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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야기 | <조선시대>- 제11대 중종, 진성대군 중종에 오르다, |
거사성공-진성대군 왕에 옹립, 연산군 폐출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 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 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사직 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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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쏠쏠한 재미 좋은글 사랑합시다.
전주향교/鶴田/옮김/한문희총대장 감사합니다.
본래의 마음,자유인 한문희총대장, 백두대간의 전설 자유인 백두대간종주대한문희총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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