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그날이 오면
예산의 가을 햇살을 품고 당진으로 달린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맛 좋다는 예산 사과를 한 박스 샀다. 가을이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하다. 오늘 일정은 부여에서 출발해 예산과 당진에 들렀다가 서산의 공기 좋은 자연휴양림에 짐을 풀 생각이다. 세한도의 거칠고 메마른 붓질에서 가을의 끝자락을 상상했다. 추사고택의 안채 주련을 되뇐다.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채소이고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솔뫼성지. 갈색 바탕에 흰색 글씨의 교통 표지판이 보인다. 이미 신리성지와 합덕성당을 지나쳤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고픈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다. 천주교 성지 세 곳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맛집을 찾고 있다. 두부, 오이, 생강, 채소만으로도 한껏 만족할 점심을 어디에 있을까.
심훈기념관의 문을 조심스레 당겨 열었다. 발걸음은 오롯이 문학의 향기를 좇을 뿐이다. 전시실에는 <동방의 애인>, <불사조>,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헤드셋으로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캄캄하던 시대를 밝히던 눈빛들이 어른거린다. 더불어 “검열” “중단”이라는 단어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역사의 풍파 속에 치열한 삶을 살았을 시인을 마주하니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상록수>는 1935년 작이다. 고등학생 때 시험에 자주 등장했던 소설이다. 농촌 계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주인공 채영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려낸 농민문학이다. 실제 모델은 독립운동 최용신 선생이라고 한다. 황폐한 농촌, 배움의 불모지 농촌을 일깨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그루의 나무로 수천, 수만 개의 성냥을 만든다. 반면에 단 하나의 성냥으로 천 그루, 만 그루의 나무를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누가 한 그루의 나무이고, 누가 하나의 성냥인가를 몇 번이고 대입시켜도 아귀가 딱 맞지 않고 헷갈리기만 한다.
<그날이 오면>을 소리 내 읽어 본다. 해방을 향한 간절한 염원은 벅찬 단어들로 귓가를 때린다. 강렬하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출 것만 같다. 두개골은 깨져 산산이 조각나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한다. 억수로, 아주, 매우 간절하다. 부부가 아들, 딸, 손자, 소녀와 함께 둘러앉아 박장대소를 할 자유로운 내 나라를 상상하게 한다. 하루에도 수천수만 가지의 생각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곤 한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가 무겁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고민도 적지 않다. 부정적 생각 하나가 삶을 몽땅 태울 수 있듯이 긍정의 믿음이 어둠을 이겨내는 힘이라는 생각이 옳다.
고민과 후회를 저 멀리 던져버린다. 시쳇말로 내일 해도 될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사는 사람이고, 마음이 편안한 사람만이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과거는 이미 나를 떠나버린 지나간 일이니,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암울한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그들처럼 우리 역시 오늘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락한 내일을 그려본다. 우리 세대는 전쟁 한 번 겪지 않은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늘 이처럼 평화롭고 좋은 세상이기를 기원해 본다. 당진의 붉은 노을을 뒤로하고 서산을 향해 차를 돌린다. 기념관을 나서는 길에 유고집 <그날이 오면> 두 권을 샀다. 기념관과 필경사의 운영경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책을 너무 많이 보는거 아니가?
하긴 성철스님이
"책 보지마라"
켔다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