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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장 1절-6절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100주년기념교회는 교회 설립 시부터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모토(Motto)로 삼고 있습니다. 즉 예배와 삶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합치된 개념이라는 의미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요한복음 4:23의 ‘영과 진리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는 의미 역시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야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해 ‘영과 진리의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 설교 주제인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3장은 ‘영과 진리의 사람,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1)’로 시작한 오늘 본문이 어제 본문인 히브리서 12장28절의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에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과 진리의 사람,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사람은 첫 번째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은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소중한 단어이자 개념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에서는 사랑을 여러 단어로 구분해서, 예를 들면 이성간의 사랑은 ‘에로스’, 친구간의 우정은 ’필레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가페‘라고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나 목회자들 중에는 성경에도 이 구분을 적용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수님 전후 200-300년 동안은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 단어들이 서로 혼용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D.A. 카슨(Carson) 교수나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 등은 이 단어들이 성경의 모든 맥락에서 독특한 종류의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읽으면 하나님의 아들 사랑과 예수님의 제자 사랑이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와 타종교를 믿는 사람 또는 비종교인이 생각하는 사랑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동일하지만 ’누구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조주이신 주님이 직접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가득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고통 받으시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만이 기꺼이 주님을 따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인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뛰어넘는 개념입니다. 본문에서 형제는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을 모두 포함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성보다 사람과의 관계성으로 말미암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 신앙마저도 흔들어 놓는 그 사람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겪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그런 사람을 사랑으로 품기란 참 힘듭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품으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수록, 내가 영적으로 피폐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조롱하고 저주하고 배신한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났나요!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사랑으로 세상 권세를 이기신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어떤 주님을 믿습니까? 죽음에서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다.
두 번째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손님이란 주인이 좋아하고 원해서 초청해 온 손님이 아니라 '이방인' 또는 '나그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같은 유목민들에게는 손님 대접은 일상이었습니다. 그들의 문화에서 손님이 오면 며칠을 묵고 가는 것이 상례였지만, 돈을 바라고 대접하거나 마지못해 대접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말은 우리의 삶 가운데 나누고 베푸는 삶을 겉치레로 하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교회는 이웃과 지역 사회를 위해 분기별로 나눔의 행사를 합니다. 주일에 교우님들이 의류와 중고제품 그리고 쌀이나 식료품을 가져오시면, 교회는 이를 수거해서 필요한 이웃이나 기관 또는 단체에 전달합니다. 그런데 보면 옷이나 정장을 그냥 갖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세탁하거나 드라이 크리닝을 해서 갖고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교회 교인들의 수와 걷히는 물품이 비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모자란 경우도 있는데, 교회에서 물품을 따로 구입해서 필요한 물량을 채워서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우리가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22:21에서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고 했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감독 또는 장로가 될 사람에게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미덕의 하나로 여겼습니다(딤전3:2. 딛1:8).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그네(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신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중요한 덕목의 하나이고 신앙의 의무입니다. 이처럼 손님 대접을 강조한 히브리서 기자는 알지도 못하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킵니다(2).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이, 창세기 19장에는 그의 조카 롯이 나그네로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를 정성껏 대접하고 좋은 소식을 듣거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들이 하나님의 천사인줄 모르고 대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의 천사였다는 의미처럼 해석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롯은 나그네가 하나님의 천사임을 알아보고 정성껏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과 롯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해석한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를 대접하는데 소홀했다면, 그들은 나그네로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을 일상 중의 하나로 여겼기에, 일상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를 알아보고 정성껏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즉 영과 진리의 사람은, 주님을 목적 삼는 사람은 일상 중에 나그네를 홀대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새번역 13:3)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세 번째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가 아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일반 공동체에 비해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인 사이의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실제로 교인간의 갈등으로 분열된 교회도 있습니다. 부부의 갈등, 자식과 부모와의 갈등, 친구와의 갈등, 공동체에서의 갈등, 회사와 노조의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나와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머리는 하나이나 지체는 많으며, 각기 할 일은 다르나 상호간의 돌봄을 통해 분쟁이 없고, 성도들은 고통과 영광을 함께 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자라는데 서로 힘써야 한다(엡 4:16)고 했습니다.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네 번째로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알레르토 안젤라, 까치글방)에 의하면 로마인의 결혼은 자녀를 생산하고 국가와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기 위한 사회적인 의무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위대한 로마를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합쳐졌습니다. 따라서 부부사이에는 친밀함도 욕망도 열정도 없었고, 남자는 성의 충동을 노예나 매춘에게서 해결했습니다. 또한 이혼도 즉석에서 이루어졌으며, 배우자 가운데 한 사람이 결혼을 끝내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녀가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남녀 서로가 사랑하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요, 한 몸을 이루고 살겠다고 결혼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부 이모양을 신랑 김모군을 위한 아내로, 그리고 신랑 김모군을 신부 이모양을 위한 남편으로 창조하셨음을 믿을 때만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을 짝으로 지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잊지 않을 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더 깊이 사랑하게 되며, 어떠한 역경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자족해야 합니다.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딤전 6:10). 돈은 당연히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을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많으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요? OPEC(석유수출기구)의 창시자 알폰소는 석유를 ‘악마의 배설물’이라 불렀습니다. 석유는 부의 원천이면서 많은 부정부패와 뇌물, 갈등의 매개물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삶이 목적이 되면 돈은 인간성은 상실하고 탐욕에 집착하는 ‘악마의 배설물’이 됩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돈에 대한 현명한 태도로 ‘자족’할 것을 권면합니다. 제가 프랑스 유학 생활을 통해 깨달은 여러 가지 중에서 한 가지는 바로 ‘자족’입니다. 프랑스(유럽) 사람은 마치 휴가를 위해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름과 겨울의 바캉스 시즌이 되면 모두가 다 바캉스를 떠납니다. 오죽하면 스위스 제네바의 경우, 바캉스 시즌에는 교회도 문을 닫는데, 바캉스 기간 동안에는 여러 마을의 교회가 돌아가면서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부자는 부자의 형편에 맞게 럭셔리하게 바캉스를 즐기고, 서민은 서민의 형편에 맞게 바캉스를 즐깁니다. 자신의 형편에 맞게 바캉스를 즐기는 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차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도 이동 수단으로 생각하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즉 돈 있는 사람은 이동 수단으로 고급차를 구입하고, 서민들은 자신의 형편에 맞는 저렴한 차를 구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이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얼마동안은 가능하지만 지속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같은 삶을 살기위해서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6, 시편 118:6)‘라는 담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시편 기자의 고백과 믿음이 바로 나의 고백이자 믿음으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고백과 믿음을 통해서 나를 배신하고 모함하는 형제도 주님의 사랑으로 품으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며, 주님 안에서 한 지체인 형제의 기쁨과 아픔에 함께 하며,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주신 결혼을 귀히 여기며,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자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 하나님을 목적 삼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히브리서 13장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몰아칠 유혹과 시련 앞에서도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고백하며 담대하게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품게 하시고, 세상의 조류에 휩싸여 덧없이 떠돌던 나그네였던 나를 품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손님을 대접하며,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있는 한 지체인 형제자매와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창조해주신 배우자와의 다름을 이해하며 사랑하게 해주시고, 돈을 악마의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현재의 삶을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를 적대시 하는 형제, 자매 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히브리서 기자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다고 해석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3. 내가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교인 또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4. 성결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5. 무엇에 대해 자족하고 있습니까?
(작성 이창호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