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子息)
계 용 묵
장마 비는 그대로 초록 기름인 듯하다. 연 닷새를 거푸 맞고 난 볏모는 떡잎에까지 샛파란 물이 들었다.
꽃아 놓고는 물을 대지 못해 뿌리도 못 박고 샛노랗게 말라들던 볏모였다. 돌보기조차 싫어 내키지 않던 논틀을 날이 들자부터는 잊는 법이 없이 저녁마
다 한 바퀴씩 돌아 들어오는 것이 주사의 방불한 취미였다.
보면 볼 때마다 다르게 싱싱 자라 오르는 기름진 꾀기였다.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만득으로 둔 아들 명호의 거처에 늘, 마음이 떠나 보지 못하듯 연연한 것이 그것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건강한 명호가 눈앞에 놀아야 마음이 놓이고, 들에 나가면 이즈러진 데 없는 볏모를 보아야 마음이 가든하다. 명호가 아이들과 싸우는 것이 아닐까? 볏모를 밟아 내는 짐승은 없을까? 들고 날 때마다 엇바뀌는 생각이었다.
오늘도 논귀에는 기어이 이상이 있었다.
두렁의 감탕 위에는 동글하게 난 쳇바퀴 자리가 올림픽 마크같이 연달렸고 그 밑의 귀잡이에는 군데군데 물이 흐리어 돈다. 아이들의 고기잡이가 분명히 또 있었던 모양이다.
볏모가 상한 데 없는 것만은 다행이라 하겠으나 날마다 일러도 듣지 않는 아이들의 장난이 괘씸하다. 단단히 한 번 일러야지, 그러다가는 기어이 또 볏모를 밟아 내는 날이 있으리라, 마음을 먹으며 동을 넘어서니 동 너머 늪에는 아이들이 한늪 들어서서 오리새끼들처럼 옥작이고 있다.
늪을 메인다고 그렇게 일러 오는데도 귓등으로조차 안 듣고 논귀로 돌아다니며 고기를 잡다가는 감탕칠을 해 가지고선 늪으로들 넘어들어 씻어 내는 것이 바로 장난의 한 순서 같다.
인기척이 없이 슬근히 동을 넘어 옷들을 모두 거둬 오.면 요놈들이 달아나지
도 못하고 오히려 쫓아오며 빌 것이 아닐까? 자국도 조심히 놓으며 달리어 샀 다.
그러나, 한두 번째가 아니요, 늘 지나 보는 그들인데다 이때만큼씩은 또 으레히 주사가 이 논틀을 한 바퀴씩 돌아 들어가는 것임을 잘들 알고 있다. 각별한 주의를 가지고 서로 망을 보며 멱을 감던 그들인가 보다. 동짬에 이르기도 전에 물 밖으로 한 놈이 건성 뛰어나오더니, 옷을 더듬어 안고 달아난다.
이에 다른 놈들도 그만 경위를 채었다. 위야! 하고 물 속을 뛰어나와 달아난다.
한 놈도 못 붙잡고 놓치게 된 주사는 이젠 엄포라도 해서 혼이나 내는 수밖에 없었다.
“뛰면 너이들이 어디로 갈 터이냐? 요놈들 잡아라!”
고함을 치며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저 그럴 뿐 덧달리는 주사가 아니었다. 힐끗 뒤들을 한 번 돌아다 보고는 걸음이 떠진다.
어른의 말을 무서워까지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의 태도가 더한층 얄밉다. 한 놈 붙들어 보지 못할까? 감자기 치미는 홍분에 쫓아가 보기는 하였으나 그 울퉁불퉁한 가랫밥 위의 동둑길을 아이들처럼 재빠르게 요리조리 피해 걸어 내는 수가 없다. 늪까지 이르렀을 땐 벌써 아이들은 다들 저 갈 데로 뿔뿔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나, 급작통에 옷을 버리고 뛴 놈이 있나 보다. 감탕이 지질지질 묻은 옷이 두 무더기가 동 위에 남아 있는 것은 상쾌하다.
“네 요놈들은 인제 내한테 경을 쳤느니라.”
소리를 치며 주사는 두 무더기의 옷을 한 줌에 움키어 허리띠로 꽁꽁 꽁저들었다.
그리고 보니, 아니나다르랴, 동 너머 개울 속에서 빨가숭이 한 놈이 더 달아나지를 못하고 숨어서 고개를 넘석거리며 주사의 눈치만 엿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놈 네가 옷을 버리구두 집우루 들어가겐? 그대론 못 들어갈 테지? 와만 봐라 어디…….”
우선 고놈을 곯리는 문세로 옷을 흔들어 구겨 보이며 또 한 놈은 어디 숨었을까를 살피었다.
늪 속에 물이 이상히 흔들리는 데가 있다. 급하니까 미처 나오지를 못하고 물 속에 그냥 소꾸막질을 해서 숨어 버린 것인가? 두고 보았으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물 밖에 겨우 내민 두 손이 어지럽게 허공을 허우적거려 내는 것을 보면 필시 깊은 골에 빠지어 물 밖을 헤어나려고 애를 쓰는 꼴임이 틀림없다.
“최 서방!”
개 건너에서 김을 매는 최 서방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물에 빠졌으니 얼른 좀 오게! 얼른!”
원체 이런 고함 소리가 제대로 척 들릴 그러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최 서방도 자기를 찾는다는 것만은 짐작했으나 무슨 소리인지가 자세치 않아 고개를 넘석이 빼고 반문이었다.
“예? 절 부루시우? 절……·?”
“아, 사람이 물에 빠졌다는데 절 부르시우라니? 아, 좀 오라구 ! 얼른 얼른…….”
주사로선 할 수 있는 데까지 높이 질러 본 고함이었으나, 이 소리도 역시 제대로 똑똑히 최 서방의 귀에 건너가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라고 헤기는 손짓이 어쨌든 급한 일인 줄을 알아차리고야 비로소 호미를 던지고 내달을 채비를 하였다.
물 속의 손은 어서 살려 달라는 듯이 쉬임없이 그냥 허공을 헤기어 내고있다.
주사의 안타까움은 최 서방의 뛰는 걸음도 뜬 느낌을 주었다.
“얘! 넌 넌 저 늪에 들어가 서지 못하니?”
행여 빨가숭이의 힘은 벌려 보지 못할까? 개울 속을 건너다보며 소릴 질렀다.
그러지 않아도 누가 늪에 빠졌을까 주사의 덤비는 꼴에 지극히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었으나 갔다가 경을 치면 하는 공포심에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네 거기요?”
주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브브게 빨가숭이는 더는 두말이 없이 동을 넘어 달리어왔다.
“넌 이 늪에 서서 꽤 건너단니군 허지?”
“저두 그 한복판엔 깊어서 잘 못 들어가 세는데요?”
그리군, 그저 그게 누구일까를 빨가승이는 일심으로 생각하는 듯이 물 속에서 연방 허우적 거리는 손만 눈을 까박까박하며 바라보고 있더니,
“주사님! 거 빠진 애가 명호 아니에요?”
빨가숭이는 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사를 올려다본다.
“응? 머!”
“글쎄 아까 애들이 주사님 보구 다 혹이 나서 뛰어나오는데두 명호는 머 저네 높이라구 일없다구 안 나오구 그대로 멕을 감으면서 놀겠다구 했는데요?”
“머시! 어째?”
주사는 어쩔 줄을 몰라 한 발을 내밀었다 들이밀었다 하다가 꽁지어 들고 섰던 옷 뭉치를 부리나케 풀었다. 하이얀 모시 바지에 샛노란 도리매 적삼, 그것은 분명히 아침에 갈아 입힌 명호의 옷임에 틀림없었다.
“명호의 옷이지요? 그게 ? 이건 제 옷이구요.”
빨가숭이는 그래도 자세히 몰라 궁금해 묻는 것이었으나 주사의 귀에는 그까짓 소리는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저고리 고름으로 손이 가다 말고 옷 벗기도 더딜세라, 그대로 첨 버덩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금껏 허우적거리던 손은 다시 물 위에 나오지 않는다. 수면 위엔 그저 바람조차 집히는 잔 물살이 주름을 잡으며 물거미를 태우고 흔들릴 뿐, 아무러한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짐작으로 물 속을 허방지방 어릅쓰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만에야 것틋하는 물체를 찾았다. 분명히 그것은 아이였다. 따뜻한 온기가 손 안에 통했다.
주사는 잡히는 대로 그러안고 나왔다.
그리고, 곧 동섭에 누이고 물을 토케 하였으나, 아이의 목은 힘이 없이 되는
대로 놀고 있었다.
이윽고 숨이 차서 달려온 최 서방은,
“걔가 누구예요? ”
“…….
“이게 무슨 일이에요? 명호로군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