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2000년 버전 추석, 여성도 즐거워야 한다.
‘일’보다 ‘인간’이 보이는 가족축제로
직장여성 ㅂ씨는 결혼 일년 반만에 시집 방식대로의 명절 보내기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했다. 각자 집에서 명절음식 마련해오기 등을 의논했으나 시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손위 동서도 “그 분들이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어...”하며 뜻을 꺾었다. 이후 ㅂ씨는 명절여행을 통해 소극적으로나마 기존 방식대로의 명절관행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명절을 거부한 지 2년 째 접어든 요즘, ㅂ씨는 다시 고민하고 있다. 과연 나의 저항은 일방적이 아니었는지, 가족 유대관계를 약화시킬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이쯤 해서 새로운 제스처를 시댁에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하고.
추석이 채 일주일도 안남은 요즘, 명절과 여성의 고통에 관한 화두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명절 증후군’이라 불릴 정도로 명절시 최대치를 기록하는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어느 정도 형성됐다. 문제는 명절에 얽힌 여성들의 피해의식이 해마다 메아리처럼 되풀이될 수밖에 없느냐에 있다. 그 메아리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선 명절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평등히 즐기는 가족축제가 되어야 하며, 이를 가능하게 할 사회적 인식변화와 구체적 실현장치가 필요하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올해도 어김없이 ‘웃는 명절’이란 추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주부 캠페인 추진본부에서는 탤런트 전원주씨가 ‘엄마도 즐거운 명절’이란 모토 아래 인식변화를 촉구하는 노래들을 담은 테이프를 전년에 이어 올해도 배포중이다.
여성학자 구훈모씨는 명절이 여성에게만 지워진 짐이란 문제제기에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할 때임을 강조한다. 명절은 점점 해체돼 가는 가족공동체를 어느정도 강화할 수 있는 촉매제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가족은 서로에게 때론 고통스러운 존재이지만 때론 참 좋은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고, 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강화시킨 가부장제 전통으로 명절 전개방식이 남성, 특히 장남 중심의 위계적이고 성차별적인 형식으로 흐르고 있고, 명절에 참여하는 여성들끼리도 큰며느리 등 특정 구성원에게 명절 부담이 고스란히 떨어진다는 데 있다. 명절관습 자체에 대한 성찰없이 “우선 나부터 빠져나오고 보자” 식의 이기주의는 여성들 간에 내부분열까지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때 핵심문제는 바로 조상님이 친히 찾아와 흡족하게 먹고 가야 한다는 제사음식의 상징성이라고 구씨는 해석한다. 이 때문에 마음과 정성을 다한 조상숭배라는 본질은 빠져 나가고 장손, 장손 며느리의 역할만 남게 되고, 이것이 결국 명절 속에서 ‘인간’은 없고 ‘일’만 남게 한다는 해석이다.
문제는 남녀노소, 가족 구성원이 평등히 인간으로 참여하는 명절문화로의 전환전략이다. 민우회의 명절 지침을 포함, 평등한 명절문화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몇몇 종교의 자유로운 조상숭배 방식을 한 방안으로 든다. 가령 기독교의 경우 추모예배로 대신한다든지, 원불교의 경우 향을 피우고 꽃을 바쳐 고인의 넋을 기린다든지 하는 방식들이다.
올 초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관심을 모았던 에세이집 '나는 제사가 싫다'에서 작가 이하천 씨는 동학의 개념을 바탕으로 평등사상과 주체사상을 강하게 도입한 ‘향아설위’란 제사방식을 소개한다. 이는 위패와 밥그릇을 죽은 자를 향해 벽 쪽에 갖다놓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 제사를 지내는 살아 있는 자, 즉 상제 앞에 갖다놓는다는 혁명적 발상 전환에서 시작한다.
또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장남이 제사장이 되는 제사형식이 아닌, 차남 딸도 제사를 주관하는 ‘돌림제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돌파구를 찾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토지관리 등 실질적 문제로 여성이 시집살이를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결혼 초기에 남성이 처가살이를 했다는 데서도 기인한다, 이 돌림제사 형식을 지금 현실에 적용하면, 가족 구성원 간 서로 ‘역할 바꿔보기’를 시도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가부장적 관습에 얽매인 제사형식을 가족들 간의 조화로운 절충과정을 통해 일정 부분 개선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특히 돌림제사를 시행할 경우, 제기 병풍 촛대 등 제사에 필요한 장치들이 매번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자유로운 음식 마련을 촉진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젠 국가적 차원에서 명절문화 개선운동을 벌여야 할 때가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여성학자 이숙경씨는 평등한 명절문화를 위한 공익광고는 물론, 여성의 명절 수고에 대한 공식적 가치 인정, 문화관광부 차원에서의 여성 위로축제나 전 가족과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거리축제를 기획해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외국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축제를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추석이나 설날을 순 한국식 축제로 변형시켜 집 안에 갇힌 여성들을 자연스럽게 집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발상에 근거한 대안들이 논의된다는 것 자체가 평등한 명절문화를 향한 진일보를 의미한다. 문제는 이의 실현을 위한 가족 구성원간, 특히 기존 관습을 고수하는 세대와 그에 끊임없이 도전을 시도하는 세대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느냐 하는 협상의 접점이다. 여기엔 개인의 선택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것이 사회 인식의 변화다.
사회복지관에서 시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를 시도했던 한 여성학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시어머니들이 가족 안에서의 여성의 역할 변화와 남성 중심의 가족문화 변화에는 동감을 표시하지만 그 실천은 별개의 문제라고. 따라서 각 가정별 실천사례들이 하나 하나 축적되고 이에 따른 면밀한 조사 연구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끝으로 그는 70대의 한 수강생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론을 대신했다.
“시어머니 역할 벗어나니 참으로 편해. 그러나 가족모임이나 친구모임에 가선 그렇다고 얘기 안해. 왜냐하면 날 이상한 사람이나 병신이라고 욕할테니까. 그래서 나와 며느리, 우리 둘끼리만 비밀스럽게 자유롭게 지내...”
올 추석을 기폭제로 가족 내 여성의 역할을 스스로 새롭게 규명하고 이를 공식화해야 하겠다.