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 (2)-치폐(置廢)와 활동 / 민순의의 조선의 스님들
비구니스님 위주 불교의례 행해진 불사(佛事) 구심점
세조 이어 예종도 정업원에 대한 재정 지원·배려 아끼지 않아
불도 수행하며 유명 달리한 가족 추선재 지냈을 가능성 충분
연산군 때 폐지된 후 후궁 거주처 부속 불당으로 명종이 재건
영조가 정순왕후를 기리며 세운 ‘정업원구기비’.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해 있다.
세조 3년(1457) 9월 정업원을 다시 세우라[復立凈業院]는 왕명이 내려졌다.
“과부와 외로운 여자들이 대개 머리를 깎고 비구니[尼]가 되니,
비구니란 실로 궁박한 무리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정업원을 세우고
이곳에 모여 살게 하여 이들을 구제하려고 한다”는 이유에서였다(‘세조실록).
‘다시’라는 표현에서 세종 30년(1448) 정업원의 노비를 전농시에 이관시켰을 무렵
또는 그 후의 어느 시기에 정업원 자체가 폐지돼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세조는 정업원을 복설하면서 그에 대한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복설의 결정과 함께 노비 30구와 전지 1백 결의 지원을 지시하였고,
이로부터 1년이 채 못 되어 기존에 지급했던 노비 30구 외에 70구를 더 주도록 명하였다.
그로부터 1년 뒤에는 다시 경상도의 공포가(貢布價 : 세금으로 바친 베의 비용)를 경비로 하여
정업원을 중창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6권).
세조는 또 때때로 왕비를 대동하여 정업원에 행차하면서 이를 기념해
명주를 하사하거나, 사리를 나누어주며 사면령을 내리는 등 물심양면의 배려를 지속하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역시 매달 갱미(粳米 : 멥쌀) 7석씩을 지원하고,
죄인의 적몰재산을 지급케 하거나 정업원에 소속된
경거노비(京居奴婢 : 한양 거주 노비)의 잡역(雜役)을 면제하는 등
부왕의 정업원 지원 정책을 계승하였다.
세조 3년에 복설된 이 두 번째 정업원도 세종 때까지 창덕궁 뒤편에 위치했던
조선의 첫 번째 정업원과 같은 자리에 그대로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 17년(1486) “정업원이 궁궐 담장[宮墻] 곁에 있어서
범패(梵唄) 소리가 궁중[禁中]에까지 들린다”는 ‘실록’의 기록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예전과 똑같은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왕궁 바로 곁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이 확인해 주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정업원이 명백하게 불사(佛事)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범패소리[梵唄之聲]’가 들렸다는 것은 불교의례가 행해졌음을 말해 주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범패가 동원된 불교의례는 아마도 망자의 추선을 기원하는 재(齎)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부와 외로운 여자들이 대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다”는
세조의 증언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체 높은 신분으로서 정변 등의 이유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또는 신분이나 정치적 배경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어 불도를 수행하면서 유명을 달리한
가족의 기일에 맞추어 추선재를 올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정업원에서 지내는 불사의 설판재자는 비단 정업원의 비구니뿐만이 아니었다.
“정업원의 비구니[尼僧] 등이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을 맞이하고 청하여
절에 올라가서 유숙하기에 이르렀다”(‘성종실록)’ 는 기록은
신분과 경제면에서 여력이 있는 재가의 여성 불자들이 정업원에서 여러 날을 묵으며
불사를 올렸던 정황을 잘 보여준다. 이들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지냈던 불사에는
범패소리가 동원되는 대규모의 추선재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들 재가의 여성 불자들은 국가의 공인을 받아 상대적으로 안정이 보장된
정업원에서 어쩌면 같은 사족 출신으로 오랜 친분이 있었을 수도 있는
그곳의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돌아가신 가족을 위해 재를 지내고
저마다 불공을 올리는 등 종교 활동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성종은 재위 3년(1472)에 “정업원은 세조께서 특별히 명하여 중수하였고,
또 노비와 전지(田地)를 준 것은 그 삼보(三寶)를 옹호함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그 전지세(田地稅) 외의 잡역과 노비 각 호(戶)의 공부(貢賦) 외 잡역을
모두 면제하여 주어서 향화(香火)에만 전심하게 하라”(성종실록 24권)고 지시한 바 있다.
이는 당시 정업원이 승속을 막론하고 여성이 위주가 된 명백한 종교 활동의
구심처였음을 증언함과 함께, 이러한 사실을 당대인들,
특히 여성의 불교활동에 부정적이었던 남성 유교지식인들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 복설된 정업원은 연산군 10년(1504) “정업원과 안암사(安庵寺)의 비구니는
모두 한치형(韓致亨)의 집으로 옮겨 살게 하라”는 왕명에 따라 다시금 폐지된다
이후 정업원의 운영 실태는 다소 불분명하다.
중종 1년(1506) 정업원을 독서당으로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자순대비(성종 계비 정현왕후)가 정업원과 원각사의 복설을 좌우정승에게 전교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하다가 중종 17년 “폐주(廢主 : 연산군)의 후궁이던
곽씨(郭氏)가 정업원 주지로 있다”는 사헌부의 언급이 등장하여
이때에 이미 정업원이 복설되어 있던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명종 1년(1546) 정업원 복설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어,
명종 4년(1549) 정업원 건축 자재에 대한 명령이 내려지며
그 재건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이다(‘명종실록’ 4권)
이 세 번째 정업원은 예전의 정업원 터에 후궁들의 거주처인 인수궁을 지으면서
그 부속 불당으로 세워진 것이었다(‘명종실록’ 4권, 1년 7월26일).
그러나 이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파악된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 종로구 숭인동에 정업원 구기비(舊基碑)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숭인동은 동대문 밖에 위치한 지역으로,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구니로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이른바 동망봉(東望峰) 아래가 바로 이곳이다.
훗날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의 거주지였음을 알게 되어 이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정업원의 옛 터’라는 뜻의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또 다른 정업원은 그 진위 여부와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정업원의 개념과 위치에 대한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시한다.
2022년 7월 6일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