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 23:1~35
살면서 역설 안에 담긴 통찰을 접하게 됨. 역설이기에 진실을 더 잘 알려주는.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라는 책의 제목. 역설적 제목. 놀이터가 안전하기만 하면, 안전하기에 쉽게 익숙해지고 방심하게 됨. 약간 어려워야 긴장감을 놓치지 않음. 설교 제목도 이러한 원리를 패러디. 우직한 것은 굳건한 것. 지혜는 밝고 부드러운 것. 어떻게 보면 그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 어색. 상호 역설적. 우직은 태도의 문제가 아님. 우직함은 대상의 문제. 누구에게, 왜 우직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 '무엇을 향하여 우직하냐'가 문제. 주님을 향해서 우직하다면 가장 '지혜'로와 짐. 한동대 김영길 총장, 너무 우직해서 독단적인 면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 '안전지대에 있다면 성장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다면 안전지대에 있을 수 없다.' '배워서 남 주자.' 등 사고 발상의 전환이 많은 좋은 영향을 학생에게 줌. 이러한 영향을 통해 한동대가 많은 '블루오션'을 만들어 갔음. NIBC(?) 우리 교회가 한동대의 모교회 역할. 바울은 우직한 인생. 무척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게. 고난이 뻔히 보이는 예루살렘에 가는 모습 등. 거기서 성난 유대인에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고 피의자로 몰려. 이후 줄곧 끌려 다니는 인생. 단 끌려 다니되 적극적으로 끌려 다님. 적극적 수동성. 우직하게 끌려 다니는 상황 속에서도 많은 것을 주도함. 끌려가면서도 점점 로마로 향하고 있는 현상. 내려놓음으로 모든 걸 얻게 되는 삶. 끌려 다니지만 주도적인 삶. 주님만 소유함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삶, 이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함. 이제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을 맞이하게 됨. 거기에는 20년 전 바울을 고용하여 신자들을 핍박하라고 명령한 사람들도 있었음. 그런 사람에게 바울은 배신자. 하수인이 대적자가 됨. 골머리 썩히던 신흥종교를 처리하라고 했는데 그 종교의 선봉자가 되다니.... 그러니 공회의 공분이 컸을 것임.
1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 타협 없이 증언하려는 결기였을 것임. 바울의 솔직한 고백은 공회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 유대교를 거스르는 일. 격분하여 대제사장 아나미아가 '주둥이를 찢어라. 꿰매어라.' 등으로 말함. 율법은 최종 선고 이전에 피의자를 모독하는 것은 안 됨. 그래서 2~3절,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바울의 저항. 공회가 복음을 정상적으로 전할 분위기가 아님을 알고 공회의 부적절함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대응. '여기 안되겠구나..'의 심정. 신앙과 정치를 섞으면 참 어렵다. 그런 자들에게는 회심이 거의 불가능(니고데모의 경우는 거의 없을 것.) 오히려 유대교의 무능함, 오도됨(추구하는 율법에도 충족되지 않는)을 공격하려는 대응으로 느껴지기도 함. 4~5절, '너희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나는 대제사장이 누군지 모른다.' 대제사장엑 불손한 바울을 지적하는 말에 대답한 것. 아나니아가 누군지 알았다면 사과하지 않았을 것. 지독한 부조리를 행한 인물임. '내 입을 치라고? 하나님이 너를 칠거야!'라고 말함. 대제사장들은 로마에게 아부하며 이익을 취한 사람들임. 그래서 나중에 아나니아를 먼저 죽임을 당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알게 되자 바울은 사과함. 이러한 모습이 주님께 '우직함'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직한 사람은 자신의 신앙적 소신을 다하다가도 뭔가 하나님의 원리에 벗어난 것을 알면 바로 '사과'할 수 있는 것임. 어떤 사람과 싸울 때 그의 아내도 한통속으로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하나님에 가까이 가면 그렇게 여기지지 않음. 하나님 앞에 각각의 인격과 존재로 여겨짐. 바울은 이것을 적용함. 6~9절, 바울은 '나는 바리새인이고 바리새인의 아들이다.' 뼈 속 깊이 바리새인이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바리새인에게 있는 '부활의 신앙 때문이다.'라고 매우 지혜롭게 말함. 이렇게 되니 바리새인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철저하게 둘로 쪼개짐. 바리새인은 영의 세계를 믿고, 사두개인들은 그렇지 않음. 어떻게 이렇게 대립할 수 있을까? 가능함. '편 가르기' 앞에서는 모두가 다 유치해짐. 편가르기만큼 우리를 유치하게 만드는 것이 없음. 그러므로 편가르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함. 내 편 만들기 같은 것. 사두개인이 바울을 욕할수록 바리새인들은 공격 당하는 느낌. 바리새인들은 바로 바울의 '무죄'를 선포. 재판 자체가 와해됨. 희극적이기도, 드라마틱하기도 한 상황. 진영 논리로 편가르기를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임. 편가르기가 되면 덕이 많던 이들도 형편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게 됨. 분명 주님의 진리의 한 줄기가 비추면 그런 편가르기가 얼마나 형편 없는 일이었는지가 드러날 것임. 11절,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 바울이 지쳤기 때문에 '담대하라.'고 하심. 엘리야가 갈멜산 승리 후에 지친 것처럼. 영적 전쟁 후에 지치는 burn out. 왜 생기느냐? 영적전쟁 후에 어떤 '기대'가 생기지만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변화하지는 않기에. 주님께서 옆에 서서 말씀하시기까지 하시고 있는 이유. 바울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지 않니?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나님께 직접 듣게 되면 힘이 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순간에 이러한 음성을 듣게 되기를 기도해야 함. 예수님이 기대하는 바울은 어떤 '성과'를 이루는 자가 아니라,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우직하게 ㅏ나님의 뜻을 증거하는 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하는가를 알고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우리를 앵벌이 시켜서 세계 복음을 이루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 그저 예수님을 닮아서 그의 사역에 참예하는 자. 이렇게 되면 넘지 못할 산이 없음.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를 '우직'하게 걷게 한다. 약속과 약속의 성취 안에는 엄청난 불안과 격차가 있음. 그러나 '약속' 자체가 성취임. 절망과 공포의 전쟁을 게임으로 변화시킨,, 그런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의 과정에서는 긴장을 유발할 수밖에 없지만, 결과를 알므로 틈새의 휴식과 안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할 수 있음. 바울을 이동시키는 과정에 그를 암살하려고 40명의 암살단 구성.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할 정도로 결기. 그 계획을 알게 되어 엄청난 수비대를 구성하여 바울을 보호.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하나의 과정임. 많은 이들이 바울을 보호하게 만듬. 로마에서 증언하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그들이 로마 시민권자를 보호했다는 정치적 논리를 붙여서 로마로 이동시키는 역사.
일련의 죽음의 위기를 거쳐서 로마로 끌려감. 계속 끌려가고, 끌려가고, 끌려가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져가는 과정. 우직하게 가고 있음. "우보만리"(내 의견). 마인드는 죽어도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일희일비하지 않는. 이 길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는 사실이 내 뼈에 깊이 박힌 자. 오직 주님께만 둘러 싸인 자. 현실에서는 너무 많은 대적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지만, 오직 주님께만 둘러 쌓인 자.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바울. 그런 속에서 돌아볼 때마다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