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단원(13-16) 하나 속의 성장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
넷째 단원의 중심점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 한, “하나 속의 성장”에 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15) 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13절은 세마디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온전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힘들고 어려운 기나긴 과정이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수행해야 할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합니다.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앙의 일치인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없는 영이시기 때문에 믿음으로만이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에는 무엇을 믿는가 하는 내용이 중요한데 그래서,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요일 4:15-16) 합니다. 그러면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지적인 작용이요, “믿는 다”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감성적인 작용입니다. 누군가는, “30cm 여행을 아십니까”라고 표현을 했는데, 머리로 안 것을 마음으로 믿는 거리를 30cm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知的)인 승인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라”(요일 4:17) 합니다. 이점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한 사랑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진정으로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 “하나”인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케논”(자)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성경이라는 자로 재서 맞으면 진리요, 맞지 않으면 비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어려움이 따르게 되는데 “하나의 성경”을 주셨는데 해석하는 잣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 하여”(14) 한,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성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어린 아이와 같았지만 언제까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되고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의 뜻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14절은, 13절에서 언급한 온전한 성도와는 정반대인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으로, “어린 아이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대하게 되는 말이, “이제부터”인데, 17절에서도 “이제부터 너희는” 합니다. 이는 지금의 상태가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상고하다 보면 분명히 잘못하고 있는데 공통점은 이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적을 해줘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시니까,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말 1:6) 하고 항변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제일 큰 고민은 한국교회, 그리고 나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한 후에,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합니다. “어린 아이”라는 것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태어나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첫째로,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기를 잘한다는 점입니다. 이점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 상태에 있던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합니다. 이는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성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하) 합니다. “풍조”(風潮)란 바람과 파도를 가리키는데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요동한다, 즉 유행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누군가가 성장 프로그렘을 계속적으로 쏟아내고 있는데 굳게 서지 못한 목회자들은 이를 쫓기에 분주합니다. 그런가하면 설교에도 유행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넘쳐나는 정보를 검색하면서 무엇인가 신기하고 감칠맛이 나는 새로운 것을 찾아 헤멥니다.
어린 아이 같은 목회자에, 어린 아이 같은 성도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어디에 새롭고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없는가? 바람과 파도에 작은 배가 요동하듯 이리저리 밀려 다닙니다. 어린 아이들은 금방 웃는가 싶더니 울어댑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다가도 이내 싫증을 느끼고 맙니다. 이러한 특성이 영적 어리아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정에 좌우되어 조석으로 변합니다. 형제는 어떠합니까? 형제에게는 어린 아이와 같은 특성들은 없습니까?
한국교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까?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14), 여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는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위험한 실험(實驗)을 중단하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을 모으는데 있는 것도, 예배당 건물을 지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