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가기(金可紀, 780~859년) 도사 이야기>
김가기(金可紀)의 자는 사원(士元), 호는 일구당(一丘堂)이다.
신라 귀족인 진골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성품이 침착하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학구열이 대단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원효 의상 변증설(元曉義湘辨證說)>에 인용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그는 신라 문성왕 때, 최승우(崔承祐)⋅자혜(慈惠 : 후의 義湘)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했는데, 당시에 외국인을 위해 실시하던
과거제도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해 진사가 됐다고 한다.
일설에는 벼슬이 화주참군(華洲參軍)과 장안위(長安慰)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가기는 특히 도(道)를 탐구하기를 좋아해서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술법의 일종인 복기법(服氣法)으로 몸을 단련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용모 또한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거동과 언담이 멀리 중국에서도
멋을 풍겼는데, 남들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면 거절하는 일이 없이
음덕을 베풀었고, 범인(凡人)으로서는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승천한 사람 16명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있다.
※복기법(服氣法)---숨을 들이쉰 다음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일정한 시간
참고 있다가 천천히 내쉬는 호흡복기법(呼吸服氣法)을 말하는데, 폐기법(閉氣法)이라고도 한다.
김가기가 벼슬을 그만두고 중국 산시성(陕西省, 섬서성) 시안시(西安市) 부근에 위치한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할 때, 같은 신라 사람인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선(天仙) 신원지(申元之)를 만났는데,
자혜(慈惠:후의 義湘)도 마침 이 절에 머물고 있어서
자혜와 신원지는 친근한 사이가 됐다.
신원지는 김가기와 최승우가 자혜와 친한 사이임을 알고
그 뒤로 서로 친분을 맺었다.
이때 천선(天仙)인 종리 장군(鍾離將軍=정양진인/正陽眞人)이 찾아오니,
신원지는 이 김가기, 최승우, 자혜(의상) 세 사람을 종리에게 소개하고
도교의 술법을 전수해 줄 것을 부탁했다.
종리가 이를 허락하고 말했다.
“신라에는 도교의 인연이 없어서 다시 8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마땅히 환반(還反, 되돌아오다)의 지결(旨訣, 배울만한 것을 엮음)이 있어서
도교가 선양될 것이다. 도교가 크게 성행해 지선(地仙) 200명이 나와서
도교를 널리 펼칠 것이다.” 하고, 도법을 전수해 감가기는
그로부터 단(丹) 공부법을 배웠고, 신원지의 도움으로 3년 만에
단의 성공을 보아 신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교에는 천선(天仙) 지선(地仙) 시해선(尸解仙)의 구분이 있었다.
초보자를 시해선이라 했고, 신선(神仙)급의 최고 도사를 천선(天仙)이라 했다.
김가기가 뒷날 바로 천선에 올랐다. 최치원은 시해선이었다고 한다.
당시 종리(鍾離將軍)는 이들에게 청화비문(靑華祕文),
영보필법(靈寶畢法), 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 금고(金誥), 내관(內觀),
옥문보록(玉文寶錄) … 등의 책과 구결(口訣)을 전수하고, 따로 연등(燃燈)을 전했다고 한다.
김가기는 이후 <도덕경>과 기타 선서(仙書)를 심독했는데
3년 동안 쉬지 않고 공부한 뒤 향수병에 걸려 고향을 잊지 못하다가
결국 공부하던 중도에 고국 신라로 귀국했다.
이때 당나라 유명한 시인 장효표(章孝標)가 이별의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장효표가 김가기의 문장을 높이 받들어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겨서
국내 고서인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 시의 전문이 수록돼있다.
※<해동이적(海東異蹟)>---조선후기 문신⋅학자 홍만종이 단학설화를
인물별, 시대별로 배열하고 평설을 달아 1666년에 간행한 전기임.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 말을 하지만
해가 뜨는 곳을 바라보면서 고향을 생각한다네.
교실(鮫室)에서 잠을 자는데 음화(陰火)가 썰렁하고
아침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머물고 저녁엔 안개가 깊네
바람이 거칠어 나뭇잎이 물고기의 등 위로 날고
호수는 고요하여 삼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네.
생각에 잠겨 문장을 오랑캐의 음악에 맞추니
복숭아꽃 속에서 인삼 향기에 취하리라.
김가기는 고향이 그리워 본국 신라에 들리려고 바다를 건넜지만
당시 국내외적으로 신라 정세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어
너무나 절망스러웠으므로 김가기는 다시 당나라로 떠났다.
곧 다시 종남산(終南山)의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해
띠 풀로 엮은 집을 지어 살았다.
김가기가 지었다는 제목도 없는 시가 전한다.
장안에서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大醉長安酒)
해질 무렵 미친 듯이 노래 부르며 돌아왔네(狂歌日暮還)
봉래산에는 속물이 너무 많기에(蓬壺多俗物)
유희하며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지(遊戱且人間)
그는 자오곡에서 손수 기화방초(奇花芳草:진기한 꽃과 아름다운 풀)를 가꾸고
이상한 과수를 많이 길렀으며, 항상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수련에 전념했으며,
<도덕경(道德經)>과 <신선경(神仙經)>을 외는데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좋아해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해서 도를 닦으니,
수많은 중국의 제자들이 김가기에게 신선술을 배우려고 몰려들었다.
그를 신선으로 여기는 후학들도 생겨났다.
심지어 어떤 이는 김가기는 하늘을 날고 구름과 비를 내리게 한다며
추앙해 마지않았다. 김가기의 명성이 당나라에 널리 퍼지자
당나라 선종(唐宣宗)이 어명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김가기는 아래와 같이 당 황제(선종)에게 상주(上奏)해
궁궐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신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英文臺)
시랑(侍郞)이 돼 내년(859년) 2월 25일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고 했다.
황제(선종)는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고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그를 궁내로 불러도 오지 않으니, 황제는 옥황상제의 조서라도
보여 달라고 했으나 그는 “다른 신선이 가지고 있어
인간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거절했다.
그러자 황제는 더 이상 청하지 못하고 향, 약, 비단과 함께
궁녀 네 명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고, 다시 중사(中使-환관) 두 명을
보내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는 홀로 고요한 방안에만 있어 궁녀와 군사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김가기가 거처하는 방안에서 손님들과 담소하는 소리가 들리어
중사가 몰래 들여다보니 선관(仙官)과 선녀(仙女)가
각기 용(龍)과 봉(鳳) 위에 앉아서 의젓하게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궁녀와 중사가 감히 놀라게 할 수 없어 조용히 물러나왔다.
마침내 2월 25일이 되자, 봄경치가 아름답고 꽃은 만발해 황홀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오르면서 학이 울고, 난새(鸞鳥)와 백곡(白鵠)이 날며,
생황과 퉁소, 금석(金石) 등의 악기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에
깃털 지붕을 한 옥(玉)으로 된 수레와 온갖 깃발이 하늘에 가득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부축하는 가운데 그는 종남산 금선봉(金仙峰)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해서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세속의 그의 나이 칠십세였다. 중국의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의하면,
역사상 신선술을 공부해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모두 16명인데,
김가기도 그 중 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조정의 관원과 선비들, 서민 등 구경하는 사람들로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는데,
모두가 이 기이한 현상을 보고 옷깃을 여미고 바라보며 경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이후로 김가기가 승천한 날에 모든 도교인들이
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해동이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元) 말 진원정(陳元靚)이 작성한 백과사전 <사림광기(事林廣記)>를 참고하면,
천하의 도사들이 김가기의 승천일에는 모두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그렇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비록 아녀자나 어린아이라도
김가기가 진선(眞仙)임을 모르는 자가 없는데, 고려에서는 김도사를 좋아하지 않아서
도교의 서적이 전해 오지 않아 모두 김가기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중국 사람이 와서 물어봐도 마침내 대답하지를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또 1610년에 한무외(韓無畏)가 펴낸 도가서(道家書)인
<해동전도록>을 보면, 김가기와 최승우, 그리고 자혜(의상)를
신라에 최초로 도교를 전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종리(鍾離將軍)는 중국 도교의 남종(南宗)에 속하는데,
김가기가 그에게서 도를 전수받은 것으로 본다면,
김가기는 중국의 도교와 도교 경전을 신라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라 추측된다.
그는 당나라에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신선이 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갔다.
중국에는 그가 승천한 날을 기념해 제사를 올린다.
국내에서는 김가기 도인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모르고
도교의 성인을 몰라본다.
결국 그는 당시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했다.
이중환(李重煥)이 1751년(영조 27년)에 저술한 인문 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는
김가기가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신라에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이름을 떨친 유명인 세 사람이 있었다.
불교를 대표하는 의상義湘, 625~702)과 유학을 대표하는 최치원(崔致遠, 857~?)과
도교를 대표하는 김가기(金可紀, 780~859년)다.
이들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한 신라 시대의 하늘이 낸 천재들인데,
이들의 눈으로 보면 속세가 너무도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세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유⋅불⋅선(儒彿仙)을 통합해
종교의 체계를 완성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존 시기가 많게는 몇 백 년에서 몇 십 년의 차이가 있어서
김가기와 이들이 교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정신적인 통합을 추구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은 화엄종을 세우고, 최치원은 신라 골품제에 실망하고
은둔의 선비로 살다 갔으며, 김가기는 당나라에서 돌아 왔다가 신무왕이 민애왕을 죽이고 즉위하고,
문성왕이 장보고를 제거하는 신라의 왕정에 낙망하고 다시 입당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김가기는 중국에서 신라인 문인 최승우(崔承祐), 도학자 신원지(申元之),
종리장군(鍾離將軍)과 교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명 ‘김가기전마애각문(金可記傳磨崖刻文)’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흥륭비(興隆碑)라고 호칭하고 있는 김가기에 대한 마애각석이
1987년 이지근(李之勤)에 의해 처음 발견, 소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김가기 석각은 김가기가 은둔해 신선으로서 살다가 승천한 곳을 기리기 위해
낭떠러지 바위에 각문을 새긴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청나라 때에 새겨진 것이라고 하나 이는 잘못이고,
아마 중국 당나라 말∼오대(五代)에 석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각은 서안(西安)의 남쪽지역에 있는 종남산 자오고도(子午古道)의 길옆 개울가에 방치돼있다.
석각 가운데 김가기전이 가장 중심자리에 있고
그 오른쪽 여백과 위쪽의 여백까지를 메우고 있는 것이 두보(杜甫)의 시이다.
이러한 형식으로 볼 때 김가기전이 맨 앞줄의 소자(小字) 5행과 중간 하단에 흥륭비라고 쓴 글자가 있다.
두보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다음에 5째 줄부터 김가기전으로 이어져 있다.
각문의 내용은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속선전>에 담겨져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나
문장이 간결하고 속자(俗字)가 더러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지식인들의 중국에서의 실제적 활동과
중국인들에 미친 영향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를 도사(道士) 중에서도 학식이 풍부하고 수양의 경지가 높은 사람을 일컫는
진인(眞人-天仙)이라고 불러 중국 도교사에서 김가기의 위치가 상당한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거해 김가기의 입당(入唐) 시기를
당대 문종(文宗) 개성(開成) 원년(836)으로 보고, <속선전(續仙傳)> 등의 기록에 따라
승천 일자를 85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가기의 문장 역시 높이 평가되지만, 그의 시문(詩文)은 완전하게 전하는 것은 없고,
제유선사(題遊仙寺) 시의 두 구가 일본 고시선집(古詩選集)인
<천재가구(千載佳句)>에 전하는 것을 <전당시일(全唐詩逸)>에 전재됐다.
출처 :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