풍(五宗家風)을 혼합하여 받아들여 오지만 초전의 가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문(宗門)과 산문(山門)이라는 이중 구조적 위상을 나타내고 법통(法統, 法脈)보다는 종통(宗統, 人脈)을 중시하는 한국선가의 독특한 유풍(流風)내지는 종풍(宗風)이라고 합니다.
한편 고려의 광종(光宗, 帝位年 : 950∼975)은 지방호족세력과 선종을 제거하고 제종을 재편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방호족과 선종세력을 등에 업고 고려를 개창한 후 그 세력으로 인하여 왕권 다툼을 겪어야만 했던 광종은 미약한 왕권 강화를 위하여 이러한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로 찬유(璨幽)·긍양(兢讓)·균여(均如) 등의 교선일치(敎禪一致)의 성상융회(性相融會)적 화엄사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광종은 존숭하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에게 지종(智宗) 등 36인과 함께 유학을 시켜 새로운 불교와 선종을 선양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력에 힘입어 연수의 법안종 사상은 고려 중·후기 및 조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영향아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성상융회(性相融會)의 화엄사상과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천태사상을 바탕으로 천태종을 개설하고 선을 교로 통합하려는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전개하였습니다.
고려 선종계(禪宗係)의 거두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 등의 삼문(三門)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정혜결사를 결성하여 선(禪) 중심으로 교(敎)를 회통하려 하였고, 한편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도 지눌의 결사에 영향을 받아 그에 부흥하는 천태종의 법화결사(法華結社)로서 보현도량을 개설하여 백련결사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연결사의 실천요강을 천태지관(天台止觀)·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정토구생(淨土求生)의 삼문(三門)으로 구성하여 실천하였습니다. 요세의 이러한 결사는 영명연수의 120병을 극복하려면 천태묘해(天台妙解)라야만 한다는 의식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눌이 최상승의 입장에서 선 중심의 수행결사였다면, 요세는 평범한 서민적 종교성의 실현을 중시한 결사인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시원은 말할 것도 없이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통일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북종선과 남종선이 전래되어 오교구산(五敎九山)을 성립하여 선교통합의 갈등 현상을 겪고서 고려말 선종만의 통합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에 의하여 시도되었습니다. 한편 임제종 계통의 선맥이 본격적으로 전해졌던 고려말에 활약한 선승들은 태고보우·나옹혜근·백운경한입니다. 고려 초기 혜조국사(慧照王師)와 탄연국사(坦然國師)를 통해 전해진 이후 고려 중기 보조지눌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진 임제선이 고려말에 그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고려불교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에 의하여 11종의 종단이 7종으로 통합되고 세종대에는 7종이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됩니다. 그리고 성종과 연산·중종 때에 이르러 이러한 선교양종마저 유명무실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종의 종단은 사라지고 교학자만이 남게 되었으며, 선종에서 겨우 맥을 이어 은둔과 산중불교로 그 명맥을 잇는 실정에 이르게 됩니다. 즉 교단의 통폐합과 승니의 도태, 사원의 혁파, 부역과 병역에 동원되는 등 배불억승(排佛抑僧)의 법난(法難)으로 법등(法燈)이 꺼져갔습니다. 그래서 조선 중기 혜성처럼 나타난 서산휴정은 {선가구감}과 {선교석}을 저술하여 불교 내부적으로도 완전한 선교통일을 이루어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계승하려 합니다. 이러한 휴정이 소속되어 있던 조선시대 선종승단의 원류는 당의 육조혜능의 남돈선(南頓禪) 계통의 전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신라 법랑(法朗)의 법을 계승한 신행(信行, 704∼779)이 신수(神秀)의 문인 지공(志空)에게서 북종선(北宗禪)을 받아 와서 선법을 폈으나, 신라 말기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중국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인인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받아 귀국한 가지산의 체징(體澄, 804∼880)은 도의(道義)의 법을 이어 가지산문을 개창(開倉)하므로써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신라말에 홍척(洪陟)·혜소(慧昭)·현욱(玄昱)·혜철(惠哲)·무염(無染)·도윤(道允)·범일(梵日) 등은 모두 남종선(南宗禪)을 배워서 귀국하고 각자 산문(山門)을 열어 종풍(宗風)을 드날렸기 때문에 고려초기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9개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을 중심으로 성립된 분파를 구산선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최초의 선종승단(禪宗僧團)의 형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성립이 언제쯤인지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고려중기 이후에는 종명(宗名)을 통일하여 조계종(曹溪宗)으로 통칭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계종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 6년에 모두 종파가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기까지 계속되었고 한국의 대표적 종파로서 존속되어 왔지만 중종조(中宗朝)에는 양종(兩宗)조차도 폐지되어, 무종무파(無宗無派)의 산중은둔(山中隱遁)의 불교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계종(曹溪宗)이란 이름은 때때로 문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선가귀감}의 저자를 [조계노화상퇴은사옹(曹溪老和尙退隱師翁)]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발문(跋文)을 쓴 사명유정(四溟惟政)도 자신을 [조계종유사명종봉유정(曹溪宗遺四溟鐘峰惟政)]이라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종단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한국 선종의 승단(僧團)으로서 조계종의 계통과 명맥은 면면히 존속해 왔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과 중종시대의 강제폐지를 거쳐 다행이 명종대(明宗代)에 잠깐 선교양종(禪敎兩宗)이 부활되었을 때, 선종출신의 휴정은 처음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판교종사(判敎宗事)가 되고, 이어서 판선종사(判禪宗事)를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휴정(休靜)의 이와 같은 경력은 한사람의 선사가 어떤 제자에게는 선법(禪法)을, 어떤 제자에게는 교법(敎法)을, 각각 전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부활되었던 양종의 승단(僧團)은 폐지되어 다시 산중은둔불교(山中隱遁佛敎)로 무종단(無宗團)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선종(禪宗)이라든가 교종(敎宗)이라는 확연한 구별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조계노화상(曹溪老和尙)이라고 한 휴정(休靜)을 [선교양종청허휴정(禪敎兩宗淸虛休靜)]이라고 일컬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종도 교종도 없었던 조선의 승단(僧團)은 대한제국 말기인 순종(順宗) 2년(1908)에는 "원종(圓宗)"이라고 하는 종단명(宗團名)을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그 2년 후에는 남부사찰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이 임제종을 세우고 원종과 대립하였는데, 그 후 일제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다시 兩宗의 이름이 폐지되고 단지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고, 1941년에 조계종으로 복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계종(曹溪宗)은 휴정 이후 후학들에 의해 주창된 이래 그 가풍과 법통(法統)을 임제선맥(臨濟禪脈)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