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표標ㅅ대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출처 《유치환 전집》(1958) 첫 발표 『조선문단」(1936)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1931년 시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보병과 더불어》(1951)를 비롯한 많은 시집을 간행하고, 수상록과 단장), 자작시 해설 <구름에 그린다)(1959) 등을 남겼다. 주로 단호하고 강인한 남성적 어조로 현실에 의연히 맞서며 생의 초월과 극복을 지향한 시를 쓴 시인이다.
| 깃발, 홀로 추는 서러운 춤
1936년 1월 《조선문단》에 처음 발표된 시 <깃발>은 청마 유치환의 첫 시집《청마시초》에 수록되었으며, 그의 초기 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어 왔다. 시에 제시되는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가 보자. '깃발'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1행에서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깃발의 나부낌을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표현하면서, 깃발의 동적인 상태에 주목하고 그것에 단순한 시적 제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여 시적 화자의 내면을 가시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제시하고 있다. 다음 두 행에서 다시 깃발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노스탈쟈의 손수건"에 비유된다. 회귀라는 어원을 지닌 '노스탈쟈(nostalgia)'는 과거 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뜻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푸른 해원"이 표상하는 미래 또는 미지에 대한 동경으로서의 그리움이라는 양면적 의미를 함께 지닌다. 4~6행까지는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를 축으로 하여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와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가 결합되어 있다. “이념의 표ㅅ대”로서의 깃대 끝에 '순정'이라는 깃발의 나부낌은 '백로'처럼 날개를 펼친 화자의 서글픈 마음을 드러내며 고정된 깃대에 의탁한 동적인 상태의 깃발의 모순성을 보여 준다. 7~9행에는 그러한 갈등과 모순에 대한 탄식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아아 누구던가.”라는 도치된 영탄법에 삶의 괴로움이 불러일으키는 갈등과 몸부림이 짙게 투영된다. 이어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 초월적 세계에 대한 향수와 좌절, 곧 서정적 조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근원적 문제를 제기한다.
이 시에서 이념의 푯대 끝에서 휘날리는 깃발의 정점 내지는 그 근저에는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 놓여 있다. 이러한 애수의 심정은 깃발과 같은 시기의 작품인 <이별>(1939)에서는 "고독의 애상"으로, "공중의 깃발”(<그리움>)처럼 울고 있는 또 다른 시적 화자에게는 그리움이 되어 나타나는 시인의 숙명적 정서이기도 하다. <깃발>에서는 깃발이 처한 공간을 축소하고 감정 표현을 심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시상이 전개됨에 따라 내면에 절제된 그리움은 '노스탈자'로, '순정'으로, '애수'로, 그리고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감정이 심화되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화자는 그의 감정 표출을 그저 확장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가 누구인지 묻는데, 이는 화자의 이성적 혹은 자기 성찰적 태도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처음에는 절제된 감정에서 출발하여 농도 짙은 감정으로 표현을 심화시키다가, 그 정점에서 공허한 물음을 던져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계기를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깃발>은 “현실과 이상의 대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시인의, 그 대립을 뛰어넘으려는 외로운 싸움의 기록" (김현, 1999: 229-230)인 것이다.
'깃발'로 촉발된 상상의 세계는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바람'의 이미지와 결합됨으로써 상황의 구체성을 획득한다. 바람의 의미를 유치환의 지사적 삶의 여정에 비추어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지만, 그러한 직접적인 연결보다는 움직임에 대한 촉발의 의미로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린 깃발을 '나부끼게 하는 움직임의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떠나고자 하는 것과 매어 놓고자 하는 것 사이의 팽팽한 긴장 관계는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린 깃발의 나부낌을 통해 성공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시에서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뜻한다. 이것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끝"에서도 굳건하게 이상이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심정과도 통한다. 또한, 바람의 동력에 의해 나부끼던 깃발이 애수의 이미지로 환치되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말하며 "아우성"의 소리 없음과 “이념의 표ㅅ대끝"에서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을 존재 일반의 질문으로 던져, 시적 화자의 "동경과 환멸을 변증법적으로 영원화"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모순성"을 보여 준다(김준오, 2002: 31.3), <깃발>이 시인의 대표작처럼 알려지고 애송되는 것은 이러한 사유지향이 서정성과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고 공중에서 나부끼는 깃발에서 인간의 그리움과 애수의 대응물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 깃발이 향하는 곳
시인 유치환은 시를 통해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실존적 탐색을 꾀하였다. 그는 순수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기보다는 삶과 죽음에서 출발하는 형이상학적 의문을 통해서 존재의 문제를 탐색하였다. 이런 시적 탐색의 이면에는 그의 허무주의적 인생관이 자리 잡고 있다. 시집 《생명의 서》 서문에서 "시는 항상 불가피한 존재의 숙명에 있는 것" (유치환, 1947; 남송우 편, 2008: 85 재인용)이라고 말한 시인 유치환은 일체의 인간적 감정을 초극하고 냉혹하고 비정한 인간이 되겠다는 허무의 의지를 그의 시작에 있어 본질적 구심으로 삼았다. 그의 시는 흔히 “애련을 거부하는 비정의 철학"인 의지와 “애련에 젖은 그리움의 서정"인 감정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논의된다(박철희, 1999: 13). 이 두 차원의 모순과 대립은 생명과 반생명,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양상으로 치환되곤 한다. 그의 시 속에서 보이는 서정적 긴장은 미완의 현실적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 고민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깃발> 역시 이러한 존재론적 허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시인은 현실에 묶여 있는 존재의 내면을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 위를 지향하면서 나부끼는 '깃발'로 나타낸다. 깃발은 비록 깃대에 매달려 있는 신세이지만, 설렘을 간직한 채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나부낌을,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념의 세계를 지향하는 현실적 존재가 지닌 근원적 갈등을 보여 주는 지표로서의 깃발은 그의 다른 작품 <기 없는 깃대>(1947), <마지막 항구>(1949), <기의 의미>(1951), <단장 58>(1960) 등의 여러 시편에서 때로는 사랑의 깃발, 때로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 애련의 정서가 잠재된 시인의 강렬한 허무 의지는 <생명의 서 1장>(1939)에서 시적 화자가 추구하는 운명 이전의 상태, 생명의 본연의 자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된다. <깃발>과 <생명의 서 1장>은 외연상 각각 애련과 비정의 서로 다른 세계를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내연상 현실과 바람 사이의 모순양상을 노래하며 의지를 다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서 1장>에는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허적"이 층층이 새겨진 적막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스스로를 내몰고 “원시의 본연한 자태" 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는 자아가 있다. 유치환 시에 나오는 저항과 의지, 그리고 애련의 감정은 결국 그가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일월>)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자발적 고행의 길을 선택해 본연적 자아를 탐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애련의 시이든 의지의 시이든 간에 독자는 청마 유치환의 시를 통해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의 시인의 면모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손예희
참고문헌
김준오(2002), 시론』, 삼지원.
김현(1999), 「<기>의 시학」, 박철희 편, 『유치환』, 서강대학교출판부,
남송우편(2008), <청마 유치환 전집 I: 시전집 1》, 국학자료원, 박철회(1999), 「청마시, 다시 읽기」,
박철희 편, 『유치환』, 서강대학교출판부,
유치환(1958), <유치환시선》, 정음사.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10. 1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