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 나훈아의 ‘갈무리’
인간은 업(業)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
20대 시절 친구를 만나면 통기타 가수가 공연하는 카페에 가곤 했었다.
그곳에서는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아 노래하기도 했는데,
갈 때마다 주로 신청한 곡이 나훈아의 ‘갈무리’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로 시작하는 노래가
가수의 목소리와 잘 어울려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이다.
이 곡을 자주 신청하자 어느 날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전에
웃으면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훈아씨가 참 좋아하겠네요.”
‘갈무리’는 떠나간 여인을 잊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 노래다.
가사에 등장하는 남성은 이미 남이 되어버린 그녀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자신을 향해 싫다고, 밉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잊어야겠다고 사랑 갈무리를 다짐하면서 노래를 마친다.
남성은 과연 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서러운 마음 나도 모르겠다는 노래를 계속 하게 될까?
이 노래를 부른 나훈아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국민가수다.
트로트의 황제, 가황(歌皇)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며,
노래방 반주기에 가장 많은 곡이 수록된 가수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만 200장이 넘으며, 120곡이 넘는
히트곡을 발표한 그야말로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언뜻 기억나는 곡만 해도 “코스모스 피어있는~”으로 시작되는
국민 애창곡 ‘고향역’을 비롯하여 ‘대동강 편지’, ‘사랑’, ‘영영’, ‘잡초’, ‘무시로’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몇 해 전에는 신곡 ‘테스 형’을 발표하여
여전히 건재함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특히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는 가사를
여야 정치권이 각자 자신의 진영에 유리하도록 해석하면서 논쟁이 되기도 했다.
나훈아는 남진과 라이벌 관계로도 유명하다.
두 가수는 여러 면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에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지역적으로 영, 호남을 대표하고 있으며,
나훈아가 토속적이고 구수한 고향의 이미지라면
남진은 세련된 도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자주 보이는 남진과 달리
나훈아는 다소 은둔적인 생활을 하면서 방송 출연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를 신비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중가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가요계의 슈퍼스타인 나훈아는 대중과의 만남이 뜸해서인지
이런저런 소문과 스캔들,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다.
지난 2008년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해명하느라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는데,
다름 아닌 나훈아가 일본 야쿠자에게 폭행을 당해 고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국적인 관심 속에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나훈아는
수많은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인다.
갑자기 재킷을 벗고 단상 위로 올라가더니 대중들을 향해 옷을 벗고
다 보여주면 믿겠느냐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나훈아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퍼포먼스로 인해
그에 관한 루머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는 누구보다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가수였다.
지난 2020년에는 추석을 맞이하여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바이러스에 지친 마음을 달랬다.
오늘에도 여전히 그의 노래는 여러 후배 가수들에 의해 불리고 있으며
특히 ‘너훈아’, ‘나운하’와 같은 이미테이션 가수들은
오리지널 가수의 감성을 흉내 내면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지금도 콘서트 소식만 들리면 공연 티켓은 10초도 안 되어 매진되고 만다.
영원한 국민가수로 남아있는 나훈아의 ‘갈무리’ 노랫말이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 /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서러운 맘 나도 몰라 /
잊어야 하는 줄은 알아 / 이제는 남인 줄도 알아 /
알면서 왜 이런지 몰라 / 두 눈에 눈물 고였잖아 /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 / 이러는 내가 정말 미워 /
이제는 정말 잊어야지 / 오늘도 사랑 갈무리”
참을 수 없는 업(業)의 무게
오랜 시간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자연스레 마음의 고통이 뒤따른다.
밥을 먹어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는다.
애써 잊으려 술에 의존해 보지만 오히려 그리움만 더해갈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보니,
술에 취해 보낸 수많은 전화와 문자가 애별리고(愛別離苦)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가수는 이러는 내가 정말 싫은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정말로 사랑을 갈무리하고 싶은데,
노래 속 주인공은 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서러워하는 것일까?
불교의 업(業)을 통해 그 이유를 확인해보자.
업과 윤회를 불교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불교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오랫동안 인도인의 마음에 내재된 믿음이었다.
그들은 착하게 살면 다음 세상에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배고픈 귀신인 아귀(餓鬼)나 축생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다.
불교는 인도인의 소박한 신앙을 수용하여 체계적으로 정립하였으며,
부파불교 시대에 이르면 업과 윤회는 하나의 학설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렇다면 업(業)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몸(身)과 입(口), 마음(意)으로 어떤 행위를 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사라지더라도
그로 인한 에너지는 무의식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여 미래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업(業)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그 영향력이 저장되는 공간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흔히 업장(業藏)으로 불리는 업의 저장 창고가 바로 이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에 저장된 에너지는 우리들 삶의 곳곳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평소에는 젊잖다가도 술만 마시면 주사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이는 그동안 술 마시고 행한 좋지 않은 에너지가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가
조건이 주어지자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에 행한 업의 과보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에너지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옛 어른들이 술버릇은 죽어서야 고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과거 권력은 현재의 권력을 이기기 어렵지만,
우리들 실존에서 무의식은 현재의 의식을 쉽게 압도한다.
그것이 중생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다.
‘갈무리’에서 가수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 노래했지만,
업(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사랑했던 흔적이 무의식에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움만 더해가는 것이다.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도 중생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음으로는 잊고 싶은데 실제 삶에서는 반대로 움직이는
생각과 현실의 괴리 현상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마음으로 원하는 선(善)을 행하지 않으며,
내가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악(惡)을 행하도다.”
바울은 마음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고 싶은데,
몸으로는 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런 고백을 한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떠나간 여인을 잊고 싶은데 잊히지 않는다는
‘갈무리’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업(業)의 구속을 받기 때문에
생각과 현실 간의 넓은 간극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는 사랑 갈무리를 다짐했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짜장면이 먹고 싶어 중국집에 갔다가
짬뽕을 시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머리로는 짜장면을 시켜야지 생각했는데,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짬뽕 주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웃음을 짓게 된다.
이 또한 업의 무게가 아니겠는가.
인간은 이처럼 참을 수 없는 업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업을 간과하고 인간의 실존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업의 원리는 짬뽕을 시키는 중국집부터 떠나간 여인을 잊지 못해
알코올에 몸을 맡기는 술집에 이르기까지 삶의 현장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수가 원하는 사랑 갈무리는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옴므가 부른 ‘밥만 잘 먹더라’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후 가슴에 멍이 들어 죽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밥만 잘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노래다.
재미있으면서 인간의 실존을 잘 보여주는 노래다.
헤어진 여인을 잊고 사랑을 갈무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한 흔적이 지워질 때까지 말이다.
가수가 그토록 원하는 갈무리는
자신도 모르게 밥만 잘 먹게 되는 그날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 역시 무상하니까.
2023년 6월 6일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